* * *
“영주님, 거기서 뭐하십니까?”
키안은 라그나르의 방 안으로 들어서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아래층에서는 길드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기척과 고함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오늘은 녹스의 짐들을 브리어스 영주 저택으로 옮기는 날이었다. 저택에 쌓여 있던 시체들을 치우고, 오래된 부분을 손질하고 필요한 부분은 뜯어고치다 보니 거처를 옮기는 것이 조금 늦어졌다.
한창 짐을 옮기던 중에 라그나르가 사라졌기에, 또 어딘가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겠거니 싶어 눈을 부릅뜨고 잡으러 왔건만. 농땡이를 피우는 게 맞는 것 같은데, 표정을 보면 또 아닌 것도 같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라그나르의 곁으로 다가간 키안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알아보고는 작게 탄식했다.
“아. 아가씨께서 하고 다니시는 목걸이입니까?”
라그나르의 손에 들린 것은, 언뜻 팔찌처럼 보일 만큼 자그마한 크기의 목걸이였다. 투박한 갈색의 가죽끈에는 투명한 수정처럼 생긴 주술석이 매달려 있었다.
키안은 미묘한 이질감에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크기가 조금 작은 것 같습니다만.......”
“첫 번째로 만들었던 거니까.”
이제껏 입술을 닫고 있던 라그나르가 나직한 답을 흘렸다. 짙은 남빛의 눈이 한참 전에 쓸모를 잃은 주술석 목걸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레이린이 태어난 날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라그나르는 본래 추위를 잘 타지 않는 성정임에도, 그날만큼은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가 기이하리만치 선명했다.
밤새 이어진 진통 끝에 산모는 사망했으며, 가까스로 태어난 아이에게 무언가 이상이 있다는 보고를 들은 길드장의 뒤를 따라 들어간 방 안.
가지런히 내리감긴 황금색 속눈썹을 눈에 담는 순간.
‘......린?’
등줄기로 벼락이 내리꽂히듯 소름이 돋아났던 감각을, 그는 아직까지도 잊지 못했다.
직감적으로 알아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목구비의 구조, 끝이 조금 올라간 눈매. 아주 미세한 부분이라도 뇌리에 박아넣은 듯 눈앞에 선명했으니까. 더군다나 저 빛깔은.......
‘흉조로군. 치워라.’
그때, 레이린을 벌레 쳐다보듯 내려다본 길드장이 혀를 차며 길드원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라그나르는 그날, 길드장의 앞에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뭐?’
길드장은 난생처음 그의 입을 통해 들은 호칭에 눈을 크게 떴다.
‘살려 주십시오.’
그때까지 툭하면 반항을 일삼곤 하던 라그나르가 복종을 자처하자, 길드장은 방 안이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며 기꺼이 그의 목줄을 잡았다.
‘쓸모가 없다면 살아 있을 가치조차 없다.’
그런 말과 함께 딸에게 목걸이를 채워 준 그는, 이따금 라그나르의 기를 꺾어 놓아야겠다 싶을 때마다 레이린을 벼랑 아래로 서슴없이 떠밀었다. 라그나르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때마다 착실히 제 앞에 엎드리며 목을 내놓았고, 길드장은 이러한 구조가 언제까지나 영원하리라 믿었다.
라그나르의 손에 목이 뽑히는 그 순간까지도.
“......왜일까.”
목걸이를 하염없이 내려다보던 라그나르가 불쑥 내뱉었다.
“예?”
키안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라그나르는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는 듯 빠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왜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그리고 린은 어째서 아무것도.......”
무언가 두서없는 말들을 되뇌던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목걸이를 쥔 손을 지그시 말아쥔 라그나르는 이내 그것을 품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아직도 안 꺼지고 거기서 뭐해?”
라그나르는 기이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키안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그러자 뒤로 한 걸음 물러난 키안이 덤덤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수장님.”
“왜.”
“혹시 완전히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시거든 저를 꼭 불러 주십시오. 퇴직금 계약서를 새로 작성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뭐 이 새끼야?”
“그럼 이만.”
키안은 빠르고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냉큼 도망쳤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아가씨께 이르겠다며 울부짖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 * *
“......?”
레이린은 무성한 수풀을 헤치며 산을 오르다 말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잘못 들었나.’
왠지 인기척이 느껴진 것도 같은데. 등 뒤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했다.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로 엷은 회갈색의 눈이 소리 없이 움직이며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유스티아와 켈레마 사이에 자리한 헤르피 산이었다.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 일주일간의 휴가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레이린이 확보한 기간은 일주일. 명목은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것이었으며, 본 목적은 켄타우로스가 언급한 존재를 찾아 금빛 인간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엘빈에게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며 루나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제 뒤에 붙여 놓은 사람을 모두 물리라 신신당부했다. 엘빈은 처음에는 불만스러운 듯 투덜대다가 끝내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떻게 너를 이기겠냐.’
한숨 같은 말을 흘린 엘빈이 애처로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 레이린은 그의 얼굴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클로비스 저택을 떠났다.
전설 속 ‘진실의 호수’는 헤르피 산 아래, 켈레마와 인접해 있는 소니아 숲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전해진다. 헤르피 산을 돌아서 소니아 숲으로 들어간다면 가는 길이야 수월하겠지만, 호수를 찾는 데 얼만큼의 시간이 소요될지 모르니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결국 레이린은 고민 끝에 헤르피 산을 넘어 소니아 숲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헤르피 산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가며 호수를 찾는 편이 그나마 수색 범위를 좁힐 수 있을 것이다.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흔적을 지우며 이동하고 있다고는 하나, 마티아스에서는 금지된 주술을 사용하고 있으니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없어.’
일주일간의 자유든, 레이린 브리어스에게 남은 시간이든. 어느 쪽이건 간에 그녀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레이린은 입술을 지그시 당겨 문 채로 땅을 디디는 발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틈틈이 제 흔적을 지우며 빠르게 산을 올랐고, 그 덕분인지 노을이 질 무렵에는 산의 정상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레이린은 작게 숨을 몰아쉬며 제자리에 멈춰 서 주위를 살폈다. 곧 해가 질 테니 밤사이 안전하게 쉴 곳을 찾아야 했다.
가만히 숨을 고르며 물소리를 찾아 귀를 기울이자 여러 소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뭇잎이 저들끼리 몸을 부딪치며 내는 소리, 작은 동물들이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그 순간, 섬찟한 살기를 감지한 레이린은 미처 의식할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는 화살이 그녀의 볼을 스치며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팍!
목표물을 비껴간 화살이 등 뒤의 나무줄기에 박히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들이 레이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곧장 짐을 내던진 레이린은 검을 뽑아 들어 제게 날아드는 칼날을 막아 냈다.
채앵!
여러 개의 칼날을 한꺼번에 튕겨내자 손목이 약간 시큰거렸다. 소리 없이 이를 간 레이린이 검을 고쳐 쥐며 활을 쥔 복면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제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튕겨내며 복면인의 가슴을 베었다. 커다랗게 신음한 복면인이 활을 놓치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열 명.’
반격하는 와중에도 기민하게 상대의 숫자를 파악한 레이린이 이를 악물었다.
‘이드리스 프리조프의 장난질인가.’
반사적으로 분노가 치밀었지만,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는 왠지 모를 이질감이 일었다.
‘......뭔가 달라.’
이드리스 프리조프는 아무리 가벼운 심술이라 한들 이렇게 저를 ‘직접’ 노린 적은 없었다. 만일 그가 수를 쓴 것이라면, 복면인들은 곧장 정신계 주술을 이용해 제 움직임을 제한한 뒤 전투를 시작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들은 주술을 써서 저를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각자의 몸에 주술을 사용해 기척을 지운 상태였다. 이는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사용하는 것과는 판이한 방식이었다. 게다가 그라면 레이린을 죽이지 않고 길게 고통스럽게 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나, 이들은 정확하게 그녀의 급소만을 노렸다. 그렇다면 저를 죽이는 게 목적이라는 것인데.
‘하지만.......’
대체 누가? 레이린은 등 뒤로 소리 없이 짓쳐들어오는 칼날을 피해 바닥을 구르며 또 다른 복면인의 다리를 길게 베어냈다.
“크악......!”
복면인 셋을 전투 불능으로 만든 레이린은 검을 고쳐 쥐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쓰러진 복면인 하나가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어 떨어진 활을 움켜쥐었다. 그것을 뒤늦게 알아챈 레이린이 눈을 크게 뜨며 그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복면인 셋이 한꺼번에 검을 휘두르며 그녀의 움직임을 막았다.
‘젠장.’
레이린은 저와 검을 맞부딪치고 있는 복면인의 눈이 휘어지는 것을 보고는 부들거리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때.
“머리 숙여.”
레이린은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쐐액-!
직후 화살 한 대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그녀의 머리 위를 가로질렀고.
쨍그랑!
이어서 두 개의 화살촉이 맞부딪혀 튕겨 나가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게 울렸다.
* * *
날카로운 쇳소리가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뭇잎 사이에 몸을 감추고 있던 새들이 놀라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아악!”
뜻밖의 상황에 찰나 방심하고 있던 복면인의 옆구리를 은빛 검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른 복면인의 몸이 뒤로 휘청 넘어가며 허공에 핏방울이 흩뿌려졌다.
레이린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틈을 향해 검을 내지르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꿰뚫듯 저를 직시하는 푸른 눈과 곧장 시선이 맞닿았다.
“.......”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주변의 모든 소음이 일시적으로 아득히 멀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어떻게?’
어떻게, 왜? 어째서 영주인 에드윈이 이곳에 있는 것인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무수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빛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금의 자신은 ‘레이린 아제트리아’였다. 엷은 회갈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지닌, 유스티아 영주의 수행 비서 그 자체.
‘안 돼.’
후드로 얼굴이 가려져 있기는 했지만, 아직은 정체를 들키지 않았으리라고 완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에드윈이 지척까지 접근해 제 얼굴을 직접 확인하기 전에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머리보다 몸이 움직이는 것이 먼저였다. 주춤 뒤로 물러난 레이린은 곧장 제게 따라붙는 암살자들을 피해 몸을 돌려 뛰었다.
“놓치지 마라!”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레이린을 뒤쫓으려다가 말고 저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에 다급히 몸을 피했다.
“이놈이.......”
험악하게 눈매를 일그러트린 복면인이 수하 몇을 향해 손짓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활을 내린 에드윈이 다른 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짙푸른 색의 눈이 조금 전보다도 선뜩한 빛을 띠었다.
그사이 레이린은 물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주술로 인해 기척은 잘 느껴지지 않지만, 등 뒤로 바짝 따라붙은 복면인들은 좀처럼 뒤처지지 않았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 이건가.’
저 정도로 훈련된 이들을 아래에 두고 있는 자라면 적어도 영주, 혹은.
‘......왕.’
레이린은 무의식중에 떠올린 가정에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처음 왕족을 마주했을 때 느껴졌던 본능적인 불쾌감. 혹시라도 그것을 저만 느꼈던 것이 아니라면.......
‘왕가와 연관되었을 수도 있다.’
물소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레이린은 제 등 뒤로 덤벼드는 복면인 하나의 팔을 잘라 내고는 또다시 뛰었다.
‘셋.’
지금 제 뒤에 남아 있는 복면인이 셋이니, 에드윈 쪽에 붙은 것은 아마도 대장을 포함해 세 명. 레이린이 아는 그라면 주술의 유무와 상관없이 세 사람의 목숨을 끊어 놓는 데 채 5분이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 순간, 시야가 갑작스레 탁 트이며 물소리가 불쑥 가까워졌다. 날듯이 내달리던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쏴아아-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귀가 먹먹해질 만큼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 그리고.
높이가 가늠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제기랄.’
입 안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은 레이린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실력이 예사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복면인들은 이전보다도 신중하고 살벌한 태도로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들었다.
그러나 화살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사라진 상황이었기에 레이린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복면인 하나의 검을 막아 낸 그녀가 그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가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맞붙은 검에 강한 힘이 실리자 복면인이 당황하며 팔에 힘을 주었다. 그사이 복면인의 지척까지 접근한 레이린이 그자의 발목을 짓밟으며 손을 비틀었다.
“끄으윽!”
우드득, 소리와 함께 발목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처절한 신음을 내뱉은 복면인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며 검이 바닥을 굴렀다.
‘둘.’
나머지 두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은빛 칼날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위아래에서 움직였다. 레이린은 몸을 숙여 위에서 내리치는 검을 피하고는 손을 움직여 아래에서 치고 들어오는 검을 막아 내며 바닥을 굴렀다.
“크아아악!”
졸지에 위에서 내려오던 검은 동료의 몸을 길게 가르고 지나갔다. 세로로 길게 베인 복면인의 몸이 무너지자 나머지 한 사람의 눈이 흉흉한 기색을 띠었다.
“이 미친년이!”
레이린이 다가올 공격에 대비해 한 발 뒤로 물러나는 순간, 품 안에 손을 집어넣은 그가 히죽 눈을 휘었다.
“망각의 강에서 보자.”
품속에서 마름모꼴의 주술석을 꺼낸 그가 그것을 바닥으로 내던지며 검을 늘어트렸다. 주술석의 생김새와 빛깔을 알아본 레이린이 눈을 크게 떴다.
‘오라버니, 저건 무슨 주술석이야? 만져 보면 안 돼?’
‘린, 안 돼. 저건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거야. 자칫했다가는 그대로 폭발하니까.’
아직 어렸을 무렵, 라그나르가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명해 주었던 기억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폭의 용도로 쓰이는 주술석.
‘왜 이렇게까지.......’
바로 그때, 저편의 숲에서 누군가의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레이린은 본능적으로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짙은 흑색의 머리카락, 상대의 속을 단박에 파헤치듯 짙은 푸른색의 눈. 그와 시선을 맞춘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양쪽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이한 직감과도 같은 것이 등줄기를 꿰뚫는 것과 동시에, 레이린은 곧장 손을 움직여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주술석을 간신히 칼날로 받아냈다.
“무슨......!”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검의 움직임을 목격한 복면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레이린은 그를 의식할 새도 없이 최대한 부드럽게 팔을 움직여 주술석의 방향을 복면인의 머리 위쪽으로 바꾸었다.
쐐액-!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날아든 화살이 주술석을 정확히 관통했다.
콰앙!
주홍색 주술석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자 거센 바람과 열기가 훅 끼쳐 왔다. 폭발의 여파로 인해 뒷걸음질 치던 레이린은, 문득 제 뒤꿈치에 땅이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번에는 몸이 허공을 향해 기울어지는 것이 먼저였다.
“레이린!”
다급한 음성과 함께 누군가 제 손목을 잡아채는 것을 마지막으로, 레이린의 몸이 그대로 거센 물살에 휩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