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87)

* * * 

며칠 후, 레이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벤투스의 영주인 유리엔 솔론이 클로비스 저택에 당도했다.

놀라우리만큼 빠르게 내전을 정리하고 찾아온 그는 에드윈에게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고는 사과의 말을 덧붙였다.

“클로비스에 잠입했던 자의 처분은 유스티아에 위임하도록 하겠네. 알아서 처리해도 후일 문제 삼지 않겠다는 계약서도, 필요하다면 써 주지.”

“알겠습니다. 그리해 주신다면 더 좋겠지요.”

“아제트리아 양은 괜찮은가?”

에드윈은 아르망에게 계약서를 가져오라 손짓하다 말고 멈칫했다. 레이린의 부상은 거의 온전히 회복되었으나, 현재 그녀는 그가 내린 반강제적인 명령에 따라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찰나 움직임을 멈추었던 에드윈은 이내 무심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아르망에게서 서류를 받아 들었다.

“......무탈합니다. 서명하시죠.”

종이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훑어본 그가 유리엔의 앞으로 서류를 밀었다. 유리엔은 암살자에 대한 처분, 헬레나의 보호에 대한 대가로 벤투스에서 지불하기로 한 것들에 관한 내용이 적힌 계약서에 선선히 서명하며 말했다.

“고맙네, 로드 에드윈.”

“영애의 보호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받았습니다만.”

“그것 말고.”

유리엔은 제게 닿아 오는 의문 어린 시선을 느끼고는 찬찬히 말을 골랐다.

“아까 보니 헬레나가 떠나기 전에 비해 참 밝아졌더군.”

서명을 마치고 깃펜을 내려놓은 그가 서류를 아르망에게 건네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드러내놓고 말은 안 했지만, 지금의 내 상황이 헬레나에게서 아이다울 기회를 지나치게 빼앗은 것이 아닌지 늘 걱정했다네.”

“.......”

“그런데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생각이 조금 바뀐 것 같았네.”

유리엔은 조금 전, 이전보다도 한층 선명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헬레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번 내전의 주동자들을 처형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뭐?’

유리엔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원체 사나운 인상인지라 그가 조금만 표정을 일그러트려도 절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깨를 움츠리곤 하던 딸이, 지금은 당당히 어깨를 펴고 저를 직시하고 있었다.

헬레나는 또렷한 눈으로 유리엔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었다.

‘처벌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제가, 온전히 제힘만으로 인정받는 모습을 살아서 지켜보게 해 주세요.’

‘.......’

‘저는 위에서 짓눌러 얻어내는 존경이 아니라 모두가 자발적으로 올려다보는, 백부님조차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가주가 될 테니까요.’

부모의 이기심으로 언제까지고 어리길 바랐던 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그의 앞에서 해사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그 변화의 기점이 이곳 유스티아라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맙다는 거네.”

유리엔은 딸과 닮은 얼굴로 푸스스 눈매를 휘며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잠시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 미소를 바라보던 에드윈은, 이윽고 비스듬히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 인사를 들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다음 날 저녁, 클로비스 저택은 실로 오래간만에 사람들의 활기로 북적였다.

“세상에, 그 영애가 솔론 가의 영애였다니.......”

“이제 시셀리 가문이 회생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죠?”

“그렇죠. 아무래도.......”

사람들은 활기찬 모습으로 패트릭과 대화를 나누는 헬레나의 모습을 보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벤투스의 내전이 종료되고 유리엔이 클로비스 저택에 방문한 것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열린 파티는, 헬레나의 신분이 공개되고 나서는 벤투스 일행의 송별 파티로 뒤바뀌었다. 이번 파티에는 클로비스 기사단 또한 참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연회장 곳곳에서는 괜찮은 결혼 상대를 물색하기 위한 눈빛이 바쁘게 오갔다.

레이린은 제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아르망을 피해 구석진 곳으로 물러나 한숨을 삼켰다.

‘안 그런 것 같으면서 과보호가 심해.......’

무려 루나의 입으로 완치 선언을 들었음에도 아르망은 끊임없이 제게 괜찮냐는 질문을 반복했다. 자신이 그렇게 쓰러진 것이 꽤 충격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넘어가긴 했으나 이곳에서까지 그 기세를 꺾질 않으니 귀찮은 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아르망을 따돌리고 간신히 한숨을 돌린 레이린이 테이블 위의 샴페인 잔을 집어 드는 순간.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제트리아 양.”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낯이 익은데.’

어딘지 진득한 기운이 묻어 있는 음성에,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자 그녀의 미간에 패인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다.

“어쩐 일이신지요, 델로이스 영식.”

눈앞에 선 청년은 일전에 시셀리 가주의 생일 파티에서 제게 치근덕거렸던 자였다.

레이린은 보란 듯 딱딱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에 엷게나마 한기가 깃들자 인상이 급격히 싸늘해졌다. 하지만 스벤은 눈치를 없애버리기로 작정한 것인지 한없이 기쁘다는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역시 기억하실 줄 알았습니다. 저희가 한 번의 만남으로 끊어질 인연은 아니지요.”

레이린은 우스우리만치 적나라한 말에 저도 모르게 피식 조소를 흘렸다.

“어쩐 일로 절 찾으신 거냐 여쭈었습니다만.”

차갑게 굳어 있던 얼굴에 비웃음이나마 떠올랐다. 스벤은 달가운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는 제대로 된 이야기조차 나누지 못하고 헤어지지 않았습니까.”

레이린은 입가에 매달려 있던 비웃음마저 지워 내며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저희가 달리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던가요.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아제트리아 양을 사모합니다.”

말 중간에 불쑥 치고 들어온 고백에, 레이린의 손에 들려 있던 잔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무슨.”

반사적으로 “헛소리를”이라고 이어서 내뱉을 뻔한 레이린은 혀를 씹다시피 하며 말을 멈추었다. 그사이 스벤은 눈꼬리를 곱게 휘며 달콤한 목소리를 흘렸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아제트리아 양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그대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뭇사람이라면 잠시나마 흔들렸을 만큼 애절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잠시간 말을 잃었던 레이린은 이내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더없이 상냥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쩌다가 그리 생각하게 되신 건지 여쭈어도 될까요, 델로이스 영식.”

스벤은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처음으로 눈에 담은 레이린의 미소에 찰나 넋을 놓았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그는 유들유들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며 답했다.

“일전의 파티에서 아제트리아 양과 그렇게 헤어진 이후, 그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끝이 조금 올라간 눈매도, 웃을 때면 비스듬히 휘어지는 입꼬리도 너무도 아름다워 한시도 잊을 수 없었죠.”

스벤은 꿈꾸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분홍색 머리카락 아래의 청안이 유유히 휘어졌다. 그 얼굴을 보니, 문득 얼마 전 처형당한 패트리샤 시셀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부디 주제넘은 감정을 품은 건 아니길 빌어요.’

‘그는 당신이 감히 탐낼 만한 사람이 아니야.’

연보랏빛 눈동자 속에 자리하고 있던 진득한 욕망을 떠올린 레이린은 헛웃음을 지었다.

‘사랑.’

대관절 그놈의 사랑이 무엇이기에.

그때, 슬그머니 레이린의 곁으로 접근한 스벤이 은근하게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역시 당신도 내게 관심이 있었던 거지.”

“......뭐?”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레이린은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의 손을 붙잡아 쳐냈다. 그러나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인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귓가에 속살거림을 흘려 넣었다.

“저번에도 이상하다 싶었지. 내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쌩하니 가 버리길래 뭔가 싶었더니, 전부 내 관심을 끌어 보려던 수작이었나?”

찰나 그의 어깨 너머를 힐긋 바라본 레이린이 사납게 웃었다.

“돌았군.”

그러나 스벤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기색이었다.

“앙탈은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어차피 당신은 운 좋게 수행 비서의 자리를 꿰찬 평민 계집일 뿐이야.”

“.......”

“앞에서는 싫다, 싫다 하지만 뒤로는 사내의 관심을 자랑스러워하는 게 여자들 아니던가.”

스벤은 말없이 저를 응시하는 레이린의 턱을 붙잡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이런 기회가 온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네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바로 그 순간, 레이린이 스벤의 얼굴에 잔을 내던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등허리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퍽-!

“악......!”

얼굴에 샴페인을 뒤집어쓴 스벤이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며 크게 휘청거렸다. 그의 앞에 서 있던 레이린이 재빨리 몸을 피한 탓에 그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어머나, 죄송해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서.”

드물게도 무표정한 얼굴의 헬레나가 영혼 없는 눈으로 스벤을 내려다보며 사과를 건넸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스벤은 이내 정신을 되찾고는 험악하게 이를 갈았다.

“이 미친 계집이......!”

“죄송합니다, 델로이스 영식. 제가 놀란 나머지 실수를 했네요.”

그때 난처한 목소리를 흘린 레이린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냅킨을 집어 들고는 스벤을 향해 몸을 숙였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제 얼굴이 가려진 것을 확인한 그녀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거기서 더 생각 없이 입을 놀렸다가는 유리엔 영주에게 혀가 뽑힐 텐데.”

순간 흠칫한 스벤이 눈동자만 굴려 사람들이 있는 쪽을 살폈다. 이쪽을 바라보며 웅성대는 사람들 속, 두 눈을 부릅뜬 채 성큼성큼 걸어오는 유리엔을 확인한 그가 입술을 꾹 앙다물었다. 레이린은 그 모습을 보며 보란 듯 웃었다.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얄팍할까. 놀라울 정도야.”

“너, 내가.......”

스벤이 이를 악물고 으르렁댔다. 하늘색 눈이 형형한 빛을 띠고 번득였다. 하지만 레이린은 같잖다는 시선으로 그의 분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 같은 쓰레기의 특징이 뭔지 알아?”

“닥-”

“처음에는 뭐든 다 해 줄 것처럼 굴다가도, 상대가 조금이라도 네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싶으면 이렇게 협박이나 지껄이지.”

스벤의 말을 칼같이 끊어 낸 레이린은 오만하게 웃으며 속살거렸다.

“위선자.”

앞에서는 한없이 점잖은 척하지만, 뒤로는 저보다 약한 자가 제 뜻을 거스르는 걸 추호도 견디지 못하는 저열한 작자.

“그렇게 무시하던 ‘계집’들에게 놀아나는 꼴이 어때?”

“이 미친년이-!”

끝내 스벤이 눈을 까뒤집으며 레이린의 멱살을 쥐는 순간.

“어디서 귀인께 손을 올리는가!”

쩌렁쩌렁한 호통과 함께 스벤의 몸이 퍽, 소리를 내며 저 멀리 날아갔다.

“커헉!”

스벤은 복부에 가해진 강한 충격에 몸을 웅크리고 벌레처럼 헐떡거렸다. 당장에라도 그를 찢어발길 듯한 눈을 한 유리엔이 살기등등한 말을 짓씹었다.

“감히 딸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께 손을 올린 자를 두고 볼 수는 없지. 아니 그런가, 로드 에드윈.”

잠시간의 침묵 후, 서늘하고도 섬뜩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예. 그러합니다.”

레이린은 헬레나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다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괜찮아요, 레이린 양?”

헬레나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레이린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영애.”

그녀는 제 옆얼굴로 따라붙는 서늘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웃었다. 그런 레이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문 헬레나가 유리엔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저희는 잠시 자리를 피해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조져 버리세요, 라는 눈빛에 유리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벤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레이린은 자그맣게 웅성대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헬레나와 함께 테라스로 향했다. 헬레나는 레이린을 테라스로 들여보내고는 커튼을 치며 걱정스레 물었다.

“잠시만 여기 계시겠어요? 마실 거라도 가져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레이린은 구태여 거절하지 않고 헬레나를 내보낸 후 몸을 돌렸다.

클로비스 저택은 마을보다 조금 높은 지대에 자리한 터라 이곳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녁 바람은 평소보다 거셌다. 노을을 담은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길게 흐트러트렸다.

“.......”

레이린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바람을 맞다가, 이윽고 몸을 돌렸다.

“......유리엔 영주님과 함께 가지 않으시고요.”

그러자 그림자처럼 조용히 시립 해 있던 흑발의 청년이 나직하게 답했다.

“패트릭을 보내 두었습니다.”

레이린은 그리 답하고는 또다시 입을 다문 에드윈을 향해 불현듯 물었다.

“죽이실 건가요?”

내용에 맞지 않게 차분한 질문. 그에 돌아온 답 또한 잠잠했다.

“그리하길 원합니까.”

마치 그녀가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그렇게 해 주겠다는 듯한 어조의 말에, 레이린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을 돌렸다.

“저번에 솔론 영애의 일에 대한 포상으로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셨죠.”

레이린이 정신을 차린 다음 날 아침. 한밤중의 일은 꿈에도 없었다는 양 무표정한 얼굴의 에드윈은 헬레나를 보호한 것에 대한 포상으로 원하는 것이 있는지 물었었다.

‘당장은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고민해 보고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리하십시오.’

레이린은 그 후, 반강제로 휴식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남들의 시선을 피해 본채의 도서관을 찾았다. 금빛 인간, 그리고 신의 분노 이전에 대한 기록을 찾기 위해서.

유스티아는 중앙인 헤르기아스, 그리고 주술사들의 마을인 켈레마를 제외하고서는 가장 많은 고서를 보유한 곳이라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을 그곳에 틀어박혀 수많은 책을 뒤졌어도, 금빛 인간에 관한 이야기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왕궁 내의 도서관에는 오직 왕족만이 드나들 수 있었으니, 이제 남은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켈레마의 주술사들과 접촉해야 했다.

‘우리는 하늘의 비밀을 보고 듣는 대가로 그 사실을 발설할 수 없네.’

‘하지만 우리와 달리 말에 제약이 없는 이들이 하나 있지.’

그리고 알렉시스가 흘렸던, ‘진실의 호수’에 대한 단서들.

노을을 담은 회갈색의 눈동자가 선연한 빛을 띠고 반짝였다.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 일주일간의 휴가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제는 묻어 두었던 진실들을 파헤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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