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87)

* * *

레이린은 다행스럽게도 에드윈과 기사단이 복귀하기 직전에 마을 회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층 구석방을 필사적으로 사수하던 루나는,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그녀의 행색을 확인하자마자 온갖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뒤처리를 도왔다. 그 덕분에 레이린은 빠르게 ‘수행 비서’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도 생채기밖에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어디 한군데 부러져서 왔으면 반대쪽도 똑같이 해 놓으려고 했더니.”

루나가 결코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매섭게 눈을 흘겼다. 그 시선의 끝에 선 레이린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채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들려온 물음에 흠칫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서 아이는 어떻게 됐어? 찾은 거야?”

“.......”

......죽었어.

내가, 내 손으로. 죽였어.

레이린은 그 말을 내뱉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끝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다시 입술을 다물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기이한 정적이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뭐야, 왜 그러는-”

루나가 끝내 불안한 목소리를 내는 찰나. 소란스러운 기척과 누군가의 비명, 다급한 목소리들이 한데 섞여 들려왔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

“신이시여.......”

루나는 드문드문 들려오는 경악성에, 레이린을 한 번 돌아보고는 곧장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악......!”

열린 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울부짖음이 아득했다. 레이린은 잠시 제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다가, 이내 느리게 발을 움직여 방을 벗어났다. 그러자 곧장 연극의 한 장면인 듯 보이는 광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 사람아, 정신 차리게!”

“자네까지 이러면 어쩌나.......”

실 끊어진 인형처럼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콜린의 모친.

“콜린, 아가, 아가......!”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아이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콜린의 부친. 레이린은 고요한 눈으로 그 모습을 머리에 새겨 넣다가, 이제는 본능처럼 느껴지는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저 멀리, 사람들의 너머. 선명한 푸른빛이 시야를 온통 물들이자 불쑥 목이 메었다.

‘아.’

레이린은 차마 울지 못해 일그러진 웃음을 흘렸다.

당신은 분명 아무것도 모를 텐데. 지금의 내가 어떤 심정인지, 스스로조차 알 수가 없는데. 그런데도 저 눈과 시선이 맞닿으면,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이해받는 것 같아서. 그것만으로도, 겨우 그뿐임에도. 어쩐지 용서받는 기분이라서.

그래서 레이린은, 끝내 에드윈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 * *

통칭 ‘네르칼리 참사’에 대한 일은 순식간에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또한, 네르칼리 참사를 몰고 온 신종 마물은 고대어로 거미를 뜻하는 단어인 ‘스피네르’라 이름 붙여졌다.

켈레마에서 마물의 사체를 조사해 알아낸, 스피네르가 체내에 지닌 독을 사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등을 통해 독을 희석해 안개 형태로 내뿜어 사냥감을 서서히 무력화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입을 통해 직접 내뱉어 공격하는 것. 그중 네르칼리를 뒤덮었던 안개는 전자에 의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어린아이 하나가 사망하고, 더 나아 가 자칫했다면 마을 주민 전체가 몰살당할 뻔했을 만큼 심각한 상황.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질 즈음 나타난 한 약초사가 치료제를 찾아낸 덕에 더 큰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

선선한 밤바람이 긴 머리카락을 살랑 흔들었다. 엷은 회갈색의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물결을 그리며 허공에 나풀나풀 흩날렸다.

레이린은 제 방 창틀 위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 있었다. 창문이 활짝 열려 당장에라도 추락할 듯 위태로운 자세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풀 내음을 가득 담은 바람이 재차 코끝을 간질였다.

레이린은 낮에 읽었던 보고서의 내용을 상기하며 시선을 멀리했다. 클로비스 저택 주위를 메운 숲의 너머,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마을의 불빛이 시야를 메웠다. 문득 조소가 튀어나왔다.

‘다행이라.’

뭇사람들은 그래도 죽은 사람보다 살아남은 사람의 수가 많다는 사실을 다행이라 여기자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죽은 자에게도 다행인 일일까?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 또한 그것이 다행이라 여길까?

‘절대 아니겠지.’

만일 레이린 자신이 그러한 입장이었다면....... 그녀는 차라리 살아남은 자의 발목을 끌어당겨 함께 나락에 처박히고 싶었다. 지독히도 뒤틀리고 이기적인 마음이었지만 그것이야말로 레이린 브리어스라는 사람의 본질이었다. 이런 음습한 마음을 품은 자가 ‘신’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니.

‘우습지도 않아.......’

레이린은 싸늘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그때 또 한 번 밤바람이 옆얼굴을 간질였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마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마을의 불빛들. 그중 하나가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클로비스 저택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뭐지?’

그녀가 미심쩍게 경계심을 곤두세우는 차,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루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린 님! 혹시 주무시나요?”

그 부름에, 레이린은 소리 없이 창틀 아래로 내려섰다. 신속한 몸놀림과 다르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답은 한없이 차분했다.

“아뇨.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영주님께서 아르망 님과 레이린 님을 호출하셨습니다. 지금 내려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말인가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루시의 답은 그대로였다.

“네, 지금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레이린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조금 전 제가 본 것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녀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는 저택의 정문으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에드윈의 곁에 멈춰 선 레이린이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마을에서 저택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더욱 선뜩한 빛을 내는 푸른색의 눈이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헉, 흐억! 기껏 일찍 퇴근했다고 좋아했더니 내 인생이 그럼 그렇지! 또 무슨 일이랍니까?”

그때 급하게 뛰쳐나온 듯 흐트러진 매무새의 아르망이 그들 곁으로 뛰어왔다. 레이린이 허리를 펴는 것과 동시에 그녀에게 닿아 있던 푸른 시선 또한 거두어졌다.

에드윈은 어느새 감정 한 점 드러나지 않는 눈을 한 채로 낮은 목소리를 냈다.

“......조금 전 에드니 가주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개를 정문 너머로 이어진 숲길 쪽으로 돌린 그가 나직이 말을 맺었다.

“헬레나 솔론이, 로드 유리엔의 서신과 함께 찾아왔다고.”

레이린과 아르망의 눈이 놀람으로 확장되는 순간, 말 울음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자그마한 주술석 등을 매단 마차 한 대가 빠르게 클로비스 저택에 가까워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문 바로 앞에 경계하듯 시립해 있던 패트릭과 리오넬이 소리쳤다.

“멈추십시오!”

그러자 마부가 워, 워 하는 소리를 내며 손에 쥔 고삐를 잡아당겼다. 밤에 파묻힌 것처럼 보이는 검은색 마차가 정문 앞에 우뚝 정지했다.

잠시간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정적이었다. 긴장된 시선들이 서서히 벌어지는 마차의 문을 향해 모여들었다. 이윽고 기다란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음에도 받아 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로비스 공.”

잔잔한 목소리의 주인이 얼굴을 덮고 있던 후드를 살짝 걷어 올렸다. 벤투스의 영주인 유리엔의 것과 같은, 연한 하늘색의 머리카락과 은색 눈이 은은하게 빛났다. 유리엔의 외동딸이자 벤투스의 차기 영주인 소녀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유리엔 솔론 님의 서신을 전하러 왔습니다. 헬레나 솔론이라고 합니다.”

헬레나에게서 서신을 넘겨받은 에드윈은 그녀를 서쪽 별채의 방으로 안내하라 이르고는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아르망이 굳은 얼굴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그와 동시에 레이린은 한쪽에 놓인 주술석을 작동시켜 방 안의 말소리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다.

한편, 에드윈은 의자에 몸을 기대자마자 유리엔의 편지를 펼쳐 들었다.

“.......”

새파란 눈이 조금은 거친 느낌의 편지지 위로 늘어진 글자를 소리 없이 훑어내렸다. 편지지의 끝으로 시선이 움직일수록, 그의 눈이 차츰 짙은 빛으로 가라앉았다.

이윽고 주변 정리를 끝낸 아르망과 레이린이 그의 앞에 서는 것과 동시에, 에드윈이 편지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벤투스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내용에 맞지 않는 무감한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아르망은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답했다.

“결국 그렇게 됐답니까?”

“그래. 제플린 안코스가 헬레나 솔론을 후계자로 인정할 수 없다며 몇몇 가문과 함께 영주 저택을 포위했다는군.”

제플린 안코스는 벤투스의 현 영주인 유리엔 솔론의 친형이었다. 하지만 제플린의 아버지였던 전 영주가 차남인 유리엔을 후계자로 지명함으로써 그는 자연스럽게 가문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그는 솔론의 가신 가문 중 하나인 안코스의 여식과 결혼하여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저를 제치고 영주의 자리를 차지한 동생에 대한 분노를 지워 내지는 않았다.

에드윈은 손에 든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내전을 정리할 동안 헬레나 솔론을 유스티아에서 보호해 달라는 요청이다.”

레이린은 다급함이 묻어나는 글씨를 빠르게 훑어보며 미간을 설핏 구겼다.

‘조금 이상한데.’

지금의 상황은 어딘지 기형적이었다.

벤투스는 유리엔 솔론이 영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부터 잡음이 많았다. 자잘한 내분이 많은 만큼 유리엔은 내전을 철저하게 대비했고, 귀족들의 사병 수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더불어, 영주 가문의 기사들과 일반 귀족가의 기사들은 애초에 수준 자체가 달랐다. 그러니 이처럼 헬레나를 멀리 피신시켜야 할 만큼 상황이 심각해지기는 극히 어려웠다.

하지만 편지에 적힌 한 문장.

「주술로 인해 솔론 저택이 반파되었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본능 같은 깨달음과 함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개입했군요.”

레이린은 싸늘히 가라앉은 얼굴로 낮게 읊조렸다. 얼마 전 시르나티스에서 윈프리드를 몰아가던 번지르르한 낯짝을 상기하니 절로 이가 갈렸다.

속내야 어떻든 겉모습만은 차분한 그녀와 대조되게,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린 아르망이 짤막한 욕지거리를 짓씹어 뱉었다.

“하여간 미친 새끼. 에르치니아로도 모자라 이제는 벤투스까지....... 무슨 병이라도 걸렸답니까?”

그는 질린다는 얼굴로 말끝을 흐리며 오만상을 썼다. 연녹색의 눈에 드물게도 진심 어린 경멸의 기색이 드러났다.

레이린은 애써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입을 열었다.

“받아들이실 겁니까.”

엷은 회갈색의 눈이 메마른 시선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에드윈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

에드윈은 잠시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 유리엔이 대가로 내건 것이 상당하기도 하고.”

짙푸른 눈이 일순 섬뜩한 빛으로 번뜩였다.

“벤투스의 영주가 이드리스 프리조프의 꼭두각시로 교체되는 것을 방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 눈에서 저와 같은 감정을 발견한 순간, 마음 깊숙한 곳에서 미약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워낙 찰나였던지라 레이린 스스로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제트리아 양은 벤투스와의 교역 명세서를 찾아와 주십시오.”

어느덧 감정 없는 눈을 한 에드윈이 빠르게 명령했다.

“그리고 아르망, 너는 에드니 가주에게 연락을 넣어라. 도착하면 패트릭을 찾아 이곳으로 올라오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곧장 고개를 숙여 보인 두 사람은 집무실을 벗어나 각자 다른 방향으로 발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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