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새파란 눈이 숲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인영을 알아보고는 반사적으로 굳어졌다. 마찬가지로 상대를 알아본 몇몇 기사들이 경악했다.
“저 사람은 그때 그......!”
기사들은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굴며 자신들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에드윈은 황금빛 머리카락과 눈을 지닌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뭘 안고 있는-”
누군가의 의아한 목소리가 칼로 잘라 내듯 끊겼다. 동시에 기사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선 여인의 걸음도 우뚝 멎었다.
“.......”
긴장된 정적이 잠시간 허공을 짓눌렀다.
그때, 복면으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는 여인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댄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소년은 언뜻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양손을 깍지 껴 배 위로 겹친 채 눈을 감고 있는 소년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얬다.
“.......”
알 수 없는 눈으로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여인이 문득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짙은 안개 속에서도 등불처럼 선연히 빛나는 황금색 눈과 시선이 맞닿은 순간. 새파란 눈이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미하게 확장되었다.
“주군, 명령을.”
리오넬은 긴장한 기색으로 여인을 주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기사들 또한 명령만 떨어진다면 당장에라도 여인을 향해 달려들 듯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소리 없는 경계를 눈치챈 것인지, 말없이 에드윈과 시선을 맞추던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주군.”
서서히 뒷걸음질 치는 여인의 모습에 초조해진 리오넬이 다시금 목소리를 내는 찰나.
“......아니.”
낮은 목소리가 서늘한 기운을 담아 내뱉어졌다.
“쫓지 마라.”
“예?”
긴장으로 어깨를 굳히고 있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에드윈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안개 너머로 흐려지는 인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싸늘한 음성을 흘렸다.
“내버려 두라고 했다. 세 번이나 반복하게 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답지 않은 명령에 리오넬을 포함한 기사들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새파란 눈에 이유 모를 살기마저 감도는 것을 본 그들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
이윽고 한동안 희뿌연 안개 너머를 응시하던 에드윈이 나직이 입술을 뗐다.
“시신을 수습하고 마물의 사체를 챙겨라.”
여인의 잔상을 떨쳐 내듯 몸을 돌린 그가 성큼 걸음을 떼었다.
“돌아간다.”
흑색 머리카락 아래의 눈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레이린은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희뿌연 안개로 그득한 숲속을 하염없이 걷고 있자니 꼭 제자리걸음을 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한 번도 원해 본 적 없었던 예지몽에 갇혀 허덕이는 것처럼.
‘마을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녀는 넋을 놓은 와중에도 본능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곧 끊어질 듯 가늘어진 이성이 필사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을 찔러댔다.
‘돌아가는 길이.......’
어느 방향이더라. 레이린은 불현듯 머리를 장악한 의문에 우뚝 발을 멈추었다. 두꺼운 안개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남겨진 그녀가 자신을 향해 되물었다.
‘왜 돌아가야 하지?’
그러자 무의식이 답했다. 에드윈과 기사들이 곧 마을로 돌아갈 테니까.
‘그걸 알고 있는 이유는?’
조금 전에 두 눈으로 마물의 시체가 땅바닥을 구르고 있던 광경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왜?’
그야-
“헉......!”
레이린은 물 흐르듯 생각을 이어 가다 말고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상처, 피, 소년.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넝마가 된 몸을 꿰뚫던, 검. 핏빛으로 물든 기억이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리며 미약하게 남아 있던 이성을 찢어발겼다. 일순 머리가 아찔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무릎이 휘청 꺾였다.
챙그랑-
몸이 땅 위로 무너짐과 동시에 허리춤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검이 아무렇게나 바닥을 굴렀다.
“욱.......”
레이린은 몸을 웅크리며 손끝으로 땅바닥을 긁었다. 목 안쪽 깊숙한 곳에서부터 짐승의 울음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필사적으로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그녀의 안에서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죽을까.’
죽음을 통해서 이 끝없는 무력과 절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부질없는 희망을 놓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차라리 지금.......’
죽음으로 도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광기에 가까운 충동이 이성을 잃은 몸을 멋대로 움직였다. 몸을 둥글게 말고 허덕이던 레이린의 손이 힘겹게 주위를 더듬었다. 이윽고 검 손잡이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와 닿았다. 물에 잠겨 허우적대다가 간신히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사람처럼, 그녀가 절박하게 그것을 움켜쥐는 찰나.
“그만두시게.”
낯선 목소리와 기척이 불쑥 귓가를 찔러 들었다.
“......!”
어깨가 화들짝 튀어 올랐다. 레이린은 본능적으로 검을 끌어당기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직후, 황금색 눈이 경악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뭐.......”
생소한 목소리의 주인이 다각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상체는 인간, 하체는 말의 형태를 한 그것은 이내 레이린의 앞에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대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 텐데.”
퍽 온화해 보이는 남자의 머리가 담담한 말을 흘렸다.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보던 레이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수인족?”
그러자 남자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자들과 우리를 동일시하지는 말아 주시게나. 불쾌하니까.”
퍽 부드러웠지만 내심 못마땅한 기색이 깃들어 있는 어조였다. 그에 놀라움으로 물들어 있던 황금색 눈이 싸늘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완전히 이성을 되찾은 레이린이 제 매무새를 추스르며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반듯이 편 그녀가 남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 뭐야.”
남자와는 다르게 예의 따위는 진즉에 집어치운 어조였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는 불쾌한 기색을 일절 내비치지 않으며 선선히 답했다.
“이제는 아주 오래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한때 ‘켄타우로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네.”
레이린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켄타우로스. 그것은 신의 분노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 생물 중 가장 신성하게 여겨지는 이들이었다. 지혜롭고 고고한 지식의 정수. 켄타우로스들이 그렇게 자칭하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이가 없을 정도로.
레이린은 미간을 가늘게 좁힌 채 물었다.
“......그림자숲에 숨어 산 덕에 신의 분노를 피할 수 있었던 건가.”
“우리는 본래 다른 종족과 어울리는 것을 썩 즐기지 않아. 그러니 숨어 살았다는 표현보다는 피해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네만.”
점잖기 그지없는 반박에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왜? 그렇게 하등한 인간 따위와 말을 섞어 주셔서 영광이다, 그런 말이라도 듣고 싶어?”
레이린은 사납게 입매를 뒤틀며 날 선 말을 내뱉었다.
지금의 그녀는 왕족을 눈앞에 두고도 예의를 차릴 수 없을 만큼 곤두선 상태였다. 하물며 저따위 오만으로 가득 찬 종족까지 구태여 배려해 주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내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심장을 정확히 관통하는 물음을 던졌다.
“그대는 정녕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믿나?”
그 말에 레이린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무의식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의구심이, 타인의 입으로 남김없이 까발려지는 기분은 더럽기 짝이 없었다. 그것도 난생처음 마주한, 사람 같지도 않은 자의 입을 통해서라면 더더욱.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를 지그시 악문 그녀가 억눌린 소리로 으르렁댔다. 당장에라도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듯 흉흉한 음성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남자는 언뜻 차분하기까지 한 얼굴로 고개만 내저었다.
“우리는 하늘의 비밀을 보고 듣는 대가로 그 사실을 발설할 수 없네. 하지만 우리와 달리 말에 제약이 없는 이들이 하나 있지.”
“.......”
쿵,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차츰 커다랗게 몸집을 부풀리며 귀를 울렸다.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다문 채 그의 입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이윽고 단아한 분위기의 입술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혹 진실의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가?”
그녀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진실의 호수는 어린아이들의 동화책에 흔히 등장하곤 하는 전설 속의 장소였다. 레이린은 미심쩍은 얼굴로 남자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눈멀고 길 잃은 자들아, 진실의 호수에 피와 살을 담가라.”
동화의 첫 장에 곧잘 등장하는 구절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너희가 찾는 답은.......”
“모두 그곳에 있을지니.”
나직한 목소리로 끝맺어진 말이 안개를 타고 흩어졌다. 엷은 웃음을 띤 남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곳에 당도하거든, 그대가 진실로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을 테지.”
묘한 어조의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안개 속으로 몸을 돌렸다.
“내 이름은 알렉시스라네. 만나서 영광이었네, 마지막 수호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