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87)

* * *

짙은 안개가 느릿느릿 허공을 부유하며 시야를 방해했다. 드물게도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서부터 밝은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안개 낀 숲속을 배회하던 새파란 눈이 문득 한 곳에 고정되었다.

“정지.”

에드윈은 복면 아래로 짤막하게 입을 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기척 없이 움직이던 기사들은 명령에 따라 곧장 제자리에 멈춰 섰다.

짙은 푸른색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며 한 걸음 앞의 땅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이내 무엇인가를 발견한 에드윈이 몸을 낮추며 손을 뻗었다.

‘......말발굽 자국?’

그의 미간이 의아함으로 설핏 좁혀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것은 축축한 흙과 이끼의 감촉. 그리고 선명하게 패여 있는 말의 발굽 모양 자국이었다. 기실 말발굽 자국만 놓고 본다면 이상할 것은 없었다. 땅은 젖어 있었고, 말이 그 위를 지나간다면 발자취를 따라 자국이 남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문제는 이곳이 ‘그림자숲’이라는 사실이었다. 맹수마저도 심심찮게 먹이로 해치우곤 하는, 헤르기아스 최상위 포식자인 마물들의 둥지. 그런 곳에 말발굽 자국이, 그것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은 확실히 기이했다.

“.......”

에드윈은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댄 자세 그대로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얼굴을 반쯤 가린 복면 위로 드러난 푸른색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바로 그때.

캬아악-!

땅을 뒤흔드는 듯 묵직한 울음소리가 숲 안쪽에서부터 기다랗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땅을 박차고 일어난 에드윈이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었다.

“전원, 전투 준비.”

짤막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갖추며 검을 손에 쥐었다. 제각기 얼굴을 굳힌 그들이 긴장된 시선으로 숲 안쪽을 응시했다.

심장이 쿵, 쿵 뛰는 소리가 귓가를 정확히 세 번 울렸을 때.

캬아아악!

안개 너머에서 거대한 형체가 불쑥 튀어나오며 일행을 덮쳤다.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에드윈의 뒤쪽에 서 있던 리오넬이 목소리를 높이며 곧장 검을 휘둘렀다.

서걱-!

키에엑!

그의 공격으로 여덟 개의 다리 중 한 다리의 절반을 잃은 마물이 소름 끼치는 비명을 토해 냈다.

키이익! 키익!

커다란 거미의 몸통, 그리고 네 개의 눈이 달린 황소의 머리를 가진 마물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태의 원인이 신종 마물일 것이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기사들은 작게 혀를 찼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정을 되찾은 그들은 냉정한 얼굴을 하고는 침착하게 마물을 도륙해 나갔다.

헤르기아스 대륙에서 유일하게 마물의 천적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클로비스 기사단. 그런 그들의 자비 없는 살육에, 숲을 가득 메우고 있는 마물의 수가 하나둘 줄어들었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기사들이 몇 생기긴 했지만, 이 정도면 무난하게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다리를 잃고 비틀거리던 마물이 돌연 기민한 동작으로 리오넬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리오넬은 마물의 입 안에서 섬뜩하게 번뜩이는 이빨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일부러 움직이지 못하는 척하며 기회를 노렸던 건가.’

기실 지능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본능에 가까운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상대하기 수월하다는 말 또한 아니었다. 방심은 최대한 지양하자는 주의의 그가 능숙하게 발을 움직여 몸을 물렸다.

하지만 그때, 마물의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튀어나온 희뿌연 액체가 예고 없이 그를 덮쳤다.

“부단장님!”

놀란 기사들이 복면 너머로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리오넬은 제 얼굴로 쏟아져 내리는 희뿌연 액체에 경악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늦었-’

낭패 어린 신음을 삼킨 그가 고통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강한 힘이 리오넬의 뒷덜미를 홱 잡아챘다. 그의 몸이 뒤로 기울어지는 것과 동시에, 날붙이가 살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귓가에 박혀 들었다.

푹-!

캬아아악!

숲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울부짖음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이어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마물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커헉! 큭.......”

땅바닥에 널브러진 리오넬이 뒤늦게 제 목을 감싸 쥐고는 거칠게 기침했다. 그가 눈물 고인 눈으로 제 옆을 힐긋 돌아보자, 탁한 흰빛의 액체가 닿은 곳부터 땅이 부식되듯 썩어 들어가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냥 안개가 아니라 독 안개였나 보군.”

기겁하며 입을 벌리던 리오넬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주위의 마물을 대부분 정리한 에드윈이 서늘한 눈으로 마물의 사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사신과도 같아, 리오넬은 잠시 상황조차 잊고 동경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단장님!”

“괜찮으십니까?”

그사이 마지막 마물의 숨통을 끊은 기사들이 허겁지겁 리오넬을 향해 달려왔다. 리오넬은 그제야 자신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음을 의식하고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됐다, 됐어. 난 멀쩡.......”

울상을 짓고 있는 기사들에게 보란 듯 너스레를 떨던 리오넬이 문득 말을 멈추었다. 보라색 눈이 커다랗게 확장되는 것을 본 기사들이 의아함에 고개를 돌렸다.

“부단장님? 뭘 보고 계신 겁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악하며 숨을 멈추었다. 누군가 간신히 중얼거렸다.

“......저건.”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감지한 에드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가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인영을 오롯이 눈에 담은 것과 동시에. 선명한 황금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 * *

“루나.”

에드니 가문의 주치의를 쥐잡듯이 잡고 있던 루나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레이린? 무슨 일.......”

그녀는 레이린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반사적으로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레이린은 언뜻 잔잔하기까지한 미소를 띤 채로 에드니 가문의 주치의를 돌아보았다.

“잠시 루나를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할 얘기가 있어서.”

예의 바른 물음에, 루나의 기세에 짓눌려 사라질 뻔한 주치의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싱긋 웃어 보인 레이린은 손을 뻗어 루나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가자.”

무어라 입을 열려던 루나는 제 손목을 감싼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조용히 입술을 사려 문 채 걸음을 옮겼다.

레이린은 루나와 함께 1층 구석방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여유롭게 인사까지 해 보였다.

“아제트리아 님. 아까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부드럽게 웃음 짓는 레이린은 완벽한 수행 비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 안에 들어서서 문을 닫아거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얼굴이 왜 그래, 너. 무슨 일이라도 있어?”

루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걱정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상대는 그녀의 물음에 차분히 답할 정신조차 없는 듯이 보였다.

“루나, 부탁이 있어.”

“대체 뭘 부탁하려고 그러는-”

의아한 목소리는 이내 시야를 환하게 물들이는 황금빛으로 인해 뚝 끊어졌다.

레이린이 목걸이를 풀어내자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이 찬연한 빛으로 물들었다. 반면 그녀의 얼굴은 시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내 핏기가 거의 사라진 입술이 달싹이며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 하나가 숲으로 사라졌어. 그 아이 이름은 콜린이야.”

“뭐라고? 그 나이에 벌써 제정신이 아닌 거야? 당장 알려야......!”

“아니, 지금은 안 돼.”

레이린은 대번에 경악하며 몸을 돌리는 루나의 손을 붙잡았다. 당장에라도 방을 뛰쳐나갈 것 같던 그녀가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섭도록 굳어진 얼굴의 레이린이 루나를 향해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나는 지금부터 그 아이를 찾으러 갈 거야. 너는 내가 출발한 이후에 콜린의 어머니를 통해서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 줘.”

말이 이어지는 내내 루나의 입이 점차 벌어졌다. 짙은 녹색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부풀었다.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의 귓가를 파고든 말을 차마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양, 아무런 말 없이 눈만 깜박였다.

그사이 레이린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엘빈이 나를 찾거든, 너는 내가 몸이 안 좋아 보여서 방에서 쉬라고 했다고 핑계를 대줘.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자리를 비웠다는 걸 들켜서는 안 돼.”

“너 미쳤니?”

목구멍에 걸려 있던 말을 간신히 토해낸 루나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네가 왜 그 애를 찾으러 가! 그런 일을 하려고 기사들이 있는 거잖아! 저번에는 넝마가 돼서 오더니, 이제는 아예 시체라도 돼서 오려고 그러는 거냐고!”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가 어둑한 방 안을 커다랗게 울렸다. 그러나 레이린은 단호히 그녀의 말을 끊어 냈다.

“내가 가야 해.”

지나칠 만큼 확고한 대답에, 루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격앙된 녹안과 시선을 맞춘 레이린이 설핏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

루나는 처음부터 저 눈과 시선을 맞추지 말았어야 했다며 짤막하게 탄식했다.

“부탁이야.”

힘없는 웃음을 띤 레이린이 자그만 속삭임을 흘렸다. 헤르기아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황금색의 눈이 고운 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

루나는 결국 이렇다 할 말을 내뱉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누군가의 미소를 보고 ‘아프다’는 감상에 잠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편이 나았기에.

끝끝내 루나의 확답을 받아낸 레이린은 곧장 옷을 갈아입고 검을 챙겼다.

그녀는 강을 넘는 중에 혹시나 아이가 물에 휩쓸려 가진 않았을까 불안해하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무너트리듯, 질척한 발자국은 큰 굴곡 없이 숲 안쪽까지 이어졌다. 검은 복면 위로 드러난 황금색 눈에 일순 절망이 스몄다.

‘서둘러야 해.’

레이린은 이윽고 이를 악문 채 콜린의 발자국을 따라 뛰었다. 지금쯤이면 루나를 통해 아이의 실종 소식을 접한 클로비스 기사들이 출발을 목전에 두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이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한다면 아이의 발자국을 찾아내는 것은 금방이었다.

거기에 먼저 숲으로 향했던 에드윈 일행을 마주칠 수도 있으니, 기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레이린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안개를 헤쳐나갔다. 음산한 빛의 초목이 빠르게 시야를 스쳤다.

그녀는 콜린의 흔적을 쫓아 움직이던 중, 드문드문 기이한 형태로 패여 있는 나무와 땅바닥을 발견하고 의아해했다.

‘......마물의 발자국인가. 그런데 나무는 어떻게?’

그러나 당장 급한 것은 아이를 찾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오래 생각을 이어 가지 못하고 그곳을 지나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나빠졌고 그만큼 초조함은 더해졌다. 강물 덕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아이의 발자국은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옅어졌다. 반대로 시야를 가리는 희뿌연 안개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워 낼 정도로 두터워졌다. 이제는 눈을 가늘게 좁혀도 코앞에 서 있는 나무조차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숲에 들어온 이후로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던 레이린이 잠시 발을 멈추었다. 그녀는 초조한 눈으로 사방을 살피며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콜린의 이름을 외쳐 볼까도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에드윈 또한 제 목소리를 듣게 될 가능성이 작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레이린은 절박한 심정으로 연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분명 호흡을 이어 가고 있음에도 숨이 막히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악!”

희미한 메아리가 기적처럼 귓가에 닿아 왔다.

머리보다 몸이 반응하는 것이 먼저였다. 레이린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비명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마! 아빠! 살려......!”

아이가 공포에 질려 부모를 찾는 소리가 잘게 조각나 안개 사이로 흩뿌려졌다.

레이린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으며 뛰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몇 번이고 생채기를 입었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다리를 움직여도 희뿌연 안개 속을 벗어날 수 없는 듯한 기분에 잠식되기 직전. 안개 너머로 불쑥 거대한 그림자가 드러났다.

“아아악!”

거미를 닮은 마물의 뒷모습 너머, 자그마한 아이가 땅을 기며 마물에게서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흑, 흐, 흐윽.......”

콜린은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회관을 벗어날 때 챙긴 듯 보이는 복면은 갈기갈기 찢겨 땅 위에 흩어져 있었다.

소년은 필사적으로 손을 움직였지만, 이미 힘이 빠진 손으로 땅을 짚어 봤자였다.

키이익, 키익!

마물은 제 앞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이 우습다는 양 한 걸음 만에 소년을 따라잡았다. 그 모습을 본 레이린은 이를 으득, 갈며 검집을 내던지고는 검을 움켜쥐었다.

“으......!”

콜린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이 공포에 물든 얼굴로 턱만 덜덜 떨었다.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직감한 소년의 눈에서 체념이 넘쳐흘렀다.

“흐으, 엄마.......”

이윽고 마물이 목 안쪽으로 그르렁대는 울림을 만들어 내며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레이린의 검이 마물의 등 한가운데에 꽂혔다.

키에에엑!

황소를 닮은 마물의 머리가 긴 울부짖음을 토해 냈다. 등을 반으로 가르는 듯한 고통에 마물이 미친 듯 몸을 흔들며 날뛰었다. 마물의 등 위에 올라타 있던 레이린은 깊이 박아 넣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키야악!

또 한 번 거칠게 발광하는 마물로 인해 몸이 균형을 잃고 땅으로 추락하기 전. 피로 물든 등을 밟고 뛰어오른 그녀가 이를 악물며 마물의 목을 내리쳤다.

서걱-!

마물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체중을 온전히 실은 검에 잘려 나간 머리가 땅을 구르고.

-쿵!

이어 머리를 잃은 몸이 묵직한 울림을 만들어 내며 땅으로 내려앉았다.

“콜린!”

땅바닥을 구른 레이린은 곧장 검을 내팽개치고 소년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쓰러진 채 미동이 없는 소년의 몸을 다급히 살폈다.

“안 돼, 안 돼.......”

레이린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콜린의 상처를 지혈했으나 손 틈으로 피가 울컥 새어 나왔다.

‘늦지 않았어.’

아직, 늦지 않았.......

그녀는 이미 엉망이 된 입술을 몇 번이고 깨물다가 끝내 소년의 몸 위로 무너졌다. 물기 어린 목소리가 흐리게 잇새로 새어 나왔다.

“안 돼.......”

그때, 거짓말처럼 기척이 들려왔다.

“윽.”

콜린의 몸 위로 얼굴을 묻고 있던 레이린이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설마. 설마, 설마.

레이린은 피가 말라붙은 눈꺼풀이 움찔거리는 모습을 숨도 쉬지 못하고 지켜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누구?”

흐릿한 눈동자를 드러낸 소년이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이 시야에 박혔다.

“.......”

일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름 모를 감정으로 꽉 메인 목이 아릿하게 욱신거리며 눈시울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가, 직후 흠칫 어깨를 굳히고는 입술을 다물었다. 이내 이성을 되찾은 그녀가 콜린과 시선을 마주한 채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콜린은 그 의미를 가늠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좁혔다가 힘겹게 입을 뗐다.

“말, 을.......”

소년은 거친 호흡 사이로 띄엄띄엄 말을 뱉어냈다.

“말을, 못 한다는...... 거예요?”

레이린은 그에 대한 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콜린은, 목소리만으로는 그녀의 정체를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의원에게 치료를 받고 기력을 차린 후에도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니 섣불리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이렇게나마 대처하는 편이 나으리라.

‘우선 마을로 돌아가서-’

습관처럼 해야 할 일을 상기하던 레이린은 불현듯 멍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

곧이어 벼락같은 깨달음이 등줄기에 내리꽂혔다. 뒷덜미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느낌이 지독히도 생생했다.

‘살았구나.’

정말로, 살아 있구나. 그 생각을 하자마자 알게 모르게 막혀 있던 숨통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새삼스럽게 콜린을 내려다보던 레이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감상에 젖어 있기에는 일렀다. 이 시간에도 콜린의 얼굴에서는 시시각각 혈색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찬물을 뒤집어쓴 듯 훅 현실감이 끼쳐 왔다. 그녀는 멍청하게 시간을 허비한 스스로를 속으로 모질게 질타하며 조심스럽게 콜린을 안아 들었다.

“쿨럭! 흐.......”

최대한 흔들림 없이 몸을 일으켰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듯 소년의 입에서 자그마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레이린은 변변찮은 위로의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그저 걸음을 뗐다.

“아. 엄마랑 아빠가 도움을 받으면 꼭, 인사를 하랬는데.”

콜린은 넋 놓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돌연 말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소년은 어린아이 특유의 순수함이 남아 있는 눈으로 레이린을 올려다보았다. 그 맑은 눈빛에, 그녀는 찰나 처참한 기분이 되어 호흡을 멈췄다.

별다른 답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콜린은 흐릿한 목소리로나마 다시금 반복했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그 말에, 레이린은 차마 밖으로 내어놓을 수 없는 대답을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인사를 들을만한 사람이 아니야. 어쩌면, 어쩌면 너를 이렇게 만든 것이 전부 내 탓일 수도 있는데. 너는 이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레이린은 씁쓸하게 자조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한테 소리, 지르지 말 걸 그랬나 봐.......”

그녀는 소년이 열에 들떠 흘리는 중얼거림을 들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빠한테도, 왜 아프고 난리냐고 화냈던 거, 미안하다고...... 쿨럭!”

연신 입술을 달싹이던 콜린이 말끝에 거칠게 콜록거렸다. 붉게 물들어 있는 소년의 앞섶 위로 검보라색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

순간 온몸의 피가 차게 식어 내렸다.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바닥에 무릎을 대며 콜린의 몸을 내려놓았다.

“콜록, 콜록!”

그녀는 잇달아 검보라색 피를 토해 내는 소년의 몸을 샅샅이 살피다가 말고 그대로 굳어졌다.

“누나, 나 좀, 이상...... 쿨럭!”

콜린은 또 한 번 몸을 뒤틀며 피를 왈칵 토해 냈다. 땅 위로 물감을 점점이 흩뿌린 듯한 자국이 남는 것을 확인한 소년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자신이 한 일임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양,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내던 콜린의 시선이 문득 제 손에 닿았다.

“아.......”

온통 상처투성이인 손. 그리고 그 위를 타고 오르는 보랏빛 핏줄. 그것을 눈에 담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

“.......”

“물렸구나.”

깨달음 같은 중얼거림이 안개 사이로 먹먹하게 흩어졌다.

레이린은 콜린의 옷깃을 젖히던 자세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왜?’

아까 확인했을 때, 분명 물린 것처럼 보이는 자국은 없었는데. 물론 정신없는 와중, 온몸을 뒤덮은 상처 중 하나에 마물의 타액이 스며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그렇지만.

왜?

레이린이 스스로 떠올린 가설을 부정하듯, 필사적으로 제 생각을 지워 내고 되묻기를 반복하던 때.

“누나.”

기이하리만치 선명한 음성이 귓가를 찔러 왔다. 레이린은 무의식중에 저를 부르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어느새 목덜미까지 보랏빛 핏줄로 뒤덮여 있는 모습의 콜린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황금색 눈을 향해 덤덤히 말했다.

“죽여 주세요.”

아, 그래.

“저는,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아직 꿈을 꾸고 있구나.

“그러니까 차라리, 그렇게 되기 전에.......”

아직도 그 지독한 악몽에 갇혀 헤매는 중이구나. 그러니까 이만 깨어나자. 깨어나.

“나를 죽여요.”

제발.

차분해서 더욱 현실감이 없는 말이 나직이 끝맺어졌다. 레이린은 어느 순간 퍼뜩 제정신을 차리고는 미친 듯 고개를 내저었다.

‘살 수 있어.’

마수화로 인해 완전히 이지를 잃는다고 해도, 왕족의 신성력이 있다면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콜린은 빙긋이 미소 지으며 사실을 되새길 뿐이었다.

“누나도 사실 알고 있잖아요.”

“.......”

“나는 이미 늦었다는 거.”

소년은 제 피를 머금어 축축해진 땅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애초에 자신이 입은 상처는 살아 돌아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무리였나.

콜린은 미약하게 가졌던 희망마저 제 손으로 꺼트리고는 웃었다.

웃었다.

“부탁이에요.”

온통 찬란한 황금빛 일색인 사람. 매일 어머니의 입으로만 전해 듣던, 흰 눈처럼 새하얗다는 왕족들보다도 신성해 보이는 사람. 그래서일까. 콜린은 끝내 절규를 토해 내며 손에 검을 쥐는 레이린의 모습에도 평온하게 눈꺼풀을 닫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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