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87)

* * *

연회장을 벗어난 레이린은 드넓은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별궁까지 이어진 통로는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연회장의 한복판에서는 대귀족들에게 접근하기 어려우니, 한산한 바깥에서 독대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이들이었다.

레이린이 유스티아 영주의 비서라는 것을 알아본 몇몇 이들은 곧장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집요한 눈빛을 보니, 척 보아도 순탄히 방까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레이린은 결국 질린 얼굴로 사람들을 피해 어둑한 정원을 향해 발길을 틀었다.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저런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분노를 담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다가 말고 우뚝 멈추어 섰다.

‘아, 그러고 보니 선배님은.......’

아르망에게 그 자리에 가만히 있겠다고 약속했던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레이린은 낭패 어린 눈빛으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을 배경으로 유달리 화사하게 빛나고 있는 본궁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적당히 포기하셨겠지. 한두 번도 아니고.’

레이린은 빠르게 아르망을 포기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를 챙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한숨을 삼킨 그녀가 별궁을 향해 발을 돌리는 순간. 길을 따라 늘어진 정원수 너머로 희미한 소란이 들려왔다.

“......놔!”

철썩!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렸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빼곡히 들어찬 정원수 너머, 나무 그림자 사이로 희붐한 인영이 서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어둠 속에서도 새하얗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만은 선명히 시야에 잡혔다.

‘......공주?’

설핏 미간을 구긴 레이린이 본능적으로 기척을 죽인 채 정원수 쪽으로 다가갔다.

몇 걸음 다가서자 나뭇잎 사이로 새하얗게 빛나는 아네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귀족가의 자제로 보이는 청년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미 같은 말씀을 여러 번 드렸습니다. 저는 클레타 영식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네트는 조금 전보다 커다란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던 청년이 헛웃음을 흘리며 제 뒷머리를 헝클었다.

“저도 누차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공주님.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올려다보고만 있을 바에는 공주님을 좋아해 주는 사람을 받아들이시라고요.”

“......그게 클레타 영식 본인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아네트가 질린 목소리로 내뱉은 말 덕에, 레이린은 머릿속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이름을 간신히 찾아냈다.

‘앨리슨 클레타라면...... 중앙 귀족이었던가.’

아르망이 일러 주었던 정보에 따르면 남자는 중앙 귀족인 클레타 가문의 장남인 듯했다. 레이린은 그 한심한 작태에 드러내놓고 혀를 찼다.

‘헛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군.’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저급한 협박질이나 해대는 자라니. 그 속내가 너무도 투명하게 들여다보여 오히려 헛웃음이 났다.

“하, 진짜 별.......”

그때, 앨리슨이 돌연 미친 사람처럼 키득거리더니 아네트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이름뿐인 공주 주제에 피차 고상한 척은 그만두지 그래.”

날 선 비아냥에 아네트의 어깨가 그대로 굳어졌다.

“뭐-”

“안 그런가? 계집인 것도 아쉬운 판에 뭐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게 없다며 허구한 날 폐하께 경멸이나 당하는 주제에.”

비열한 웃음을 머금은 앨리슨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오죽하면 하나뿐인 자식을 두고 공공연히 왕손을 찾으시겠어. 그러니까 적당히 하고 나랑.......”

그가 얼음처럼 굳어져 있는 아네트를 향해 우악스럽게 손을 뻗은 순간. 매끄러운 천이 아네트의 눈 위를 감싸며 시야를 차단했다.

“잠깐만 이렇게 있어요.”

낮은 속삭임을 흘린 레이린은 직후, 앨리슨의 복부를 그대로 걷어찼다.

퍽-!

“커헉!”

앨리슨은 몸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흙바닥으로 나자빠졌다. 거칠게 기침을 토하며 숨을 헐떡거리던 그가 제 앞으로 다가선 구두를 보고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흐, 당신 뭐.......”

어둠에 잠긴 인영을 가까스로 알아본 앨리슨이 두 눈을 부릅뜬 것과 동시에. 레이린은 신속한 동작으로 손을 뻗어 그의 입을 자비 없이 틀어막았다.

“읍! 으으읍!”

앨리슨은 턱이 그대로 짓뭉개지는 듯한 악력에 눈을 반쯤 까뒤집으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레이린은 차분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한 채 그의 허벅지를 굽으로 지그시 짓이길 뿐이었다.

“......윽.”

앨리슨은 그제야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입 안으로 신음을 삼키며 발버둥을 멈추었다.

엷은 회갈색의 눈이 소름 끼치도록 무감정한 빛을 띤 채 그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사신과도 같은 그 모습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하나하나 돋아나는 것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레이린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벌벌 떠는 앨리슨을 내려다보며 낮게 웃었다.

“그래. 계속 그렇게 닥치고 있어, 살고 싶으면.”

앨리슨은 알았다고 대답하듯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린은 등 뒤에서 갈팡질팡하는 아네트를 힐긋 돌아보았다. 그녀는 제 눈을 가리고 있는 천을 풀어내려는 듯 손을 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네트의 눈 위를 가로지르고 있는 푸른 끈은 레이린의 머리카락을 고정하고 있던 것이었다. 만약 앨리슨을 처리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보였다가는, 유스티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호신술을 운운하며 둘러댈 수 없을 것이 뻔했다. 하여 저 머리끈은 조금이라도 제 수상함을 감추고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방편이었다.

‘게다가 공주는 내 목소리를 모르니까.’

우연하게도, 레이린은 아직 아네트의 앞에서 정식으로 제 존재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눈을 가리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아네트의 생각과 감각에 혼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빠르게 생각을 갈무리한 레이린은 무미건조한 비소를 머금었다.

“역겹기도 하지.”

나직한 중얼거림에 앨리슨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레이린은 그를 짓밟고 있는 발에 느긋하게 힘을 주며 입술을 달싹였다.

“남이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쳐다보고 있건 말건, 그게 네 역겨운 주장의 근거가 되어 주지는 않아.”

부드러운 목소리가 사근사근한 속살거림을 엮어냈다.

“말 못 하는 짐승조차 제 욕망을 해소하려 상대를 덮치지는 않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마치 먹이를 언제 삼킬까 고민하는 맹수의 것과도 같아 더욱 공포스러웠다.

“너.”

레이린은 그런 속내를 단번에 파헤쳐 쥐고는 나긋하게 눈매를 휘었다.

“내가 무섭구나.”

그의 턱을 쥐고 있는 손 아래로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맞부딪치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린은 구태여 감추지 않고 그것을 비웃었다.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고작 이 정도에도 제 목숨을 잃을까 안달복달하는 주제에. 저보다 약한 듯 보이는 상대에게는 서슴없이 더한 짓을 반복한다는 점이.

레이린은 스산한 미소를 머금고는 앨리슨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가 그 움직임에 따라 짤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네가 머리라는 걸 달고 있다면 이거 하나는 기억해 둬.”

솜털이 쭈뼛 곤두설 정도로 매서운 목소리가 그의 뇌리에 한 자 한 자 새겨졌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올려다보는 자를 비웃지 말라.”

헤르기아스에서 속담처럼 사용되는 시의 한 구절이 교묘하게 변형되어 흘러나왔다.

“네가 허리를 접어 웃는 사이, 그 나무에 매달리게 되는 것은.......”

“.......”

“너의 목일지니.”

레이린이 섬뜩한 말을 맺으며 고개를 드는 찰나였다. 순간적인 공포심을 이기지 못한 앨리슨이 발악하듯 그녀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투둑-!

목덜미로 따끔한 통증이 스치더니,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의 줄이 투박한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무슨......!”

놀란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앨리슨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그가 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가는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이 찬란한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레이린은 간발의 차로 앨리슨에게서 목걸이를 빼앗고는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요? 무슨 일......!”

그때, 일련의 소란을 감지한 아네트가 눈가에 묶인 천으로 다급하게 손을 가져갔다. 그 기척을 느낀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질긴 줄이 그녀의 목 뒤에서 매듭지어지는 것과 동시에, 황금색으로 빛나던 머리카락이 다시금 엷은 회갈색으로 물들었다.

직후 아네트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천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둠이 익숙지 않은 듯 연푸른색 눈을 몇 번 깜박이던 그녀가 이내 놀란 얼굴을 했다.

“당신은.......”

레이린은 제 머리카락이 원래대로 돌아왔음을 확인하고는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공주님. 다급한 나머지 무례를 저질러 송구합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아네트가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오히려.......”

그녀는 레이린의 등 뒤에 널브러져 있는 앨리슨의 모습을 힐끔 일별하더니 말했다.

“큰 도움을 받았네요. 정말 감사해요.”

아네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편 레이린은 영혼 없이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답했다.

“별말씀을요.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이니 개의치 마시길.”

흠잡을 곳 없는 태도로 말을 마친 그녀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밤공기가 차니, 공주님께서는 이만 연회장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는.......”

“잠깐만요.”

그 순간, 재빠르게 레이린의 앞까지 다가선 아네트가 뒤돌아서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레이린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흠칫 어깨를 굳히고는 손에 힘을 풀었다.

“아, 멋대로 붙잡아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한데 왜 그러시는지.”

레이린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아네트가 머뭇머뭇 손을 들어 올려 레이린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상처가.......”

“아.”

레이린은 그제야 목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통증을 자각했다. 뭐지, 하고 눈살을 찌푸렸던 그녀는 이것이 앨리슨의 발악으로 인해 생긴 상처임을 깨닫고는 웃었다.

‘하여튼 끝까지 성가신 놈.’

속으로 앨리슨을 사납게 난도질한 레이린이 태연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아네트는 간절하기까지 한 눈으로 양손을 모아 쥐며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렇게나마 보답하게 해 주세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는 없어서.......”

그녀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더니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레이린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처연한 아네트의 모습에 난처한 한숨을 삼켰다.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아네트가 불편한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내보이는 감정은 순수하기 그지없는 호의였다. 엘빈이 짐작한 것처럼, 이런 종류의 호의에 유달리 취약한 레이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권하신 대로 의사에게 상처를 보이고 치료를 받겠다. 그렇게 답하려던 순간이었다.

“고마워요.”

순식간에 환한 얼굴을 한 아네트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것과 동시에, 새하얀 손에서 눈부신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레이린은 경악하며 작게 입을 벌렸다.

‘설마.......’

머리는 눈이 인식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지만 진실은 명확했다.

각 도시의 영주들이 온갖 금은보화를 바치며 청하는 힘.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 그들이 헤르기아스에서 명실상부한 신의 현신으로 대우받는 이유.

신성력. 아네트는 그러한 힘을 고작 생채기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레이린은 목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겁던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

바로 그때. 무언가에 경악한 아네트가 소스라치듯 손을 거두어들이더니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공주님?”

레이린은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아네트는 창백한 얼굴로 떨리는 양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뭐였지?’

희게 질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명, 힘이.......’

그녀는 아직도 심장이 섬뜩해지는 듯한 감각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한순간이지만 분명히 느꼈다.

‘끌어당겨지는 것 같은.......’

본능적으로 양손을 모아 감춘 아네트는 제 앞에 선 여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찬바람이 침묵을 거두어 가듯 나뭇잎을 흐트러트리는 소리만이 허공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

연하늘색의 눈이 제가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형형하게 부릅떠졌다. 발코니의 난간을 움켜쥐고 있는 손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폐하?”

경악으로 얼어 있던 왕은 제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이드리스는 선한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서 있던 왕의 얼굴이 점차 가라앉았다.

“.......”

연푸른 눈 위로 수천 가지 생각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왕은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차갑게 굳어진 얼굴로 이드리스를 돌아보았다.

“이드리스 프리조프.”

그 부름에, 이드리스는 곧장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왕은 어둠에 잠겨 새까만 정원을 돌아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일전의 그 제안, 받아들이겠다.”

이드리스는 찰나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뱀처럼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명 받들겠습니다, 나의 왕이시여.”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주홍색 눈이 생기로 반짝였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6. 나락

‘고마워.’

다정한 목소리가 가슴 아리도록 서글프다. 무의식중에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이것은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일까, 아니면.......

‘내 가족은 너 하나뿐이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일까.

검은 그림자가 말간 웃음을 짓는 모습이 흐릿하게 머릿속을 물들였다.

‘고마워, 린.’

그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세상이 뒤집혔다. 시야를 가득 메우던 포근한 검은색이 차츰 다른 빛으로 물들었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핏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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