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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린이 속으로 칼을 갈며 이드리스의 손을 잡았을 때. 에드윈은 곡의 끝을 알리는 음이 울려 퍼지자마자 아네트에게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났다.
“클로비스 공?”
아네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애매하게 허공에 떠 있던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에드윈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쯤이면 폐하께서도 질책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태도는 정중했으나 실상은 답변을 빙자한 통보였다. 아네트는 처음에는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예. 오늘 감사했습니다, 공.”
가볍게 치맛자락을 쥔 그녀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작별을 고했다.
에드윈은 그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화답해 준 뒤 연회장 가장자리 쪽으로 움직였다. 그가 인파의 틈으로 발을 내딛자 사람들은 화색을 띠며 말을 붙이려 했다.
“공.......”
하지만 싸늘하게 가라앉은 푸른색 눈과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에드윈은 서늘한 살기를 흩날리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아네트와 춤을 추던 도중 이질적인 소란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을 때부터 그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왕의 반강제적인 명령으로 공주의 파트너 역을 떠맡은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호사가들이야 혀가 잘릴까 두려워 제 앞에서는 입을 닫기 바쁘니까.
하지만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레이린을 향해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본 순간. 지금껏 태연히 유지해 왔던 평정에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
“.......”
급격한 피로감을 느낀 에드윈은 연회에서 아르망을 피해 곧잘 숨어 있곤 하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교묘하게 벗어난 기둥 뒤쪽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어차피 왕의 비위는 충분히 맞춰 주었으니, 이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큰 잡음은 없을 것이었다.
‘아르망은 난리겠지만.’
에드윈이 미미한 한숨을 삼키며 기둥의 그림자로 발을 들이는 순간.
“......클로비스 공?”
누군가의 목소리가 불쑥 그를 맞이했다.
“아.”
에드윈은 드물게도 놀란 음성을 흘리며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러자 기둥의 그림자에 파묻혀 있던 이가 앞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옅은 회청색의 머리카락이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라그나르는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채로 입을 열었다.
“이리 인사드리는 것은 처음이던가요. 라그나르 브리어스입니다.”
말을 마친 그가 짧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중앙과 오래도록 동떨어져 있던 윈프리드의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고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에드윈이 라그나르의 인사에 정중하게 화답했다.
“에드윈 클로비스입니다. 한데 로드 라그나르께서는 어쩐 일로 이런 곳에.......”
그가 의아한 듯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라그나르 브리어스는 오늘 연회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다. 몇백 년 만에 중앙으로 복귀한 윈프리드의 새로운 주인, 그리고 사람을 홀릴 듯 아름다운 외양. 사람들의 한가운데서 쏟아지는 빛을 받고 서 있어도 모자랄 그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에드윈은 의문 어린 눈으로 제 앞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그나르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춤을 추는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라면 무례하다고 생각될 법한 행동이었지만, 상대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에드윈은 이유 모를 기시감에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
푸른 시선의 끝에서, 라그나르는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춤을 추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미려한 얼굴 위로 절반은 빛이, 절반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같은 표정이었지만 빛이 비치는 부분에서는 여유로움이, 어둠이 드리운 부분에서는 위태로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 모순이 왜인지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어디서 본 듯한데.’
에드윈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가 불현듯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저...... 이런 자리가 처음이어서인지 조금 피곤해서요.”
서늘하게 가라앉은 남빛의 눈은 이드리스의 등을 꿰뚫듯 직시하고 있었다.
“자칫하다가 실수라도 해서는 안 될 노릇 아닙니까.”
자그만 중얼거림을 흘린 라그나르가 에드윈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그의 눈에서는 조금 전의 날 선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에드윈은 잠시간 침묵했다. 라그나르는 그가 입을 닫고 있는 사이 차분히 상대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에드윈 클로비스라.......’
그간 보고로야 지겹도록 들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에드윈 클로비스’라는 사람을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명료했다.
‘타고났군.’
그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외모나 능력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분위기.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주한 사람을 압도하는 위압감. 그것은 분명 타고났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의외인 구석도 있었다.
‘한데 로드 라그나르께서는 어쩐 일로 이런 곳에.......’
로드 라그나르.
‘로드’는 본디 영주들이 서로를 지칭할 때만 붙이는 호칭이었다. 하지만 겨우 며칠 전에 영주의 자리에 오른 라그나르에게는 조금 과한 감이 없지 않은 호칭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윈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영주’로 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리감을 두는 것과는 분명 다른 태도였기에, 라그나르는 조금 묘한 기분이 되었다.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 고요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에드윈이 불쑥 입을 열었다. 라그나르는 에드윈을 관찰하던 기색을 능숙하게 감추고는 웃었다.
“예. 말씀하시지요.”
대수롭지 않게 승낙의 말을 내뱉었던 그는,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왜 이제 와 영주가 되신 겁니까.”
“.......”
라그나르는 드물게도 말을 잃었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에드윈은 덤덤하고도 명료한 눈으로 그를 직시하며 입을 움직였다.
“윈프리드가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것을 몰랐을 분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
“한데 어째서 목줄을 자처하시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적막을 대신해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얼굴로 에드윈을 바라보던 라그나르가 돌연 허물없이 미소 지었다.
“지키고 싶어서.”
상대는 분명 경계해야 마땅한 유스티아의 영주였다. 하지만 라그나르는 오늘 하루 중 가장 솔직한 웃음을 내보이며 답했다.
“지키고 싶은 것을 제대로 지키고 싶었으니까요. 단지 그 이유뿐입니다.”
“.......”
“너무 보잘것없어 놀라신 겁니까?”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긴 라그나르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에드윈은 잠시 답을 미룬 채 고개를 돌렸다.
춤을 추는 사람들의 너머. 수많은 색채 속에서도 단번에 시야를 사로잡는 회갈색의 눈과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구태여 말을 나누지 않아도. 마치 본능이 알고 있는 양, 시선이 닿는 곳에는 언제나 그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정말이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감각.
“.......”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난 후. 시선을 제자리로 거둬들인 에드윈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오히려.......”
조각상처럼 무감하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라그나르는 그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닮은 듯 다른 색의 눈이 제각기 상대를 시야에 담아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저자는 어쩌면, 그저 나쁘기만 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