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흘 후. 그 어느 때 보다 파란만장했던 회의가 끝끝내 막을 내렸다.
윈프리드가 몇백여 년 만에 중앙으로 복귀했다는 소식에 온 대륙이 들썩였다. 윈프리드가 헤르기아스를 위해서 내놓은 배상금과 더불어, 새 영주의 미모에 대한 소문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시르나티스의 마지막 날 왕궁에서 열리는 파티의 초대장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결과, 파티가 열리는 당일. 왕궁은 전에 없는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레이린은 연회장에서 멀리 떨어진 제 방에서도 손에 잡힐 듯 느껴지는 소란스러움에 피곤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시녀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그렇게 움직이시면.......”
“아,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던 레이린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정면에 놓인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에 또다시 짜증이 치미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피곤해.’
레이린은 시르나티스의 마지막 날인 오늘, 왕궁에서 닷새간의 노고를 위로하는 의미로 여는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길었던 회의를 마무리하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에게 붙잡혔다.
‘아제트리아 님의 치장을 도우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레이린은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이내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그들을 점잖게 물리려고 했다. 하지만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곤란해진다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그녀는 결국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냐 하고 싶었으나, 구태여 실랑이를 해 가면서까지 그들을 내쫓을 기력도 없었기에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조금 후회하는 중이었다.
‘그냥 아까 내쫓았어야 했나.’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것인지, 레이린의 눈이 점차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다행히 그녀의 가면이 모조리 벗겨지기 직전, 머리를 매만지던 시녀가 손을 떼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끝났습니다.”
“......고마워요.”
영혼 없는 웃음을 흘린 레이린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레이린이 시녀들이 추천한 드레스를 강력히 거부한 탓에, 그들이 마지못해 골라낸 드레스는 언뜻 수수하게도 보일 법한 것이었다. 진한 푸른색의 레이스가 겹겹이 겹쳐지긴 했으나, 허리께에 박힌 보석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장식조차 없는 디자인에 시녀들은 하나같이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막상 치장이 끝나가자 그러한 기색은 눈 녹듯 사라졌다. 외려 드레스를 걸친 이의 분위기와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레이린의 움직임에 맞추어 진한 푸른색의 천이 물결치듯 겹쳐진 드레스가 가볍게 흔들렸다. 엷은 회갈색의 머리카락을 높이 틀어 올려 훤히 드러난 목덜미와 어깨가 눈이 시리도록 희었다. 가느다란 목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자그마한 목걸이가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단정한 분위기를 한층 더해 주었다.
치장 내내 레이린의 눈치를 보기 바쁘던 시녀들은, 어느새 불편해하던 것도 잊은 채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린은 호노라투스에서 선호하는 것처럼, 선하고 여려 보이는 느낌의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붉은 기가 감도는 눈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눈이 어딘지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한편, 레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 일별했다. 어느덧 아르망과 만나야 할 시간이 넘어가고 있음을 확인한 그녀가 자그맣게 한숨을 삼켰다.
‘그냥 방에 있고 싶은데.......’
며칠 내내 윈프리드의 일로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탓에 유달리 기운이 없었다. 평소와 비슷한 상태였더라도 곤욕이었을 텐데, 오늘은 더군다나 윈프리드의 일로 인해 사람이 몇 배나 몰려 있었다. 이렇듯 인내심이 갉아 먹힌 상태로 이드리스의 얼굴이라도 마주했다가는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영주와 그 보좌관들의 파티 참석은 의무였고, 그녀는 아직 첩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결국 최소한의 예의만을 지키고 빠져나오겠다 결심한 레이린이 방문을 열고 복도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익숙한 음성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반겼다.
“이번에는 진짜로 늦었어, 10초.”
방문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아르망이 씨익 웃음 지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평소 부스스하게 흩어져 있던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깔끔히 넘기고, 암녹색 예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퍽 낯설기까지 했다. 레이린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순 거짓말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왠지 나보다 옷이 더 부티 난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다행히 귀 밝은 건 그대로시고.”
“야!”
자그마한 혼잣말을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아르망이 버럭 외치며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레이린은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그에게 가볍게 손짓해 보였다.
“농담이에요. 오늘따라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우시며 부티나 보이십니다, 아르망 선배님.”
“말이나 못 하면. 내가 책을 읽어도 너보다는 감정을 담아서 읽겠다.......”
레이린의 유려하고 무미건조한 칭찬에, 아르망이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양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모습이 꼭 침울한 어린아이의 것만 같아, 레이린은 끝내 푸스스, 웃음을 흘려 버렸다. 불쾌감으로 미미하게 굳어 있던 그녀의 입매가 조금이나마 풀어지며 고운 미소를 그렸다.
그에 불퉁한 기색을 감추지 않던 아르망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표정을 풀며 한숨을 흘렸다. 그가 레이린을 향해 장갑 낀 손을 내밀더니 입을 비죽였다.
“하여간...... 나니까 넘어가 주는 줄 알아.”
“네, 네. 감사합니다.”
레이린은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스스로조차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연회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사이 나쁜 남매처럼 투덕거리다가 어느새 연회장 입구에 다다랐음을 깨닫고는 금세 자세를 바로 했다.
휘황한 금빛 문 앞에 멈춰 선 레이린과 아르망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두 사람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지자, 나름 유하던 그들의 인상이 완전히 뒤바뀌며 묘한 위압감마저 자아냈다.
무표정한 얼굴의 아르망이 입구를 지키던 시종을 향해 말했다.
“입장하겠습니다.”
그러자 문 양쪽에 서 있던 시종들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어 주었다.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길.”
두 사람은 가벼운 눈인사로 그에 호응해 준 뒤 문 너머로 이어진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지간한 저택의 부지만큼이나 드넓은 연회장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해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복잡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부채, 혹은 술잔을 한 손에 든 채 쉼 없이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르망과 레이린이 모습을 드러내자 몇몇은 잠시 계단을 향해 힐긋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들은 곧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연회장 한가운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엷은 회갈색의 눈이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무수한 시선들이 화살처럼 쏟아지는 연회장의 중심. 화려한 샹들리에의 반짝임을 모두 모아 놓은 것처럼 빛나는 청년이 그곳에 서 있었다.
“하하하!”
불콰한 얼굴의 귀족 하나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며 청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사람 아주 재미있는 친구일세! 다음 탄신연 때는 내 저택에도 한 번 들러 주게나.”
“저야 영광이지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청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잔을 기울였다. 쨍, 두 사람의 유리잔이 부딪치며 종소리를 닮은 맑고 높은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청년, 라그나르는 해사하게 눈꼬리를 휘며 제 입가로 잔을 가져가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
계단을 내려오는 레이린의 모습을 발견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그려낸 듯 작위적인 미소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이 남색 눈 한가득 찰랑거렸다.
라그나르는 손에 든 유리잔을 미묘한 각도로 기울여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하고는 그녀를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여기서 나보다 예쁜 건 너밖에 없어.’
티 나지 않게 눈을 찡긋해 보인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 레이린은 웃음을 참기 위해 볼 안쪽을 지그시 깨물어야 했다.
‘참나.......’
그녀는 끝내 참지 못하고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가, 제 주위의 인기척을 인지하고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래도 아르망과 라그나르 덕에 기분이 조금 나아져서인지, 평정을 되찾는 것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레이린은 곧 일전에 안면을 익혀 두었던 귀족, 그리고 그 보좌관들과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누는 데에 집중했다.
파티 초반, 라그나르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쏠려 있던 관심은 차츰 다른 자리를 찾아갔다. 기이하리만치 한쪽에 몰려 있던 열기가 균일하게 분산되니 연회장의 전체적인 공기는 외려 전보다 활기차게 변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오롯한 밤이 찾아오고, 파티의 분위기가 가장 달게 무르익었을 무렵. 웅장한 나팔 소리가 높다란 천장을 커다랗게 울렸다.
“바로크 드 루에이리 폐하, 아네트 드 루에이리 공주님께서 드십니다!”
제각기 이야기에 빠져 있던 이들이 일제히 말을 멈추고 입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언뜻 흰 빛으로 빚어낸 듯 새하얀 인영이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왕, 바로크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빗어넘기고 섬세한 자수가 놓인 흰 털 망토를 입고 있었다. 언뜻 위압감이 서린 표정으로 연회장을 둘러보던 그의 눈이 라그나르를 향한 채 우뚝 멈춰 섰다.
“.......”
하지만 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감하게 시선을 거두어들이고는 계단을 밟았다. 그러자 그의 뒤를 따르던 한 쌍의 남녀가 오롯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를 숙인 채 위쪽을 곁눈질하던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허.......”
흑과 백이라는 글자를 사람의 형태로 빚어낸다면 꼭 저러한 모습이지 않을까. 맞춘 것도 아니었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한 손을 맞잡고 있는 에드윈과 아네트의 모습은 황홀했다.
새까만 예복을 갖춰 입은 흑발의 청년과, 새하얀 드레스를 걸친 백발의 여인. 한순간 오감을 마비시킬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에 얼어붙었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쁘게 수군거렸다.
“공주님께서는 나날이 아름다워지시는 것 같습니다. 올해로 열여덟이 되셨다던가요?”
“유스티아의 영주께서도 사람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예요.”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그건 그렇고 두 분께서 저리 참석하셨다는 건...... 역시 소문이 사실이라는 뜻일까요?”
누군가 흘리듯 중얼거린 물음이 유달리 크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르망의 곁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던 레이린은 덤덤한 얼굴로 제 발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이 연회장 한쪽에 놓인 왕좌 앞에 서자 사람들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레이린은 정면에 서 있는 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낮은 단상 위로 올라선 바로크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또 이러네.’
혹시나 했지만, 왕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드는 것은 여전했다.
‘......돌아가자마자 도서관에 들러야겠어.’
레이린은 신의 분노 이전의 기록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무엇도 속단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애써 표정을 풀었다.
시종에게서 은 술잔을 건네받은 왕이 잔을 들어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닷새간 수고한 모든 이들을 위해 건배하지. 헤르기아스에 영광을!”
“영광을!”
장엄한 외침이 연회장을 크게 울렸다. 사람들은 각자 손에 들고 있던 잔, 또는 부채를 들어 올리며 본격적인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은잔에 담겨 있던 술을 한 번에 들이켠 왕이 시종에게 빈 잔을 건네며 말했다.
“오늘의 첫 춤은 클로비스 공과 공주에게 맡기겠네. 짐은 좀 쉬어야겠어.”
그가 옥좌에 앉으며 옆쪽으로 물러나 있던 아네트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시작해라.”
명령 같은 말에 움찔 어깨를 떤 아네트가 에드윈의 손을 보일 듯 말듯 잡아당기며 웃었다.
“가실까요?”
“.......”
새파란 눈이 잠잠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에드윈의 입은 답을 흘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그저 굳게 닫혀 있었다.
“공?”
아네트는 살짝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며 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아당겼다. 에드윈은 그제야 그녀를 따라 연회장 가운데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며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에드윈과 아네트가 동그랗게 비어 있는 연회장의 가운데에 마주 보고 섰다. 왕의 눈짓에 따라 잔잔한 춤곡이 시작되고, 가볍게 예를 표한 두 사람은 매끄럽게 춤을 이어 갔다. 사람들은 한동안 그 그림 같은 광경을 감상하다가, 이내 서서히 음악이 바뀌어 가자 하나둘 춤을 추는 무리에 합류했다.
레이린과 함께 한 쪽으로 물러나 있던 아르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출래?”
사람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레이린이 그 말에 퍼뜩 고개를 저었다.
“......아뇨. 피곤해요.”
“그래? 그럼 나도 여기 있지 뭐.”
아르망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손을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연녹색 눈동자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레이린은 픽 웃음을 흘리고는 그의 등을 떠밀었다.
“됐습니다. 선배님은 춤추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전 여기 있을 테니까 다녀오세요.”
“그래도.......”
“어서요.”
레이린이 연달아 독촉하자, 결국 아르망은 많이 피곤하면 슬쩍 빠져나가라는 말을 속삭이고는 사람들의 틈으로 섞여들었다.
화려한 불빛 아래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옷자락이 물결처럼 흔들리며 화사한 빛을 흩뿌렸다.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낯설기 그지없는 풍경인지라. 레이린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
머리를 비우려 해도 시선은 자꾸만 한 사람을 쫓아 움직이려 했다. 그 괴리에서 찾아오는 짙은 피로감에, 레이린은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
‘......이만 돌아갈까.’
같은 공간에 있지 않으면 좀 나아지려나. 그런 실없는 기대를 품은 그녀가 벽에서 등을 떼는 찰나.
“한 곡 추시겠습니까, 레이디.”
뱀 같은 웃음으로,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레이린을 향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만.”
한순간 그대로 굳어졌던 레이린은 황급히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녀는 이곳이 사람들로 득시글한, 그것도 왕궁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곳임을 잊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바로 다음 순간 무산되었다.
“제게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얼굴이시기에. 게다가.......”
이드리스는 일부러 말끝을 늘이며 제 뒤쪽을 힐긋 일별했다. 춤을 추는 무리에 섞이지 않고 물러나 있던 이들은 아닌 척 눈을 빛내며 그들을 힐긋거리고 있었다. 먹잇감을 찾아 바쁘게 주위를 살피는 승냥이 떼와 소름 끼치도록 흡사한 모습. 그는 굳어진 레이린을 향해 보란 듯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맺었다.
“이 상황에서 나를 거절했다간.”
“.......”
“동이 틀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건 알고 있겠지.”
빌어먹을 새끼. 레이린은 속으로 거친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입술을 세게 당겨 물었다.
역겹게도 이드리스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그는 속내야 독사보다도 징그러운 작자라지만 겉보기에는 반지르르한 얼굴과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혼의 젊은 영주라는 직위, 거기에 만개한 장미꽃처럼 화사한 외양. 더불어 에드윈과는 정반대로 모두에게 친절하며 상냥한 언변과 예의 바른 태도까지. 객관적으로 ‘영주’ 이드리스 프리조프는 귀족 대부분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낯선 여인을 향해 손을 내밀며 첫 춤을 청하는 모습. 그 흥미로운 상황에, 사람들은 레이린의 행동 하나하나를 조각내어 해부할 듯 주시하고 있었다.
이드리스의 춤 신청을 받아들인다면 그저 업무상의 안면 때문이었다는 핑계로 넘길 수는 있겠지만, 거절한다면 그 즉시 낱낱이 파헤쳐져 물어뜯길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 상황을 레이린 자신보다 힘들어할 사람이 이곳에 함께 있었다.
“.......”
레이린은 제 옆얼굴에 닿아 오는 시선을 느끼고는 힐긋 눈을 돌렸다. 춤을 추는 사람들의 저편. 움직임조차 멈춘 라그나르가 당장에라도 이드리스를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키안이 애써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려 노력하고 있었으나, 몇몇은 라그나르의 심상찮은 기색을 눈치챈 듯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기랄.’
레이린은 결국 속으로 칼을 갈며 이드리스의 손을 맞잡았다.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아제트리아 양.”
속이 뒤집힐 만큼 유려한 미소를 지어 보인 그가 그녀를 이끌어 춤을 추는 무리에 합류했다. 잠시 곡이 멈춘 틈을 타,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이드리스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사람들 사이에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이 서로의 허리와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레이린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드리스의 어깨에 지그시 손톱을 박아 넣으며 웃었다.
“차라리 당장 죽고 싶다고 솔직히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는데.”
“그럴 리가. 난 아주 오래오래 살아남고 싶은 몸이거든.”
하지만 그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길 뿐이었다. 레이린은 그 반응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구겼다가, 이내 한숨을 삼키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괜한 실랑이로 이드리스의 얼굴을 보아야 하는 시간을 늘릴 바에는, 차라리 빠르게 춤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피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이따위 작자에게 제 감정을 추호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것이 분노나 살의일지라도.
‘......어차피 지금은 낭비할 여력도 없지만.’
레이린은 곧 무표정한 얼굴로 이드리스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그녀가 춤을 춰 본 일이라고는 윈프리드를 떠나기 전 몇 가지 사교 예절을 속성으로 배웠을 때가 다였다. 그러니 사실상 지금이 첫 실전인 셈이었다.
그럼에도 타고난 반사 신경이나 몸놀림이 워낙 탁월했기에, 그녀는 나름 괜찮다는 평을 받을 정도의 춤을 이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드리스의 움직임은 애초에 차원이 달랐다. 레이린은 춤을 추는 내내 무던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내심 경악했다.
‘무슨.’
이드리스는 그야말로 능수능란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릴 만큼 춤 실력이 뛰어났다. 본인의 실력과 별개로, 상대적으로 실력이 부족한 파트너까지 뛰어난 듯 보이게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드리스는 미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왔다.
레이린은 이드리스를 경멸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조금 기묘한 심정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밝은 조명 아래 반짝이는 사람들의 사이에 위화감 없이 섞여 있는 제 모습이 참 낯설었지만. 동시에 이유 모를 위안이 찾아들었다.
‘......이런 것도 한 번쯤은 나쁘지 않을지도.’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는 순간. 절대로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푸른색에 그대로 시선을 붙들렸다.
“.......”
시간이 느려진 것만 같은 감각 속. 레이린과 에드윈은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헤매지 않고 정확히 서로를 직시했다. 엷은 회갈색의 눈과 짙은 푸른색의 눈은 상대의 속을 낱낱이 파고들고자 하는 듯 집요했으나 소용은 없었다.
억겁 같던 찰나가 지나고, 입을 맞추는 양 진득하게 엉겨 붙었던 시선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떨어져 나갔다. 사람들 속에 서 있던 에드윈의 모습이 인파에 쓸려 사라졌다.
잠시 알 수 없는 감각에 사로잡혔던 레이린은 눈을 몇 번 깜박여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직후, 귓가를 파고든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굳혔다.
“설마 했는데. 이미 마음을 내어 주기라도 한 겁니까?”
“......뭐?”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살기 어린 목소리를 흘리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드리스가 의뭉스러운 웃음을 띠고는 속삭였다.
“저 얼음장 같은 자가 그런 눈을 하는 건 처음 봐서 말이야.”
주홍빛 눈이 힐긋 제 어깨 너머를 향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멍청했어.’
레이린은 낯선 감정에 사로잡혀 이드리스가 저를 관찰하고 있었음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자신을 질책했다.
낭패감을 익숙하게 목 안으로 욱여넣은 그녀가 사납게 입매를 뒤틀었다.
“헛소리 집어치우시죠. 한 번만 더 그런 오해를 하신다면 저를 모욕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말에 이드리스가 무언가 답하려는 듯 입을 움직이는 순간 음악이 끝났다. 레이린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쳤다. 한 걸음 뒷걸음질 친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예를 취했다.
“자세한 사항에 대한 것은 제 주인과 함께 이야기 나누도록 하지요. 그럼.”
부디 살펴 가시길.
레이린은 흠잡을 곳 없는 미소로 말을 맺은 후 재빠르게 몸을 돌려 연회장을 벗어났다. 내내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은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업무 이야기였나 보군.”
“그렇다면 안심해도 되지 않겠는가?”
“시시하게 되었어.”
자그맣게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이내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아 움직였다.
한편, 이드리스는 레이린이 사라진 방향을 망연하게 응시하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당했군.’
그녀가 티끌만 한 여지조차 말끔히 잘라 내고 사라진 탓에, 함부로 따라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뭐. 어차피 필요한 정보는 얻었으니 상관은 없지만.’
이드리스는 연회장 저편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움이 담긴 비소를 머금었다.
그때, 그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닿아 왔다.
“이드리스.”
그에 이드리스는 한결 짙은 웃음을 띤 채 천천히, 동시에 우아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부드럽게 눈매를 휜 그가 상체를 숙이자 남빛의 긴 머리카락도 사르르 흘러내렸다.
“찾으셨습니까, 폐하.”
눈송이가 내려앉은 듯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
“잠시 이야기 좀 하지.”
바로크 드 루에이리가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