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정신없던 회의가 끝난 후.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인가.......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아르망은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홀린 얼굴을 한 채 터덜터덜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와는 조금 다른 이유로 넋을 놓고 있던 레이린은 등 뒤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서야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이성을 되찾자마자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기억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엷은 회갈색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기다란 커튼에 반쯤 가려져 있는 유리문을 빤히 응시하던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벌컥!
흰 손이 묵직한 벨벳 커튼을 홱 걷어 내고는 유리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서늘한 밤공기가 훅 밀려 들어오자 긴 머리카락이 물결을 그리며 흩날렸다.
네모난 유리문과 이어져 있는 작은 발코니는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레이린은 문을 붙잡고 있는 손을 물리지 않은 채 물끄러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직후.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나와 있어.”
그녀의 기다림에 화답하듯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막한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던 발코니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몸을 일으킨 청년이 레이린을 향해 한 발 다가왔다.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주술석의 빛이 짙은 남색의 눈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싱긋 미소 지어 보인 라그나르가 그대로 레이린을 끌어안았다. 긴 머리카락에 깊숙이 얼굴을 묻은 그가 거짓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고 싶었어, 린.”
“.......”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그는 한숨이 뒤섞인 말을 내뱉으며 레이린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레이린은 본래 제게 일언반구도 없이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에 대한 질책부터 내뱉을 생각이었다. 회의장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라그나르가 자기 자신을 영주라 소개했음에 얼마나 당황스러웠던가. 그녀는 그의 혈연이기 이전에 녹스의 간부로서, 자신을 배제한 채 멋대로 일을 벌인 수장을 추궁할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늘 여유롭던 그의 목소리에서 언뜻 지친 기색이 묻어남을 깨닫는 순간. 목구멍을 가득 메우고 있던 가시 돋친 말들은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결국, 미미한 한숨을 삼켜낸 레이린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내 라그나르의 등을 양팔로 단단히 감싸 안은 그녀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나도.”
서늘한 밤공기로 식어 있던 온몸이 맞닿은 이의 온기로 서서히 녹아내렸다.
“많이 보고 싶었어, 오빠.”
그제야 비로소, 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몇 시간 전.
“윈프리드의 새 영주가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느닷없이 회의장에 난입한 라그나르는 여유로운 자태로 허리를 굽히며 싱긋 웃음 지었다. 불그스름한 눈매가 야살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보란 듯 휘어졌다. 연한 회청색 머리카락, 짙은 남색의 눈,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고운 이목구비까지. 그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지니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뜻밖의 상황과 더불어, 제 눈을 의심케 하는 그의 미모에 잠시간 넋을 놓았던 사람들은 뒤늦게 경악했다.
“윈, 윈프리드......!”
“경비병! 경비병들은 대체 무얼 하는 건가!”
유리엔이 천둥처럼 소리를 내지르고,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하는 사람들의 눈에 날 선 적의가 깃드는 찰나.
“아, 제 미모에 놀라신 탓에 미처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제 불찰이니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순수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천진한 목소리가 소란을 일시에 잘라 냈다.
“그제 부로 윈프리드의 영주가 된 라그나르 브리어스라고 합니다.”
라그나르는 제 귀를 의심하며 서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한 사람.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왕만을 직시하며 입꼬리를 길게 끌어당겼다.
“윈프리드의 새 영주로서, 폐하의 인가를 청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 한마디가 왕의 분노를 흥미로 바꾸었다.
한 도시의 영주가 이렇듯 왕의 앞에 직접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늘 경시당하던 왕가의 권위를 바로 세울 기회. 그 달콤한 단어가 왕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어느새 너그러운 얼굴을 한 왕은 암묵적인 동의를 내비치듯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괸 채 침묵했다. 그러자 라그나르는 태연한 기색으로 회의실의 모든 사람을 향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서 사람들의 눈에는 적의 대신 의심이, 의심 대신 경악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라그나르가 내뱉은 말은, 자그마치 몇백 년 동안 윈프리드가 아등바등 쌓아온 것들을 송두리째 무너트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백 년의 과오가 모두 저 하나의 것은 아니라 한들, 제게도 제 소유가 아닌 것들로 목숨을 연명해 온 것에 대한 죄가 있습니다.”
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죄를 읊조리는 라그나르의 눈꺼풀이 보일 듯 말 듯 파르르 떨렸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일로 인해 힘겹게 목숨을 연명해 온 것조차 이곳에서는 죄가 된다는 말. 그 말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숙연한 기색을 내비쳤다.
교묘한 말로 사람들의 속을 흔들어 놓은 라그나르는 왕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니 가시나무숲의 마물을 토벌해 쌓은 부의 절반을 제외한 모든 것을 헤르기아스를 위해 바치겠습니다.”
충격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파격적인 발언에, 왕은 전에 없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왕은 한참 동안 고개를 젖히고 호탕한 웃음소리를 냈다. 늘 주름 잡혀 있던 미간이 드물게도 펴진 모습에 놀란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던 그는 이내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썩은 진흙 속에 이런 보석이 숨어 있었음을 진즉 알지 못했던 세월이 한탄스럽군.”
다정함과 신랄함이 뒤섞인 말을 내뱉은 그가 오만하게 라그나르를 내려다보았다.
“3할. 3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왕가에 넘긴다는 조건으로, 너의 영주 직위를 인정하겠다.”
날강도나 다름없는 그 요구에 에드윈과 릴리트, 유리엔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그러나 라그나르는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태연한 답을 흘렸다.
“헤르기아스를 위해서라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왕가’가 아닌 ‘헤르기아스’를 지칭하는 말에 왕의 입가가 알게 모르게 굳어졌다. 연하늘색의 눈이 매섭게 번득이며 제 맞은편에 선, 새파랗게 어린 나이의 청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라그나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말간 얼굴을 한 채 겸허히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착각인가.’
마물 토벌으로 벌어들인 돈의 3할을 제외한 윈프리드의 모든 재산이라니.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인지라 왕은 본능처럼 그 돈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 했지만, 라그나르의 우연찮은 말실수로 인해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왕은 이 이상 적나라한 탐욕을 내비쳤다가는 자칫 영주들의 반발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작게 혀를 찼다. 이윽고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자애로운 미소로 선언했다.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로서.”
새하얀 머리카락이 창 너머에서 비쳐든 햇살에 신성한 빛으로 반짝였다.
“나 바로크 드 루에이리는 라그나르 브리어스를 윈프리드의 영주로 임명하겠다.”
그것은 어쩌면 누군가가 간절히 바랐을 말이었다.
한동안 서로를 안은 채 가만히 안정을 찾던 레이린과 라그나르는, 처량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후에야 팔에 힘을 풀었다.
“아가씨, 저는 이제 보이지도 않으시는 겁니까......?”
라그나르의 뒤쪽에 물러나 있던 키안이 기다리다 못해 울상을 지었다. 뒤늦게 그의 존재를 깨달은 레이린이 미안한 얼굴로 라그나르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어냈다.
“아니, 키안. 그게 아니라.......”
하지만 그때, 돌아서는 그녀의 어깨를 오른팔로 감싸 안은 라그나르가 심술궂은 미소를 흘렸다.
“기왕 보이지도 않는 거, 위층으로 신속 정확하게 꺼져 주면 더 좋겠는데. 오랜만에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가질 예정이라.”
그러자 키안은 신속 정확하게 레이린에게 하소연했다.
“아가씨, 전 서러워서 못 살겠습니다. 앞으로 제 사표가 수리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그건 수장님 탓입니다.”
“야!”
라그나르는 저도 모르게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쓸데없이 맑은 고함이 밤하늘을 울리며 퍼져 나갔다. 그에 이곳이 바깥이라는 사실을 퍼뜩 자각한 레이린이 두 사람의 팔을 다급히 잡아끌었다.
“둘 다 뭐하는 거야, 지금! 경비병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녀는 소리 죽인 질책을 내뱉으며 두 사람을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라그나르와 키안을 긴 의자에 떠밀듯 앉힌 레이린이 재빠르게 유리문을 닫고는 틈 없이 커튼을 쳤다. 두꺼운 커튼이 방 안의 풍경을 완전히 가리고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잇새로 엷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등 뒤에서 의미심장하게 시선을 주고받던 라그나르와 키안은, 레이린이 등을 돌리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딴청을 피웠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라그나르와 키안의 모습에 반가웠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졌다. 이성을 되찾은 레이린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표정을 굳혔다.
“그보다, 두 사람 다 나한테 할 말이 있을 텐데.”
차가운 목소리에 라그나르와 키안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레이린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턱을 까딱였다.
“해명해 봐.”
엷은 회갈색의 눈이 흡사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처럼 번득였다. 그 시선에, 라그나르와 키안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눈싸움을 하듯 눈을 부릅뜬 채 상대를 노려보았다.
‘네가 설명해.’
‘이게 제 탓입니까? 수장님 탓이지. 전 분명 말렸습니다.’
7년의 정 아닌 정을 기반으로 한 눈빛 대화는 빠르고 살벌했다.
결국, 먼저 시선을 거둔 것은 라그나르였다. 깊은 한숨을 삼킨 그는 고개를 돌려 머뭇머뭇 레이린을 마주 보았다.
“린.”
평소와 달리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낸 그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의지와는 달리 절로 말끝이 흐려지며 목이 덜컥 메어 왔다. 수십 가지의 이야기와 감정이 목구멍을 그득히 메운 채 소란스럽게 출렁였다. 하지만 그것들은 차마 레이린의 앞에 꺼내 놓을 수 없는 것들인지라.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는 끝내 변명 같은 한마디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흔하고 진부한 말.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존재 이유이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말.
“.......”
라그나르가 내어놓은 마음의 무게만큼 묵직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레이린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로 말이 없었다. 엷은 회갈색의 눈은 차마 그 너머를 들여다보기가 겁날 만큼 잔잔했다. 이따금 자그맣게 팔랑이며 움직이는 속눈썹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조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고요한 모습이었다.
그에 때늦은 두려움이 덜컥 엄습했다.
‘멍청한 놈.’
라그나르는 속으로 자기 자신을 향해 험한 욕을 퍼부었다. 아무리 무의식중에 내뱉어 버린 것이라지만, 이것은 레이린이 요구한 해명, 혹은 사과조차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잠시 옛 기억과 감정에 잠겨 넋을 놓아 버렸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설명을, 아니, 사과를 해야.......’
한 발자국 늦게 상념에서 빠져나온 라그나르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닫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후회 그득한 얼굴의 그가 레이린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요량으로 몸을 일으키던 차.
“미안해.”
슬프게 가라앉은 방 안의 공기만큼이나 담담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뭐?”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춘 라그나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마치 과거의 어느 순간을 되풀이하듯.
“내가 미안해.”
눈물 없이 울고 있는 레이린의 눈이, 시야에 들어와서.
“.......”
라그나르와 키안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굳어진 사이. 레이린은 시리도록 차분한 얼굴로 희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말해 주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 없어.”
“.......”
“이미 알고 있으니까.”
라그나르가 갑작스럽게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레이린은 제게 말 한마디 없이 윈프리드를 중앙으로 되돌리겠다고 말하는 그의 행동에 당황했고, 분노했다. 그 감정은 분명 진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심장을 그대로 잡아 뜯는 듯한 통증 또한 진실이었다. 그간 왕가라는 말만 꺼내면 이상하리만치 치를 떨던 라그나르 브리어스가.
‘윈프리드의 새 영주로서, 폐하의 인가를 청하기 위해 왔습니다.’
왕과 영주들의 앞에서 치욕스러울 만큼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애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수백 년의 과오가 모두 저 하나의 것은 아니라 한들, 제게도 제 소유가 아닌 것들로 목숨을 연명해 온 것에 대한 죄가 있습니다.’
끝내는 제 선택이 아니었던 삶마저 죄라며 덤덤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그 모든 이유의 중심에, 레이린 브리어스 자신이 있다는 것에. 죄스러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레이린은 그간 라그나르가 저를 보며 심장이라도 꺼내어 줄 것처럼 굴 때마다 민망하다며 그를 곧잘 타박하곤 했다.
하지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 선연한 애정을, 희생을, 마음을, 사랑을. 대체 어떻게.......
“미안해.”
서글피 웃는 레이린의 눈에서 끝내 눈물 한 방울이 툭, 굴러떨어졌다.
“내가.......”
내가 늘 짐이라서.
그녀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 말을 토해 내기 직전. 순식간에 레이린의 앞까지 다가온 라그나르가 다급하게 팔을 뻗었다.
“아니야, 린. 아니야.”
그는 아니라는 말을 빠르게 반복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이 엷은 회갈색의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쓰다듬었다.
라그나르의 품에 얼굴을 묻은 레이린의 귓가로 낮은 중얼거림이 파고들었다.
“내가 전부터 계속 말했지? 나는 너한테서 받은 것들을 갚는 거라고.”
한없이 따스한 말들이 그녀의 위로 속삭이듯 내려앉았다.
“네가 나를 살렸어.”
“윽.......”
“네가 나를 살렸고,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버티게 해 줬어.”
라그나르는 결국 억눌린 흐느낌을 토해 내는 레이린을 품 안 깊숙이 끌어안았다. 행여나 놓칠세라, 두려워하듯이.
“나는 네게 받은 것들을 돌려주는 것뿐이야.”
거짓 한 점 없는 진심을 마지막으로, 라그나르는 가만히 레이린의 등을 토닥였다. 그 다정한 손길이 그녀를 더욱 슬프게 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