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87)

* * *

어둑한 하늘에 맞춘 것처럼 스산한 피비린내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윈프리드 중심부에 자리 잡은 화려한 저택의 정문에서부터 핏자국이 길게 늘어졌다.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안으로 이어지는 핏물의 주위로는 기괴한 자세로 널브러진 시체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1층 한가운데에 자그마한 둔덕을 이루며 쌓여 있는 시체 더미의 위. 어둠 속에서도 희붐하게 빛나는 외모의 청년이 걸터앉아 있었다.

“위층 정리는?”

볼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낸 라그나르가 빙긋 웃었다. 옅은 회청색의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묻어 있는 피로 인해 노을이 번진 것처럼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자 그와 마찬가지로 피 칠갑을 한 키안이 한숨을 내쉬며 계단을 내려왔다.

“끝났습니다. 애들 불러서 치우라고 할까요?”

“그래. 여기가 마지막이던가?”

“예. 9번째이자 마지막 길드였습니다.”

계단 아래에 내려선 키안은 라그나르의 아래에 쌓여 있는 시체 더미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래도 처음처럼 분풀이는 안 하신 모양이군.’

키안은 제 예상보다는 멀쩡한 모습에 가까운 시신들을 확인하고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들은 지금 윈프리드에 존재하는, 나름 허우대 멀쩡한 길드를 9개째 무너트리는 중이었다.

첫 번째 길드를 습격할 때의 라그나르는 이상하리만치 날이 서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시체 중에서는 사지가 온전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길드가 궤멸한 후 뒷정리를 맡은 녹스 길드원들 다수가 헛구역질을 참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지금은 퍽 양호하다고 해야 하려나.

키안은 시체 더미 위에 태평한 얼굴로 걸터앉아 있는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물었다.

“수장님.”

“왜. 그보다 목소리 깔지 마라, 소름 돋으니까.”

“저 질문 하나만 해도 됩니까?”

“아니.”

“아니, 제발 좀! 저 지금 진지하거든요?”

드물게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키안이 금세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발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그나르는 심드렁한 기색으로 혀를 끌끌 찼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네. 잔소리만 해대는 저 입부터 치워 버려야 했는데.”

“아가씨께 이를 겁니다.”

“물어볼 게 뭔데?”

순식간에 말을 바꾼 라그나르는 삐딱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고치는 것과 동시에 양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 자세를 취했다. 갑작스럽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빠른 태도 전환이었다. 라그나르가 레이린의 이야기만 나오면 얼빠진 푼수가 된다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 않았다면 분명 헛웃음을 흘렸으리라.

키안은 자꾸만 입술 새로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애써 감추며 헛기침을 했다. 이내 ‘진지하고 명석하고 유능한 비서’의 얼굴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 그가 조용한 물음을 던졌다.

“대체 왜 갑자기 영주를 자처하시겠다는 겁니까?”

“.......”

내내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라그나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허공으로 올라가 있던 그의 양손이 느릿하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시리도록 무표정한 얼굴의 그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굳어 버릴 것처럼 싸늘한 남색 눈.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즉 뒷걸음질을 치고도 남았을 정도로 서늘한 기세가 스멀스멀 공기를 장악했다.

하지만 이것이 라그나르의 ‘평소’ 얼굴인 것을 알고 있는 키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레이린이 안톤의 배신으로 위험에 처한 사실을 알고, 유스티아로 미친 듯 달려가서 그녀의 무사함을 확인했던 날. 라그나르는 키안과 함께 윈프리드로 복귀하던 중 불쑥 입을 열었다.

‘당분간 린 얼굴 보기는 힘들겠지?’

‘뭐, 아무래도 아가씨께서는 지금 녹스와 아주 조금의 연관이라도 있다는 게 드러나면 곤란한 신분이시니까.......’

‘그러면 이참에 영주나 한번 해 볼까.’

‘예?’

키안은 하마터면 말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몸은 무사했으나 심장은 확실히 떨어져 내린 듯했다. 간신히 중심을 잃지 않은 키안이 대경하며 소리쳤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내가 내 동생 당당하게 보러 가겠다는데 왜 네가 지랄이야? 시끄럽게 굴지 말고 물갈이할 준비나 해.’

‘아니 뭐 이런 미친......!’

키안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가 어디 상관에게 욕을 지껄이냐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았다. 그러나 라그나르에게 얻어맞은 것보다도 그가 내뱉은 말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 뒤로도 키안은 필사적이었다.

‘수장님, 정말 미치셨습니까?’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어디다 대고 소리를 질러?’

‘도대체 이게 무슨...... 마물이 풀 뜯어 먹는 소리랑 뭐가 다릅니까!’

‘너 지금 마물 무시하냐? 걔네도 정 배고프면 풀 뜯어 먹을 수도 있는 거야.’

‘저 진짜 사표 쓸 겁니다! 이번엔 진짜라고요!’

‘그러든가. 안 말려.’

라그나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사정하던 그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아가씨한테 말도 없이 이런 대형 사고를 치시고 뒷감당할 자신은 있으십니까?’

하지만 키안의 예상과는 달리, 라그나르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레이린의 이름을 들먹였음에도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키안은 그제야 그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윈프리드로 돌아온 직후, 라그나르는 녹스의 길드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통보했다.

‘나는 윈프리드의 영주가 될 거다. 따르지 않겠다면 떠나도 좋아.’

앞뒤를 모두 잘라먹은 일방적인 선언을 들은 녹스의 간부, 길드원들은 처음엔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그간 여러 번의 소란을 거치며 뒷공작을 일삼는 자들을 쳐낸 후였기에, 현재 녹스에 남아 있는 길드원들은 대부분 라그나르를 어느 정도 존경하는 자들이었다.

라그나르는 무심한 눈길로 길드원들을 둘러 보더니, 이내 나직이 덧붙였다.

‘하지만 잘 생각해 봐라. 정말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지.’

그 말에 길드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침묵했다.

헤르기아스의 오점, 신에게 버림받아 마땅한 쓰레기. 그들은 늘 그렇게 불리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오롯한 자기 자신의 의지만으로 윈프리드에 발을 들인 이는 없었다.

‘평범하고 떳떳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몇몇 간부와 길드원을 제외하고는 라그나르를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후 라그나르는 윈프리드 내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9개의 길드를 궤멸시키고, 여타 길드 또한 절반 가까이 갈아 치웠다. 키안은 그런 라그나르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하지만 여전히 납득하지는 못했다. 왜 모든 것을 손에 쥔 지금에 와서야 허수아비 왕의 개를 자처하는 것인지.

이유를 물을 때마다 라그나르는 ‘내 동생을 당당하게 보러 가기 위해서’라는 답만 미친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하지만 키안은 라그나르가 정말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데릭이라는 소년을 이용해 레이린을 인질로 잡으려 했던 간부의 목을 꺾고, 별채 가득 깔린 살수들을 헤치며 필사적으로 나아 가던 라그나르의 눈. 그 눈은 결코 미친 사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여 한 번 더 묻고 싶었다.

“제가 수장님을 따른 지도 벌써 7년이 지났습니다.”

키안은 덤덤한 눈으로 라그나르를 바라보았다.

그날, 길드원들을 도륙하던 라그나르의 능력에 홀린 듯 비서를 자처한 지도 벌써 7년이었다. 라그나르는 레이린이 곁에 있을 때는 얌전한 미친놈, 그 반대일 때는 그냥 미친놈처럼 행동하는 탓에 레이린조차 그 속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키안은 제가 보았던, 메마른 눈으로 괴로워하던 라그나르를 기억했다.

“아가씨를 당당하게 만나러 가시겠다는 이유도 완전한 거짓은 아니겠죠.”

“.......”

“하지만 정말 그것뿐입니까?”

차분한 목소리가 피비린내 자욱한 허공으로 아스라이 흩어졌다. 이윽고 굳어진 얼굴로 키안을 내려다보던 라그나르가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저택의 문 너머로, 먹구름이 낀 듯 흐린 하늘을 응시하던 그가 낮게 말했다.

“키안 에레즈.”

“예.”

“너는 지금의 윈프리드가 누리는 권세가 영원하다 생각하나?”

“.......”

키안은 그 질문에 섣불리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현재의 윈프리드는 암흑가의 지배자이자, 어쩌면 허울뿐인 귀족보다도 더한 권력과 재력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한가 묻는다면.......

“우리가 쥐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저 위에 있는 자들이 ‘허락한’ 것들에 불과해.”

답은 ‘아니다’였다.

라그나르는 더없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가차 없이 말을 이었다.

“실세? 누군가 마음을 바꾸면 당장에라도 버려질 수 있는 처지를 실세라고 부르지는 않지.”

“.......”

“그게 지금의 윈프리드고, 녹스고, 우리인 동시에 레이린이다.”

라그나르는 문드러진 속을 남김없이 씹어 뱉어내는 양, 한 글자 한 글자 으르렁대듯 말했다. 늘 버석한 얼굴로 웃음 짓던 레이린을 떠올린 키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트렸다.

“나는 레이린을 계속 이런 곳에 둘 생각이 없어.”

무겁게 숨을 들이켠 라그나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어떻게 그녀를 이리도 더럽고 추악한 곳에 둘 수가 있나. 목숨보다도 소중한, 차마 닳을까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운. 어쩌면 자신의 전부이자 모든 것인 그녀를 위해서, 그는.

“그러니 나는 윈프리드의 ‘정당한’ 주인이 될 거다.”

설령 세상을 뒤바꾸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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