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날. 유스티아 일행은 사람들의 무수한 감사 인사를 뒤로하고 호노라투스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마을로 들어올 때 보다 눈에 띄게 침잠한 분위기였다. 그 이유는 주위 사람들마저 숨이 막힐 정도로 싸한 분위기를 내뿜는 에드윈과 레이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누구 하나를 베어 넘길 것처럼 심기 불편한 얼굴의 그들에게 살갑게 말을 붙일 만큼 간이 큰 이는 없었다. 이럴 때면 꼭 나서서 설치곤 하던 아르망마저 모른 척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돌려버릴 정도였다.
일행은 그렇게 미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묵묵히 이동했다. 그리고 며칠 후, 마침내 수도인 호노라투스에 다다랐다.
견고한 성벽 위에서 따분하게 눈을 비비던 경비병이 성문으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퍼뜩 자세를 바로 했다. 잔뜩 늘어져 있던 조금 전과 달리 어깨에 뻣뻣이 힘을 준 그가 으스대듯 말했다.
“신분과 방문 목적을.......”
“여십시오.”
하지만 서늘히 가라앉은 얼굴의 에드윈이 단칼에 그의 허세를 잘라 냈다. 낮지만 선명한 목소리는 군더더기 없는 공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흐트러진 흑발 아래의 새파란 눈은 목덜미가 서늘해질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뭐 저딴.......”
한순간 얼굴을 팍 일그러트리던 경비병은, 일행의 머리 위로 펄럭이는 황금색 장미 문양 깃발을 발견하고는 입을 떡 벌렸다.
유스티아의 상징인 황금색 장미. 그리고 일행의 가장 앞에 자리한, 흑발에 청안의 청년. 뒤늦게 에드윈의 정체를 눈치챈 그가 허둥지둥 몸을 돌리며 고함쳤다.
“서, 성문을 열어라!”
이윽고 거대한 성문이 묵직한 울림을 만들어 내며 서서히 벌어졌다. 에드윈은 성문에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틈이 생기자마자 곧장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거대한 흑마는 그림자처럼 성문을 지나쳐 대로를 빠르게 내달렸다. 시르나티스를 위해 대로에 사람의 출입을 제한해 놓은 덕에, 마을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한 왕궁까지 다다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드윈과 레이린을 태운 말이 성벽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경비병들이 활짝 열어 놓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에드윈은 왕궁의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능숙하게 말을 멈춰 세웠다. 그동안 말없이 침묵하고 있던 레이린은 덤덤한 얼굴로 말에서 내리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에드윈은 아직도 자신이 알라기스들 앞에 나선 일에 대한 분노를 풀지 않은 것인지, 이곳까지 오는 내내 별다른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무겁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당신은 내 사람이라고 했던 말.’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형형하게 빛나던 눈으로 당부한 말에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마자 그 믿음을 배반했다. 굳이 에드윈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분노할 만한 일이 아닌가.
하여 레이린은 그가 손을 뻗기를 기다리지 않고 홀로 땅으로 내려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면을 향하던 몸을 비트는 것과 동시에, 오른쪽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가만히.”
레이린은 제 목덜미 위로 흩어지는 더운 숨결에 반사적으로 굳어졌다. 그 틈을 타 땅으로 훌쩍 내려선 에드윈이 레이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
그녀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짙고 깊은 푸른색의 눈은 상념 한 점 떠오르지 않은 듯 잔잔하기만 했다. 분노도, 이따금 내보이곤 하던 이름 모를 감정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린은 에드윈의 손을 잡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희미하게 한숨을 삼킨 그가 양손을 뻗었다.
“뭐.......”
제 허리를 감싸는 손길에 놀란 레이린이 퍼뜩 정신을 차렸으나, 그녀의 몸은 이미 땅 위로 안착한 후였다.
레이린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느릿느릿 떨어져 나갔다. 분명 투박한 천 위로 닿아 온 손길이었음에도, 살결을 쓰다듬는 듯 선연한 열기에 옷 아래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와 동시에 맑은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로드 에드윈.”
에드윈과 레이린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나란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 신비한 분위기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흰 눈으로 뒤덮인 절벽처럼 새하얗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이제는 드물어진, 맑은 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연한 하늘색의 눈까지.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신성해 보였다.
“먼 걸음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왕족이라기엔 퍽 공손한 어조의 말이 잠잠히 울려 퍼졌다.
여인은 조금 어색한 웃음을 머금으며 가볍게 예를 취했다. 치맛자락을 쥐고 무릎을 굽혔다가 펴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흠잡을 곳 없이 고아했다.
말간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레이린은 심장을 묵직하게 강타하는 통증에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미간에 설핏 주름이 졌다.
‘뭐지?’
그저 첫인상이 좋지 않아서, 라고 표현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느낌이.......’
뭔가, 달라.
그녀는 평소에도 겉이 아무리 멀쩡하다 한들 뒤가 구린 사람을 만나면 곧장 그 사실을 알아채곤 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에서 비롯된 직감이 본능적으로 경종을 울려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것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아주 깊은 곳에 박혀 있던 가시를 뒤늦게 인지한 것처럼, 미묘하게 거슬리는 느낌.
“.......”
레이린은 조용히 입술을 당겨 물었다. 옅은 색의 입술이 지그시 뭉그러졌다. 이렇게 별다른 이유나 짐작도 없이 사람이 불편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 불편함. 낯가림보다는 날카롭고, 적의라고 하기에는 날이 무딘 감정.
‘머리 아파.......’
며칠 전 알라기스 무리와 대치하다가 벌어졌던 일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자꾸만 의문투성이인 일이 하나둘 늘어가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영주님, 늘 말씀드리지만 저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이고. 죽겠네, 진짜.”
그때, 뒤늦게 도착한 아르망과 클로비스 기사단이 구시렁거리며 말에서 내려서는 기척이 들려왔다. 흠칫 어깨를 떤 레이린이 상념에서 빠져나와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사이, 시리도록 무심한 얼굴의 에드윈이 고개를 까딱 숙여 여인의 인사에 화답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주님.”
왕족의 앞이라기에는 자칫 오만하게도 보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태도는 간결하다 못해 삭막했다. 하지만 애초에 영주는 왕의 ‘신하’가 아니었고, 에드윈은 수도인 호노라투스보다도 위상이 높은 유스티아의 주인이었다. 이는 곧, 그가 왕족의 앞에서 깍듯이 고개를 숙여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릴리트처럼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영주들은 존칭조차 생략하고 ‘공주’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존칭을 생략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에드윈은 충분한 예의를 보인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예의라기보다는 거리감에 가까웠지만, 그 사실을 구태여 지적할 사람은 없었다.
공주, 아네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양 불쾌한 내색 없이 클로비스 일행을 빙 둘러보았다.
“내일 오전부터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니, 다들 이만 안으로 들어가서 여독을 푸시는 편이 좋겠네요.”
우아하게 말을 맺은 그녀가 에드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바라신다면.”
무미건조한 답을 흘린 에드윈은 가늘게 떨리고 있는 흰 손을 받쳐 들었다. 그와 손이 닿고서야 긴장이 풀린 듯 자그맣게 한숨을 내뱉은 아네트가 성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 옆에 선 자에게 간간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건네는 아네트. 그리고 상대가 민망해하지 않을 정도의 짤막한 답만을 흘리는 에드윈. 뭇사람들이 감탄할 만큼 한 폭의 그림 같은 두 사람이 성 쪽으로 천천히 멀어졌다.
레이린은 제자리에 선 채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엷은 회갈색의 눈에 미묘한 이채가 떠올랐다.
“......?”
그녀가 의아함으로 미간을 설핏 구김과 동시에, 쾌활한 감탄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야, 역시 잘 어울리시네. 폐하께서 점찍은 사윗감다워.”
“네?”
레이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생각이 충격으로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 와 있던 아르망이 외려 놀란 듯 눈을 댕그랗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왜 새삼 놀라는...... 아, 너는 모르고 있었겠구나. 물밑에서 말이 돈 지 꽤 돼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거든.”
네가 신입이었다는 걸 잠깐 잊고 있었네, 미안. 아르망은 사과의 말을 덧붙이며 제 볼을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그 말을 들은 레이린의 눈이 드물게 흔들렸다. 이유 모를 혼란이 속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엉망인 속을 토해 내는 기분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분명 영주님을.......”
싫어하시지 않나요?
레이린은 목구멍이 바짝 말라붙는 것 같아 차마 온전히 말을 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속으로 삼킨 말을 눈치껏 알아챈 아르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지하게 눈엣가시처럼 여기시지. 하지만 사적인 감정이랑 후계자 문제는 엄연히 다르잖아?”
“아.”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짤막한 신음을 토해 냈다. 막힌 둑이 무너지듯, 영 이해가 가질 않던 말들이 빠르게 맞물려갔다.
왕족은 대대로 단 한 명의 아이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배우자가 될 사람의 자질이 무척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 나이에 영주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무리 없이 유스티아의 황금기를 이끌고 있을 만큼 뛰어난 재능. 보는 사람의 눈마저 의심하게 할 정도로 완벽한 외모. 거기에 절로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검술 실력까지. 그런 부분을 따지자면 에드윈은 누구라도, 어떻게 해서든 제 자식과 엮어 주고 싶어 할 만큼 완벽한 사람이었다. 유스티아를 질시해마지않는 왕마저 선뜻 제 자존심을 굽힐 정도로.
“게다가 공주님께서 저렇게 좋아하시잖냐. 그런 상황에서 굳이 다른 사람을 찾을 이유가 있겠어?”
아르망이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레이린은 조금 멍한 눈으로 찬찬히 시선을 움직였다. 모든 감각이 아득히 늘어지고, 허공 가득 출렁이는 적막 한가운데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한결같이 앞쪽만 응시하고 있는 에드윈과 달리, 아네트는 아예 고개를 돌린 채 그에게 연신 말을 붙이고 있었다. 부드럽게 늘어진 입술이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기분이 드는 미소를 그려냈다. 맑은 빛의 눈은 한 사람에게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분명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이라고 생각할 법한 모습이었다.
그때. 아까 전, 아르망의 말에 정신이 팔려 한쪽으로 밀려났던 생각이 다시금 스멀스멀 몸집을 부풀렸다.
아네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레이린의 눈썹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저 사람.
‘그렇다기엔.......’
마치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듯한 눈을 하고 있는데.
알 수 없는 찜찜함을 뒤로한 채 제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온 레이린은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물론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고 해서 무난하게 잠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평소와 다름없이 짧은 선잠을 끝으로 몸을 일으킨 그녀가 피곤한 얼굴로 짐을 뒤적였다.
조금 넉넉한 통의 검은 바지, 루시의 정성 어린 손질에 힘입어 주름 하나 없는 흰 블라우스. 상황에 걸맞게 사무적인 분위기의 옷들이 드문드문 흉터가 자리한 몸 위로 걸쳐졌다.
레이린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옷매무새를 점검하다가, 문득 오른손으로 제 왼쪽 어깨를 감싸 쥐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벌써 아주 오래전인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가 귓전을 먹먹히 울렸다.
‘......여기.’
‘다쳤습니까.’
간간이 맨 등을 스치던 손에 박여 있던 굳은살의 감촉. 일순 온몸의 솜털이 곤두설 만큼 낮게 가라앉았던 목소리. 목덜미 위로 내려앉던 더운 숨결. 그 모든 것들이 해일처럼 일어나 머릿속을 뒤덮었다.
레이린은 술렁이는 속을 다스리기 위해 어깨를 쥔 손에 지긋이 힘을 주었다.
‘허튼 생각.’
그녀는 강박 같은 그 단어를 속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클로비스 저택의 사람들은 이미 자신에 대한 경계를 거두었다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이곳은 상대방을 물어뜯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자들로 득시글한 왕궁이었다.
특히나 그 남자.
‘이드리스 프리조프.’
그 이름을 입 속으로 읊조리자마자 오브리의 얼굴이 연달아 떠올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일순 살기 어린 눈을 하며 이를 갈았던 레이린은 이곳이 어디인지를 상기하고는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마티아스의 영주인 이드리스 또한 이번 회의에 참석할 것이다. 뱀 같은 사람. 나른하게 웃는 얼굴로 제 행보를 감추는 사람. 그런 그의 앞인 만큼, 한 치의 흔들림도 내보여서는 안 되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레이린은 가만히 심호흡을 반복하며 상념을 털어 냈다.
아네트를 에스코트하던 에드윈의 손,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차츰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이내 모든 감정을 지워 낸 레이린은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 앞에서 몸을 돌렸다. 소파에 자리를 잡은 레이린이 서류를 점검하고 필요한 정보들을 되짚기 시작했다.
그사이,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던 푸르스름한 빛이 점차 노랗게 물들어 갔다. 이윽고 벽에 걸려 있던 시계가 하루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얼굴 위로 그려낸 듯 완벽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허락에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시녀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이제 곧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아제트리아 님.”
바야흐로 칼 없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다.
레이린은 시녀가 가져온 식사를 조금 깨작거리다가 물린 후, 서류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일찌감치 일어나 모든 준비를 마쳐 놓았던지라 시간은 넉넉한 편이었다. 그녀는 아르망, 에드윈과 만나기로 약속한 본궁의 홀까지 걸어가며 화려한 내부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천장에 매달려 눈 부신 빛을 흩뿌리는 거대한 샹들리에, 복도를 따라 드문드문 놓여 있는 금빛 조각품들. 이곳을 이루는 것 중 무엇 하나 화려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
본래도 무덤덤했던 엷은 회갈색의 눈이 어둑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왕궁까지 말을 타고 달려오던 길에 스치듯 보았던 마을의 정경을 떠올리자 절로 비소가 새어 나왔다.
‘성자는 무슨.’
대관절 어느 성자가 바깥에서 제 백성이 죽어 가는데 황금으로 된 술잔이나 기울이고 자빠졌나. 기분이 나빠진 레이린은 차디찬 얼굴을 한 채로 마저 걸음을 옮겼다. 나름 간단하게 둘러본다고 둘러본 것이었는데, 궁이 워낙 넓다 보니 어느덧 약속했던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는 본궁의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을 지나쳐 화려한 홀로 발을 들였다.
“그럼 그 부분은 정리했던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저번처럼 쓸데없는 도발에나 걸려들지 마.”
“아, 진짜! 그건 그놈이......!”
정면에 놓인 계단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아르망과 에드윈이 레이린의 기척에 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에드윈은 무표정하게, 아르망은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자못 해맑은 미소를 띤 아르망이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을 걸어왔다.
“아쉽네. 5초만 더 늦었으면 근무 태만으로 혼내려고 했는데.”
“선배님께서 즐거워하실 기회를 빼앗게 되어서 유감이네요.”
건조한 대꾸를 흘린 레이린이 에드윈을 돌아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영주님.”
그 말에, 에드윈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그는 깔끔하게 각이 잡힌 짙푸른 색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조각상과도 같아 주변의 풍경과 한 치의 위화감도 없을 정도였다.
“.......”
감정 하나 없는 얼굴의 그는 이내 별다른 답 없이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에 레이린의 눈치를 보듯 눈을 도르륵 굴리던 아르망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리도 이만 가자.”
“......네.”
또다시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다스린 레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옮겼다.
세 사람은 이윽고 붉은 카펫이 길게 늘어진 복도를 지나 회의장 앞에 도착했다. 에드윈이 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레이린은 언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냐는 듯 서늘한 얼굴을 한 아르망과 함께 그 뒤에 섰다.
고풍스럽게 조각된 나무문 옆에 서 있던 시종이 문을 열어 주며 우렁찬 목소리를 냈다.
“유스티아의 영주께서 드십니다!”
거대한 문이 벌어지며 널따란 회의실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회의실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원형 테이블의 주위에는 총 여섯 개의 의자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놓여 있었다. 초대 왕 엘피스 드 루에이리 때부터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처럼, 진한 색의 나무 의자들은 하나같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문과 마주 보고 있는 자리에는 여섯 개의 의자 중 가장 커다란 등받이를 가진 의자가 놓여 있었다. 유달리 높게 뻗은 등받이에, 흰 독수리가 양 날개로 왕관을 감싸 안고 있는 왕가의 문양이 선명했다.
그 외 나머지 의자에는 다섯 도시를 상징하는 문양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유스티아의 상징인 황금빛 장미 덤불에 휘감긴 검. 에르치니아의 상징인 천칭과 시계. 벤투스의 상징인 바위에 박힌 보석. 마티아스의 상징인 단검에 찔린 뱀. 그리고, 윈프리드의 상징인 초승달과 가시관까지.
“.......”
레이린은 잠시간 윈프리드의 문양이 박힌 의자에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다른 의자들과 달리, 윈프리드의 대표가 앉는 의자는 퍽 새것처럼 반질반질했다. 그 모습이 윈프리드가 중앙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곳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주는 듯했다. 그녀는 결국 오래지 않아 의자에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에드윈 일행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도착해 있던 이들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르치니아의 영주인 릴리트가 제자리에서 씩 웃음 지으며 손을 팔랑거렸다.
“왔나.”
“오셨습니까.”
에드윈은 유스티아의 문양이 새겨진 의자에 앉으며 짧게 고개를 까딱였다. 양손을 깍지 껴 그 위로 턱을 괸 릴리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툭, 짓궂은 말을 던졌다.
“안타깝군.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한번 꼬셔 보는 건데 말이야.”
그러자 그녀의 뒤쪽에 서 있던 청년이 경기를 일으키며 빠르게 핀잔했다.
“어머니, 제가 분명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씀 함부로 하시는 게 아니라고 말씀 드렸......!”
“아, 알았다. 알았어. 하여간 까탈스러운 놈 같으니.”
릴리트는 아들이자 보좌관인 커티스의 잔소리에 재빨리 항복하고는 툴툴거렸다.
그녀의 뒤통수를 매섭게 흘겨보던 커티스가 문득 제 쪽을 바라보던 레이린과 아르망을 발견하고는 방긋 웃음 지었다. 한순간 그의 주위로 자그마한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듯한 착각마저 일 정도였다.
“이야, 저분은 여전하시군.”
여태 무표정을 유지하던 아르망은 저도 모르게 작은 감탄을 흘리며 마주 웃었다. 반면 레이린은 커티스를 향해 사무적인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이고는 금세 원래의 얼굴로 돌아갔다.
커티스는 어쩐지 가라앉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처음으로 참석하는 시르나티스에 긴장했겠거니 대강 추측하고는 상념을 접었다.
한편, 두 영주가 퍽 스스럼없는 인사를 주고받자마자 낯선 음성이 새로이 귀를 찔러 왔다.
“오랜만이군, 로드 에드윈.”
에드윈의 뒤에 선 레이린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티 나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 건너편, 릴리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희끗희끗 세기 시작한 연하늘색의 머리카락은 이마를 살짝 덮고 있었고, 진한 은회색의 눈은 상대를 단박에 꿰뚫어 볼 듯 날카로웠다. 보기 드물게 커다란 체구의 그는 릴리트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였다. 하지만 주름이 곳곳에 자리 잡은 얼굴은 기운이 없는 노인보다는 노회한 정치가의 것에 가까웠다.
그는 쉬이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로 에드윈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저절로 고개를 숙였을 만큼 매서운 시선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동요 한 점 없이 그를 마주 보며 묵례했다.
“무탈하셨습니까, 로드 유리엔.”
진심이라고는 한 점도 담기지 않은 텅 빈 인사에, 벤투스의 영주인 유리엔 솔론은 드러내놓고 실소를 흘렸다.
“자네는 매번 입에 발린 말만 하는 것도 지겹지 않나.”
“그 말을 듣고 싶어 하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만.”
에드윈은 매끄러운 대꾸를 흘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푸른 눈은 그저 무감했다. 딱히 트집을 잡거나 시비를 걸기 위해 던진 말이 아니었던 듯, 유리엔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입을 다물었다.
“마티아스의 영주께서 드십니다!”
그 순간, 커다란 외침과 함께 문이 열렸다. 이런저런 일들로 짐짓 부드럽게 풀어져 있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열린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청년은 깔끔한 정장을 갖춰 입은 다른 영주들과 다르게, 어김없이 하늘하늘한 차림이었다. 길게 늘어진 남색 머리카락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살랑거렸다.
“이런. 제가 마지막이군요.”
뱀 같은 목소리가 회의장을 적막하게 울렸다. 반사적으로 살기를 내비칠 뻔한 레이린은 주먹을 꾹 말아쥐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손톱이 흰 손바닥을 파고들자 찌릿한 통증이 일며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 보이는군, 이드리스.”
영주끼리의 존칭조차 생략한 릴리트가 사납게 미소 지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드리스는 불쾌하리만치 태연한 웃음을 흘리고는 제 자리에 앉았다.
“다 로드 릴리트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허.”
뻔뻔하다 못해 기가 찬 말에 릴리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 이드리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로드 에드윈.”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레이린과 아르망의 어깨가 그대로 굳어졌다.
말없이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던 에드윈이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심해 빛깔의 눈과 짙은 노을빛의 눈이 마주쳤다. 비릿한 미소를 감추고 짐짓 말간 얼굴을 가장한 이드리스는 그의 반응을 기다린다는 듯, 손에 든 부채를 팔랑거렸다.
숨 쉬는 소리마저 커다랗게 울려 퍼질 것처럼 적막한 공기가 회의실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윽고 낮고 낮은, 한없이 깊어 무저갱 같은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예.”
이드리스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미소에 쨍, 금이 갔다. 그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예?”
“염려해 주신 덕에 잘 지냈다 말씀드렸습니다만.”
에드윈은 이드리스가 릴리트를 향해 내뱉었던 말을 고스란히 읊조리며 대꾸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
이드리스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당기며 부채로 입을 가렸다.
절망이라는 거창한 기대까지 품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적어도 에드윈이 제게 분노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새파란 눈은 고요했다. 수면에서는 파도가 거칠게 휘몰아쳐도, 깊고 깊은 밑바닥에서는 파랑 한 번 일지 않는 것처럼. 에드윈은 일말의 흔들림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이드리스는 속으로 이를 갈며 더욱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지독한 놈. 짤막한 욕지거리를 짓씹은 이드리스가 매섭게 눈을 번득이는 찰나.
“헤르기아스의 주인, 바로크 드 루에이리 폐하께서 드십니다!”
나팔 소리 같은 외침과 함께, 문이 열렸다.
에드윈은 시종의 목소리를 듣고는 차분한 태도로 몸을 일으켰다. 이어서 릴리트와 유리엔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세를 바로 했고, 서늘한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를 덧씌운 이드리스 또한 우아하게 일어섰다. 레이린은 다른 이들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비스듬히 내리깔린 회갈색의 속눈썹이 느릿하게 팔랑거렸다.
그녀가 묵묵하게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회의장을 지나 상석까지 움직이는 인기척이 귀를 간질였다. 이내 묵직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나직이 울렸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레이린은 가는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회갈색의 눈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1년 만이던가. 다들 무탈해 보여 다행이군.”
레이린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유리엔과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나이를 가진 듯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흰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 하늘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눈. 딸인 아네트와는 전혀 다른, 보는 사람을 절로 긴장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눈매. 왕, 바로크 드 루에이리는 틀에 박힌 인사치레를 내뱉으며 회의실을 빙 둘러보았다.
레이린은 아네트를 만났을 때의 감정이 되풀이되지는 않을까 긴장했으나,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음에 안심하고 한숨을 삼켰다.
‘그럼 역시 착각이었나.’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던 아네트와 에드윈의 모습을 시야에 담은 순간.
‘그는 당신이 감히 탐낼 만한 사람이 아니야.’
패트리샤가 내뱉은, 제 속을 있는 그대로 후벼 파는 듯하던 말이 떠올라 잠시 심사가 뒤틀렸던 것인 듯했다.
‘역시 나도 아직 멀었군.’
레이린은 스스로의 한심함에 혀를 차며 자조했다.
곧이어 왕의 고개가 에드윈 쪽을 향하고, 연푸른 시선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잠시 멈추어 섰다. 연푸른 시선이 에드윈을 뚫어질 듯 응시하다가, 그 뒤쪽에 서 있는 레이린에게로 향한 찰나. 해묵은 살기가 심장을 덜컥 내려 앉혔다.
“......!”
놀란 레이린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에조차 동요를 내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그저 낯선 얼굴에 대한 일말의 호기심이었던 듯, 왕의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린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심장이 뛰는 소리는 여전히 북소리처럼 그녀의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쿵, 쿵, 쿵.
마치 오래도록 찾아 헤맸던 무언가를 찾아낸 것처럼. 혹은 하염없이 기다리던 이를 만난 것처럼. 심장이 크고 묵직하게 박동하자 자꾸만 숨이 가빠졌다.
레이린이 남몰래 숨을 몰아쉬며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 있던 때.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던 에드윈의 손에 가만히 힘이 들어갔다.
그때, 회의장을 모두 둘러본 왕이 영주들을 향해 손짓했다.
“다들 온 것 같으니 이만 자리에 앉도록. 이 상태로 회의를 진행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퍽 가벼운 어조로 농담을 던진 그가 제자리에 앉았다.
‘모두 왔다’라기에는 한 자리가 을씨년스럽게 비어 있었으나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네 명의 영주들은 왕의 말에 따라 차례로 착석했다. 에드윈은 일어날 때와는 달리 조금 느릿한 동작으로 몸을 내렸다.
이윽고 얼굴을 굳힌 왕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시작하지.”
그 말을 기점으로 회의장의 분위기가 단숨에 뒤바뀌었다. 마수 토벌, 예산, 거래 품목, 세금, 상단 등의 단어가 사람들의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아주 자그마한 차이라도 크나큰 손해, 혹은 이익이 될 수 있었으므로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다.
릴리트와 유리엔이 날 선 공방을 주고받던 사이. 무료한 눈길로 각 도시에서 올라온 서류를 들여다보던 왕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카라스테 상단이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용케 잡아낸 아르망이 설명했다.
“예. 본래 총괄을 맡고 있던 카르키오 상단주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총괄 상단을 교체하게 되었습니다.”
‘개인 사정’이라는 단어로 실제 이유를 뭉뚱그려 넘긴 그가 빙긋이 웃었다.
“힐데트 가문의 영애들께서 업무를 맡아 주신 이후로 오히려 일 처리가 수월해졌지요.”
“그런가. 놀랍군.”
왕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작게 호응하고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몇 분도 가지 않을 관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르망 역시 별말 없이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괸 왕은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빤히 응시하더니 희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티 나지 않게 그의 입 모양을 주시하던 레이린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여간 쓸모없는 것 같으니.”
왕이 입 속으로 삼켜 버린 그 말에, 그녀는 의아함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누굴 말하는 거지?’
그때, 에르치니아와 벤투스 사이의 설전이 끝나고 유스티아의 차례가 돌아왔기에 그녀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마수 토벌과 관련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레이린은 아르망과 미리 말을 맞춰 놓았던 대로 적절히 에드윈의 말을 뒷받침하며 회의의 흐름을 이쪽으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보기 위해 눈을 부릅뜨던 사람들은, 어디 하나 흠 없는 일 처리에 시간이 지날수록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하여 해당 안건에 관해서는 재고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매끄럽게 말을 정리하던 레이린은 문득 곁눈질로 왕과 이드리스를 살폈다. 가장 격렬하게 덤벼들 것 같던 두 사람은 어쩐지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었다. 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드리스는 요사스럽게 웃는 얼굴로 다른 도시의 영주들이 제안하는 것들을 대부분 수긍하고 있었다.
‘뭐지?’
순순하다 못해 의심스럽기까지 한 그들의 태도에 왠지 모를 불길함이 엄습했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유스티아의 입장에서는 시간과 기력을 낭비하지 않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영 찜찜함이 가시질 않았다. 유스티아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이들이 조용하니 외려 불안했다.
아르망 또한 그녀와 같은 생각인 듯, 그녀를 힐긋 돌아보는 시선에서 의아함이 묻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반박을 독촉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레이린은 애써 상념을 갈무리하고 회의에 집중했다.
지지부진한 말싸움이 거의 벌어지지 않은 덕인지, 회의는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필수적으로 논의되어야 하는 안건들이 모두 마무리되고, 이어서 추가로 의논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분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꺼낼 차례가 되었다.
회의 내내 필요한 이야기를 제외하고선 일절 입을 열지 않던 에드윈이 왕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고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차분한 말이 울려 퍼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왕을 향했다.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어 있던 왕이 성의 없이 턱짓했다.
“말하라.”
언뜻 거만한 태도에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에드윈은 상대방의 반응은 안중에조차 없다는 듯 무감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3급 마물 알라기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합니다.”
“이유는?”
“알라기스가 지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에드윈이 그 말을 내뱉자마자 회의장 내에 경악 어린 술렁임이 가득 찼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굳힌 유리엔이 딱딱하게 물었다.
“그 판단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는 있는 건가?”
“호노라투스로 오던 길에 하룻밤 묵었던 마을에서 습격이 있었습니다. 무리를 반으로 나누어 일부는 저와 기사들의 발길을 붙들고, 나머지는 마을 반대쪽으로 숨어들더군요.”
냉정하고 칼 같은 답에 말도 안 된다며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에드윈이 근거로 내민 이야기는 3급 마물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행동임이 분명했기에 이 이상 어떠한 반박도 불필요했다.
잠시간의 정적이 찾아든 틈을 타, 그가 덤덤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하여 알라기스를 1급 마물로 지정, 공표한 후 각 도시에서 선발한 인원으로 토벌대를 꾸려야 할 것 같습니다.”
군더더기 없고 명확한 결론이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사람들이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때, 한쪽 입꼬리를 길게 끌어당긴 왕이 입을 열었다.
“마침 잘되었군.”
어딘지 오싹한 미소에 레이린이 움찔 굳어졌다. 왕은 짐짓 자애롭기까지 한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알라기스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해마다 마물로 인해 죽어 나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분명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지.”
왕의 눈이 비스듬히 움직이더니 제 맞은편을 향했다. 연푸른 시선을 마주한 이드리스가 진한 미소를 띠었다. 그와 동시에 레이린에게는 사형 선고와 같은 말이 떨어졌다.
“해서 짐은 이제껏 미뤄 두었던 윈프리드 정벌을 추진하려 한다.”
심장이 그대로 멈추는 것만 같았다.
“감히 왕가와 서약을 맺은 영주를 살해한 죄, 영주의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어 왕가를 농락한 죄, 이후에도 제멋대로 윈프리드를 점거해 여러 자원을 무단으로 탈취한 죄.”
죄목이 하나하나 내뱉어질 때마다 이성이 한 점씩 잘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몇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차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잘못을 저질러오며 헤르기아스를 좀먹었다.”
왕이 적나라하게 내뱉은 말들에 사람들은 입을 다문 채 바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윈프리드는 암암리에 헤르기아스의 쓰레기통으로 이용되어 왔다. 곤란한 사생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대는 정적, 은밀한 취미 생활 등. 제 손을 더럽히기 싫은 자들은 어김없이 윈프리드를 찾았다. 법의 울타리 안에 있지 않은, 범죄자들의 둥지로 불리는 윈프리드가 여태껏 무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윈프리드를 도려내기 위해서는 헤르기아스 귀족들의 8할이 함께 잘려 나가야 했으므로.
그런데, 대체 왜, 어째서.
레이린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흥미로운 기색으로 저를 관찰하고 있는 주홍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
이드리스가 그녀의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듯 부드럽게 눈을 휘는 순간. 이성이 툭, 끊어졌다.
죽여 버릴 거야.
이곳이 어디인지, 제가 누구인지조차 모두 잊었다. 새빨간 살의가 온통 머리를 지배했다. 이성을 잃은 레이린이 저도 모르게 이드리스 쪽으로 한 발을 내디딘 순간.
콰앙!
굉음과 함께 회의실의 문이 벌어졌다.
“이런.”
거칠게 삐걱거리는 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이린은 본능처럼 움직임을 멈추며 고개를 홱 돌렸다.
“초행길인지라 좀 늦었습니다.”
이곳이 제집인 양, 당당한 태도의 청년이 사뿐히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왕을 향해 과장되게 허리를 굽히며 웃었다.
“윈프리드의 새 영주가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라그나르 브리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