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87)

키야아악!

에드윈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메아리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틈을 노린 알라기스 하나가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들었으나 소리 없이 허공을 가른 검에 곧장 목이 떨어졌다. 표정 없는 조각상 같은 얼굴 위로 검붉은 피가 점점이 튀었지만, 그는 표정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

에드윈은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마을 회관이 있는 방향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키이익!

그 와중에도 소름 끼칠 만큼 정확한 몸놀림으로 마물 둘의 목을 더 쳐낸 그가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엘빈!”

소란을 가르고 또렷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대편에서 검을 휘두르던 엘빈이 시선을 힐긋 돌렸다. 동시에 그의 옆쪽에 있던 알라기스가 매섭게 발을 휘둘렀다.

“윽......!”

엷은 신음을 흘린 그가 아슬아슬하게 검으로 발톱을 튕겨냈다. 엘빈은 집요하게 달려드는 알라기스들을 쳐내며 조금씩 에드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얼마 후, 가까스로 에드윈의 지척에 다다른 그가 알라기스 하나의 발을 잘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러십니까, 주군!”

에드윈이 리오넬의 뒤편에서 달려드는 알라기스의 복부를 걷어차며 답했다.

“내가 틈을 만들 테니 너는 그 즉시 회관으로 달려가라.”

뜻밖의 말에 엘빈이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예?”

“뭔가 이상해. 지능이 없는 마물이라기에는 움직임이 지나치게 정렬되어 있다.”

에드윈은 확신 어린 어조로 단언하듯 말을 맺었다. 피로 물든 흑발 아래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던 이질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선명해졌다. 3급 마물이라면 그저 인간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발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 알라기스들은 아까부터 종종 ‘몸을 사리는’ 듯한 기색을 내비치곤 했다.

일반적인 3급 마물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 행동.

‘......함정.’

그것을 깨닫자마자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에드윈은 속에서 흉흉하게 날뛰는 초조함을 애써 억누르며 잠긴 목소리를 냈다.

“내가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널 보내는 거다.”

새파란 눈이 엘빈을 찌를 듯 바라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 뇌리에 새기듯 선명한 말이 엘빈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가서 회관의 상황을 확인해라. 그리고.......”

“.......”

“지켜.”

마지막 말은 짓씹듯 내뱉어졌다. 무엇을 지키라는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엘빈은 그 뜻을 알아들은 듯 한순간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내 표정을 굳히며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엘빈이 대답을 내뱉음과 동시에, 섬뜩하게 눈을 빛낸 에드윈이 엘빈의 앞으로 뛰어들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은빛 검날이 허공을 가르자 알라기스의 몸통이 그대로 반으로 잘려 나갔다. 동료의 몸이 난자되어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본 알라기스들이 에드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모든 알라기스의 시선이 그를 향한 찰나. 에드윈의 움직임을 숨죽여 주시하던 엘빈이 재빨리 몸을 돌려 마을 뒤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키이익!

뒤늦게 엘빈의 움직임을 눈치챈 알라기스들이 흥분해 날뛰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공포마저 느껴질 정도로 철저하게 그들의 모든 행동을 좌절시켰다.

검붉은 피로 점철된 얼굴에서 푸른 눈만이 이질적으로 번뜩였다. 그 모습이 가히 인간이 아닌 것처럼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숨 막히는 살기를 견디다 못한 리오넬이 걱정과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어올 정도였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알라기스를 난자하는 데만 집중했다.

‘어라?’

그 모습을 힐긋거리던 리오넬은 문득 어떠한 생각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알라기스 무리를 도륙하는 에드윈의 기세는 평소보다 배는 난폭했다. 어지간한 광경엔 헛구역질조차 하지 않는 클로비스 기사단이 질린 얼굴을 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저건.......’

잔혹한 살상의 이면. 어쩐지 농도 짙은 두려움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한편, 간신히 알라기스 무리에게서 벗어난 엘빈은 전속력으로 마을 회관까지 달려갔다. 이윽고 저 멀리 보이는 회관을 향해 시선을 던진 그가 움찔, 미간을 좁혔다.

‘결계가...... 없잖아?’

지금쯤이면 회관의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어야 할 주홍색 결계가 보이지 않았다.

‘레이린.’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져 내리는 느낌을 체감했다. 일평생 여유를 잃어본 적이 없던 그이기에, 그만큼 익숙지 않아 괴로운 초조함이 해일처럼 몰아닥쳤다. 저도 모르게 볼 안쪽을 짓씹은 엘빈이 마을 회관의 문을 부술 듯 열어젖혔다.

쾅!

“레이린!”

엘빈은 회관 안으로 뛰어들며 버럭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며 손을 뻗었다.

턱!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던 두꺼운 나무 막대가 커다란 손에 붙잡혔다. 엘빈을 향해 있는 힘껏 나무 막대를 휘두르던 청년이 얼떨떨한 목소리를 냈다.

“어? 기사님......?”

청년은 이내 긴장이 풀린 듯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청년의 뒤쪽으로는 무기를 갖춘 몇 사람이 나머지 주민들을 보호하듯 진형을 갖추고 서 있었다. 엘빈은 이 상황이 영 이해가 가질 않아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이게 무슨.......”

“키스티엘 경!”

그때, 사람들을 보호하고 서 있던 이 중 하나가 엘빈을 알아보고는 다급히 다가왔다. 그의 모습을 알아본 엘빈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르망 님!”

레이린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던 엘빈은, 바로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 반사적으로 입술을 다물었다.

“레이린이 사라졌습니다. 오는 길까지는 분명 함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체.......”

아르망은 반쯤 넋이 나간 눈을 한 채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헤집었다.

레이린은 분명 마을 사람들과 함께 회관으로 오던 길까지 동행했다. 그러나 회관에 도착해 사람들의 수를 확인하고 주술석 결계를 작동시키려던 차에 그녀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레이린!’

대경한 아르망은 당장에라도 그녀를 찾아 나설 수색조를 꾸리고자 했다. 하지만 본래 전투를 담당하던 사람들이 모두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바깥의 상황을 모르는 와중에 섣불리 움직일 수도, 애써 의연한 척 어깨의 떨림을 감추는 어린아이들을 두고 나갈 수도 없었다. 하여 아르망과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레이린을 기다리던 중 엘빈과 마주한 것이었다.

아르망은 언뜻 간절하기까지 한 눈으로 엘빈을 바라보며 사정하듯 물었다.

“혹시 오는 길에 레이린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엘빈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뇨, 오는 길에.......”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리던 그가 일순 어깨를 굳혔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의 뒤편. 회관의 뒷문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던 릴리와 엘빈의 시선이 마주쳤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던 소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색이 되어 입을 벙긋거렸다.

‘언니가 전해 달래요.’

적령의 후계자로서 교육받은 엘빈은 릴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소녀가 말하는 ‘언니’라는 인물이 레이린임을 직감한 그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릴리는 상대를 배려하듯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 몰래, 자기를 찾아와 달라고.’

자그마한 입술이 마지막 말을 내뱉던 때. 의아하게 엘빈을 바라보던 아르망이 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키스티엘 경?”

그러자 릴리는 언제 입을 벙긋거렸냐는 듯 뒷짐을 지고는 슬그머니 옆으로 움직였다.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은 이내 사람들의 몸에 가려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에 엘빈과 릴리 사이에 비밀스럽게 오간 대화를 알아채지 못한 아르망이 고개를 갸웃했다. 뒤통수를 긁적이며 몸을 원래대로 돌린 그가 재차 엘빈을 불렀다.

“키스티엘 경?”

“......아.”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엘빈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찰나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던 그는 눈 한 번 깜박할 새에 평소의 무해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주변을 찾아볼 테니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면목이 없습니다.”

아르망은 엘빈을 위험으로 떠민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하지만 엘빈은 그저 선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아니요. 당연한 결정을 하신 겁니다. 아르망 님께서는 마을 사람들을 잘 돌봐 주십시오.”

순한 눈매가 곱게 접히며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냈다. 그는 싱긋 웃음 짓고는 그대로 발을 돌려 회관을 나섰다.

덜컹.

엘빈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마을 회관의 문을 단단히 닫아걸었다. 묵직한 나무문이 틈 없이 맞물리며 낮은 울림을 만들어 냈다.

직후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몸을 돌린 그가 곧장 땅을 박차며 입술을 짓씹었다. 둥둥둥, 북소리 같은 심장 박동이 귓전을 커다랗게 울렸다.

‘설마.’

자신이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섬뜩하게 입을 벌리고 달려들던 알라기스들의 모습이 핏빛으로 아른거렸다. 거기에 레이린이 소녀의 입을 통해 자신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는 사실까지.

조각난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퍼즐을 맞추듯 하나둘 맞물렸다. 그러자 드러나는 것은 한 가지의 가정뿐이었다.

“이게 진짜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엘빈은 이를 갈듯이 거친 말을 짓씹어 내뱉으며 땅을 박차는 발에 속도를 더했다. 불안을 원동력 삼아 발을 재촉하며 회관의 옆쪽으로 이어진 큰길을 따라 달리기를 얼마간. 불현듯 짙은 피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해 왔다.

“레......!”

엘빈은 작은 나무집의 모퉁이를 돌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추어 섰다. 아니. 기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키야아악!

쇳소리에 가까운 알라기스의 비명이 핏방울과 함께 조각조각 허공에 흩뿌려졌다. 생의 마지막을 알리는 단말마가 귓가를 파고들자 뒷덜미를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하지만 그의 오감을 장악한 것은 알라기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엘빈은 멍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지를 뒤덮다 못해 작은 언덕을 이루며 쌓인 알라기스의 시체. 그리고, 그 정점을 밟고 올라선 한 여인의 모습.

무심한 눈을 한 레이린은 제 발밑에서 버둥거리는 알라기스의 목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피가 팍, 튀어 오르며 이미 검붉은 자국으로 뒤덮여 있는 흰 볼 위로 새로이 덧씌워졌다.

“......레이린?”

엘빈은 무의식중에 공포와 경외가 뒤섞인 부름을 흘렸다. 그러자 흠칫 어깨를 떤 레이린이 고개를 움직여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

멍하니 저를 올려다보는 엘빈의 모습을 발견한 레이린이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이내 섬뜩하게 가라앉아 있던 회갈색의 눈이 평소와 다름없이 잔잔한 빛으로 돌아왔다.

“왔구나.”

덤덤하게 말을 내뱉은 레이린은 가볍게 손을 휘둘러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녀는 언뜻 사뿐하다고 느껴질 만큼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땅으로 내려섰다. 엘빈은 레이린이 제게 다가오는 모습을 어쩐지 현실감 없이 지켜보다가, 다짜고짜 제 손에 검을 쥐여 주는 그녀의 행동에 놀라 펄쩍 뛰었다.

“뭐, 뭐야?”

“새삼스럽게 뭘 놀라? 받아.”

눈썹을 까딱인 레이린이 엘빈의 손에 제가 들고 있던 검을 떠넘겼다.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의 그가 반사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주는 것을 확인한 후, 손을 뻗어 그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은 보급형 롱소드였기에 레이린이 쥐고 있던 것과 모양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검에 묻은 피가 엘빈이 들고 있는 것에 묻어 있는 피보다 적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만 벙긋거리던 엘빈은 그제야 목소리를 되찾은 것처럼 말을 쏟아 냈다.

“너 지금 또 나한테 떠넘기려는 거지! 맞지! 이 정신 나간......!”

“알고 온 거 아니었어? 언제는 마음껏 써먹으라고 했으면서,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레이린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하게 되물었다. 엷은 회갈색의 눈에는 티끌만 한 장난기도 없이 그저 순수한 의문뿐이었다.

엘빈은 그 태연한 모습에 더욱 환장할 노릇이었다.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제 머리를 헝클인 그가 애써 평온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나를 이용해도 좋다고 했던 말은, 어디까지나 네가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는다는 전제하의 말이었어.”

늘 순한 웃음을 짓고 있던 평소와는 다르게, 엘빈의 얼굴은 차게 굳어 있었다.

“네 안전이 보장되었을 때의 이야기라고.”

“......너.”

깊이 가라앉은 붉은 눈에서 무언가를 읽어낸 레이린이 무섭도록 얼굴을 굳혔다. 매섭게 눈을 치켜뜬 그녀가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서글픈 웃음을 흘린 엘빈이 충동적으로 제 속을 꺼내 놓은 것이 먼저였다.

“미안해.”

“.......”

“이젠 진심인 것 같아, 내가.”

마지막 말은 피비린내 자욱한 허공으로 아스라이 흩어졌다. 엘빈은 아무런 말도 없이 경직되어 있는 레이린을 향해 한 발을 내디디며 속삭였다.

“그렇다고 너한테 무언가 보답을 바란다는 뜻은 아니야.”

레이린은 물러나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넋을 놓고 엘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까지 다가와 선 그가 설핏 웃음을 흘리며 긴 머리카락을 쥐어 올렸다.

“네가 위험해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기꺼이 나를 이용해. 같은 마음이 아니라도, 키스든 뭐든 내킬 때면 얼마든지 해도 좋아.”

“.......”

“그저, 여기에도 선택지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 달라고.”

그걸 말하고 싶었어. 엘빈은 자그마한 말을 덧붙이며 엷은 회갈색 머리카락에 정중히 입술을 내렸다. 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 채로 레이린을 올려다보는 붉은 눈에 부드러운 미소가 담겼다.

“......빈! 아제트리아 님!”

그때, 멀리서부터 다수의 인기척이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간 생각하는 것을 잊었던 레이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이를 갈았다. 제 머리카락을 쥔 엘빈의 손을 쳐낸 그녀가 으르렁댔다.

“너, 당장 그만둬.”

“처절하게 노력해 보라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

“그건......!”

레이린은 울컥해 목소리를 높이다가 거칠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살기는 어지간한 사람 하나는 눈빛만으로 찢어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살벌했다. 그러나 엘빈은 그녀의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이미 늦었는걸.”

혼잣말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그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또다시 입술을 혹사하듯 짓씹던 레이린이 꽉 잠긴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딴 마음까지 책임져줄 생각 없어.”

“누가 책임져 달래? 넌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니까.”

엘빈은 약간의 의문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않았어? 새삼스럽게 왜 경기라도 일으킬 것처럼 굴어?”

“.......”

레이린은 엘빈의 물음에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가 저에게 가진 호기심에 명백한 호감이 깃들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여 거리낌 없이 그것을 이용했다.

황금 덩어리와 얄팍한 계약서 한 장만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누군가의 작은 장난질에도 손쉽게 무너진다. 하지만 거기에 스스로 약자를 자처하게 되는 감정이 더해진다면, 외려 종잇장 위에 적힌 서명보다 더욱 견고한 관계를 이룰 수도 있었다. 하여 레이린은 엘빈을 자극하고 긁어내리는 짓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제게 가진 호감을 서슴없이 무기로 휘둘렀다.

그렇지만 막상 저 하나를 온전히 내놓을 것처럼 구는 엘빈의 모습을 마주하자 더럭 숨이 막혀 왔다.

‘왜?’

레이린은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엉망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호흡이 절로 가빠지며 심장이 아프게 지끈거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땅바닥에 웅크려 앉아 가슴께를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꾹 감자 찾아든 어둠 위로 데릭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가 저를 보며 내뱉던 목소리, 표정, 물잔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물방울 한 알의 모습까지 어지러이 뒤섞이자 속이 울렁거렸다.

“레이린? 왜 그래?”

레이린이 갑작스럽게 땅바닥에 주저앉다시피 하자 당황한 엘빈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지금.......”

일순 섬뜩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겁니까, 아제트리아 양.”

서슬 퍼런 목소리가 피비린내를 헤치고 들려왔다. 낯익은 기척과 목소리에 놀란 엘빈이 레이린을 향해 뻗던 손을 거두어들이며 몸을 돌렸다.

“주군?”

마을로 이어진 길의 가운데. 날카로운 살기를 등 뒤로 두른 듯 섬뜩한 얼굴을 한 에드윈이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새하얀 조각 같던 얼굴은 검붉은 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피에 젖어 늘어진 흑발 아래로 새파란 눈만이 형형한 빛을 냈다.

“엘...... 헉!”

에드윈의 뒤를 따라 달려오던 리오넬이 허공에 자욱한 피비린내에 숨을 헉, 들이켜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제 앞에 펼쳐진 광경을 의심하듯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을 끔벅였다.

“대체 몇 마리야, 저게......?”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작은 언덕을 이루며 쌓여 있는 알라기스의 시체는, 기사들이 마을 입구에서 막아 냈던 것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한 수였다. 그러나 이곳을 지키던 자는 오직 엘빈과 레이린뿐이었다.

물론 레이린은 엘빈에게서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기실 엘빈 혼자서 이룩해낸 성과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초라하기 그지없는 전력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눈앞의 광경이 단 두 명이 이룩해낸 결과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장악하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세상에.......”

그를 제외한 클로비스 기사단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그들 또한, 차마 알라기스의 시체 더미까지 다가오지 못하고 하나둘 리오넬의 근처에 멈추어 섰다.

산전수전 다 겪은 기사들마저 한순간의 경악을 가누지 못하고 병풍처럼 굳어진 가운데. 차디찬 얼굴의 에드윈이 레이린과 엘빈의 앞까지 다가왔다.

“아제트리아 양.”

에드윈은 곧장 레이린을 향해 몸을 숙였다.

새파란 눈이 언뜻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윽고 어깨를 옹송그린 채 몸을 말고 있는 레이린의 몸 곳곳에 검붉은 핏자국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의 눈에 바짝 날이 섰다.

무섭도록 굳어진 얼굴을 한 에드윈이 고개를 돌려 엘빈을 노려보았다.

“엘빈 키스티엘.”

“......예, 주군.”

“해명해 봐라.”

에드윈은 당장에라도 엘빈의 목덜미를 잡아 뜯어버릴 듯 흉포하게 눈을 번뜩였다. 엘빈은 찰나 제 목을 죄어오는 섬찟한 살기에 다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당황한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차.

“......아니요, 영주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미약한 힘이 에드윈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실바람만큼 미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손길에 속절없이 몸을 기울였다.

짙푸른 색의 눈과, 메마른 땅의 빛깔을 띤 레이린의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잡고 있던 옷소매를 놓고는 말했다.

“먼저 돕게 해 달라 사정한 것은 접니다. 그러니 키스티엘 경을 질책하지는 말아 주세요.”

“당신.......”

“죄송합니다.”

에드윈의 말 사이로 끼어들어 사과를 건넨 그녀가 덤덤히 고개를 숙였다.

에드윈은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도 치죄해 달라 청하는 그녀의 모습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이성을 끊어 놓을 만큼의 분노가 머릿속을 장악하자 마음은 외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죽지 마.’

오브리가 죽었던 그 밤. 벼랑 끝까지 내몰린 기분으로, 애원처럼 내뱉었던 제 말에.

‘응.’

그런 얼굴로. 그런 눈을 하고.

‘그럴게.’

그리 답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왜 당신은 또 스스로 위험에 뛰어드나. ‘내 사람’이라는 말. 그 말을 저가 어떤 심정으로, 어떻게 내뱉었는데.

“.......”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힘이 바짝 들어간 목에 핏줄이 섰다. 레이린은 곧 제게 떨어질 분노를 짐작하고 조용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 순간.

키이이익!

땅 위에 널브러져 꿈틀대던 알라기스 하나가 발악하듯 입을 벌리며 레이린의 발목으로 달려들었다.

“위험......!”

엘빈이 놀라 소리치는 것, 그녀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른 것보다도.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기세를 내뿜은 에드윈이 알라기스의 목을 무자비하게 땅에 꽂아 넣은 것이 먼저였다.

콱, 소리와 함께 새빨간 피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와 대비되게 알라기스의 머리는 난폭하게 땅에 처박혔다.

캬아악.......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알라기스가 가는 울음소리를 흘리며 눈을 끔뻑였다. 작게 숨을 몰아쉬던 레이린은 그 구슬픈 소리에 저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섬뜩한 붉은색의 눈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에게 죽음을.......>

손톱으로 날붙이를 긁어내리는 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강타했다.

“헉......!”

레이린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뒤로 물러났다. 소름이 뒷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휘청이는 몸을 에드윈이 반사적으로 붙들었다.

“아제트리아 양?”

그가 드물게도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레이린은 그의 부름을 의식할 새도 없었다. 정확히는 주위의 모든 것에 신경을 기울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어느새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알라기스의 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방금 그 목소리.

‘설마.’

......마물의 생각을 들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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