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87)

마을 사람들이 후하게 제공한 술 덕분에, 유스티아 일행의 저녁 식사 자리는 유독 떠들썩했다.

“저엉 들었, 히끅, 더언....... 저 그리운 고, 향에.......”

웃다가 울기를 반복하던 기사들은 구슬픈 곰의 울음소리 같은 노래마저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영혼 없는 웃음을 짓고 있던 레이린은, 나무를 붙잡고 속을 게워내는 기사 하나에 시선이 쏠린 틈을 타 조용히 막사로 돌아왔다.

아까 리오넬이 권한 개인 막사를 거절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제정신이 아닌 기사들에게 시달리느라 차분히 생각에 잠길 시간조차 없었을 테니.

“아, 머리야.......”

낮부터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머리가 생각으로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침대에 몸을 누인 레이린은 욱신욱신 두통이 이는 머리를 문지르며 생각을 이어 가다가 깜빡 선잠에 빠졌다.

잠시간 새카만 어둠이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를 집어삼킨 듯했다. 하지만 이내 불분명한 색채와 소리가 스멀스멀 떠올라 그 빈 자리를 메웠다.

‘오빠!’

어딘지 앳된 목소리가 그리움을 동반한 채 흐릿하게 귓가를 울렸다.

‘칼리고! 어디 있어!’

레이린은 자꾸만 누군가를 찾는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간간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탓에, 무의식에 짓눌려 사라졌던 의식이 자꾸만 몸부림쳤다.

시끄러워. 그 입을 찢어 버리고 싶으니까 제발 좀 닥쳐. 레이린이 잠결에 살벌한 생각을 하며 이를 갈던 찰나.

‘......오빠?’

핏빛 잔상이 눈 앞에 펼쳐짐과 동시에, 심장이 그대로 멎는 듯 둔탁한 충격이 가슴께를 강타했다.

“헉!”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켜며 눈을 번쩍 떴다.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어둠에 물든 막사의 천장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쿵,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는 소리가 귓가를 먹먹하게 울렸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가쁜 호흡이 잇새로 흩어졌다.

분명 무슨 꿈을 꾸었는데. 아니, 정말 꿈이던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건조하게 메말라 있던 눈에서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흐, 욱.......”

순식간에 흘러넘친 눈물이 온 얼굴을 뒤덮었다. 손가락 틈새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벌써 흐릿해져 가는 꿈의 잔재를 필사적으로 되짚었으나 소용없었다. 목구멍이 꽉 막혀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았다. 레이린이 제 목을 조르듯 움켜쥐며 숨을 미친 듯 헐떡였다.

당장에라도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로 파고들던 차.

“그만.”

심해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제 목을 움켜쥐고 있는 레이린의 손을 떼어 냈다.

울컥울컥 솟구치는 눈물로 시야가 부옇게 변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낯선 인기척이 느껴지자 반사적으로 눈을 깜박여 눈물을 떨쳐 냈다.

이윽고 맑아졌다가 흐려졌다가를 반복하는 시야 너머. 어둠 속에서 선명한 빛을 발하는 새파란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에드?”

숨소리보다도 작은 속삭임이 어둠을 떠돌았다. 그녀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이성이 비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에 산산이 부서지며 씻겨 나갔다. 초점이 없는 엷은 회갈색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흰 볼에 기다란 선을 그렸다.

무의식중이기에 가장 진실에 가까운 부름. 그 말에 마주한 사람의 몸이 경직되는 것이 언뜻 시야에 비쳤다.

“.......”

잠시간 레이린의 가쁜 숨소리만이 방 안을 울렸다. 고요한 수면 아래로 요동치는 바다처럼 기이한 침묵이 찾아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숨, 천천히 들이쉬어.”

낮은 목소리가 단호한 어조의 말을 뱉어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허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레이린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 들려온 동아줄 같은 말에 따라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허억, 컥, 콜록!”

하지만 급하게 숨을 들이켠 탓에 밭은기침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상체를 웅크리며 연신 콜록거렸다.

“천천히.”

강조하듯 되풀이되는 속삭임이 어둠 속에서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레이린의 등허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이 조금 더 느릿해졌다. 굳은살로 인해 조금은 투박한 손마디가 외려 안정감을 더해 주었다.

짜증이라고는 일절 담기지 않은 말이 계속해서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다시 내쉬고.”

“하.......”

“그래. 그렇게.”

동요 한 점 없는 침착한 목소리와 손길이 차츰 호흡을 안정시켰다. 레이린은 한참이나 눈물 섞인 기침을 토해 내고서야 일말의 이성이나마 되찾을 수 있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은 여전해 호흡이 조금 가빴지만, 아까처럼 고통스럽게 기침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레이린은 그제야 제 앞에 있는 남자의 존재를 인식하고는 흠칫 놀라 어깨를 굳혔다.

“진정은 좀 됐습니까.”

에드윈이 덤덤한 목소리를 냈다. 미미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 자리 잡은 새파란 눈은 평소보다도 어둑한 빛을 띠고 있었다.

레이린은 더없이 현실감 없는 광경에,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 눈을 마주 보았다. 이내 여태껏 그녀의 등허리와 얼굴을 달래듯 쓸어내리던 손이 느릿느릿 떨어져 나갔다. 레이린은 제 몸에 닿아 있던 낯선 온기가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가늘게 내뱉었다. 눈물로 인해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가 당혹감으로 파르르 떨렸다.

“영주님?”

그녀는 반신반의하듯 물었다. 사실 지금의 이 상황도 꿈이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심정을 드러내듯,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던진 물음에서는 미심쩍은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한 조각의 불신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싸늘한 답이었다.

“그럼 누구이길 바랐습니까.”

어쩐지 형형한 살기를 감추지 않는 말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그에 순식간에 피부 위로 현실감이 훅 다가왔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레이린은 경악에 찬 비명을 내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미쳤구나.’

그녀는 속으로 거친 욕지거리를 씹어 삼켰다. 현 상황을 명확히 인지하고 나니 차마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울며 깨어나 스스로 목을 조르려 하는 둥 소란을 피운 것으로는 모자랐나.

‘......에드?’

서슴없이 에드윈의 이름을, 그것도 애칭을 불러댄 몇 분 전의 자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저지른 것인지.

‘어떻게 변명해야 하지.’

레이린은 에드윈에게 제 이상 행동을 해명할 방법을 찾기 위해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어찌나 절박한 심정이었던지, 그녀는 무의식중에 입술을 혹사하기라도 하듯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때, 굵은 손가락이 레이린의 입술을 건드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반사적으로 입술을 벌리며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무슨.......”

입술 위를 간지럽히듯 쓸어내리는 손가락의 감촉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엷디엷은 피부 위로 닿아 오는 체온은 홧홧하게 느껴질 정도로 선연했다.

에드윈은 놀라 굳어진 레이린의 입술을 엄지로 쓸어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피가 나는데.”

그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하도 짓씹어 괴롭힌 탓에 그녀의 입술 위로는 벌써 엷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에드윈은 피가 비치는 레이린의 입술을 제 엄지로 지그시 내리눌렀다.

그와 마주 보고 있는 레이린은 목덜미를 물린 사냥감이 된 것만 같은 심정으로 가쁜 숨을 내뱉었다. 살짝 벌어진 잇새로 뜨거운 호흡이 색색, 흩어지며 맞닿아 있는 이의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

짙푸른 눈이 더 어두워질 수 없을 만큼 짙게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 날이 선 시선이 레이린의 입가를 느릿하게 배회했다.

당장에라도 집어삼킬 수 있는 먹잇감을 앞에 두고 침묵하는 맹수와도 같은 모습. 호흡 한 자락 허투루 흘릴 수가 없을 만큼 묵직한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그녀가 옅은 현기증마저 느낄 때쯤, 입술을 쓸던 엄지에 일순 힘이 들어갔다.

“아.”

한껏 숨을 죽이고 있던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짤막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입술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이 움찔 떨리더니 순식간에 압박감이 사라졌다.

“.......”

이윽고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쉰 에드윈이 찬찬히 손을 물렸다. 이유 모를 갈증으로 형형하던 그의 눈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러자 숨통을 짓누르던 살벌한 기세 또한 수그러들었다.

“......본인만큼 자기 몸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에드윈이 어느덧 덤덤해진 목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지금 보니 썩 그런 것 같지도 않군요.”

그는 방 한쪽에 놓여 있던 테이블 위의 수건으로 엄지에 묻어난 피를 닦아 내며 말을 맺었다.

레이린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이불을 그러쥐었다. 식은땀으로 차가워진 이불이 부스럭거리며 구겨졌다.

에드윈의 말이 질책인 것을 알지만 무어라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에 쉽사리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술술 거짓을 뱉던 혀가 지금은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

그녀가 침묵에 잠겨 있는 사이, 그는 수건을 내려놓고 다시금 발을 움직였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에드윈이 레이린의 옆에 걸터앉자 침대가 부드럽게 출렁였다. 땀에 젖은 채 힘없이 늘어져 있던 긴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아제트리아 양.”

고요하고도 서늘한 시선이 그녀의 목을 정확히 응시했다. 이어 분노조차 담기지 않아 더욱 소름 끼치는 무감정한 목소리가 칼날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난 내게 거짓을 말하는 자를 곁에 두지 않습니다.”

덜컥.

레이린은 한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가슴 한쪽이 아프게 욱신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그러나 힘 빠진 웃음이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래.’

우리는 애초에 이런 관계였지. 신의란 사치이며, 진실은 기만인 관계. 서로 일면식조차 없는 남보다도 못한 존재.

그것이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전부가 아니던가.

레이린은 체념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

“하지만 당신은 이미 내 사람입니다.”

낮은 목소리가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선명히 귓전을 울렸다. 레이린은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은 미처 감추지 못한 놀라움으로 커다랗게 확장되어 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맞춰 오는 심해 빛깔의 눈.

“그리고 그 말은 곧.......”

에드윈은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새파란 눈이 식은땀으로 흐트러진 회갈색의 머리카락부터, 이불을 그러쥔 흰 손끝까지 차례로 훑어 내렸다. 손마디 하나하나마저 빠짐없이 눈에 담는 그 행동에서는 광기에 가까운 집요함마저 느껴졌다.

뒷덜미가 저릿하게 울렸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그와 동시에 에드윈이 꿰뚫듯 시선을 맞춰 왔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

“내 소유라는 뜻이고.”

찰나 전율인지 공포인지 모를 감정이 등줄기를 타고 내리꽂혔다. 나직한 목소리에 깃든 흉포한 소유욕이 그의 말을 뇌리에 새겨 넣는 것만 같았다.

레이린은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귀가 인지한 사실을 머리가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이 아득히 길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도 제빛을 잃지 않는 푸른 눈에 시선을 붙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당신은 이미 내 사람입니다.’

마침내 그녀의 머리가 에드윈의 말을 오롯이 인식하고.

‘설마.’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에 숨이 막힐 것 같은 한 가지 가정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캬아아아악!

기괴한 울음소리가 마을 전체를 뒤흔들었다.

에드윈과 레이린은 곧장 막사를 박차고 나갔다. 문을 찢을 듯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쳐나가자마자 사람들의 정신없는 고함이 귓가로 확 다가왔다.

“마, 마물이다!”

“으아악!”

“모두 피하십시오! 어서!”

소란한 쇳소리에 기사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마을 입구 쪽으로 달려가자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채 연이어 검을 휘두르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키에에엑!

소름 끼치는 비명을 뱉어낸 마물이 새빨간 눈을 번뜩이며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늑대의 머리와 말의 몸통, 털로 뒤덮인 커다란 발.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을 불러일으킬 만큼 섬뜩한 마물의 모습은 레이린에게 퍽 익숙한 것이었다. 엷은 회갈색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혀졌다.

‘저건.......’

그때 무리의 가장 앞에서 마물을 막아내던 리오넬이 에드윈을 발견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주군! 3급 마물 알라기스입니다!”

3급 마물 알라기스. 3급이라면 지난번 클로비스령 외곽의 숲에 나타났던 마물보다도 한 단계 급이 낮은 개체였다. 본래라면 클로비스 기사단이 지금처럼 당황할 수준의 마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수가 심상치 않았다.

“주군!”

에드윈과 레이린을 발견한 엘빈은 몸을 돌려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키이익!

하지만 그 순간, 그와 마주 보고 있던 마물 하나가 짤막하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반대쪽에서 다른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던 마물 둘이 순식간에 엘빈에게 달려들었다.

“큭!”

움직임을 봉인 당한 엘빈이 작은 신음을 흘리며 다급히 마물의 이빨을 막아 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짐 속에 보관해 두었던 비상용 주술석을 꺼내 올 틈조차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백 마리가 훌쩍 넘는 수의 마물들이 마을 입구를 향해 끝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에 반해 클로비스 기사단은 리오넬과 엘빈을 포함해 고작 열 명 남짓. 마을 사람들 모두를 보호하며 막아 내기에는 버거운 숫자였다.

서늘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윈이 검을 뽑아 들었다.

“촌장이 마을 회관에 방어용 결계가 설치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거대한 도시에 속하지 않은 작은 마을은 마물의 습격에서 자력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때문에 마물의 습격에 대비해 주술석 결계를 설치해 둔 건물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었고, 이곳의 방어 거점은 마을 회관이었다.

그가 제 뒤쪽에 서 있던 레이린을 돌아보며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아르망은 지금쯤 촌장을 돕고 있을 겁니다.”

아르망은 피곤으로 다 죽어 가는 얼굴로도 기사들의 사이에서 연신 술을 들이켜댔었다. 결국 속을 거하게 한 번 게워내고 뻗어버린 그는 촌장의 집으로 옮겨졌다. 그러니 아마 습격이 시작되자마자 깨어나 촌장과 함께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에드윈이 말을 이었다.

“그들과 합류해서 10분 내로 모든 사람을 마을 회관으로 대피시키십시오.”

차갑게 굳은 짙푸른 색의 눈이 레이린을 향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무거운 물음이 떨어졌다. 그에 레이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녀가 나직이 답을 읊조렸다.

“알겠습니다. 부디.......”

무사하시길.

그리 말을 맺고 몸을 돌리려던 찰나. 손목이 가볍게 붙들림과 동시에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고 얇은 손목을 붙든 에드윈이 또렷한 시선으로 그녀를 직시했다.

“당신은 내 사람이라고 했던 말.”

“.......”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족쇄처럼 손목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꿈인 듯 떨어져 나갔다.

무감하게 몸을 돌린 에드윈은 순식간에 기사들의 사이로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캬아아악!

은빛 검이 허공을 가르자마자 마물의 비명이 들려오며 허공으로 피가 솟구쳤다. 잠시 굳어 있던 레이린은 이내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뒤돌아 뛰었다.

숨이 조금 가빠질 만큼 빠른 속도로 마을을 가로지르길 얼마간. 저 멀리서 허둥지둥 움직이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선배님!”

가쁜 호흡 탓에 옅게 얼굴을 찡그린 레이린이 목소리를 높이며 외쳤다. 그러자 정신없이 사람들을 인솔하던 아르망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레이린!”

놀란 얼굴의 그가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왔구나. 영주님께서는?”

“기사분들과 시간을 끌고 계십니다. 10분 안에 마을 회관으로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해요.”

레이린의 말을 들은 아르망은 시간을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좁히더니 중얼거렸다.

“10분이면...... 조금 촉박하네. 얼른 움직이자.”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 함께 사람들의 이동을 도왔다. 중간에 촌장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남은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이 드물지 않은 듯 마을 사람들은 당황해하면서도 침착했다.

“어, 엄마아.......”

“괜찮아.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레이린은 간간이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을 달래가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수월해도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마저 들 무렵.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레이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아까 보았던 광경이 불현듯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러자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언니?”

레이린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던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레이린은 소녀의 부름을 듣지 못한 채 미간을 좁혔다.

‘아까 분명.......’

엘빈이 그녀에게 다가오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마치 그의 움직임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리듯 짧게 울부짖었던 알라기스의 모습.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알라기스는 지능이 없어.’

당시에는 급작스러움에 정신이 없어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갔지만, 돌이켜보니 말이 되질 않았다.

최상위 마물의 경계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은 지능의 유무였다. 지난번 보았던 마물은 다른 마물들에 비해 확연히 높은 살상력을 가진 개체였기에 2급으로 분류되긴 했으나 지능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상력이 약한 마물이라도 그것이 지능을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짐승을 ‘토벌’하는 것과 괴물을 ‘상대’해야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으므로. 그러니 3급 마물인 알라기스에게는 그저 살육에 대한 본능만이 남아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아까 엘빈의 움직임을 막던 모습은 꼭....... 전술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와 같지 않았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벼락같은 불길함이 머리를 강타했다.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굳어지려는 얼굴을 애써 가다듬으며 몸을 숙였다.

“릴리.”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 애썼으나 아이의 귀에는 그 이면의 스산함이 느껴진 모양이었다. 어깨를 흠칫 떤 릴리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네......?”

그러자 어색한 웃음이나마 지어 보인 레이린이 주위를 슬쩍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혹시 회관 근처에 마을 밖으로 통하는 길이 또 있니?”

그녀는 물음을 던지는 그 순간에도 속으로는 아니라는 답이 돌아오길 바랐다. 이것이 제 터무니없는 비약에 그치기를 간절히 빌었건만.

“그, 뒷길이 하나 있긴 한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늘 그렇듯, 하늘은 그녀의 기대를 보란 듯 짓밟았다.

‘제기랄.’

레이린은 절로 튀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가까스로 목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소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있잖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레이린을 힐긋대던 릴리가 화들짝 놀라더니 답했다.

“네, 네?”

“이 마을에서 가장 용감하고 믿음직스러운 릴리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들어줄래?”

레이린은 선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입에 건 채 다정하게 속살거렸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마물이 어린아이를 꾀어내듯 다디단 말과 미소였다. 그야말로 입에 발린 칭찬이었지만, 어린아이 특유의 허영심을 자극하기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용감하고 믿음직스러운......!’

그리고 레이린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릴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져 내리더니 통통한 볼이 작게 씰룩였다. 소녀는 자꾸만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쓰듯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크흠.”

이윽고 가슴을 쫙 편 릴리가 으스대듯 어깨를 들썩이며 눈을 빛냈다.

“무슨 부탁인데요?”

레이린은 제 입 속으로 들어온 먹잇감을 보는 맹수처럼 웃고는 답했다.

“언니는 지금부터 뭘 좀 찾으러 갈 거야. 만약 10분 후에 머리가 눈처럼 흰 오빠를 만나게 되면, 다른 사람들 몰래 언니를 찾아와 달라고 전해 줄래?”

그녀는 이어서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결정타를 덧붙였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어른 대 어른으로서 하는 진지한 약속.”

어른 대 어른. 그 말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의심마저 모두 내려놓은 릴리가 손가락을 마주 걸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그래. 그럼 잘 부탁할게.”

릴리의 손을 놓아준 레이린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잠시 인파에 섞여드는가 싶던 그녀는 이내 건물 사이의 틈으로 뛰어들어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엷은 회갈색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만일 알라기스가 지능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맞다면.’

마을 입구에서의 공격은 그저 눈속임일 뿐이었다.

“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마을의 뒷길에 다다른 레이린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람이 황량한 대지 위를 스치며 내는 스산한 울음이 길게 메아리쳤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아이처럼 이리저리 배회하던 시선이 불현듯 멈추어 섰다. 곧이어 자조 섞인 중얼거림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어떻게 이런 예상은 틀리질 않는지.”

크르르르.

마을의 뒤편과 이어진 길의 저편. 수많은 알라기스가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마을로 접근하고 있었다. 무리의 가장 앞쪽에서 움직이던 알라기스가 레이린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순간 멈춰 섰다.

키이익!

다급한 울음소리가 짤막하게 허공을 울리자 알라기스들이 주춤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수십 쌍의 붉은색 눈에 당혹한 기색이 묻어났다. 영락없이 사람과도 같은 반응이었던지라 헛웃음마저 새어 나왔다.

해가 갈수록 마물들이 강력해지며 그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새삼. 정말 새삼스럽게도, 이 세상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피부에 훌쩍 와 닿는 듯해 조금 허탈했다.

‘이젠 3급 마물이었던 놈들까지 1급으로 올려야 할 판이군.’

레이린은 잠시간 미친 사람처럼 실소를 흘리다가, 문득 이를 갈았다.

‘그런데도 그딴 짓을 한다는 말이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반발심이 울컥 치솟았다. 자신이 전설 속 ‘금빛 인간’과 어떠한 관계가 있든, 설령 ‘신’ 그 자체였다고 한들.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이다. 신의 분노 이전에 어떠한 일이 있었든 간에, 지금의 레이린은 그저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잃고, 떠나보내며 죽음에 익숙해지고. 이제는 당장에라도 목숨을 끊고 싶다고 무수히 생각하면서도. 모순적이게도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삶을 갈망하는 ‘사람’.

한데 신이라는 작자는 제 손으로 저버린 이 세상에 대관절 무슨 미련이 남았기에. 어째서 잊을 만하면 또다시 누군가의 죽음을 보여 주며 그녀의 것도 아닌 죄책감에 끊임없이 허덕이게 만드나.

레이린은 길 저편의 알라기스 무리를 노려보며 사납게 입매를 비틀었다. 그녀의 주위를 감싼 공기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서늘한 살기가 허공으로 음습하게 퍼져 나갔다.

시리도록 차가운 얼굴의 레이린이 말없이 검을 뽑아 들며 검집을 내던졌다.

캉!

알라기스 무리의 앞쪽에 떨어진 검집이 땅에 한 번 부딪치고는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키야아악!

그 행동을 기점으로, 긴 울부짖음을 토해 낸 알라기스들이 일제히 레이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서늘한 눈으로 검을 고쳐 쥐며 생각했다.

신이 우리를 버렸다면.

‘그따위 신.’

이쪽에서도 저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이윽고 이를 악문 레이린이 제자리를 박차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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