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87)

* * *

현재 헤르기아스 대륙의 왕족은 단 두 명이었다. 현왕인 바로크 드 루에이리. 그리고 그의 유일한 자식인 아네트 드 루에이리 공주.

역대 왕들에게는 늘 후계자가 하나뿐이었다. 초대 왕 엘피스 드 루에이리 때부터 쭉 그래왔다. 그것이 왕족이 지닌 신성력 때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왕족은 단 한 명의 자식만을 낳을 수 있었으며 대개 그 자식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숨을 거두곤 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줄여 가며 사람들을 구하는’ 진정한 성자라며 받들었다.

“하지만 현왕은 성자라는 말과는 거리가 멉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레이린의 귓가를 간질였다. 흑마가 다각다각, 발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하나로 올려 묶은 긴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녀는 이제는 퍽 익숙해진 에드윈의 온기와 목소리에 덤덤히 귀를 기울였다.

“그는 역대 왕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왕권에 대한 욕심이 강합니다. 공주가 18세가 되는 올해까지도 본인이 모든 업무를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그 말에 레이린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잠자코 이어지던 생각이 부자연스럽게 정지했다. 마치 평탄한 길을 걷다가 갑자기 나타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불쑥 의문이 일었다.

왕권에 대한 욕심이 강하다는 말은 곧, 스스로가 모두의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에 집착한다는 뜻이었다. 한데 루에이리 왕가가 이 땅의 주인이자 성자라고 불릴지언정, 그들의 직할령인 호노라투스가 가장 살기 좋은 땅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현왕은.......”

레이린은 반신반의하는 어조로 말을 흐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그러자 평소보다도 부쩍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에드윈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담겼다.

그녀는 새파란 눈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반사적으로 호흡을 멈추었다.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난다고 한들, 저 눈빛.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집어 삼켜지는 것만 같은,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같은 저 눈빛에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레이린을 바라보던 에드윈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현왕은 유스티아를 굉장히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특히 나를.”

그의 목소리는 잘 쓰인 구절을 읊는 것처럼 무감정하기 그지없었다.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리던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비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신성력을 지녔다는 존재치고는 범인과 별다를 것 없이 치졸하네요.”

기실 왕가는 각 도시 영주들의 인정 위에 얹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대 왕 엘피스 드 루에이리는 오직 ‘신성력’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왕좌에 올랐다. 그것은 영주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신성력을 제공하는 대신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약속을 달리 말하자면, 신성력이라는 이유를 제외하면 그들을 왕으로 받들어야 할 어떠한 명분도 없다는 말이었다. 애초에 인품이나 능력 때문에 그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바로크 드 루에이리 본인의 능력이 뛰어났다면 모르겠으나, 애석하게도 그의 자질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다섯 영주를 모두 휘어잡을 만큼의 위엄조차 없으면서 남을 시기하기에만 바쁜 작자.

그는 ‘왕’이었다. 군주가 아니라 왕.

레이린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악의에 작게 입매를 비틀었다가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엷은 회갈색 눈이 일순 뒤쪽을 향했다.

‘오히려 이쪽이 더.......’

그 순간, 그들의 뒤편에서 말을 몰던 리오넬이 커다랗게 외쳤다.

“저기 마을이 보입니다!”

유스티아 일행은 호노라투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작은 마을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자그마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에는 이름이 없었다.

에드윈은 마을에 도착하기 전, 부단장인 리오넬을 먼저 보내 양해를 구하도록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흔쾌히 허락의 의사를 전달한 촌장이 인자한 웃음과 함께 일행을 맞이했다.

“머무시는 동안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변변찮은 것들이나마 최선을 다해 대접하겠습니다.”

레이린을 말에서 내려 준 에드윈이 담담한 얼굴로 가볍게 묵례했다.

“양해해 주어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그저 편히 머물다 가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촌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는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퀭한 얼굴로 죽어 가는 아르망과 달리, 쌩쌩한 낯의 기사들은 순식간에 마을 공터에 막사를 여럿 세웠다. 레이린은 제게 자그마한 막사 하나를 통째로 내어 주겠다는 리오넬의 말에 난색을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도 내내 신세를 졌는걸요. 저 하나 때문에 다른 분들께 폐를 끼칠 수는.......”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막사를 세우는 일이라도 돕고 싶었으나, 한사코 자신을 말리는 기사들로 인해 가끔 물건을 몇 번 옮겼던 것이 그녀가 한 일의 전부였다. 한데 개인 막사라니. 지나치게 과한 배려였다. 하지만 리오넬은 단정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영주님과 레이린 님, 아르망 님께서 회의에서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실 수 있도록 보필하는 것이 저희의 의무입니다.”

“.......”

“레이린 님께서는 저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상치 못한 말에 레이린은 잠시 말을 잃었다. 놀람으로 작게 벌어졌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하는 일들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첩자로서 이곳에 안전하게 남아 있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래서 레이린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제게 대가 없는 호의를 건네주는 이들을 속이고 있는 주제에, 그리 생각하는 것 자체가 기만이었으므로.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리오넬은 여전히 선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저희는 그저 저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니, 레이린 님께서는 어깨의 힘을 조금 빼셔도 됩니다.”

그는 다정한 어조로 말을 맺으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결국 레이린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그의 배려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름조차 없는 마을의 사람들은 낯선 이들에 대한 호기심과 호감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개중에서도 순진무구한 얼굴의 아이들은 독보적이었다.

“아저씨는 왜 머리가 이렇게 하얘? 우리 할아버지 머리보다 하얗다!”

“눈사람 같아!”

“아니야! 눈사람이 아니라 설탕이야!”

조그마한 아이들이 까르륵거리며 엘빈의 머리채를 덥석 움켜쥐었다. 고사리 같은 손에서 느껴지는 힘이 머리카락을 뽑을 듯 살벌했다. 심지어 몇몇은 서슴없이 그의 등이나 목에 올라타 “이랴!”하며 발을 휘적거리기도 했다.

열매가 맺힌 나무와도 같은 모양새로, 조그마한 아이들을 대롱대롱 매단 엘빈이 짐짓 눈을 부릅떴다.

“어허, 이 형은 사실 아주 무서운 사람이란다. 자꾸 이러면 화낼지도 몰라.”

퍽 으스스한 어조의 말이었다. 그러나 우악스러운 손길에 이리저리 뻗쳐 엉망이 된 머리를 한 모습으로 목소리를 낮춰 봤자 우스울 뿐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한 여자아이가 흥미로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무서워? 뭐가?”

“아주 무섭게 잘생긴 사람이라는 뜻이지.”

“꺄하학! 오빠 너무 웃겨!”

“이상하다. 웃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엘빈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미심쩍게 중얼거렸다. 그에 아이들이 한 번 더 폭소를 터트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레이린은, 아이들이 너덜너덜해진 엘빈을 두고 떠나자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잘 놀더라, 너.”

그녀는 짐짓 평온한 목소리로 칭찬인 듯한 말을 건넸다. 아이들의 손길에 뽑힌 머리카락을 시무룩하게 모으던 엘빈이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장난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매단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제야 내가 얼마나 자상한 남자인지 알겠어?”

“역시 정신 연령이 맞아서 그런가.”

“야!”

대놓고 하는 중얼거림에 엘빈이 발끈했다.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하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러자 드물게도 작게 키득거린 레이린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다 놀았으면 이만 제스 경한테 가 봐. 저녁 준비 문제로 할 말이 있는 것 같더라.”

레이린의 말을 들은 엘빈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빈정거렸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혹시 이따가 식사 중에 돌이 씹히는 것 같다면 착각이 아니라 제가 한 짓일 겁니다.”

엘빈은 제 할 말만 빠르게 내뱉고는 후다닥 도망쳤다. 그 뒷모습에 대고 잘게 웃음을 터트리던 레이린은 문득 귓가를 간지럽히는 천진한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을 말해. 땅굴 두더지는 이빨이 마흔다섯 개라니까.”

“으으, 징그러워.”

엘빈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사라졌던 아이들이 마을 입구에 모여 놀고 있었다. 그들은 나뭇가지와 풀잎으로 흙바닥에 장난을 치며 무언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선한 눈으로 연신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괜스레 정겨웠다.

레이린은 무의식중에 미소를 띤 채로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입구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점차 가까워질수록 희미하게 들리던 흥얼거림이 또렷해졌다.

“......네.”

“이 땅의 불행한 자.......”

레이린의 입가에 어려 있던 미소가 차츰 사라졌다. 그와 반대로 엷은 회갈색 눈동자는 점차 경악으로 확장되었다. 아이들을 향해 다가가던 발걸음이 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완전히 멈추었다.

“......날개 없는 신이 너희를 위해 왔다네.......”

맑은 목소리가 읊조리는 가락이 귓가를 파고들자마자 뒷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저 노래는.......’

지금 아이들이 흥얼거리고 있는 노래. 그것은 레이린이 곧잘 흥얼거리곤 하는 가락과 정확히 일치했다. 언제, 어디에서 알게 되었는지조차 기억에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노래.

언제나 아무런 의미 없는 가락이라고만 생각했다. 제목은커녕 가사조차 떠오르지 않아, 그저 되는대로 엮어 만든 조잡한 가락일 뿐이겠거니 했건만. 지금 아이들이 부르고 있는 노래는 그녀의 흥얼거림을 고스란히 구체화 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게 어떻게?’

경악이 가시자 찾아든 것은 짙은 의문이었다.

레이린은 표정을 굳히지 않으려 애쓰며 아이들을 향해 다가갔다.

“좋은 노래구나.”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 애쓴 덕에 퍽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노랫소리가 뚝 그쳤다.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레이린을 발견한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웅성거렸다.

“어, 그 누나다!”

“맞아! 아까 재미있는 아저씨들이랑 같이 온 언니야. 그렇지, 릴리?”

“그건 재미있는 게 아니라 웃긴 거야.”

“아하.”

아이들은 저들끼리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더니 레이린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아직 아이다운 눈에 깃든 것은 순수한 호기심과 호감이었다.

레이린은 그중에서도 ‘릴리’라고 불린,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녀와 시선을 맞추며 몸을 낮추었다. 이내 조심스러운 물음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혹시 이 노래를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고 있니?”

말끝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약간의 초조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를 몇 번이나 위험에서 구해 주었던 본능이 심상찮은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마치 이 노래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레이린은 숨마저 죽인 채 릴리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때, 낯선 음성이 불쑥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노래에는 주인이 없습니다.”

흠칫 어깨를 떤 레이린이 숙였던 몸을 바로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낮과 다름없이 인자한 미소를 띤 촌장이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이제 곧 완전히 어두워지겠구나. 오늘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거라.”

“히잉, 더 놀고 싶은데.......”

몇몇 아이들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시무룩하게 입술을 비죽이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촌장은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거다. 아이들을 집까지 바래다줄 수 있겠느냐, 릴리?”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릴리가 짐짓 의젓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곧 소녀의 지시에 따라 손을 맞잡은 아이들은 기다란 줄을 이루며 마을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촌장이 레이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직하고도 담담한 목소리가 보랏빛 하늘을 배경으로 울려 퍼졌다.

“조금 전에 물어보셨던 노래는 오래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민요입니다.”

그 말에, 아이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레이린이 촌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달싹였다.

“민요......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촌장은 가볍게 숨을 들이켜며 먼 곳을 응시했다. 주름이 진 눈가 아래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혀졌다.

완전한 어둠이 주위를 뒤덮기 전에 찾아드는 황혼. 땅 아래로 모습을 감춘 태양의 파편처럼, 황폐한 땅 위로 황금색의 빛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오래전.”

그는 그 빛을 응시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신께서 이 땅과 인간을 버리신 것보다도 아주 오래전에.......”

차분하게 이어진 말이 천둥처럼 귓전을 울렸다.

“이 땅에는 온통 금빛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쿵.

레이린은 심장이 그대로 내려앉는 듯한 느낌에 숨을 멈추었다. 거센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찰나 호흡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탄식처럼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사람에게서 나타날 수 없다고 여겨지는 황금색. 태어날 때부터 레이린 자신이 지니고 있던 그 빛깔.

그 색을 지닌 인간이.

‘또 있었다고?’

조금 전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도 이 정도로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한순간 머리가 아찔해지는 느낌에 레이린이 소리 죽여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손은 어느새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들은 늘 소리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더군요.”

촌장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동요 없이 말을 이어 갔다.

“병마에 고통받던 자도, 스스로조차 감당할 수 없는 미움에 잠식당해 주위를 향해 검을 휘두르던 자도. 그들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병이 낫고 평온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

“마치 ‘신’처럼 말입니다.”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그 말을 곱씹었다.

‘......신.’

맨 처음 이 대륙과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지고의 존재이자 모든 것의 기원. 그리고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버린 존재.

촌장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신의 분노가 대륙을 휩쓴 이후로, 더는 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먼 곳을 응시하던 그가 다시금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말을 맺었다.

“이제는 모두 옛이야기일 뿐이지만요.”

인자한 미소를 짓던 그가 문득 탄식했다.

“이런. 오랜만에 손님을 맞이해서 그런지 말이 길어진 것 같군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촌장이 난처한 얼굴로 사과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레이린은 꽉 막힌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러자 안심한 듯 웃음 지은 촌장이 마을 쪽으로 몸을 돌리며 손짓했다.

“다행입니다. 그럼 늙은이의 재미 없는 수다는 이쯤 하고 이만 저녁 식사를 하러 가시지요. 꽤 맛 좋은 술을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이내 자그맣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레이린은 제자리에 선 채 멀어지는 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친 풍랑이 일 듯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정처 없이 떠돌았다.

‘금빛 인간. 신의 분노.’

그 두 가지 단어를 반복해서 곱씹던 레이린의 눈이 깊이 침잠했다.

신의 분노가 대륙을 휩쓸기 이전. 살아 있는 낙원으로 불리었다던 헤르기아스 대륙.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때의 기록은 대부분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지만, 어째서일까. 지워진 역사 속에서 제 존재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강하게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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