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다. 레이린은 그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무슨 돌덩이도 아니고.......’
본래 레이린은 에드윈에게 오브리 샌더슨을 업게 하고, 자신이 앞장서 길을 살피며 빠르게 탈출할 생각이었다. 출구에 다다르자마자 도망칠 것을 생각하면 그편이 안전했다.
그녀가 간과한 것은, 정신을 잃은 건장한 기사의 몸은 어지간한 성인 남성 두 명의 무게에 육박한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오브리 샌더슨은 클로비스 기사단 전체와 비교해 보았을 때도 가장 덩치가 큰 축에 속했다.
결국 에드윈과 레이린은 오브리의 팔을 양쪽에서 각각 어깨에 걸친 채로 이동했다. 가끔 사람의 기척이 들려올 때면 잠시 몸을 숨겼다가, 인기척이 사라지면 복도를 통과해 계단을 오르기를 반복했다.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레이린은 바깥과 이어진 문이 있는 복도를 따라 걸으며 슬슬 도망쳐야 하나 고민했다. 그때, 반대쪽에서 에드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도망치려 한다면.”
“.......”
“팔다리를 모조리 잘라 내서라도 막을 겁니다.”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렇게 섬뜩할 수가 없었다. 윈프리드의 어중이떠중이들보다도 점잖은 협박이었으나 차원이 다른 무게감이었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당겨 물었다. 형태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을 스멀스멀 잠식했다. 무의식중에 걸음이 우뚝 멎었다. 그 행동에 멈칫한 에드윈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푸른색의 눈은 어둡게 깊어져 있었다.
“애초에 사람이라는 것도 의심스러운데.”
에드윈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힐긋 일별하더니 빤히 시선을 맞춰 왔다. 황금빛 눈동자를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레이린은 당혹감에 고개를 홱 돌리며 발을 뗐다. 그러자 등 뒤에 잠시 머물러 있던 시선은 곧 사라졌다.
이윽고 출구까지 서른 걸음쯤을 남겨 두었을 때였다. 레이린이 천장을 힐긋 올려다봄과 동시에, 저 멀리서 성난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저기! 저기 있다! 탈출 못 하게 막아!”
험악한 얼굴을 한 사회자가 등 뒤에서 빠르게 달려왔다. 그의 뒤로 손에 무기를 쥔 직원들이 우르르 발을 굴렀다. 한순간 시선을 교환한 에드윈과 레이린이 곧장 출구를 향해 달렸다. 빠르게 출구에 다다른 레이린이 문을 열어젖히자, 에드윈이 오브리의 몸을 끌어당기며 거리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에드윈의 몸이 복도를 빠져나가는 순간. 레이린은 오브리의 몸을 제게서 떨어트리며 그대로 거리를 향해 밀쳤다. 커다란 몸이 바깥으로 휘청거리며 기울자, 에드윈은 본능적으로 그를 받아 들었다.
시간이 느려진 듯한 감각 속. 점점 좁아지는 문 틈새로 푸른색의 눈과 황금색의 눈이 정확히 서로를 직시했다.
“당신......!”
에드윈이 문 너머로 사라져 버린 사람을 향해 채 분노를 토해 내기도 전.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오며 건물이 위쪽부터 무너져 내렸다.
경매장에 설치해 둔 주술석이 일제히 폭발하는 순간, 레이린은 출구 오른쪽의 하수도 입구를 향해 곧장 뛰어들었다. 그 길로 반대편 골목길을 통해 건물을 빠져나온 그녀는 미친 듯 내달려 여관으로 돌아왔다.
레이린이 호흡을 고를 틈도 없이 매무새를 가다듬자마자 에드윈과 엇갈렸던 엘빈이 들이닥쳤다. 그는 숨을 가볍게 몰아쉬는 그녀를 보고 조금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샌더슨 경 때문에 내내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가 봐.”
레이린은 대강 얼버무렸다.
다행히 엘빈은 오브리를 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그쪽에 정신을 쏟느라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레이린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그 후, 유스티아 일행은 동이 트기 전 신속하게 마티아스를 빠져나왔다. 레이린은 남몰래 에드윈의 눈치를 보았으나 무표정한 얼굴은 감정 한 올 드러나지 않았다.
마티아스로 달려올 때만큼이나 신속하게 이동한 그들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클로비스 저택에 다다랐다.
“샌더슨 경!”
“세상에, 지금 당장 주치의 선생을 불러오겠습니다!”
놀라 달려 나왔던 사람들은 이내 조금 전보다도 기겁한 얼굴로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택에 하나둘 불이 밝혀지고, 영주 일행의 귀환 소식은 이윽고 서쪽 별채를 넘어 기사단 숙소에까지 전해졌다.
“주치의는 아직입니까.”
“지, 지금 일어나셨습니다!”
후드를 벗어 던진 에드윈은 패트릭과 함께 오브리를 둘러멘 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레이린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달려온 아르망과 함께 그 뒤를 따랐으며, 엘빈은 당장에라도 본채로 몰려들려는 기사들을 막느라 1층에 남았다.
2층 바깥쪽에 마련되어 있는 병실의 문을 열고 그 안의 침상에 오브리를 눕히는 사이, 하인트에게 멱살이 잡혀 깨어난 주치의가 가운조차 입지 않은 채로 달려왔다. 잠시 허둥대던 주치의는 이내 무섭도록 집중한 얼굴로 오브리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폈다. 긴장된 침묵이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기사들을 숙소로 돌려보낸 엘빈이 뒤늦게 방 안에 들어서고, 패트릭의 이마 위로 구슬땀이 흐를 무렵. 주치의가 의자에 바로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회복이 아예 불가능한 상태는 아니십니다. 그래도 오늘 밤이 고비일 것 같으니 제가 내내 곁에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
엘빈은 주치의의 말이 끝나자마자 짙은 탄식을 내뱉으며 옆 침상에 주저앉았다. 패트릭 또한 거친 손바닥에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레이린은 빠르게 뛰는 심장 위로 가만히 손을 올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불안을 동반한 고동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왔다.
‘이제 된 건가?’
정말 이렇게 쉽게...... 변했다고?
분명 상황은 낙관적이었지만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었다.
레이린이 멍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던 에드윈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차가운 색의 눈이 의심을 담아 오브리의 몸을 몇 번이고 훑어보았다. 그가 주치의를 돌아보며 낮게 말했다.
“다시 살펴보십시오.”
“예, 예?”
“다시 살펴보라 했습니다.”
에드윈은 헛것을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단호하게 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엘빈과 패트릭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주치의 또한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뎅- 뎅- 뎅-
그 순간,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동시에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던 오브리가 눈을 번쩍 뜨며 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끄윽! 컥, 커흑......!”
“새, 샌더슨 경! 정신 차리십시오!”
“오브리! 손에 힘을 빼라! 이게 뭐하는 짓이야!”
오브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주치의와 패트릭이 놀라 오브리의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그의 손은 목덜미에 뿌리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오브리는 꺽꺽 소리를 삼키며 이것이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는 듯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려 했다.
“제, 끅, 아니.......”
털썩.
오브리의 고개가 툭 기울어졌다. 목을 틈 없이 조르던 손이 스르륵 풀려나와 침상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텅 빈 눈동자는 멍하니 천장을 향한 채 움직임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가운데, 레이린이 무의식중에 입술을 달싹였다.
......샌더슨 경?
* * *
뎅- 뎅- 뎅-
“자정은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라지.”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커다랗게 귓전을 두드렸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주홍색 불빛이 아롱거리는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기다란 의자에 나른히 기대어 있던 이드리스는 붉은 입술을 모아 후, 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술 새로 길게 뻗어져 나온 연기가 어둠 위로 옅게 흩어졌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샹들리에에 매달린 검은 보석들에서부터 주홍색 불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른하게 웃음 지은 그가 손가락으로 담뱃대를 톡톡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지금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으려나? 우는 모습도 썩 궁금하긴 하지만.......”
이드리스가 어둑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냈다. 기분 나쁠 만치 선명한 푸른색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 그는 곱게 눈을 휘었다.
“뭐든 간에 죽어 버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는걸.”
그렇게 쉽게 죽어 버리면 공들여 준비한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겠나.
“그러니까 부디 고통스럽게 살아 있어 달라고.”
아주 오래도록 말이야.
* * *
“......돌아가셨, 습니다.”
주치의가 오브리의 목을 더듬거리더니 숨 막힌 목소리를 흘렸다. 실핏줄이 터져 형형한 눈을 한 패트릭이 주치의를 밀쳐 내고는 오브리의 심장 박동을 재차 확인했다. 하지만 몇 번을 그리한다 한들 멈춰 버린 심장이 다시 뛸 수는 없었다.
“이게, 왜, 어째서.......”
엘빈은 넋이 나간 채로 연신 중얼거렸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은색 머리칼이 눈을 찔러댔지만 그는 그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린은 멍하니 오브리의 시신을 응시하다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몸 안에서 한순간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주술?’
그 순간, 둔탁한 충격이 머리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아.’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이쪽을 불러들였구나. 이렇게, 가장 안도하고 있는 순간에 소리 없이 들이닥쳐서 목을 조르려고.
‘그래서.’
주술, 주술, 주술. 같은 단어만을 강박적으로 되뇌던 레이린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지금껏 기척조차 없던 에드윈이 낮게 말했다.
“......시신을 수습해라.”
에드윈은 짤막한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몸을 돌려 방을 벗어났다. 방문 너머로 흐트러진 뒷모습이 사라지기까지는 눈 몇 번 깜짝할 새조차 되지 않았다.
몇 초간 정지해 있던 레이린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의 뒤를 쫓았다. 이유를 생각할 새도 없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나온 행동이었다.
레이린은 그동안 한 번도 발을 디뎌 본 적 없는, 영주의 침실이 있는 6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녀는 사람이 오가지 않는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복도를 지나쳐 우아한 나무문 앞에 섰다.
“.......”
노크하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던 레이린이 우뚝 동작을 멈췄다. 잠시간 문을 바라보던 그녀가 노크하려던 손을 움직여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은 매끄럽게 열렸다.
이윽고 넓고 휑한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짙은 푸른색과 흰색, 검은색이 적절히 조화된 방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림처럼 싸늘했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레이린은 드넓은 방을 빙 둘러보았다. 그러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는 에드윈의 뒷모습을 발견한 그녀가 천천히 발을 옮겼다.
“영주님.”
조용한 부름에도 에드윈은 반응이 없었다. 조심스레 소파를 향해 걸어간 레이린이 고개를 숙인 그의 앞에 서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눈을 한 번 깜빡인 에드윈이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레이린은 또다시 이유 없는 충동에 따라 찬찬히 손을 뻗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흰 조각 같은 얼굴에 살짝 닿았다가, 이내 볼 전체를 감쌌다. 서늘한 손과 얼굴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누구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 시선을 맞추던 중. 단단한 팔이 레이린의 허리를 휘감아 그대로 끌어당겼다.
에드윈이 고개를 툭 기대자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복부를 간질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더운 숨에 섞여 흘러나왔다.
“그렇게나 내 믿음이 간절하고.”
“.......”
“그렇게도 내 사람이 되고 싶다면.......”
레이린의 손이 검은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았다. 피와 먼지가 어지럽게 엉겨 붙은 머리카락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더해졌다. 에드윈은 어둠에 잠식당하듯 눈을 내리감았다.
“죽지 마.”
실낱같은 속삭임이었지만, 천둥보다도 선명히 귓전을 때렸다.
레이린은 제 몸에 닿아 있는 온기를 한참이나 붙들고 있다가.
“응.”
끝내 스스로를 허물어트리며 속삭였다.
“그럴게.”
이 남자의 손에서가 아니라면 절대 죽지 않으리라. 그리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