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87)

* * *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거리를 뒤덮었다.

졸린 눈을 한 사람들이 하나둘 하루를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할 즈음. 마티아스의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경매장에서는 막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네, 30골드로 마감하겠습니다! 이 상품은 저쪽에 계신 신사분께 낙찰되었습니다! 열렬한 반응 보여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쾌한 목소리와 동시에 은색 종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울렸다. 흥분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제기랄!”

“저 새끼는 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야?”

“이봐! 이딴 시시한 것들 말고 진짜를 가져와!”

누군가 커다랗게 목소리를 키우며 외쳤다. 가면을 쓴 채 무대 위에서 종을 울리던 남자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진정하시죠, 선생님들. 조금 있다가 시작될 ‘진짜 경매’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니 지루하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자는 과장되게 무릎을 굽히며 관중을 향해 인사하고는 다음 경매를 진행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불만스럽게 혀를 차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남자의 말에 집중했다.

한편, 화려한 무대의 뒤쪽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정신없이 어둠 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조심해서 옮기라고! 떨어트리기라도 했다가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조리 팔아도 갚을 수 없을 테니까!”

“빨리빨리 움직여!”

“어이, 거기! 이것 좀 지하로 가져다 놔!”

“아, 알겠습니다!”

허둥지둥 움직이던 소년 하나가 큼지막한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늑장을 부렸다가는 혼이 날까 걱정하듯 주위를 힐긋대면서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복잡한 계단과 복도를 몇 번이나 지났을까. 소년은 음산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층에 다다라서야 발걸음을 늦추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긴 언제 와도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소년은 복도 저편에서 간간이 울려 퍼지는 울음을 무시하려 애쓰며 상체를 굽혔다. 그리고 한쪽에 쌓여 있는 상자들의 위에 들고 온 물건을 내려놓았다.

퍽!

“윽......!”

직후 거센 충격이 소년의 뒷목을 강타했다. 짤막한 신음을 흘린 소년의 몸이 상자 위로 무너지던 중,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온몸을 검은 천으로 휘감고 있는 이가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소년의 몸을 기대어 앉혀 놓았다.

그녀는 잠시 위쪽의 동태를 살피듯 천장을 잠시 바라본 뒤 문을 굳게 닫았다.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주술석의 불빛에 반사되어 황홀하게 반짝거렸다. 얼굴을 절반 넘게 가리고 있는 복면 너머로 드러난 눈은 선명한 황금색이었다.

온몸에 기이함을 휘감은 여인, 레이린이 차가운 눈으로 복도 저편을 바라보았다.

‘......저쪽인가.’

그녀는 간간이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는 복도 저편을 향해 소리 없이 움직였다. 회색빛 돌로 이루어진 벽에서는 오싹한 한기가 배어 나왔다. 기다란 복도에 자박자박 울려 퍼지는 발소리가 등 뒤를 쫓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모퉁이를 도는 순간.

“......!”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검은 복면 위로 드러난 황금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확장되었다.

한쪽 벽을 따라 줄지어 늘어져 있는 쇠창살과, 그 너머에서 숨죽이고 있는 수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절망의 색을 닮은 퀴퀴한 짐승 냄새가 훅 끼쳐 왔다. 호흡마저 멈춘 레이린이 미처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인족...... 혼혈?”

아주 먼 옛날. 신의 분노가 대륙을 휩쓸기 이전에 대한 역사는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몇몇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와 동화, 혹은 환상 속의 이야기로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수인족에 대한 이야기는 유독 인기가 많았다. 동물과 사람의 모습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인간보다 몇 배는 뛰어난 신체를 지녔다니. 너무나도 매혹적인 생명체가 아닌가.

하지만 신의 분노 이후, 수인족의 대부분은 목숨을 잃었다. 개중 가까스로 살아남은 수인이 인간과 연을 맺어 낳은 이들이 바로 ‘수인족 혼혈’이었다.

수인족 혼혈은 동물의 귀와 꼬리가 달려 있고, 보통의 인간보다 육체가 아주 약간 발달한 것을 제외하면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더불어 몇 세대를 거쳐 내려오며 그 피가 점점 옅어지자 이제는 동물의 귀와 꼬리를 제외하면 수인족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동물의 귀와 꼬리가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특이한 짐승으로 취급했다.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수인족 혼혈을 수집해 우리에 전시하는 비상식적인 유행마저 번졌다.

결국 살아남은 수인족 혼혈들은 인간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주했다. 이후 그들을 목격하거나 사로잡았다는 소식은 영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이 벌써 몇십 년 전의 이야기였다.

“.......”

레이린은 잠시 생각조차 잊은 채 멍하니 쇠창살 너머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그들은 열없이 서로를 감싸 안은 채 색색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때 무릎을 모아 웅크려 있던 소년 하나의 귀가 쫑긋 흔들렸다. 레이린의 기척을 느낀 것인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초점 없이 텅 빈 눈이 레이린을 향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모두 놓아 버린 듯 힘없는 눈빛은 거대한 운명 앞에 좌절한 사람의 것만 같았다. 그 눈빛 위로, 오브리 샌더슨의 시체를 앞에 둔 제 모습이 일순 겹쳐 보였다.

‘......운명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레이린이 복면 아래로 이를 악물었다. 마음을 굳힌 그녀가 성큼 발을 움직이며 입을 뗐다.

“살고 싶니?”

조용하지만 또렷한 목소리에 소년이 흠칫했다. 반쯤 넋을 놓은 채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 또한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누구?”

레이린은 쇠창살 바로 앞까지 다가가 바닥에 무릎을 대고 몸을 숙였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을 직시하며 재차 물었다.

“살고 싶니?”

“.......”

소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레이린은 초점 없던 소년의 눈에 물기가 번져 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살고 싶어요.”

꽉 잠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곧았다. 그제야 옅은 한숨을 내쉰 레이린이 속삭였다.

“그래.”

우리는 죽어 아름답게 박제되는 것보다, 추하더라도 생을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칠 것이다. 태양의 빛을 그대로 담아낸 황금빛 눈이 엷게 휘었다.

“도와줄게.”

“.......”

“다들 뒤로 물러나요.”

레이린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며 목소리를 키웠다. 수인족 혼혈들은 불안한 듯 서로를 힐긋거리더니 소년을 챙겨 벽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녀가 단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자물쇠를 향해 손을 뻗자 소년이 놀라 외쳤다.

“그거-”

파앗!

레이린의 손끝이 자물쇠에 닿은 순간, 불꽃이 일었다. 불꽃이 자물쇠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넘실거리며 레이린의 손바닥 전체를 뒤덮었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단검으로 자물쇠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살갗이 불에 그을리는 냄새에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기능을 잃은 자물쇠가 텅,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레이린은 통증이 이는 왼손을 무시한 채로 감옥의 문을 열었다. 어둠을 등 뒤에 두른 그녀의 눈이 노랗게 빛났다.

“이대로 곧장 여길 벗어나요.”

“하지만 위에는.......”

“이 건물은 곧 무너질 겁니다. 그 틈을 타서 도망가요.”

레이린은 이곳에 내려오기 전, 곳곳에 숨겨 둔 주술석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 말에 탈출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던 이들이 눈을 반짝 빛냈다. 평소와 같은 상황이라면 모를까, 혼란한 상황에서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그때 사람들의 뒤쪽에 몸을 감추고 있던 소년이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조금은 두려운 기색으로 레이린의 앞까지 다가간 그가 자그맣게 말했다.

“저, 보답은.......”

“괜찮아. 그러니까 어서 가.”

“그래도요.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하세요. 뭐든지요.”

레이린은 필요 없다고 내뱉으려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생의 의지와 희망, 선명한 호의로 반짝거리는 소년의 눈을 마주하자 어쩐지 거절의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졌다.

“......그럼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잠시간 고민에 잠겼던 레이린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여기서 검은 머리카락에 갈색 눈을 가진 남자를 본 적 있니?”

레이린은 수인족들을 모두 내보낸 후 어둑한 복도를 빠르게 내달렸다.

‘우리가 잡혀 오기 전에 여기에 있던 남자를 창고로 옮긴다는 말을 언뜻 들었어요.’

이곳이 아무리 ‘상품’을 취급하는 경매장일지라도 인간은 감옥 근처에 가두어 두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나. 그야말로 진정한 물건 취급이군. 레이린은 작게 비소를 흘리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이윽고 어느 방 앞에 우뚝 멈춰 선 그녀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자물쇠는 일부러 걸어 놓지 않은 건가?’

그렇다고 별도로 주술이 설치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여 조금 미심쩍었지만, 여유롭게 생각에 잠겨 있을 틈이 없었다. 이윽고 가볍게 심호흡을 한 레이린이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끼익-

나무가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심장이 긴장으로 쿵쿵 뛰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서서히 벌어지는 문 너머로 희미한 불빛과 함께 방 안의 풍경이 시야 가득 담겨 왔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

맞은편 벽에 한 남자가 묶여 있었다. 굵은 밧줄로 동여맨 전신은 멍이 들다 못해 썩어 가고 있는 것처럼 검었고, 상의를 걸치지 않은 몸과 얼굴에는 검붉은 피딱지가 가득했다.

레이린은 숨조차 멈춘 채로 남자의 모습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정신을 잃은 남자의 몸이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자 손에 힘이 턱 풀렸다.

‘살아 있어.’

아직 늦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레이린은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뗐다. 오브리의 바로 앞까지 다가선 그녀가 손을 뻗었다.

“윽.......”

상처가 나 있는 부분을 피해 조심히 어깨를 흔들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피딱지가 엉겨 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에 작게 흔들렸다. 이윽고 오브리의 눈꺼풀이 움찔하더니 서서히 올라갔다. 그가 엉망인 속눈썹 아래로 갈색의 눈을 멍하니 깜박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오브리는 무의식중에 시선을 올리다 말고 그대로 굳어졌다.

‘......유령?’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죽었나?’였다. 사실 굉장히 합리적이라고 할 만한 판단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어둑한 창고 안, 죽음을 몸에 두른 듯 검은 천을 휘감고 선 사람. 분명 땅바닥을 딛고 선 모양새는 사람일진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머금은 듯 빛나는 금색 머리카락과 눈.

오브리는 신, 혹은 사람 형태의 마물을 맞닥뜨린다면 꼭 이런 모습일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하며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사로서 명예롭게 자결하지도 못하고 이렇듯 붙들린 채로 치욕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운이 빠졌다.

‘주군께서는 무사하셔야 할 텐데.’

그 순간 옆구리에 강한 충격과 함께 격통이 느껴졌다.

“커헉!”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한 고통에 오브리가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몽롱했던 감각들이 순식간에 깨어나며 눅눅한 피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오브리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 한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사람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형체는 여전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오브리가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눈을 찌푸림과 동시에 눈앞의 형체가 움직였다.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일단은 사람의 형체를 한 그것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 손동작이 뜻하는 바를 이해한 오브리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일단 수신호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을 보니 마물은 아닌 것 같지만, 수상했다. 누가 보아도 의심이 갈 만큼 칭칭 싸맨 옷차림에, 애초에 저 황금색 머리카락과 눈부터 말이 되질 않았으니까.

오브리는 영 미심쩍은 기분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몸이 누더기 같긴 하지만, 탈출할 틈 정도는 만들 수 있겠지. 저쪽도 나름 눈에 띄면 안 되는 입장인 것 같고.’

결국 그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여기서 벗어날 때까지는 신세를 지도록 하지. 하지만 그때까지만이다.”

레이린은 그 무감정한 말에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 또한 클로비스 기사단의 누군가를 맞닥뜨릴 때까지만 오브리와 동행할 생각이었다. 괜히 그들의 눈에 띄어 불필요한 소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엘빈이 일 처리를 제대로 했다면 슬슬 주변에 도착했겠지.’

이윽고 레이린이 밧줄을 잘라 내기 위해 단검을 쥔 손을 뻗는 순간.

“......멈춰라.”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차가운 날붙이가 뒷덜미로 바싹 다가왔다.

에드윈은 마티아스에 숨어든 이후 곧장 기사들과 조를 나누어 수색을 시작했다. 하지만 패트릭과 함께 반나절이 넘도록 주위를 이 잡듯이 뒤졌음에도 오브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마티아스 귀족의 저택에 27번째로 숨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길. 어둑한 골목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고르던 패트릭이 신음을 흘렸다.

“벌써 해가.......”

그 말에 낡은 상자에 걸터앉아 있던 에드윈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의 새파란 눈동자가 보랏빛이 번져 가는 하늘을 유심히 응시했다.

“.......”

에드윈이 무표정한 얼굴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는 또다시 불쑥 치솟는 살의를 다스리려 애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런 식이라면 영원히 찾지 못해.’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에드윈은 현재 꽤 초조한 상태였다. 평소라면 종일 몸을 움직여도 피곤한 줄을 몰랐겠지만, 지금은 전신에 긴장감이 감돌아 그런지 약간의 피로감이 느껴졌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겠다면, 때로는 출발점부터의 경로를 살펴보며 문제를 찾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란다.’

문득 오래전 들었던 말이 귓가를 스쳐 갔다. 잠시 고민하던 에드윈은 이내 이드리스의 편지를 받았을 때의 상황부터 차근차근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길 잃은 개.......’

이드리스의 편지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드리스가 수많은 것 중 굳이 동물을 골라 비유한 이유는 모욕감을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애초에 오브리를 ‘사람’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으로 보였다.

‘사람이 아니다.’

에드윈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벼락이 내리꽂히는 듯한 직감에 뒷덜미로 소름이 돋아났다. 두서없는 생각들이 순식간에 뒤섞였다.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태도. 가지고 놀라며 던져 주었다는 것. 주인을 찾아 주려 한다는 말. 그 모든 것들이 한 가지 가정을 만들어 냈다.

“......패트릭.”

“말씀하십시오.”

“상태가 좋지 않은 물건을 어떻게 처리하지?”

“예?”

불쑥 튀어나온 물음에 패트릭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에드윈은 말없이 시선으로 답을 독촉했다.

눈을 도르륵 굴리던 패트릭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답을 짜냈다.

“글쎄요. 보통은 버리든가, 고물상에게 팔아 푼돈이라도 챙기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겠-”

그때 에드윈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놀란 패트릭이 엉거주춤하게 그를 따라 일어났다.

“주군?”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니다, 패트릭.”

“그게 무슨.......”

에드윈이 골목 안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패트릭이 주위를 경계하며 그 뒤를 따랐다.

어둠에 파묻힌 푸른 눈동자가 형형히 번뜩였다.

“우리는 ‘오브리 샌더슨’이라는 상품을 찾아야 하니까.”

에드윈은 그 길로 뒷골목을 뒤집었다.

그의 괴물 같은 무력을 목격한 이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정보를 토해 냈다.

‘스, 스컬트! 스컬트령의 경매장일 겁니다! 그곳이 거래량이 가장 많은 곳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패트릭에게는 기사들과 함께 다른 지역의 경매장들을 뒤져보라 명령한 후, 에드윈은 홀로 스컬트령의 경매장에 숨어들었다.

무대 뒤쪽에 쌓여 있는 상자들을 하나하나 뒤지던 중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우연이었다.

‘유스티아의 첩자라던 그놈은 제대로 잡아둔 거겠지? 그게 오늘 경매에서 제일 중요한 상품인데 도망치기라도 했다가는 곤란해져.’

‘그 넝마 같은 몸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도 확인은 해 보겠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에드윈은 곧장 직원의 뒤를 쫓아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직원이 어느 방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자 그를 기절시킨 뒤 주변의 빈 상자로 대강 덮어씌웠다.

에드윈은 숨을 한 번 고른 뒤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다가 우뚝 동작을 멈추었다. 푸른 눈이 문 너머를 들여다보듯 가늘어졌다.

‘......둘.’

에드윈은 방 안의 인기척이 둘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검을 뽑아 들었다. 문에 몸을 바짝 붙인 그가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들려오는 오브리의 목소리에 기이한 안도감이 스쳐 지나감도 잠시. 직후 선연한 황금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늘 무감하던 눈동자에 드물게도 격랑이 일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어째서.

“.......”

동요로 가득하던 푸른 눈이 차츰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지독히도 날카로운 얼굴을 한 에드윈이 그대로 발을 옮겨 여인의 목 뒤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예리한 날이 황금색 폭포 같은 머리카락을 지나 목 위로 다가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멈춰라.”

그 말을 기점으로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모든 움직임이 멎으며 옷깃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마저 아득히 멀어져 갔다.

“주군? 어떻게 여길.......”

한순간 굳어졌던 오브리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제게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여인의 목에 검을 더욱 바짝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셋을 셀 때까지 답이 없다면 죽이겠다. 하나.”

그는 미동 없이 멈춰 선 뒷모습을 날 선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늘 고요하던 속이 이유 모를 분노로 들끓었다.

처음부터 수상하기 그지없던 자였다. 돌연 나타나 조나단을 구해내고는 사라져 버리고, 사냥 대회에서도 절묘한 순간에 나타나 주술을 파괴하더니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는 오브리 샌더슨을 구하러 오기까지.

“둘.”

그 모든 일이 우연일 리가 없었다. 그러니 붙잡아 죽이거나 배후를 캐내어 이유를 묻는 것이 마땅했다. 누가 보아도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도 정당한 결론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윽고 고저 없는 목소리가 마지막 숫자를 짓씹듯 뱉어냈다.

“......셋.”

바로 그 순간. 여인의 몸이 뒤쪽으로 불쑥 기울어졌다. 예리한 날 위로 무게가 쏠리자 에드윈이 반사적으로 검을 물렸다.

그야말로 찰나였다. 눈을 한 번 깜빡이지도 못할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이 상대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검이 목에서 떨어져 나간 틈을 타 재빨리 몸을 돌린 세운 여인이 그대로 단검을 쥔 손을 내질렀다.

챙!

두 날붙이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에드윈은 자신이 한순간이나마 검을 휘두르는 것을 망설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에드윈이 왜 벌써......!’

한편 황금빛 이채를 휘감은 여인, 레이린은 쉼 없이 들이닥치는 공격들을 막아 내며 미친 듯 머리를 굴렸다.

그녀는 분명 엘빈을 내보내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식적으로 엘빈이 에드윈과 함께 이곳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더 지나야 했다.

‘빠져나가야 해.’

레이린은 제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칼날을 간신히 피하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에드윈이 오브리 샌더슨을 발견한 이상 한시라도 빨리 프리조프령의 여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만일 엘빈이 레이린보다 먼저 여관으로 돌아온다면 그대로 정체를 들키게 될 테니까.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레이린은 또다시 아슬아슬하게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검을 피해 몸을 움직였다.

수없이 짓쳐들어오는 공격 중 위협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에 다다른 자의 검이었다. 두려움과 놀라움을 오가는 감정이 발끝까지 퍼져 나갔다. 그래서일까. 지금껏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나들며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챙-!

“윽......!”

내리쳐지는 검을 튕겨내는 순간, 단검을 쥔 손이 한순간 흔들렸다. 레이린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작게 휘청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푸른 눈이 섬뜩한 빛을 냈다. 에드윈의 검이 그대로 레이린의 어깨에 박히려던 순간.

“주군! 멈추십시오!”

오브리가 있는 힘껏 내지른 소리가 창고를 가득 울렸다. 에드윈과 레이린이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자마자 오브리가 피를 왈칵 토해 냈다.

“그 사람은 적이, 욱, 아닙니다. 적어도 이드리스 프리조프의 사람은 아니에요. 저를 탈출시키려고 했.......”

힘겹게 말을 잇던 오브리의 눈이 뒤집힘과 동시에 그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에드윈이 미처 발을 떼기도 전, 오브리의 곁으로 달려간 레이린이 다급하게 그의 숨을 확인했다.

‘살아 있어.’

다행히 오브리는 정신을 잃은 것뿐이었다.

깊이 안도한 레이린이 떨리는 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눈빛을 한 에드윈을 향해 천천히 손을 움직여 보였다.

더 늦어지면, 이 사람은 죽는다. 레이린의 손동작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한 듯 에드윈의 미간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잡힌 검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제발.’

살릴 수 있게 해 줘. 레이린은 초조한 심정으로 에드윈과 시선을 맞췄다.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선명한 황금빛의 눈과 심해 빛깔의 눈이 서로의 속을 들여다보듯 시선을 맞추길 얼마간. 이윽고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팽팽히 긴장되어 있던 손이, 검 끝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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