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돌아가셨, 습니다.”
주치의가 오브리의 목을 더듬거리더니 숨 막힌 목소리를 흘렸다. 실핏줄이 터져 형형한 눈을 한 패트릭이 주치의를 밀쳐 내고는 오브리의 심장 박동을 재차 확인했다. 하지만 몇 번을 그리한다 한들 멈춰 버린 심장이 다시 뛸 수는 없었다.
“이게, 왜, 어째서.......”
엘빈은 넋이 나간 채로 연신 중얼거렸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은색 머리칼이 눈을 찔러댔지만 그는 그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린은 멍하니 오브리의 시신을 응시하다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몸 안에서 한순간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주술?’
그 순간, 둔탁한 충격이 머리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아.’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이쪽을 불러들였구나. 이렇게, 가장 안도하고 있는 순간에 소리 없이 들이닥쳐서 목을 조르려고.
‘그래서.’
주술, 주술, 주술. 같은 단어만을 강박적으로 되뇌던 레이린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지금껏 기척조차 없던 에드윈이 낮게 말했다.
“......시신을 수습해라.”
에드윈은 짤막한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몸을 돌려 방을 벗어났다. 방문 너머로 흐트러진 뒷모습이 사라지기까지는 눈 몇 번 깜짝할 새조차 되지 않았다.
몇 초간 정지해 있던 레이린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의 뒤를 쫓았다. 이유를 생각할 새도 없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나온 행동이었다.
레이린은 그동안 한 번도 발을 디뎌 본 적 없는, 영주의 침실이 있는 6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녀는 사람이 오가지 않는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복도를 지나쳐 우아한 나무문 앞에 섰다.
“.......”
노크하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던 레이린이 우뚝 동작을 멈췄다. 잠시간 문을 바라보던 그녀가 노크하려던 손을 움직여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은 매끄럽게 열렸다.
이윽고 넓고 휑한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짙은 푸른색과 흰색, 검은색이 적절히 조화된 방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림처럼 싸늘했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레이린은 드넓은 방을 빙 둘러보았다. 그러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는 에드윈의 뒷모습을 발견한 그녀가 천천히 발을 옮겼다.
“영주님.”
조용한 부름에도 에드윈은 반응이 없었다. 조심스레 소파를 향해 걸어간 레이린이 고개를 숙인 그의 앞에 서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눈을 한 번 깜빡인 에드윈이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레이린은 또다시 이유 없는 충동에 따라 찬찬히 손을 뻗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흰 조각 같은 얼굴에 살짝 닿았다가, 이내 볼 전체를 감쌌다. 서늘한 손과 얼굴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누구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 시선을 맞추던 중. 단단한 팔이 레이린의 허리를 휘감아 그대로 끌어당겼다.
에드윈이 고개를 툭 기대자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복부를 간질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더운 숨에 섞여 흘러나왔다.
“그렇게나 내 믿음이 간절하고.”
“.......”
“그렇게도 내 사람이 되고 싶다면.......”
레이린의 손이 검은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았다. 피와 먼지가 어지럽게 엉겨 붙은 머리카락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더해졌다. 에드윈은 어둠에 잠식당하듯 눈을 내리감았다.
“죽지 마.”
실낱같은 속삭임이었지만, 천둥보다도 선명히 귓전을 때렸다.
레이린은 제 몸에 닿아 있는 온기를 한참이나 붙들고 있다가.
“응.”
끝내 스스로를 허물어트리며 속삭였다.
“그럴게.”
이 남자의 손에서가 아니라면 절대 죽지 않으리라. 그리 다짐하면서.
5. 죄의 재림
유스티아의 남단에 자리한 힐데트령은 유스티아 내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풍요로운 곳이다.
힐데트 가문의 저택은 따스한 빛깔의 풍경을 뒤로 두른 그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른한 햇살이 쏟아지는 힐데트 저택의 정문 앞. 황금색 장미 덩굴에 휘감긴 검의 문양이 박힌 마차가 매끄럽게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려서는 청년을 향해 힐데트의 가주, 카힐라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영주님.”
“간만입니다, 힐데트 공.”
카힐라는 에드윈이 내민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에드윈을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레이린과 아르망 또한 카힐라를 향해 가볍게 예를 표했다.
그때, 카힐라의 뒤쪽에 서 있던 두 여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헤일리 힐데트라고 합니다.”
“베아트리스 힐데트입니다. 부디 편히 머물다 가시길.”
자매는 에드윈 일행을 향해 완벽한 자태로 예를 표했다. 숨소리의 결 하나하나마저 신경 쓰는 것처럼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 인사에 몸을 돌린 카힐라가 엄격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어서 들어가거라. 저번처럼 멋대로 수업을 빠지기라도 한다면 그 일에 따른 처벌은 모두 너희 밑의 사용인들이 감내해야 할 것이다.”
“......예, 어머니.”
어깨를 바짝 굳힌 헤일리와 베아트리스는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인 후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레이린은 무덤덤한 모습으로 저택을 향해 앞장서는 카힐라의 뒷모습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에드윈이 집무실에서 장부와 서류들을 살펴보는 사이, 아르망과 레이린은 거리 시찰을 위해 저택을 나섰다. 두 사람은 제각기 제1거리와 제5거리부터 차례로 돌아보기로 합의한 뒤 다른 길로 흩어졌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손에 들린 서류 뭉치를 무심한 눈으로 훑어보는 레이린의 귓가로 발랄한 목소리가 불쑥 파고들었다.
“이렇게 둘만 있는 것도 오랜만인데,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응.”
“야박하네. 뭐, 난 그런 점도 좋아하지만.”
엘빈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햇볕 아래 루비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이 사르르 휘어졌다. 그에 한숨을 푹 내쉰 레이린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며 그를 돌아보았다.
“계속 헛소리 지껄일 거면 사라져.”
“안 될 말이지. 아르망 님이 네 옆에 잘 붙어 있어 달라고 두 번이나 부탁하셨는데.”
“하여간 선배님은 왜 또 쓸데없는 소리를.......”
“기왕이면 좋게 생각해.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땐 날 핑곗거리로 쓰면 되잖아? 늘 그랬던 것처럼.”
엘빈은 무구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맺었다.
거리에 길게 늘어선 가판대를 즐거운 듯 두리번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저런 말을 이렇게 스스럼없이 하던가? 저 여우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서로를 이용하자는 암묵적인 합의하에 꽤 많은 시간을 공유했다. 서로의 가면 너머를 어느 정도는 훔쳐볼 수 있을 만한 시간이라는 얘기였다.
본래 엘빈의 성격대로라면 핑곗거리가 되어 주는 대신 대가를 요구하며 치근덕거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치 대가 없이 이용당해 주겠다는 듯한 저 말.
“.......”
알 수 없는 기분에, 레이린은 신이 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시선을 눈치챈 엘빈이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며 레이린의 어깨 위로 제 팔을 올렸다.
“왜? 이렇게 밝은 데서 보니까 새삼 잘생겨 보여?”
“꺼져.”
착각이군. 질린 듯한 눈을 한 레이린은 엘빈의 팔을 쳐내다 말고 멈칫했다. 잿빛이 감도는 갈색 눈이 거리 저편에 고정된 채 가늘어졌다.
‘저 사람은 분명.......’
한동안 이어진 침묵에 엘빈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뭐라도 있어?”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혹시 헛걸음하는 걸까 봐 그러는 거니까 따라오겠다는 소리 하지 말고.”
단호히 내뱉은 레이린은 순식간에 인파를 뚫고 사라졌다. 미처 잡을 새조차 없이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그때, 제자리에 남겨진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엘빈의 표정이 돌변했다.
“......역시 헛짓거리였나.”
엘빈은 작게 입을 비죽이며 애꿎은 땅을 발끝으로 툭툭 찼다. 조금 전과는 명백히 다른 온도를 띤 얼굴의 그가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어느새 엘빈이 레이린의 존재를 알게 된 지도 두 달이 조금 넘게 지났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적령의 후계자로서 철저하게 교육받아온 그에게는 충분하다 못해 남아돌 만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레이린 아제트리아라는 사람은 그런 엘빈에게조차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항상 얼굴 위로 두꺼운 가면을 여러 장 쌓아 올린 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 수많은 가면 너머로, 한 가지나마 확실하게 알아낸 것이 있다면.......
‘이상한 부분에서 너무 물러.’
레이린은 대가 없이 주어지는 호의에 약했다. 지나칠 정도로. 하여 제 성미와는 영 맞지 않는 모습이나마 흉내 내어 보았다. 나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듯이, 이것은 때 한 점 묻지 않은 순백의 호의라는 듯이. 물론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으나, 조금은 진전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아니, 요즘 영주와의 분위기가 영 심상찮아 보여서 나도 모르게 조급해졌던 건가.’
엘빈은 스스로의 한심함에 작게 혀를 찬 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후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며 자꾸만 흘러넘치려는 마음에 단단히 빗장을 채웠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자. 대책 없이 서두르다가는 될 일조차 그르치게 되는 법이니까. 엘빈은 늘 마음에 새기곤 하는 말을 되뇌며 발을 옮겼다. 레이린이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말하기는 했으나,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도 일인지라 아예 한쪽으로 물러나 있으려는 심산에서였다.
엘빈이 가판대 사이의 빈 곳을 발견하고 한 걸음을 떼는 순간. 맞은편에서 다가온 이와 그의 어깨가 세게 부딪쳤다. 그는 제 코앞까지 다가선 사내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윽, 당신 뭐.......”
“배에 구멍 나기 싫으면 입 닥치고 따라와.”
엘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커다란 후드를 눌러써 반쯤 가려진 얼굴에서 시선을 내리자, 기다란 로브 자락 안쪽으로 예리한 빛을 내는 날붙이가 눈에 들어왔다. 현재 엘빈은 유스티아의 주민이라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는 클로비스 기사단의 제복 차림이었다.
그러니 시답잖은 강도는 아닐 테지만, 적령의 길드원이라고 하기에는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적령의 수장이 공인한 후계자였으므로.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경우 없이 행동한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하늘 같은 형님에게 이 무슨 버릇없는 짓이냐, 아우야.”
엘빈이 사납게 입매를 뒤틀며 비소를 흘렸다. 그러자 그에게 칼을 겨누고 있던 이가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살짝 들어 올려 보였다.
기분 나쁠 만큼 닮은 붉은색 눈.
“뻔뻔한 건 여전하네. 근본 없는 도둑놈 주제에.”
엘빈의 배다른 동생, 노아 키스티엘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웃음 지었다.
굳이 이목을 끌어 좋을 것이 없었기에 엘빈은 순순히 노아를 따라 어둑한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보이지 않는 곳에 각각 자리한 그림자들이 서로를 경계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엘빈은 제 그림자들에게 함부로 나서지 말라 경고한 뒤, 짐짓 여유로운 모습으로 낡은 나무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달랑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나들이라도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골목의 그림자에 완전히 몸을 감춘 노아가 한 손을 들어 올려 후드를 젖혔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 아래 자리한 붉은 눈이 섬뜩한 빛을 냈다. 엘빈은 조금은 앳된 얼굴의 노아를 바라보며 천진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야? 요즘 영감들한테 꼬리 흔드느라 바쁜 것 같더니.”
“분수도 모르고 나불대는 혓바닥은 여전하군.”
“넌 여전히 자기 주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애송이고.”
“이게.......”
노아는 반사적으로 이를 드러내며 로브 안쪽에 넣어 둔 단검을 꺼내 들었다. 어둠에 몸을 숨긴 그림자들마저 당장이라도 달려 나올 것처럼 팽팽해진 분위기를, 여유로운 웃음의 엘빈이 끊어 냈다.
“해 봐.”
“......내가 못 할 것 같아?”
“그러니까 해 보라고. 길드장이 공인한 후계를 손수 찢어놓은 사생아라. 참 좋아하시겠어, 안 그래?”
엘빈은 비웃음을 감추려 하지도 않은 채 도발하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에 형형한 눈을 한 노아가 이를 갈며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
긴장된 침묵이 얼마나 지났을까. 노아는 입 안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어 뱉으며 단검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챙, 소리와 함께 엘빈의 옆얼굴을 스쳐 지나간 단검이 벽에 튕겨 바닥을 굴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빈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보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 그가 골목 바깥을 힐긋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본론만 말해. 너 같은 거에 기운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쯤이면 레이린이 돌아올 법한 시간이었다. 엘빈은 짜증과 귀찮음이 그득한 얼굴로 노아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있던 노아가 돌연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아직 귀가 맛이 갈 나이는 아닌데, 희한한 소문을 좀 들어서 말이지.”
“소문이라. 사람을 붙였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는데 말이다.”
“친애하는 ‘차기 길드장’님께서, 웬 같잖은 계집 하나에 홀려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려고 할 만큼 머저리가 되어 버렸다는 소문 말이야.”
“.......”
지금껏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던 엘빈의 입술이 처음으로 다물렸다. 은빛 머리칼 아래의 붉은 눈동자가 아침을 맞이한 태양처럼 서서히 몸집을 키웠다. 그것을 기회라고 여긴 것인지, 노아는 한껏 의기양양한 미소와 함께 앞으로 한 발을 떼었다.
“이 사실을 아버지께서 아시면-”
“세 살짜리 애도 아니고, 먹을 거에 홀리기라도 했나 싶어서 찾으러 다녔더니.......”
귓가에 한숨 같은 속삭임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노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허공을 가르던 주먹이 무언가에 붙잡힘과 동시에 세상이 뒤집혔다.
쿵!
“......어?”
노아가 얼빠진 신음을 흘렸다. 이내 등 전체로 알싸한 통증이 퍼지고 저 멀리 청명한 빛깔을 띤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미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린 그의 시야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쳐들었다. 후드를 깊이 눌러쓴 인영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둑한 모자 그림자 아래로 가려진, 엷은 잿빛을 띠는 머리카락과 눈. 보고로 들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외양에 노아가 눈을 부릅떴다.
레이린은 곱게 눈을 휘며 상냥히 속삭였다.
“같잖은 벌레가 있었구나.”
노아는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고 그대로 굳어졌다. 노골적인 모욕의 말이 귓가로 파고들기 이전, 시야에 비친 기이한 미소가 뇌리를 먼저 장악했다.
화가가 공들여 그린 초상화처럼 소름 끼치게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단지 분위기. 바싹 메말라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한 장미 꽃잎 같은. 혹은 실바람에 일렁이는 촛불 같은 그 미소에서 이상하리만치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너.......”
레이린이 그 시선에서 이채를 느끼고 눈을 가늘게 좁힘과 동시에, 상자에서 뛰어내린 엘빈이 굳어진 얼굴로 노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그림자 뒤로 레이린이 반쯤 가려졌다. 눈살을 찌푸린 레이린이 엘빈의 등을 어깨로 툭 건드렸다.
“......뭐하는 거야?”
“괜히 저 새끼랑 같은 공기 들이마셨다가 멍청함이 옮을지도 모르잖아.”
“쟤나 너나 별다를 건 없어 보이는데. 가만히 있으랬더니 왜 이런 데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건데?”
“그건 내 탓이 아닌...... 잠깐, 쟤랑 나랑 똑같다고? 농담이지?”
레이린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자 엘빈이 발끈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노아가 퍼뜩 땅을 박차고 일어났다.
‘뭐였지, 방금?’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노아는 완전히 넋을 놨었다.
노아는 적령의 길드장조차 그 존재를 모르고 있던 사생아였다. 어미마저 그를 돌보지 않아 뒷골목에서 아득바득 살아남으며 깨달은 것은, 사람의 목숨이 지극히 찰나에조차 엇갈릴 만큼 위태롭다는 것이었다.
하여 늘 주변을 경계하며 살았다.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으려 아득바득 애를 써서 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런 스스로에 약간의 자부심마저 느껴 왔건만. 조금 전의 일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노아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이유 모를 분노에 형형하게 눈을 치켜떴다. 치기 어린 시선은 정확히 레이린을 향한 채였다.
“레이린 아제트리아, 당신.......”
“초면에 연장자 이름부터 따박따박 불러제끼는 버릇부터 고쳐야겠구나, 꼬마야.”
레이린은 퍽 상냥하게 타일렀으나, 그렇지 않아도 제 분기를 못 이기고 씩씩대던 노아에게는 더없는 모욕이었다.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이를 빠득, 간 그가 품에서 날붙이 여러 개를 꺼내 달려들었다.
“이게 미쳤나!”
쐐액,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날붙이가 공기를 갈랐다. 노아가 땅을 박차자마자 엘빈을 옆으로 밀쳐낸 레이린이 가볍게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노아가 레이린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가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공기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찢겨 나갔다. 어지간해서는 피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하지만 레이린은 따분한 얼굴로 한 걸음씩 움직여 공격을 흘려낼 뿐이었다.
엘빈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구는 그림자들을 진정시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아는 연달아 몸을 피하기만 하는 레이린의 모습에 입매를 비틀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하! 아까는 뭐 대단한 것처럼 굴더니-”
“안타깝지만.”
조곤조곤한 말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노아의 지척으로 파고든 레이린이 그의 손목을 붙잡아 꺾으며 무릎을 거칠게 걷어찼다.
“큭!”
눈앞이 아찔해지는 고통에 숨을 헉 들이켠 노아의 한쪽 다리가 휘청거리며 무너져 내렸다.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그의 손에 들린 날붙이는 정확히 제 주인의 목 한가운데를 겨냥하고 있었다.
“너 같은 건 녹스에서 장난감 정도도 못 돼.”
레이린이 장난치듯 손을 움직이자 날붙이가 노아의 목 위로 원을 그렸다. 칼날 끝이 연약한 피부 위를 스칠 때마다 붉은 줄이 그어지며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
살기로 형형한 붉은 눈을 마주 보던 그녀는 이내 픽 웃음을 흘리고는 그를 홱 밀쳐 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날붙이가 바닥을 굴렀다.
무감한 얼굴을 한 레이린이 몸을 돌리는 순간, 분한 듯 이를 갈던 노아가 저린 손목을 부여잡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 녹스고 뭐고 네가 무사할 줄 알아? 어차피 쥐새끼 주제에......!”
“글쎄. 적령의 정식 후계자도 아니고 일개 길드원일 뿐인 네가, 정보의 독점권을 가진 내게 무슨 짓을 할 수 있을까?”
“......뭐?”
노아가 정보의 독점권이라는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던 모양이지. 입 안으로 작게 혀를 찬 레이린이 성큼 발을 움직여 노아에게 다가섰다. 흠칫하는 노아의 귓가로 뱀 같은 속살거림이 흘러들었다.
“일개 길드원 나부랭이라도 녹스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을 텐데, 중요한 사업 파트너를 몰라보고 개처럼 덤벼든 사생아라.......”
“.......”
“네 잘난 ‘아버지’께서는 이 소식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할까?”
말이 이어지는 동안 노아의 얼굴에서 차츰 핏기가 빠져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기로 가득했던 붉은 눈동자는 풍랑을 만난 배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레이린은 말없이 입술을 짓씹는 그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노아를 힐긋 내려다본 엘빈이 그림자들을 해산시킨 후 그녀의 뒤를 따라 골목을 나섰다.
“이야, 저 새끼가 저런 얼굴 하는 거 꽤 오랜만...... 컥.”
“치워.”
실실 웃음을 흘리며 레이린의 어깨에 제 팔을 감으려던 엘빈은 복부를 팔꿈치로 가격당하고 몸을 반으로 접으며 고꾸라졌다. 잠시 컥컥대던 그가 입을 비죽이며 상체를 바로 했다. 이내 투덜거린 적도 없다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입가에 건 엘빈이 또다시 말을 붙여 왔다.
“하여간 지나치게 적극적이야. 그보다 다녀온 일은? 어떻게 됐어?”
“......따라와.”
뻔뻔한 얼굴의 그를 향해 눈을 흘긴 레이린이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그는 요령 좋게 그 뒤를 따랐다.
“여긴.......”
이윽고 그들은 한 건물 앞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건물의 간판에 시선을 준 엘빈의 두 눈이 묘한 기색을 띠었다.
‘역시 알고 있었나 보네.’
하긴, 이 정도도 몰라서야 적령이라는 이름이 아깝겠군. 속으로 그리 중얼거린 레이린은 엘빈에게 가볍게 눈짓한 후 ‘카라스테 상단’이라고 적힌 건물 안쪽을 향해 홀로 발걸음을 떼었다.
상단 안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북적거렸다. 레이린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내부를 한 번 훑어보던 와중, 서글서글한 웃음을 띤 여인이 다가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카라스테 상단의 관리인인 아멜리아 리퍼라고 합니다. 어쩐 일로 방문하셨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그 물음을 들은 레이린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아멜리아에게 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내보이며 말했다.
“저는 영주님의 수행 비서인 레이린 아제트리아라고 합니다. 혹시 단주님을 뵐 수 있을까요?”
“아, 그러셨군요. 잠시만 이쪽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멜리아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레이린을 한쪽에 놓인 의자로 안내하고는 사라졌다.
레이린은 부드러운 천이 덧대어진 의자에 느른히 기대어 앉아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 괜찮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건지려는 듯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시선들. 예전에 방문했던 카르키오 상단과 비슷한 듯 보였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한동안 주의를 기울이니 답은 금세 나왔다. 이곳의 직원은 모두 여성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단주님께서 안쪽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생긋 웃어 보인 레이린은 아멜리아를 따라 건물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고풍스럽게 조각된 나무문 앞에 멈춰 선 아멜리아가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문을 열었다.
“단주님. 아제트리아 님을 모셔왔습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것은 짙은 색의 책상이었다. 왼쪽에는 서류가 빽빽이 들어찬 책장이 벽을 메우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독특한 무늬가 새겨진 파티션이 세워져 있었다.
책상 너머에 앉아 있던 여인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린 아제트리아 님. 카라스테 상단의 주인인 데메트리아 엔슬린입니다.”
레이린은 정중히 인사하는 데메트리아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불시에 입을 뗐다.
“엔슬린 양.”
“말씀하십시오.”
“월급은 많이 받고 있나요?”
“......네?”
데메트리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쓰고 있는 은테 안경의 줄이 그 움직임에 따라 찰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녀는 영락없이 영문을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이린은 그녀의 의문에 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파티션을 향해 성큼 발걸음을 옮기자 다급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지금 뭐하는......!”
하지만 데메트리아의 움직임은 레이린을 붙잡기에 지나치게 느렸다. 눈 깜짝할 새에 파티션 너머에 발을 들인 레이린은 크게 떠진 두 쌍의 눈을 마주 보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분명 예법 수업 중이시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새로운 장난감을 보고 눈을 빛내는 아이처럼, 어딘지 짓궂은 얼굴을 한 레이린이 말을 맺었다.
“이곳에서 특별 수업이라도 받고 계셨던 건가요? 헤일리 영애, 베아트리스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