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서늘하고도 음습한 공기, 대기에 감도는 죽음의 냄새가 차츰 짙어지는 곳. 유스티아의 북쪽에 자리한 그곳에는, 사람의 악의만큼 새까만 성벽이 강물 너머에 우뚝 솟아 있었다.
“멈추십시오!”
성벽 위에서 망을 보던 병사가 활을 겨누며 커다랗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치자 성벽을 향해 다가오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해자처럼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강 너머에 멈춰 섰다.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히십시오!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면 즉결 처분될 수도 있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거칠게 흘러가는 물줄기를 넘어왔다.
말을 탄 무리의 사람 중, 가장 앞에서 후드를 둘러쓴 이와 함께 말을 타고 있던 은발의 청년이 외쳤다. 그의 뒤로 황금색 문양이 새겨진 검은 깃발이 펄럭였다.
“유스티아의 주인을 대신해 그분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다리를 내려 주십시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을 안으로 들일 수는 없소. 얼굴을 드러내시오!”
꽤 높은 직위에 있는 듯한 사람이 창을 겨누며 위협적으로 외쳤다. 입가에는 조롱 같은 비웃음이 매달린 채였다. 그 적나라한 도발에 청년이 무어라 발끈하기 전. 수수한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이가 모자를 뒤로 젖히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불꽃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재를 뒤섞은 듯, 오묘한 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닥가닥 흩날렸다. 비스듬히 아래로 내리깔린 속눈썹이 들어 올려지며 고운 눈매가 반달을 그렸다.
“영주님의 직속 수행 비서인 레이린 아제트리아라고 합니다.”
버석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린이 성벽 위의 병사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마티아스의 주인을 뵈러 왔습니다.”
레이린은 한쪽 팔에 후드를 걸친 채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마티아스의 한가운데 위치한 프리조프 저택으로 향했다. 프리조프의 기사라는 이들은 틈만 나면 클로비스의 기사들을 향해 시시껄렁한 시비를 걸어대며 낄낄댔다.
“저런 놈들한테는 시선도 주지 마. 괜히 인상 쓰지 말고.”
무표정한 얼굴의 레이린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에 그녀의 뒤쪽에서 걷던 엘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정면을 돌아보는 기척이 들려오자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클로비스 저택이 희고 푸른 색채들로 이루어져 낮의 하늘을 나타내는 것 같다면, 프리조프 저택은 그야말로 정반대였다. 검은색과 흰색이 기묘하게 대비된 저택의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어딘지 사람의 소름을 자아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유스티아의 사절단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일행은 빠르게 계단을 올라 거대한 문 앞에 섰다. 문을 지키던 시종이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커다란 문 너머의 풍경이 서서히 드러남과 동시에.
“이렇게 놀라울 데가.”
한순간 오싹 소름이 돋을 만큼 기이한 목소리가 귀를 찔러 왔다. 찰나였지만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진한 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마치 왕의 알현실처럼 길게 늘어진 카펫 끝에 자리한 의자. 그곳에 나른히 기대어 있는 청년이 손에 든 부채를 살랑거렸다. 이내 불꽃처럼 선명한 주황색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사르르 휘어졌다.
“귀한 분들께서 어쩐 일로 이런 험한 곳까지 걸음 하셨는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이드리스가 부채 너머로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바다 밑바닥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남빛 머리카락이 허리께에서 결 좋게 살랑거렸다. 금실로 자수를 놓은 흰색의 실크 가운 사이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가슴이 엿보였다. 마치 관능, 농염함 따위의 단어를 그대로 빚어 놓은 것 같은 모습.
레이린은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은 채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티아스의 주인, 거짓의 감시자를 뵙습니다. 유스티아에서 영주 직속 수행 비서로 일하고 있는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아아, 그대가.”
이드리스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주홍색 눈이 순수한 악의와 흥미, 잔혹함으로 반짝였다.
이드리스는 의자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켜 단 아래로 내려왔다. 눈 깜짝할 새에 레이린의 지척에 다다른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올렸다.
“이리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아제트리아 양.”
이드리스가 레이린의 손등에 진득하게 입 맞추며 녹아내릴 듯 눈을 휘었다. 예의상의 미소를 띤 레이린은 급하지 않게 손을 잡아 빼며 한 발자국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곧 있을 시르나티스와 관련해 제 주인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주인이라.......”
묘하게 탐탁잖은 감정이 어린 음색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이드리스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레이린의 얼굴을 빤히 훑어보았다.
레이린은 불안하게 등 뒤를 힐긋거렸다. 이드리스가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 등 뒤에 서 있는 클로비스의 기사들이 미심쩍다는 듯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망할 새끼.’
결국 입 안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은 레이린은 이드리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주위를 물려주시죠.”
“......흠. 원하신다면야.”
빙그레 웃음 지은 이드리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남은 이야기는 아제트리아 양과 둘이서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모두 나가 줘요.”
그러자 엘빈을 포함한 클로비스의 기사들이 곧장 발끈했다.
“말도 안 됩......!”
“키스티엘 경.”
레이린은 고개를 돌리며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걱정으로 일그러진 엘빈의 얼굴을 마주한 그녀가 불현듯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파도가 치듯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에 담긴 걱정이 너무도 선연해서.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 있으면 소리를 지르겠습니다. 다른 분들과 함께 바깥에 계셔 주세요.”
“......알겠습니다.”
엘빈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클로비스의 기사들과 프리조프의 기사들이 모두 방 밖으로 모습을 감추며 문을 닫았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틈 없이 닫히자마자, 레이린은 곧장 이를 갈았다.
“뭐하는 짓입니까.”
“그보다 의뢰인한테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건가?”
“헛소리도 정도껏 하셔야지. 의뢰고 나발이고 색다른 돈 지랄을 하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말씀하시지 그랬습니까. 아니면 그냥 미친 건가?”
차가운 얼굴의 레이린이 신랄한 말을 내뱉었다. 이드리스는 그 모습조차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답했다.
“생각보다 더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나 보네, 당신. 의외인데.”
“그걸 알면 오브리 샌더슨 경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방금 깎아 내려버린 제 신뢰를 회복하는 데 필요할 것 같거든요.”
레이린은 상냥하고 따갑게 말을 맺으며 비소했다. 언뜻 보기에는 짜증만이 그득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속내는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스멀스멀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미 마티아스에 당도하기까지 반나절이 넘는 시간을 소요했다. 사실 이조차도 주술석을 미친 듯 사용한 덕에 크게 단축된 것이었지만 오브리 샌더슨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녀에게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것 때문에 온 거겠군.”
이드리스가 지금껏 잊고 있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레이린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저 사람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예. 그러니까.......”
“싫은데.”
“뭐?”
레이린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지나치게 놀란 탓에 가까스로 지키고 있던 예의마저 잊고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그러나 이드리스는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주려는 것처럼 나긋하게 말문을 뗐다.
“당신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잘해 주고 있어. 어차피 이젠 별 가치도 없어진 기사 하나,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내어 주는 건 어렵지 않지.”
“그럼 왜.......”
“하지만 역시 나는.”
의미 모를 말을 내뱉던 이드리스가 한 발을 내디뎠다. 주춤거리며 몸을 물리는 레이린의 머리카락을 쥐고 그 끝에 입을 맞춘 그가 웃으며 속삭였다.
“기왕이면 당신의 ‘주인’이 괴로웠으면 좋겠거든.”
레이린 일행은 저택에 방을 내어 주겠다는 이드리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바깥의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기사들이 1층에서 대기하는 사이, 레이린은 엘빈을 이끌고 2층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물었다.
“영주님 쪽은 어떻대?”
“아까 수색 시작하겠다고 연락 온 거 말고는 없어.”
“적령은? 움직이고 있는 거야?”
“마티아스로 출발했을 때부터 찾는 중이야. 그보다, 너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
엘빈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으나 레이린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을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문 그녀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 새끼 성격상 쉽게 찾을 수 있는 데 뒀을 리가 없어. 수하들에게 가지고 놀라며 던져 줬다고 했으니까.......’
마티아스는 다른 도시 중에서도 가장 윈프리드에 가까운 성질을 지닌 곳이었다. 대외적으로는 향수를 팔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다고 알려졌지만, 그들의 주 수입원은 마약이나 수면제, 미약 등을 만들어 파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귀족들 또한 물밑 세계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녹스에 있을 적 간간이 보았던 암시장 관리자라든가, 경매장의 품질 감별인.......
“......경매장.”
레이린은 생각을 이어 가다 말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몸을 돌려 엘빈의 옷깃을 잡아채자 엘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이린?”
“너, 지금 당장 적령에 연락 넣어. 애먼 데 뒤지지 말고 마티아스 내에 있는 ‘경매장’들에 대한 기록부터 확인하라고.”
“웬 경매장...... 설마.”
의아한 빛을 띠던 엘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붉은 눈에 형형한 살기가 소용돌이쳤다. 레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엘빈의 옷깃을 놓았다.
“사람을 찾으려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찾아야 할 건 ‘물건’이니까.”
마티아스의 드넓은 음지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경매장’. 그곳에서는 돈만 충분하다면 구할 수 없는 것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사람까지도.
“여기 작자들 성격대로라면 실컷 가지고 놀다가 경매장으로 보냈겠지.”
엷은 회갈색 눈은 차디차게 들끓고 있었다.
“여기엔 외부에서 온 손님들도 많으니 그렇게 팔아 버리면 어디로 팔려 갔는지 누가 어떻게 알겠어?”
“이드리스 그 미친 자식이.......”
“그만 열 내고 가서 10분 안으로 알아 오라고 해.”
레이린은 이를 가는 엘빈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그러자 애써 감정을 갈무리한 그가 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
방 안에 혼자 남겨진 레이린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민에 잠겼다. 생각이 빠르게 머리를 스쳐 지나감에 따라 그녀의 두 눈은 점차 고요히 가라앉았다.
‘경매장의 일이 시작되는 건 보통 노을이 지고 나서부터.’
레이린의 눈이 창밖을 힐긋 일별했다. 이것저것 가늠해 보던 그녀는 끝내 결심을 굳혔다.
‘......위험을 감수해야겠군.’
잠시 후. 바깥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찾았어.”
엘빈이 가볍게 헐떡대며 내뱉었다. 어찌나 다급하게 움직인 것인지, 평소에는 아무리 날뛰어도 지친 기색조차 찾아보기 어렵던 그가 색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레이린이 무심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디야.”
“스컬트령 지하에 있는 경매장. 여기서 얼마 안 멀어.”
“그럼 당장 영주님께 가. 가서 레이린 아제트리아가 이드리스와의 대화 중에 오브리 샌더슨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잡아냈다고 말해.”
“뭐?”
엘빈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의아한 물음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네가 할 일은 티 내지 않고 영주님을 스컬트령으로 이끄는 거야. 샌더슨 경을 구해낼 가장 빠른 길은 그것뿐이니까.”
이어지는 말에 결국 엘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잠깐, 널 두고 가라고?”
불편한 목소리에도 레이린의 눈은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럼 지나가던 사람한테 대신 전해 달라고 할까? 아니면 내가 달려가서 말해? 널 대신해서 날 호위해 줄 사람은 많지만, 지금 너 말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너는 진짜.......”
“아직도 낭비할 시간이 남았어? 가.”
냉정한 얼굴의 레이린이 차갑게 말을 끊어 냈다. 결국 엘빈은 제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다가 “아!”하고 짜증스러운 탄식을 내뱉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레이린은 가만히 앉아 엘빈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몸을 일으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그녀를 발견한 기사들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제트리아 님! 왜 나오셨습니까?”
“배고프신 겁니까? 뭐라도 시켜드릴까요?”
피곤한 기색의 기사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신 물어댔다. 레이린은 어느새 핏기가 가신 얼굴로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먼 거리를 이동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너무 피곤하네요. 저는 몇 시간만 눈을 붙일 테니 경들께서도 편히 쉬고 계세요.”
그러자 기사들은 저마다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저희가 멍청했습니다.”
“익숙하지도 않은 말 위에서 그만큼을 움직이셨는데 피곤한 게 당연하죠. 정신이 없어서 신경을 못 써드렸네요. 이것 참 면목이 없습니다.”
“푹 쉬십시오. 여긴 저희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요.”
기사들이 어깨에 바짝 힘을 주며 당부했다. 레이린은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용히 직원 하나를 불러 세웠다.
“저 테이블에 술이랑 안주를 좀 채워 주시겠어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으니까 절대 잔이 비지 않을 정도로 가득하게요.”
레이린이 금화 다섯 개가 담긴 주머니를 건네자 직원의 입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벌어졌다. 직원은 허리를 연신 굽실대며 알았다는 말을 반복하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그제야 무심한 얼굴로 돌아온 레이린은 방으로 올라가 문을 걸어 잠갔다. 방문이 제대로 고정된 것을 확인한 그녀가 후드를 둘러쓰며 창문을 열어젖혔다.
굳은 결의가 담긴 회갈색 눈이 선명히 빛났다. 흰 손이 목덜미를 타고 떨어져 내리는 줄을 움켜쥐었다.
‘기다릴 시간이 없어.’
다음 순간, 검은 후드 자락이 창문 바깥으로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