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87)

* * *

힐데트 저택에서의 마지막 밤. 레이린은 어김없이 찾아든 불면증에 숄을 걸치고 산책에 나섰다. 이제는 새삼스럽지조차 않았기에 그녀는 거울에 비치는 희미한 눈 그늘을 무심히 일별한 뒤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꼭대기 층 바깥에 온실이 있다고 했지.’

거기나 가 봐야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정을 끝마친 레이린은 한 손에 촛불을 든 채 조용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대부분 내일의 일정을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지, 그녀는 꼭대기 층에 다다를 때까지 그 누구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새까만 밤하늘 아래 펼쳐진 널찍한 테라스 곳곳에서 주홍색 불빛이 넘실거렸다. 레이린은 드문드문 자리한 주술석 등을 눈으로 훑으며 한쪽에 세워진 유리 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온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청량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아 왔다. 어쩐지 꽉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유리창에 아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에 흠칫 움직임을 멈췄다.

‘아.’

찰나 살기를 동반한 경계심을 내비쳤던 레이린이 황급히 기세를 갈무리했다. 주홍색 불빛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의 주인을 뒤늦게 알아본 터다.

‘......에드윈.’

온실의 안쪽에 놓인 기다란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오른팔은 소파 아래로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고, 흐트러진 흑발 아래로 자리한 눈 밑으로는 옅은 눈 그늘이 져 있었다. 바닥에 엉망으로 널브러진 서류들을 보니 아르망의 징징거림을 피해 이곳에서 일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답지 않게 흐트러진 모습에, 저 광경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이유 모를 충동이 불쑥 치솟았다.

‘잠든 거 맞겠지?’

레이린은 숨을 죽이고 조심히 에드윈의 곁으로 다가갔다. 발뒤꿈치까지 들고 움직인 덕인지 그녀가 소파 옆의 테이블에 살짝 걸터앉을 때까지도 그는 고른 숨을 내뱉고 있었다. 주홍색 불빛이 에드윈의 조각 같은 얼굴 위로 선명한 그림자를 자아냈다.

레이린은 명암이 선명한 그의 얼굴을 말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불현듯 자조했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어차피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자신은 죽게 될 텐데.

유스티아에 도착해서도 이미 한 번의 죽음을 보았는데.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받았는데.

대관절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애쓰고 있는지. 이제는 조금 지친 기분이었다.

멍하니 에드윈을 내려다보고 있던 레이린의 눈꺼풀이 차츰 내려앉았다. 코끝을 간질이는 청량한 향, 은은하게 비쳐드는 주술석의 불빛이 생각을 둔하게 만들고 몸을 무겁게 했다.

눈을 깜박이며 잠을 쫓아내려 애쓰던 그녀가 어느 순간 툭, 고개를 떨궜다. 서로 다른 숨소리가 겹쳐짐과 동시에, 지금껏 미동도 없던 에드윈의 눈이 소리 없이 뜨였다. 푸른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여 제 곁에 잠든 여인의 모습을 향했다.

“.......”

한동안 레이린을 바라보던 에드윈이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기척 없이 움직여 레이린을 제가 잠들었던 소파에 눕힌 뒤, 그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레이린은 미간을 찡그리고 잠시간 뒤척거리더니 곧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는 탄식 같은 숨을 흘렸다.

“......어.”

잇새로 희미한 숨소리 같은 말이 새어 나왔다. 주변이 조용했음에도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에드윈은 잠시간 고민에 잠긴 듯하더니 이윽고 조용히 상체를 기울였다. 서로의 숨결이 뒤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움직임을 멈추자, 얼굴을 일그러트린 레이린이 입 안으로 웅얼거렸다.

“죽기 싫어.......”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를 타고 희미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한 주황색의 불빛이 더해진 탓인지, 그 광경은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

고통스러운지 작게 숨을 몰아쉬는 레이린의 모습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지켜보던 에드윈이 충동적으로 입술을 내렸다.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그대로 그의 안으로 삼켜졌다.

마치 파멸을 경고하듯, 혀끝에 닿아 온 눈물은 숨이 막힐 만큼 씁쓸했다.

* * *

힐데트령 시찰을 끝낸 후, 클로비스 저택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가 되던 밤.

“......!”

레이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 오며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푹신한 침대는 식은땀으로 인해 차갑게 젖어 있었다. 멍하니 숨을 헐떡이던 레이린이 제 목을 부여잡고 짐승처럼 신음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갑자기 왜.......’

또다시 찾아온 악몽이 스멀스멀 전신을 옥죄어 왔다. 처참하게 죽어 가던 남자와, 그 주변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던 복면을 쓴 자들. 그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그녀는 본능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엔 또 누구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인지. 남자를 둘러싸고 있던, 복면을 쓴 자들은 누구인지. 혹여나 이번에도 클로비스 저택의 사람이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범람했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그녀는 거뭇해진 눈가를 매만지며 본채로 걸음을 옮겼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은 그때였다.

“......?”

계단 아래에서 집사인 하인트와 하녀장 그레타가 잔뜩 굳은 얼굴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지금쯤 각자의 할 일로 바빠 머리카락 끝조차 보이지 않아야 했을 이들이었다. 그 모습에 심장이 불안하게 덜컹였다.

레이린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그녀를 발견한 하인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레이린 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목이 덜컥 메어 간신히 물음을 끝마치자, 입술을 몇 번 달싹인 하인트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올라가서 들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레이린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인사조차 잊은 채 곧장 계단을 밟았다. 시종일관 차분하던 평소와 달리 뛰듯이 빨라진 걸음걸이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5층에 다다른 레이린이 잡아 뜯듯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쾅, 커다란 소리를 내며 영주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방 안에 자리하고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레이린을 향했다.

“......왔어?”

“오셨습니까.”

평소와 달리 일그러진 얼굴을 한 아르망과, 클로비스 기사단의 단장인 패트릭 웬델이 몸을 돌려 레이린을 맞이했다. 분명 기사단의 아침 훈련을 지휘하고 있어야 할 패트릭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문득 의문이 스쳤으나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쿵, 쿵.

레이린은 귓가에 천둥처럼 울리는 심장 소리를 무시하려 애쓰며 걸음을 옮겼다. 에드윈은 맞은편에서 양손으로 책상을 짚고 선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새파란 눈은 언뜻 까맣게 보일 정도로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레이린은 책상 앞에 우뚝 멈춰 서며 찬찬히 시선을 내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손 아래에 짓눌려 조금 구겨져 있는 편지와. 누군가 거칠게 잘라 낸 듯 보이는 검은 머리칼이었다.

「이제는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분께.

길 잃은 개 한 마리가 있기에 주인을 찾아 주려 했더니, 글쎄 주인이 없는 개라고 주장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자꾸만 사람을 물려 하지 뭡니까. 해서 방금 막 제 식솔들에게 알아서 처리하라 넘겨준 참입니다.

혹시라도 이 개의 주인을 알고 계신다면, 그 개가 주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I.P」

길 잃은 개.

뱀 같은 필체로 휘갈겨진 단어를 눈에 담은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마티아스에 있던 정보원이 잡힌 건가요?”

레이린의 말에 답한 것은 에드윈이 아닌 패트릭이었다.

“예. 오브리 샌더슨 경이 2년 전 마티아스에 파견되었는데, 3일 전부터 연락이 전혀...... 닿질 않았습니다.”

레이린은 입 안으로 그 이름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오브리 샌더슨.’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야.’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몇 번이고 겪었던, 심장을 통째로 찢어 내는 듯한 고통이 정확히 그 이름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꿈에 나온, 죽음을 예고 당한 사람은 오브리 샌더슨이라는 이가 틀림없었다.

‘하.’

레이린은 맹렬히 머리를 굴리다 말고 저도 모르게 자조했다. 하마터면 다른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소리 내어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이젠 지쳐 쉬고 싶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보이지도 않는 희망을, 미련을 붙잡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저란 작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먹을 꾹 말아쥔 패트릭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린과 아르망의 시선이 동시에 에드윈에게로 향했다.

책상을 짚고 선 채 시선을 내리고 있던 그가 입술만 달싹였다.

“어떻게 하길 바라나.”

“저는, 주군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패트릭이 눈을 질끈 감으며 힘겹게 대답했다. 기사단장의 의무와 제 부하의 생사를 걱정하는 사사로운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제 어깨 위에 놓인 목숨의 무게에 짓눌려 끝내 의무를 택했다.

서로의 목을 틀어쥐는 듯 무거운 침묵이 숨죽인 호흡에 스며들었다.

한참이나 굳어 있던 에드윈이 제 손에 들린 편지를 구기며 상체를 세웠다.

“패트릭.”

“예, 주군.”

“1조를 집결시켜라.”

에드윈이 한 손으로 크라바트를 풀어헤치며 명했다. 그에 아르망이 곧장 반발했다.

“직접 가시려는 겁니까? 하지만......!”

“‘공식적’으로 마티아스에 방문하는 것은 너다, 아르망.”

차디찬 목소리가 아르망의 말을 단박에 잘라 냈다.

내뱉어진 말이 귓가를 타고 인식되기까지의 정적 사이, 에드윈이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나와 패트릭, 1조의 기사들은 비공식적으로 마티아스에 잠입해 오브리를 찾는다.”

패트릭을 응시하며 말을 내뱉던 그가 고개를 돌려 아르망을 직시했다.

“그동안 너는 날 대신해 방문했다는 핑계를 대고 이드리스 프리조프의 시선을 끌어.”

“저도.”

그때 레이린이 말 중간에 끼어들며 한 발자국 움직였다. 깊게 가라앉은 갈색의 눈과 새파란 눈이 마주쳤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가 다시금 명료한 목소리를 냈다.

“저도 가겠습니다.”

“아니, 이런 일은 아르망에게 맡기는 것이 더 낫습니다. 아제트리아 양은 여기 남아 계십시오. 누군가는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이곳에 남아 유스티아를 지킬 이로 자신을 선택했다는 말인가. 레이린은 충동적으로 되물었다.

“저를 믿으시나요?”

“.......”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에드윈은 그녀의 의중을 가늠해 보려는 듯 말없이 시선을 맞춰 올 뿐이었다. 찌를 듯 닿아 오는 차가운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린 레이린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단지, 이드리스 프리조프의 시선을 끌기에는 제가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이유는.”

“아르망 선배님께서는 이미 몇 차례의 시르나티스를 통해 그와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있으시겠지요.”

에드윈은 생각을 가늠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레이린은 자꾸만 떨리는 턱에 힘을 주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내뱉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파악된 상대인 아르망 선배님보다는, 지금껏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제가 가는 편이 시선을 끌기 쉬울 겁니다.”

그래,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베일의 싸인 녹스의 간부. 제 손으로 직접 심어 넣은 첩자. 그게 레이린 아제트리아였으니까.

“......일리가 있는데요. 그 뱀 같은 작자가 제 얼굴을 굳이 보고 싶어 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대인, 신입 수행 비서를 구워삶아 보려 하겠죠.”

아르망은 레이린이 둘러댄 핑계가 그럴듯하다고 여긴 것인지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힘을 얻은 레이린은 허리를 더욱 곧게 펴고는 에드윈을 마주 본 채 건조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저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

“그때는 기꺼이 단념하겠습니다.”

엷은 잿빛이 감도는 갈색의 눈과, 얼음을 깎아 놓은 듯한 새파란 눈. 서로를 탐색하듯 흔들림 없이 맞닿은 시선 속에 알 수 없는 감정 또한 오가는 듯했다.

딱 세 번의 호흡을 할 만큼 시간이 흐른 뒤. 에드윈이 무감한 얼굴로 집무실을 나서며 말했다.

“출발은 1시간 뒤, 정문입니다.”

레이린은 문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것이 바늘에 꿰인 물고기가 발악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일지라도.

‘이번에는.......’

이번에는 다를지도 몰라.

또다시 기약 없는 희망을 되뇌며, 레이린은 성큼 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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