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87)

* * *

달칵.

데메트리아는 불안한 듯 입술을 꾹 닫은 채로 다과상을 차린 후 집무실을 나갔다. 레이린은 제 앞에 놓인 찻잔에 시선을 한 번 주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드셔 보세요. 저희 상단에서도 특상품으로 취급되는 찻잎으로 우려낸 거라 맛이 좋을 겁니다.”

헤일리가 차분한 얼굴로 손짓했다. 그녀의 곁에 정갈한 자세로 앉아 있던 베아트리스 또한 얇은 쿠키가 담긴 접시를 밀어 주며 방긋 웃었다.

“이건 전 왕궁 요리사가 하루에 50개만 구워내는 쿠키에요. 같이 드시면 풍미가 더욱 좋답니다.”

척 보아도 먹음직스러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레이린은 코끝에 은은하게 감도는 차향을 잠시간 음미하다가 입을 열었다.

“카라스테 상단은 서류상 창설된 지 겨우 5년이 되어 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정도면 가히 놀라운 발전이군요.”

“말도 마세요.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 한마디에, 지금껏 단정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던 헤일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떠는 그녀의 곁에서 베아트리스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어머니 몰래 모아 둔 용돈으로 어찌어찌 시작은 했는데....... 처음 몇 달간은 데메트리아의 월급은커녕 끼니도 못 챙겨 줄 정도였다니까요.”

“돈만 문제였으면 차라리 나은 편이지. 여자만 셋이라고 등쳐먹으려는 놈부터 시작해서 정말 별의별 미친놈도 많이 만났어요.”

헤일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베아트리스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린은 고단했던 지난 5년을 회상하는 자매의 모습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무심한 듯 말했다.

“그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카라스테 상단은 현재 힐데트령 제일의, 어쩌면 헤르기아스 대륙에서 손에 꼽는 상단이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거대해졌습니다.”

굳건히 버티고 있던 카르키오 상단이 무너지자마자, 그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카라스테 상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카라스테 상단의 실질적인 규모를 확인한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간 공격적이던 카르키오 상단의 움직임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카라스테 상단은 이미 모든 상단의 중심에 고요히 자리 잡은 채였다.

엷은 회갈색 눈이 그 상단의 주인들을 번갈아 응시했다.

“영애들께서 이루신 일들에 대해 함부로 떠들 수 있는 자도 거의 없다는 말인 거죠.”

“.......”

“그런데 어째서 이 사실을 힐데트 공께 숨기고 계시는 겁니까?”

레이린의 물음에 두 여인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반면에 말을 꺼낸 장본인인 레이린은 독촉하거나 다그쳐 묻는 것이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달콤한 차향이 희미해질 무렵, 한참을 머뭇거리던 베아트리스가 무겁게 입술을 뗐다.

“......어머니께서는 저희가 일에 관심 가지는 걸 좋아하지 않으세요.”

“좋아하지 않으시는 걸 넘어서 결사반대하시죠.”

헤일리가 힘없는 목소리로 베아트리스의 말을 넘겨받았다.

“얌전히 방 안에 앉아 자수를 놓고, 좋은 가문에 시집을 가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만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니까요.”

그녀는 자조하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 모습을 본 레이린이 의아함에 미간을 좁혔다.

“힐데트 공 본인께서는 지난 몇십 년간 직접 일선에 뛰어드셨고, 가주의 업무 또한 다른 이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처리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베아트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서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쾅! 소리와 함께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찻잔과 그릇이 덜그럭거리자 헤일리가 불안한 눈빛으로 테이블 위를 힐긋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분기로 가득한 얼굴의 베아트리스는 한탄하듯 말을 쏟아 냈다.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직접 영지를 돌아보시고 활발히 정치에 참여하시죠. 건강이 위태로우니 일을 줄이라는 주치의의 말도 무시하시면서까지요.”

베아트리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젊었을 적 다친 다리의 상태가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노심초사하는 자식들의 심정을 모르는 것일까. 카힐라는 일을 줄이기는커녕 수면조차 줄여 가며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저희를 비롯한 모든 여자가 정치나 일에 뛰어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거라면 말을 안 해요!”

억울함이 그득한 두 눈에 엷은 물기가 일렁였다. 베아트리스는 자꾸만 속에서 북받쳐 올라오는 눈물을 참으려 애쓰며 입술을 움직였다.

“다른 여자들이 저택에 찾아와 일자리를 구하면 그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내어 주시는 분이라고요! 그런데 왜 하필 저희한테만......!”

“베스, 그만.”

그때, 헤일리가 덤덤히 베아트리스를 만류했다. 씩씩거리며 말을 토해 내던 베아트리스는 그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제자리에 앉았다. 베아트리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준 헤일리가 체념한 듯 웃음 지었다.

“몇 번이고 어머니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애초에 어머니께서 너무 바쁘시다 보니 대화를 자주 나누는 것도 아니라서.......”

헤일리가 말끝을 흐리자 방 안에는 쥐죽은 듯한 고요만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흥분해 있던 베아트리스조차 울적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레이린은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짐짓 충동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그럼 이렇게 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 * *

“이러다가 영애들께서 가주님 걱정으로 먼저 숨넘어가시게 생겼습니다. 제발 건강 좀 챙기십시오.”

힐데트 가문의 주치의가 카힐라를 향해 하소연하듯 말했다. 카힐라는 진료를 위해 걷어 올렸던 옷소매를 내리며 덤덤히 얼버무렸다.

“자네 덕에 아직 이렇게 정정하지 않나.”

“여기서 조금만 더 나빠졌다가는 약을 써도 소용이 없단 말입니다!”

주치의는 결국 더는 참지 못하겠다며 와락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왜 그렇게 몸을 혹사하지 못해 안달이신 겁니까! 자꾸 이러시면 저 정말 사표 낼 겁니다!”

“알았네, 알았어. 그만 열 내고 이만 가 보게.”

카힐라는 눈을 부릅뜬 채 으르렁대는 주치의의 등을 떠밀어 내보내고 미미한 한숨을 흘렸다.

휴식이라는 말은 그녀에겐 사치나 다름없었다. 당장 급한 것은 영주의 시찰 일정에 협조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다가오는 시르나티스에 대비해 처리해 놓아야 할 일만으로도 3일 밤낮을 새도 모자랄 지경인데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리가 있나.

카힐라는 피곤한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책상 앞에 앉아 깃펜을 들었다. 일에 집중할 때의 오랜 습관으로 주름이 깊이 파인 미간이 또다시 좁혀졌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온후한 인상의 집사가 방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 데메트리아 엔슬린 양께서 이번 축제의 물품 조달 건으로 방문하셨습니다.”

그 말에 카힐라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데메트리아가 직접 말인가?”

“예. 우선 응접실로 모셨습니다만. 어찌할까요?”

집사의 물음에 카힐라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카라스테 상단은 최근 몇 년 사이 무섭도록 빠르게 몸집을 불려, 이미 유스티아의 핵심 상단 목록에 당당히 발을 들인 곳이었다. 처음 그 상단의 주인이 여인인 것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데메트리아 엔슬린은 할 수만 있다면 제 밑에 두고 싶을 정도로 능력 있는 자였다. 그런 이가 어쩐 일인지 직접 찾아왔다는데, 시간을 내어서라도 얼굴을 비추는 성의를 보이는 편이 이롭겠지.

고민을 끝마친 카힐라가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들며 고개를 까딱였다.

“올려 보내게.”

중요한 서류들을 모아 서랍 속으로 정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냉정한 인상의 데메트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힐라는 답지 않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엔슬린 양. 웬일로 여기까지 걸음을 다 했나. 설마 이 늙은이가 보고 싶어 그런 것은 아닐 테고.”

“아닙니다. 저도 마침 바깥바람을 좀 쐬고 싶었던 참이었으니까요.”

“하하! 그래, 그래. 어서 앉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카힐라가 제 맞은편 자리를 손짓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언제 농을 주고받았냐는 듯 냉랭한 얼굴로 협상에 들어갔다. 아주 조금의 차이라도 지나치지 않고 따지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렇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설전이 얼마나 오갔을까. 간신히 축제 물품에 관한 거래를 모두 매듭지었을 때는 이미 해가 다 기울어 있었다. 보랏빛으로 물든 창을 힐긋 돌아본 카힐라가 피곤한 듯 손마디를 문지르며 한숨을 삼켰다.

‘영주님께선 저녁은 제대로 챙겨 드셨을지 의문이군.’

에드윈은 마치 돌을 깎아 만든 조각상 같았다. 낮에도 표정 없는 얼굴로 서류만 넘겨대기에 시종을 시켜 집무실로 식사를 올려 보낸 후에야 서류에서 눈을 뗐을 정도이니, 저녁 또한 매한가지이리라.

카힐라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책상 위로 어지럽게 널브러진 서류를 끌어모은 데메트리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주님.”

“무슨 소린가. 자네야말로 이 늙은이 비위 맞춰 주느라 고생이지.”

상념에서 빠져나온 카힐라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서류를 칼같이 정리해 확인하는 데메트리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문득 물었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자네는 어쩜 그리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나?”

조금 뜬금없는 물음이었음에도 데메트리아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미소 지었다. 하지만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는 겸손하기 그지없는 태도의 그녀가 공손한 목소리를 냈다.

“과찬이십니다. 보잘것없는 재주인 것을요.”

그 차분한 대답에 카힐라는 짐짓 눈을 부릅뜨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 평생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일을 잘하는 사람은 다섯이 채 되지 않아. 그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네만, 혹 숨겨 둔 동업자라도 있는 건가?”

일전에 그녀가 카라스테 상단과 첫 거래를 할 즈음이었다. 조금 알아보자니 데메트리아는 상단주가 되기 전에는 힐데트의 방계인 한 귀족가의 하녀장이었다. 더없이 조용하고 소박한 삶을 살던 그녀는 어느 날 돌연 사표를 내고는 카라스테 상단을 창립했다.

카힐라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고작 5년 만에 상단을 여기까지 키워낸 데메트리아의 능력이 오롯이 선천적인 재능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조언과 가르침으로 완성된 것인지.

잠시 멈칫했던 데메트리아는 이윽고 과거를 되짚듯 은은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사실 그분들이 아니셨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카힐라의 눈이 대번에 흥미로 물들었다. 그 모습에 속으로 얼핏 웃어 보인 데메트리아는 무릎에 놓인 서류 봉투 위로 양손을 겹치며 말을 이어 갔다.

“저조차도 몰랐던 저의 재능을 알아봐 주시고, 무섭다, 힘들다 투정하는 제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아 주신 분들입니다.”

은테 안경 너머의 눈에 진심 가득한 애정이 선명히 떠올랐다. 늘 냉철한 태도를 유지하던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에, 카힐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데메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가주의 모습에 살풋 미소 지었다.

“그뿐인가요. 놀라울 만큼 박학다식하심은 물론이고 제가 하나를 볼 때 열을 보시는 분들이시기도 하죠.”

연이은 칭찬들에, 카힐라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까지 칭찬할 정도라니, 한번 만나 보고 싶어지는군.”

“그렇다면 만나 보시겠습니까?”

“......뭐?”

카힐라는 어리둥절하게 반문했다. 그와 대조되게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를 매단 데메트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이어 단정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 드러난 인영에 카힐라가 경악한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한쪽 다리에서 찌를 듯한 통증이 밀려왔으나 인식할 새조차 없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가주님.”

꼭 닮은 모습으로, 두 여인이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카힐라의 앞에 섰다.

“카라스테 상단의 실소유주인 헤일리 힐데트, 베아트리스 힐데트입니다.”

“너희.......”

카힐라는 영 충격이 가시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였다. 긴장된 얼굴의 헤일리와 베아트리스는 아직도 허리를 굽힌 자세 그대로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얼마나 지났을까. 카힐라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이윽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완고한 얼굴로 돌아온 그녀가 짓씹듯 내뱉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나가라.”

“어머니!”

지금껏 차분함을 유지하던 헤일리가 울컥해 외쳤다. 절망감과 울분이 목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레이린과 영주의 허락까지 얻어 간신히 용기를 내었건만. 이번에도 벽에 대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는 말인가.

그때, 곁에 서 있던 베아트리스가 팔을 뻗어 헤일리를 제지했다. 멈칫한 헤일리가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베스?”

베아트리스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어 보인 후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무섭도록 차가운 얼굴을 한 카힐라를 직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꼭 만나 보고픈 인재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그게 어째서 ‘저희’이면 안 되는 겁니까?”

“......말해 봤자 너희는 이해하지 못해.”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으면서 그 일의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베아트리스는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끼고는 양손을 세게 말아쥐었다.

카힐라의 차가운 시선에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습관적인 두려움에 심장이 거세게 두방망이질 치는 것이 온몸에 느껴졌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마지막 기회야.’

결연히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저희는 단념하지 않겠습니다.”

베아트리스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거운 정적이 방 안 가득 내려앉았다.

카힐라는 그런 딸의 모습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술을 뗐다.

“너희는 아직, 이곳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

“앞으로도 평생 알게 될 일이 없는 편이 나을 테지.”

카힐라는 책상 뒤로 조용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남편과 한쪽 다리를 앗아간 그 사고를 시작으로, 그녀는 이 세상이 저와 같은 이들에게 얼마나 잔혹하고 또 냉혹한지 처절히 깨달아야 했다.

‘몸도 불편할 텐데 먼저 들어가 쉬는 것이 어떤가.’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 테니 이만 쉬시지요, 힐데트 공.’

‘이런 힘든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더없이 상냥한 이들뿐이었지만.

몸을 돌리자 선명히 귓가를 찔러 오는 것은 무수한 조롱이었다.

‘지독한 년. 나머지 다리 한쪽도 망가져 봐야 정신을 차릴 테지.’

‘저년이 아득바득 버티고 앉아 있지만 않았어도 저 자리는 내 것이었는데. 하여간 욕심만 많아서는.’

‘자식들만 불쌍하게 됐군. 저런 피도 눈물도 없는 계집의 딸이라니.’

그리고 그 무엇보다 카힐라를 무섭게 했던 말.

‘저런 부모 밑에서 뭘 배우겠나? 영애들 혼삿길은 아예 막혔다고 봐야겠지.’

그 한마디가, 살아오며 들은 그 어떤 협박보다도 겁이 났다. 산 채로 눈과 혀를 도려내겠다는 말을 들었더라도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으리라.

혼자만 깎여 나가면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제 몸에서 부서져 나간 파편이 딸들의 발 앞에 빼곡히 깔리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들을 ‘안락하고 편안한’ 세상에서 도려내고 있었다. 하여 욕심임을 알면서도, 제 자식들만은 세상이 감싸 안아 주는 존재가 되었으면 했다.

“그것이 나의 이유다.”

단호한 말을 끝으로 숨죽인 침묵이 사위를 메웠다. 섣불리 입술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짙고 짙은 정적이었다.

카힐라는 무의식중에 주먹을 그러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한평생 자식들 앞에서 꺼낼 일이 없으리라 생각한 말들이어서일까. 어째서인지 심장 한쪽이 무거웠다.

‘타고나기를 영리한 아이들이니,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카힐라는 수선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생각에 변함은 없었다. 카힐라는 제 행동으로 인해 딸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할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내쳐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게 옳은 선택이었다.

이만 돌아가라는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벌렸을 때.

“아니요, 어머니.”

베아트리스의 선명한 목소리가 카힐라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저는 꽃이 아니라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뭐?”

카힐라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녀가 순간적으로 말을 잃은 틈을 타, 뒤편에 조용히 서 있던 헤일리가 앞으로 한 발을 내디디며 말을 받았다.

“5년 전, 저희는 가시나무숲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저희가 해낼 수 있을지, 단지 어머니의 말에 반발하고픈 객기는 아니었는지 매 순간 의심하고 두려워했죠.”

카라스테 상단을 운영하기 시작한 이후 흔들리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따뜻한 침대로 파고들어 아무것도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끝내 이 길을 걸어 보고자 마음먹을 수 있었던 건.”

“.......”

“어머니께서 그 길을 걸어오셨기 때문이에요.”

그들에겐 그 누구보다 커다란 존재인 카힐라가, 그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그 굳건한 등을 올려다보며 저 너머의 세상을 꿈꿀 수 있었다.

연이어진 말들에 카힐라의 눈이 풍랑을 만난 배처럼 흔들렸다. 세상이 통째로 뒤집히는 듯한 충격이 뇌리에 번져 어떤 반응을 내보여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카힐라의 앞에 멈춰 선 헤일리가 조용히 손을 뻗었다. 조금은 거친 손을 조심조심 감싸 쥔 그녀가 제 어머니와 시선을 맞추며 속삭였다.

“험한 땅이지만 누군가 그곳을 걷고, 그 모습을 보고 또 다른 누군가 뒤를 따르고,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뒤따라 걷다 보면.”

“.......”

“그건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 될 거예요.”

저희는 그런 ‘길’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헤일리는 말을 맺으며 물기가 어린 눈으로 푸스스 웃음 지었다. 저 뒤에서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던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데메트리아는 조용한 웃음과 함께 집무실을 벗어났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돌아선 그녀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여러모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제트리아 님.”

그러자 집무실 앞 복도에 서 있던 레이린이 사무적인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요.”

그녀가 한 일은 그저 제안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긴 것은 헤일리와 베아트리스 본인들이었으니 감사를 받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데메트리아는 마치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빙그레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저희를 영주님께 변호해 주셨잖습니까.”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에,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유달리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연이어 귓가를 울렸다.

“영주님께 보고된 서류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자가 상단을 운영하고 관리해 왔다니, 사실 엄밀히 따지면 얼마든지 처벌받을 수도 있는 일이지요.”

덤덤하게 처벌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데메트리아의 얼굴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 호의는 오롯이 레이린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저희를 위해 애써주셨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아제트리아 님.”

데메트리아는 또 한 번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 앞에 선 레이린의 머릿속으로 찰나 마거릿의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가.’

지금껏 피로 점철된 풍경만을 자아냈던 제 행동이, 이곳에서 또다시 누군가 감사할 만한 결과를 불러 왔다는 게.

새삼스럽게 묘했고, 생소했으며. 또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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