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87)

* * *

“파티요?”

에르치니아 일행이 돌아가고 며칠 후. 여느 때처럼 에드윈, 아르망과 함께 집무실에 틀어박혀 서류를 처리하던 레이린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그에 무표정하게 편지를 읽어 내리던 에드윈이 덤덤히 답했다.

“예. 시셀리 공의 생일 파티가 3일 뒤에 열린다는군요.”

시셀리라면 클로비스 가문을 섬기는 가문 중 하나였다. 레이린이 머릿속으로 시셀리 가문에 대한 정보를 되짚고 있던 때, 건너편에서 서류를 넘기던 아르망이 눈을 반짝이며 에드윈을 돌아보았다.

“영주님. 그러면 오랜만에 옷 몇 벌만 사 주시면 안 됩니까?”

“......뭐?”

에드윈이 황당함이 깃든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깃펜까지 내던진 아르망이 본격적으로 징징댔다.

“마거릿 영애의 결혼식 파티에서 라벤 자식이 제게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얼마 전 파티에서 마주친 뱀 같은 얼굴의 사내를 떠올리며 이를 아득 갈았다.

‘그 후줄근한 옷은 뭐냐? 주인의 얼굴에 먹칠이나 하는 녀석 같으니.’

광택이 감도는 재킷을 걸친 라벤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아르망을 향해 한껏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분한 듯, 얼굴을 한껏 구긴 아르망이 분통을 터트렸다.

“순전히 있는 연줄 없는 연줄 다 끌어다가 시셀리 공의 보좌관 자리를 꿰찬 주제에.......”

그 모습을 보던 에드윈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 질 낮은 도발에 일일이 반응할 기력으로 일이나 하지 그러나.”

“아, 진짜 치사하게! 그럼 성과급이라도 좀 챙겨 주시든가요!”

울컥한 아르망이 손을 뻗어 레이린을 가리키면서 와르르 말을 쏟아 냈다.

“레이린 얘는 일 시작하자마자 선배 두 명이 내쫓겨서 서류에 깔려 죽어 가고 있는데, 따로 뭐 챙겨 주신 적 한 번도 없으시죠?”

그는 흥 하고 콧방귀를 끼더니 여봐란듯이 팔짱을 끼었다. 레이린은 갑자기 들려온 제 이름에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드물게도 당혹감이 드러난 얼굴의 에드윈이 시선을 맞춰 왔다.

“.......”

레이린과 에드윈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연한 회갈색의 눈과 푸른 눈이 잘게 흔들렸다.

비슷한 빛을 띤 시선이 맞닿아 있기를 얼마. 깊은 한숨을 내쉰 에드윈이 자포자기하듯 서류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업무는 여기까지 하고, 나가죠.”

“역시 현명하고 자비로우십니다. 전 미리 나가서 마차를 대기시켜 놓죠.”

아르망은 기다렸다는 듯 잔뜩 신이 난 모습으로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 동작이 어찌나 재빨랐는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가 가볍게 팔락일 정도였다. 레이린은 서류를 정리하고 책상을 돌아 나오는 에드윈의 모습에 당황해 몸을 일으켰다.

“전 괜찮.......”

“아닙니다. 보통 상관이 직원에게 업무용 의복을 선물하는 것이 관례인 것도 사실이니 부담 갖지 마시길. 나가시죠.”

어느덧 무심한 표정으로 되돌아온 에드윈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등을 돌렸다. 단정한 걸음걸이에서는 한 번 내뱉은 말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함이 엿보였다.

‘......드레스라니.’

복잡함과 불편함이 뒤섞인 얼굴을 하던 레이린은 머뭇거린 끝에 그를 따라 발을 떼었다.

아르망이 자화자찬했듯 (레이린은 내내 떫은 표정이었다.) 그의 신속한 움직임 덕에, 일행은 노을이 옅게 깔린 거리를 빠르게 가로질러 의상실에 당도할 수 있었다.

미리 연락을 받고 긴장이 역력한 모습으로 문 앞에 도열해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유스티아에 영광을.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영주님을 뵙습니다.”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의상실의 주인, 지젤은 등 뒤로 식은땀이 한 방울 굴러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되겠거니 싶었건만, 돌연 영주라는 거물이 들이닥치다니. 그야말로 없던 잠도 달아날 지경이었다.

지젤은 마차에서 내려선 이들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파티용 드레스와 예복을 맞추실 것이라 들어 준비해 놓았습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담 지젤.”

생글 미소 지은 아르망이 먼저 걸음을 떼고, 에드윈과 레이린이 뒤따랐다. 직원들은 지젤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레이린은 아르망과 에드윈을 따라 소파에 앉으며 불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이렇게까지 해 주지 않으셔도.......”

“어허, 그러지 말고 이 선배 말 들어. 이럴 때 아니면 영주님께 언제 또 선물을 받아 보겠어.”

레이린을 만류한 아르망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닥거렸다. 그 속삭임 같지 않은 말을 들은 에드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망은 그저 신난 얼굴로 테이블 위의 카탈로그를 뒤적였다.

“이거랑...... 아, 이것도 괜찮아 보이네요.”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입어 보세요.”

“그럴까요?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지젤의 권유를 흔쾌히 받아들인 아르망은 옆방으로 넘어갔다.

직원들은 그가 카탈로그에 표시해 놓은 것들을 챙기느라 허둥대며 그를 따라 이동했다. 워낙 많은 수의 직원이 옆으로 넘어갔기 순식간에 썰렁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레이린은 눈을 비스듬히 내리깐 채 입을 다물었다. 에드윈은 무심한 눈길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방 안에 감도는 기이한 분위기를 눈치챈 지젤은 필요하면 불러 달라는 말을 남긴 채 직원들을 데리고 옆방으로 넘어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윈이 입을 열었다.

“안 고르십니까.”

“......과합니다, 저한테는.”

레이린은 담담히 답했다. 그 모습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에드윈이 소파 등받이에 느른하게 몸을 기댔다.

“어떤 점에서 과하다는 건지.”

“급여는 이미 충분히 받고 있습니다. 저번에 마거릿 영애께서 선물해 주신 의상도 있고요. 하는 일에 비해 이런 건...... 과분해요.”

레이린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카탈로그에 잠시 눈길을 주며 말했다.

화려한 레이스와 알알이 반짝이는 보석들로 휘감긴 드레스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척 보아도 어지간한 금액을 훌쩍 넘을 법한 것들이었다. 아르망처럼 덥석 받아버리기에는 불편할 정도로. 게다가.

‘......기만이지, 이건.’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사는 자가 이렇듯 고귀한 차림을 하는 것 자체가 거북했다.

마거릿이 선물로 보내 주었던 옷은 드레스가 아닌 원피스로 생각할 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내내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하물며 이런 화려한 드레스라면 오죽할까.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엷은 자조를 흘렸다. 그녀의 입가에 스치듯 떠오른 미소를 응시하던 에드윈이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다면 다르게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네?”

“업무에 대한 포상이 아니라.”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에드윈이 카탈로그를 집어 들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책장을 쓸 듯이 훑었다.

이내 새파랗게 가라앉은 눈이 올곧게 시선을 맞춰 온다.

“내 개인적인 선물이라고 한다면.”

“.......”

“받아들일 겁니까.”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한순간 그의 말을 인지하지 못했다.

꿰뚫어 동여매는 듯한 시선에서 벗어나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그게 무슨.......”

“마담.”

당황한 레이린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에드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지젤은 곧장 알아듣고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에드윈은 무심한 얼굴로 카탈로그를 넘기더니 어느 페이지를 짚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으로.”

“네,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깍듯이 답한 그녀가 재빠르게 몸을 돌려 달려갔다. 당황한 레이린이 에드윈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방금.......”

“이대로 두면 내일 새벽까지 아무것도 못하실 듯해 대신 골라드렸습니다, 제 취향으로.”

“......네?”

레이린은 찰나 제 귀를 의심했다. 그 순간, 발갛게 상기된 얼굴의 지젤이 드레스를 조심조심 운반해 왔다.

“영주님께서 안목이 탁월하시네요. 이게 이번 시즌에 알음알음 유행하는 디자인이거든요. 이제 탈의실로 들어가실까요?”

“잠깐.......”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난색을 표했지만 소용없었다. 지젤은 좋은 드레스를 알아봐 주는 손님을 만났다는 생각에 잔뜩 들떠 단호하게 레이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탈의실의 문이 닫힐 때까지 그녀와 시선을 맞추던 푸른 눈동자가 문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탈의실 내부는 두 사람이 편하게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드레스를 한쪽 벽에 걸어 놓은 지젤이 팔을 걷어붙였다.

“그럼 탈의부터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이성을 되찾은 레이린은 난처한 표정을 얼굴 위로 덧씌웠다. 그녀의 몸 군데군데에는 여러 흉터가 남아 있었다. 평범한 상처가 아닌, 누가 보아도 칼에 베이고 화살에 찔린 상처들이었기에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적당히 핑계를 대자.’

그녀는 능숙하게 표정을 바꾸며 지젤을 바라보았다.

“마담. 사실 제 몸에 흉한 화상 자국이 하나 있어서 그런데, 혼자 갈아입어도 될까요?”

“네? 하지만.......”

“부탁드려요.”

레이린이 입매를 누그러뜨리며 서글피 웃자 상황은 곧 정리되었다. 그녀의 가면에 넘어간 지젤은 안타까운 얼굴로 탈의실을 나섰다.

레이린은 탈의실의 문이 틈 없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옷을 갈아입었다.

에드윈이 고른 것은 보편적인 디자인과는 정반대였다. 대부분은 어깨와 쇄골을 드러내기 위해 앞쪽을 파이게 하며 치마를 도톰하게 겹쳐 부풀리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 드레스는 전체적으로 몸의 선을 따라 유려하게 흐르는 듯한 디자인이었다.

옅은 분홍빛의 드레스는 등 부분이 반투명한 레이스로 되어 있었고, 진주를 박아넣은 단추가 척추를 따라 일자로 떨어져 허리까지 이어졌다. 소매와 치마 끄트머리에는 은실로 섬세한 자수가 놓여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반짝거렸다.

“......취향이라.”

아까 에드윈이 내뱉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레이린은 어딘지 심란한 기분으로 옷을 마저 갈아입었다. 난생처음 걸쳐보는 ‘제대로 된’ 드레스였지만 꽤 수월하게 입을 수 있었다.

다만, 등 뒤에 달린 단추가 문제였다.

‘아, 이래서 아까 망설였던 건가?’

마담 지젤이 몇 번이고 도와주겠다고 했던 것이 이 때문이었나 보다. 그리 납득한 레이린은 목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담. 등 뒤쪽에 있는 단추를 좀 잠가주실 수 있을까요? 손이 닿질 않네요.”

말을 마친 레이린은 머리카락을 모아 한쪽 어깨로 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칵,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찬바람이 맨 등에 닿아 왔다. 등 뒤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그녀는 어색한 목소리를 냈다.

“죄송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부탁드렸을 걸 그랬.......”

저벅.

“......!”

묵직한 발걸음 소리. 그것을 인지한 순간 레이린은 그대로 굳어졌다. 생각을 채 잇기도 전 본능적으로 깨달아 버렸다.

“아.”

짤막한 탄성을 흘림과 동시에 등허리에 무언가 닿아 왔다. 오싹한 온기가 어린 손가락이 스치듯 움직이며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기 시작했다.

뒷목을 타고 본능적인 소름이 돋아났다. 온몸의 감각이 포식자를 앞에 둔 것처럼 바싹 곤두섰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지극히 단순한 행동조차 조심스러웠다. 그사이 손가락은 느릿하게 등줄기를 타고 오르며 차근히 단추를 채워 나갔다.

마지막 단추가 채워지자 레이린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늘게 떨리는 호흡이 엷게 새어 나갔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어깨를 간질여 오는 감각에 또다시 흠칫하며 턱을 굳혔다.

“......여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넘긴 탓에 오롯이 드러난 왼 어깨로 한숨 같은 숨이 내려앉았다.

“다쳤습니까.”

담담해서 더욱 소름이 돋는 물음이었다. 왼쪽 어깨라면, 어렸을 적 가시나무 숲에서 입은 상처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었다. 낭패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은 레이린은 태연한 목소리를 흘렸다.

“어렸을 적에.”

“.......”

“산을 타고 넘어온 마물을 피하려다가.......”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등 뒤로 무게감이 쏠리는가 싶더니 에드윈이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댔다. 레이린은 피부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에 절로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영주님?”

“.......”

에드윈은 말없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무의식중에 답을 하려 입을 벌렸지만 대답은 미처 만들어지지 못한 채 흩어졌다.

누가 보아도 심상찮은 상처의 흔적. 곧장 의심이 들어야 마땅함에도, 한순간이나마 의심이 아닌 감정이 먼저 뇌리를 장악했다.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지금껏 그를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 준 감각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감정을 걷어 내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함이 옳았다.

분명 그럴진대.

“.......”

찰나, 정말 찰나의 순간에.

이대로 미쳐버리면. 그러면 어떨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하늘 가득 깔린 먹구름과 대조되게, 색색이 빛나는 주술석에 휘감긴 저택이 어둠을 배경으로 은은하게 빛을 냈다. 잘 꾸민 마차에서 내려서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차림새는 주술석만큼이나 화려했다.

웬만한 사람들이 모두 저택 안으로 사라졌을 무렵, 거대한 흑마 2마리가 이끄는 마차 한 대가 정문으로 들어섰다. 마차에 박힌 문양을 확인한 시종들이 재빠르게 일렬로 늘어섰다. 그들은 마차의 문이 열리자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유스티아에 영광을. 어서 오십시오.”

에드윈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의 뒤를 이어 모습을 드러낸 아르망이 생글 미소 지으며 마차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아. 내리실까요, 아름다운 숙녀분?”

“소름 돋으니까 제발 그만두세요.”

레이린은 진심을 그득히 담아 중얼거리며 조심히 땅을 디뎠다. 루시의 강력한 주장으로 엷은 화장이 덧대어진 얼굴은 조금 창백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은 아니었으나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인지 긴장이 영 풀리질 않았다.

힐긋 에드윈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무심한 눈으로 발을 움직일 뿐이었다. 가볍게 숨을 삼킨 그녀는 이내 아르망과 함께 에드윈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영주님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연회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소란하던 말소리가 잠시 가라앉으며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검푸른 광택이 도는 정장을 갖춰 입은 에드윈이 자연스레 그들을 바라보며 계단을 내려왔다. 레이린과 아르망 또한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그 뒤를 따랐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어 이 누추한 곳까지 걸음 해 주시다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사람들의 틈에서 시셀리의 가주, 베오른 시셀리가 살가운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은테 안경을 쓴 푸근한 인상의 남자는 벌써 취기가 꽤 오른 듯한 얼굴이었다.

기실 그가 보낸 초대장에는 어떻게든 참석해 달라는 애원에 가까운 말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마치 에드윈 본인의 의지로 이곳에 찾아온 것처럼 구는 것이 눈에 빤히 보여 퍽 가소로웠다. 에드윈은 구태여 반박하지 않고 건조한 인사를 건넸다.

“생일을 축하합니다, 시셀리 공.”

“선물은 시종을 통해 옮겨 두라 지시해 두었으니, 후에 느긋하게 풀어 보시지요.”

레이린이 사무적인 웃음을 띠며 말을 받았다. 그러자 눈을 휘둥그레 뜬 베오른이 노골적으로 그녀를 훑어보며 감탄했다.

“오, 아제트리아 양! 오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우시군요. 한순간 누군지 몰라볼 뻔했지 뭡니까!”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레이린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칭찬에 감사하기는 무슨. 마음 같아서는 저를 위아래로 훑어본 눈을 뽑고 쓸데없는 말을 나불거린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능숙하게 속내를 감추며 웃었다. 오히려 반응은 다른 이들에게서 돌아왔다. 아르망은 날카롭게 웃으며 칼 같은 혀를 놀렸다.

“하하, 시셀리 공. 과음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영주님을 보좌하시려면 오래오래 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술 끊고 오래오래 살아 서류 밭에서 굴러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미처 해석하지 못한 베오른은 그저 알았다며 허허로운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 태연한 태도에 미간을 조금 찌푸린 에드윈이 아르망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이만 가 봐.”

“알겠습니다. 아, 못해도 1시간은 여기 계셔야 합니다. 다른 데로 새지 마시고요.”

아르망의 경고에 순간 멈칫한 에드윈은 이내 그러마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아르망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레이린을 이끌고 사람들 틈을 빠져나갔다. 그가 웃는 얼굴로 레이린을 향해 속삭였다.

“방금 네 얼굴 진짜 살벌했다. 한 대 칠 줄 알았어.”

“그 정도였다니 다행이네요. 마음 같아서는 그냥 몸을 반으로 접어 버리고 싶었는데.”

“농담도.”

작게 키득거린 아르망은 저편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보좌관 무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농담 아니었는데.’

속으로 그리 중얼거린 레이린은 곧 평온한 얼굴을 하고는 그와 함께 연회장을 누볐다.

오늘 역시 만나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 레이린은 대략 2시간 동안 쉼 없이 연회장을 종횡무진 움직였음에도 반지르르한 아르망의 얼굴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의 문제인가.......’

아니야, 내가 저 미친놈보다 정신력이 약할 리가 없어. 레이린은 애써 부정하며 아르망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생긋 웃었다.

“왜? 힘들어?”

“......그렇게 여유 넘치는 얼굴로 말하지 말아 주실래요. 짜증 나니까.”

“어휴, 힘들면 쉬어야지. 잠깐 쉬고 있어. 어차피 다들 소강상태인 것 같으니까.”

아르망은 실실 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저었다. 대놓고 비웃음이었다. 레이린은 그를 한껏 흘겨본 뒤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건 지금은 쉬어 줘야 할 때였다.

“아제트리아 양!”

레이린이 연회장 구석에 다다랐을 때였다.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도도도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리자 풀썩 안겨 오는 작은 몸이 기꺼워 그녀는 작게 웃었다.

“클라만시아 영애. 그러다 넘어지십니다.”

“우와! 이 드레스 너무 예뻐요! 우와......!”

레이린이 걱정스레 말했지만 아비시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일전에 마거릿의 결혼식에서 만났던 때와는 정반대인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일주일에 한두 번 마주할 때마다 아비시카의 얼굴에는 싱그러움이 점차 더해졌다. 클라만시아 가주 부부는 어색한 듯 다정하게 딸을 챙기곤 했다. 미미한 듯 보이지만 선연한 변화였다.

아이답게 편안함에 중점을 둔 드레스를 차려입고 양 갈래로 머리를 올려묶은 소녀는 남청색 눈을 반짝이며 레이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 발랄한 모습에 레이린은 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소리 죽여 웃는 모습을 본 아비시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을 붉히더니 수줍게 미소 지었다.

“정말 잘 어울려요, 아제트리아 양.”

“.......”

찰나 굳은 얼굴을 했던 레이린은 이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아비시카의 볼을 살짝 건드렸다.

“감사해요. 그보다 제 기억으로는, 편하게 레이린이라고 부르겠다 하셨던 것 같은데요?”

“......레이린도 내 이름 안 부르면서.”

아비시카가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심통이 난 듯 씰룩이는 통통한 볼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레이린은 기분 좋게 웃으며 쪼그려 앉아 아비시카의 어깨를 도닥였다.

“알았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비시카.”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시네요, 두 분.”

그때,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단박에 표정을 바꾼 레이린이 몸을 일으켜 아비시카를 제 뒤로 감추었다. 아비시카 역시 털을 잔뜩 세운 동물처럼 경계심이 역력한 눈을 한 채 레이린의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에게 말을 건 청년이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퍽 멀쩡한 얼굴의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놀라셨나 보군요.”

“누구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스벤 델로이스입니다.”

스벤은 싱긋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손을 내밀었다. 사르르 흩어지는 분홍빛 머리카락 아래의 벽안이 유혹하듯 곱게 휘었다.

“......영주님의 수행 비서인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델로이스 영식.”

무미건조한 미소를 띤 레이린은 그 손을 성의 없이 흔들었다가 놓았다. 그 말에 입술을 움찔한 그가 이내 표정을 가다듬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영 피곤했던 터라 이만 돌아갈까 했는데, 아제트리아 양을 보니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더군요.”

적나라한 말을 내뱉은 그가 시선으로 레이린을 훑어내렸다. 뱀이 휘감아 지나가는 듯 질척한 시선에 레이린은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오늘따라 그녀의 성질을 자극하는 인간들이 자꾸만 눈에 띄어서인지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한동안 세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매끄럽게 올라가 있던 스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뭐지? 보통 이쯤이면 넘어오는데.’

그는 객관적으로 상당한 미형의 남자였다. 스벤은 자신의 얼굴이 가지는 위력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상대의 표정을 읽어내는 능력도 그만큼 발달되어 있었다.

‘반응이 없잖아?’

하지만 레이린의 얼굴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지금껏 이처럼 조금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는 여인을 만나 본 적이 없었기에 스벤은 내심 당황했다.

그가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재차 입을 열던 순간이었다.

“레이린!”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레이린이 자그마한 소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비시카 영애?”

그 물음에, 아비시카는 스벤을 한 번 노려보고는 활짝 웃음 지으며 레이린을 향해 팔을 벌렸다.

“나 엄마 아빠한테 갈 거야. 안아 주세요!”

“기꺼이요.”

레이린은 선선히 웃음 지으며 몸을 숙였다. 회갈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스벤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아, 그럼 제가......!”

스벤은 아비시카를 클라만시아 부부에게 데려다주는 데 동행하며 레이린과 대화를 이어 나가 볼 생각이었다. 더불어 성인의 허리만 한 소녀를 가뿐히 안아 드는 제 팔근육도 은근슬쩍 자랑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레이린이 아비시카를 너무도 가뿐히 안아 들었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탁!

“저한테 손대지 마세요, 아저씨.”

“아, 아저.......”

스벤의 손을 매정하게 쳐낸 아비시카가 날카롭게 눈을 흘겼다. 스벤은 난생처음 들어 본 ‘아저씨’라는 단어에 얼이 빠져 어버버댔다.

레이린은 그런 그를 무시한 채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비시카가 내민 단풍잎 같은 손에 제 손을 맞부딪혀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비시카?”

연회장 한쪽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에밀리 클라만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이린은 담담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클라만시아 부인.”

“세상에...... 고생했네. 이젠 내가 안지. 아비시카, 엄마한테 오거라.”

그녀는 아비시카를 안고 있는 레이린을 보고는 자연스레 양팔을 내밀었다. 아비시카는 레이린과 떨어지는 것이 아쉬운 듯 입을 작게 비죽이고는 어머니의 품으로 건너갔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모습이었던지라 레이린은 작게 웃었다.

그때, 클라만시아 부부의 맞은편에 서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레이린 아제트리아로군.”

묵직한 목소리였다. 시선을 돌리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말끔히 틀어 묶은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름이 깊게 새겨진 얼굴에서는 채 감출 수 없는 세월이 묻어났다. 레이린은 그녀의 신분을 눈치채고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힐데트 공.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힐데트 가문의 가주, 카힐라는 날카로운 눈으로 레이린을 응시했다. 품평이라기보다는 탐색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대단한 분이시지. 느지막이 두 딸을 얻자마자 부군은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고, 본인은 다리를 다치셨어. 그런데도 여태껏 가주의 업무까지 직접 도맡아 하시니까.......’

일전에 아르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왕의 앞에 서도 평소와 다르지 않을 것만 같은 그가 카힐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는 퍽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이린은 본능적으로 꿈틀거리는 경계심을 억누르려 애쓰며 평온한 얼굴을 가장했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난 후, 카힐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갑네, 아제트리아 양. 다음 시찰지가 힐데트령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때 다시 인사 나누도록 하지. 주치의 잔소리 때문에 오늘은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카힐라는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에 박혀 있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몸을 돌렸다. 절뚝거리며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레이린에게 에밀리가 말을 걸어왔다.

“피곤한 얼굴이군, 아제트리아 양.”

“아닙니다. 이게 제 일인걸요.”

“괜찮기는 무슨. 저쪽에 보면 작은 문이 하나 있을 거네. 그 문을 통하면 곧장 주랑 쪽으로 나갈 수 있으니 잠시라도 머리를 식히고 오는 것은 어떤가?”

에밀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아비시카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결국 레이린은 난처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어서 가 보게나.”

“아프지 말아요!”

레이린은 클라만시아 부부와 아비시카의 인사를 들으며 연회장을 벗어났다.

에밀리의 말대로 작은 문을 통과하자마자 어둑하고 좁은 복도가 그녀를 맞이했다. 기다란 복도에는 두꺼운 커튼으로 입구가 가려진 휴게실이 몇 있었다. 복도 끝에서부터 희미한 빗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오나 보네.’

레이린은 기척을 죽이고 복도 끝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그때, 한 휴게실의 커튼이 돌연 홱 젖혀졌다. 놀란 레이린이 움찔 멈춰 섰다.

“......어머. 수행 비서님 아니신가요?”

잠시간의 정적 후, 상냥함과 적의가 반씩 뒤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막을 새도 없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 정말 무슨 날인가?’

오늘만 대체 몇 번째인지. 농도 짙은 불쾌함으로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다. 레이린은 작게 한숨을 삼키고는 영혼 없는 미소를 입가에 덧씌우며 고개를 돌렸다.

휴게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화려한 차림의 여자였다. 윤기 도는 분홍빛 긴 곱슬머리는 곱게 틀어 올려져 있었으며, 자수정을 닮은 보랏빛 눈동자는 아름다웠다. 무엇보다도 꼿꼿이 세운 허리와 목, 오만한 빛이 감도는 시선. 스치듯 보아도 귀한 집의 자제가 분명해 보였다.

여인은 이내 만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던가요? 패트리샤 시셀리입니다.”

누군가 했더니 시셀리 가주의 딸이었나. 레이린은 별 감흥 없이 마주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패트리샤 영애.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사실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어 보았답니다. 괜찮으실까요?”

“네. 무슨 일이신가요, 영애?”

패트리샤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쳤다. 촤르륵, 소리와 함께 부채에 섬세히 장식된 보석들이 흔들거렸다. 부채로 입가를 반쯤 가린 그녀가 상냥하게 물었다.

“아제트리아 양이 입고 있는 드레스가 참 특이해서 그런지, 아까부터 자꾸 눈길이 가더라고요. 혹시 직접 고르신 건가요?”

“아니요, 이건 영주님께서.......”

표정을 지우고 기계적으로 답하던 레이린이 흠칫하며 말을 멈추었다. 머릿속으로 에드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자 혀가 빳빳이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무의식중에 숨마저 멈추었다.

레이린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오르자 패트리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탁, 접더니 더없이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제트리아 양.”

“......네?”

“정말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부드러운 웃음을 띤 패트리샤가 레이린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사르륵,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어둑한 복도에 울려 퍼진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그녀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부디 주제넘은 감정을 품은 건 아니길 빌어요.”

“.......”

“그는 당신이 감히 탐낼 만한 사람이 아니야.”

마음 깊은 곳의 어둠을 헤집듯 낮은 목소리가 귀를 찔러 왔다.

레이린은 시선을 틀어 패트리샤와 눈을 맞췄다. 보랏빛 눈동자 그득한 적개심.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을 읽어낸 그녀는 저도 모르게 조소했다.

참 기분 나쁜 눈이네. ......파버리고 싶게.

“왜 웃는 거죠?”

패트리샤가 의외의 반응이라는 듯 눈썹을 가볍게 까딱였다. 그에 레이린이 무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염려 마세요, 영애.”

“.......”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그분과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유려하게 덧붙인 레이린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예상치 못한 답에 굳어진 패트리샤를 등지고 걸어가는 그녀의 눈은 버석하게 메말라 있었다.

최악이다, 오늘. 레이린은 주랑 너머 어둑한 정원 위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피부 위로 닿아 오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소름 끼쳤다. 내내 의미 없는 미소를 띠고 있던 입가가 피로했다. 저를 훑던 역겨운 시선도,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주제넘지 말라 경고하던 목소리도.......

“아.......”

레이린은 신음을 흘리며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갈 곳 모르는 짜증과 불쾌함이 속을 온통 울렁이게 했다.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해 보아도 평소처럼 쉽지가 않았다.

구역질이 날 만큼 갑갑해 숨을 크게 들이쉬는 순간.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아제트리아 양.”

......지금 가장 피하고 싶은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린은 고개를 들고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기다란 주랑의 저편, 이제는 눈을 감고도 선명히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익숙해져 버린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영주님.”

잇새로 작은 부름이 새어 나왔다.

에드윈은 말없이 발을 옮겨 레이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에드윈의 미간이 순간 좁혀졌다. 다가오던 걸음마저 멈춘 그가 희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왜.......”

레이린은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 그 아래로 자리 잡은 심해 같은 눈동자. 빛이 잘 어울리는 사람. 닿을 수 없는 사람. 어울릴 수, 없는 사람.

검게 일렁이는 충동이 레이린의 입을 멋대로 움직였다.

“머리가 너무 아파 마차로 돌아가 있으려 하는데.......”

“.......”

“부축해 주실 수, 있을까요.”

레이린은 말끝에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힘없는 미소였다.

눈을 몇 번 깜박이던 에드윈이 점차 가까워졌다. 레이린은 무언가를 무서워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직후, 안온한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

놀란 레이린이 흠칫 어깨를 굳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단단한 팔이 그녀의 무릎 아래와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주름 하나 없던 정장이 바스락거리며 구겨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에드윈은 덤덤한 얼굴로 비 내리는 정원을 가로질렀다. 정원에서부터 마차가 세워져 있는 곳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제법 굵은 빗줄기에 젖은 옷이 피부에 바싹 달라붙었다. 젖은 옷 사이로 열기 같은 체온이 오가며 차갑던 몸을 데웠다.

마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곳은 고요했다. 비 때문에 마부들을 안으로 불러들인 것인지, 인기척 하나 없었다.

에드윈은 그들이 타고 왔던 마차 안으로 들어가 레이린을 의자 위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여기에 닦을 만한 것이 있을.......”

레이린을 안전히 내려놓은 그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의자 밑을 살피려던 순간. 미약한 온기가 그의 볼을 건드렸다.

“.......”

흠칫 굳어진 에드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의자에 앉은 레이린이 그의 볼에 닿을 듯 말 듯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댄 채 물끄러미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

투두둑, 빗줄기가 마차의 지붕을 두드리는 소음과 달리 마차 안은 정적이었다. 어둑한 마차 내부. 커튼 틈으로 비쳐드는 달빛은 상대방의 존재만을 간신히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희미했다.

‘그는 당신이 감히 탐낼 만한 사람이 아니야.’

패트리샤의 목소리가 불쑥 머리를 울렸다. 아까 있었던 일이 악몽처럼 기억을 헤치고 나왔다.

늘 스스로 해 오던 생각이었다. 이렇듯 다정한 곳, 선량한 사람들과는 결코 어울릴 수 없다며 늘 세뇌하듯 되뇌어왔다. 어쭙잖은 희망에 흔들리지 않도록 냉정하게 현실을 되새겼다.

분명히 그랬는데. 이 감정은 대체.......

“틀릴 거 하나 없는 말이었는데.”

서로의 얼굴조차 확인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레이린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

“......화가 날까.”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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