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87)

* * *

두 영주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에, 사냥 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이 발칵 뒤집혔다. 에드윈은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번 습격에 관한 함구령을 내렸다.

일행이 당했던 것은 매개인 주술석을 부수어야만 파훼되는 주술이었다. 그렇기에 화살에 꿰뚫려 부스러진 조각들만이 일부 남아 있었다.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증거였다.

에드윈은 주술을 꿰뚫었던 정체 모를 화살과 정신 계열 주술에 관한 일들에 대해서는 따로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이른 뒤 이 일을 덮었다. 본인이 정신을 잃은 동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릴리트는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다행히 사상자는 많지 않았다. 경미한 부상을 입었던 기사들은 정확히 이틀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전보다 더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위험한 순간을 함께 겪었기 때문일까. 사냥 대회 전까지는 은근한 기 싸움을 일삼던 보니파츠 기사단과 클로비스 기사단은 어느새 말까지 놓고는 시시덕거렸다.

“생각보다 훨씬 더 잘하시는데요? 엘빈 그놈이 가르쳤는데도 이 정도라니.......”

클로비스 기사단의 부단장, 리오넬이 싱긋 미소 지으며 레이린에게 물을 건넸다.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내려놓은 그녀는 엷은 웃음을 띠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래 봤자 리오넬 경께는 턱도 없는걸요.”

“아닙니다. 제대로 배우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이 정도면 대단하신 거죠.”

“자꾸 추켜세워 주시면 해이해질지도 몰라요.”

“에이. 안 그러실 거 다 아는데요, 뭘.”

리오넬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마주 웃어 준 레이린은 물 잔을 기울이며 시선을 흘긋 돌렸다. 저 멀리, 말 위에 오른 채 낄낄대며 웃음을 흘리는 엘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선배님, 조만간 특별 보양식이라도 준비해드릴까요?”

“필요 없어.......”

“제 사랑을 거부하시다니, 이렇게 슬플 데가-”

“아악! 필요 없다고!”

목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상대에게 장난을 거는 얼굴이 퍽 해맑았다. 레이린은 질린 얼굴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미친놈.......’

에르치니아 일행이 돌아갈 날짜가 정해지자, 릴리트는 불미스럽게 끝난 사냥 대회의 아쉬움을 달랠 겸 마상 시합을 제안했다. 에드윈은 그다지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최근 여러 일로 서류에 파묻혀 죽어 가던 아르망이 발광하자 마지못해 시합을 수락했다.

그렇게 각 기사단은 시합 연습에 돌입했다. 실력순으로 출전자를 선별하다 보니 엘빈 또한 자연스럽게 참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믿고 싶진 않았지만 정말 그랬다.

리오넬이 말을 걸어온 것은 그때였다.

‘엘빈은 시합 연습 때문에 한동안 정신이 없을 겁니다. 기본 훈련 정도라면 봐 드릴 수 있으니, 시합이 끝날 때까지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엘빈이 레이린에게 기본적인 검술과 궁술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클로비스 저택 전체에 퍼져 있었다. 거기에 클로비스 기사단은 영주의 수행 비서에게 퍽 호의적이었다. 레이린은 순수한 얼굴로 도와주겠다 말하는 리오넬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작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확실히 덥구나, 유스티아는.’

1년 내내 기온에 큰 변화가 없는 윈프리드와는 달리 햇볕이 퍽 따가웠다. 레이린은 연무장 바깥쪽의 턱에 걸터앉아 기사들의 훈련을 구경하며 숨을 골랐다. 그녀의 곁에 나란히 앉은 리오넬이 문득 중얼거렸다.

“참 바보 같은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네?”

뜻밖의 말이었다. 레이린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리오넬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볼을 긁적였다.

“아니, 나쁜 의미는 아니고, 뭐랄까.......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하다고 할까요.”

“아.”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그녀 또한 늘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는 생각이었다.

몇 번이고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로 따스하고 다정한 곳. 그래서 매 순간 죄스러웠다.

“레이린 님께서는 벤투스 출신이라고 하셨죠?”

리오넬이 레이린을 힐긋 돌아보며 물었다. ‘레이린 아제트리아’는 서류상 벤투스의 변방 지역 출신이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선을 정면으로 돌린 그가 물 흐르듯 말을 이어 갔다.

“저는 검은 땅과 호노라투스 사이의 작은 마을 출신입니다. 사실 별 볼 일 없는 용병이었죠. 클로비스 기사단에 들어오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검은 땅’이란, 헤르기아스 대륙 최북단에 위치한 마물 생성의 근원지였다. 다른 말로 ‘늪지대’라고 불리기도 하는 땅.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를 들이마시면 사람은 피를 토하게 되고, 땅에 닿으면 피부가 썩어들어 가게 된다.

“제가 성격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던지라 알게 모르게 원한을 꽤 사고 다녔는데, 하루는 다른 용병들 몇이 작심하고 저를 늪지대로 떠밀지 뭡니까.”

리오넬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무언가를 회상하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레이린은 알 수 없는 눈을 하고는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던 리오넬이 이내 상념을 갈무리하고 말을 이었다.

“그땐 정말 죽을 뻔했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가시던 주군께서 저를 발견하고 거둬 주셨죠. 그게 벌써 5년쯤 전이군요.”

리오넬은 존경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밝게 미소 지었다. 때마침 불어온 미풍이 그의 청록색 머리칼을 간지럽히듯 흐트러트렸다. 보랏빛 눈동자는 먼 과거를 더듬는 듯 조금 멍한 기색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얼떨떨하고 정신없었지만...... 이젠 이곳이 집이나 다름없는 것 같습니다.”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옛이야기를 묵묵히 귀에 담던 레이린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제 막 여트막한 붉은빛이 번져 가는 하늘이 눈에 한가득 고였다.

“.......”

그 빛깔이 사무치게 아름다워, 그녀는 어쩐지 눈을 감고 싶었다.

마상 시합 당일, 이른 아침. 늘 아침잠 가득한 얼굴의 기사들로만 가득 찼던 연무장에는 드물게도 활기가 감돌았다.

“아프다고 우셔도 안 봐 드릴 거니 몸조심하십시오!”

“그쪽이야말로 오늘 경비 설 거 생각해서 적당히 하라고!”

“어어,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 아녔습니까?”

보니파츠 기사단과 클로비스 기사단은 농담 반, 진심 반을 담아 장난을 주고받았다. 왁자지껄, 요란한 소란이 초목을 뒤덮었다. 릴리트는 그런 그들을 진정시키려는 에드윈을 말리며 웃었다.

“꽤 신나 보이는데 그냥 내버려 두지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이 또 얼마나 있다고.”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릴리트와는 정반대로, 무감정하기 그지없는 얼굴의 에드윈이 건조하게 답했다.

“지나친 흥분은 실수를 불러오고, 한 번의 실수가 목숨과 직결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릴리트는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죽기 전에 자네의 평정이 깨지는 모습을 한 번은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

“......글쎄요.”

그 말에, 에드윈의 시선이 저 멀리에서 엘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레이린에게 잠시 머물렀다. 잠시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시선을 제자리로 돌리며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애석하게도 저 또한 인간인지라.”

한편, 가벼운 옷차림으로 목검을 챙긴 엘빈은 레이린을 보며 싱긋 웃음 지었다. 햇빛 아래 붉은 눈동자가 루비처럼 반짝였다.

“이제 곧 시작인데, 응원 안 해 줘?”

“어차피 적당히 지고 빠질 거면서 무슨.”

“그렇긴 하지만 응원은 다른 문제지.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네가 책임져주면 조금쯤은 다쳐도.......”

“헛소리하지 말랬지.”

레이린은 여상히 웃는 낯으로 엘빈의 옆구리를 꼬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반복된 학습으로 뒤로 훌쩍 물러서 옆구리를 지켜낸 엘빈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뒤돌았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레이린의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응원은 감사히 받아 가겠습니다, 레이디.”

“그건 대체 언제 빼 간.......”

반사적으로 이를 갈던 레이린은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입꼬리를 바들대며 애써 웃었다. 그래, 그냥 버린 셈 치자. 깊은 한숨을 삼키는 그녀의 옆쪽에서 아르망이 목소리를 높이며 손을 흔들었다.

“레이린! 슬슬 자리로 돌아와야 해!”

“지금 갈게요.”

마주 대답한 레이린은 걸음을 떼어 임시로 세워진 천막 아래로 향했다. 의자에 미리 앉아 있던 아르망이 제 옆자리를 손짓했다. 그녀가 다가가 착석하자 아르망이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말했다.

“아,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일을 안 하니까요?”

“바로 그거지.”

아르망은 보란 듯이 입을 활짝 벌리고 웃었다. 그 천진한 모습에 레이린은 결국 기분이 상했던 것도 잊고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연무장의 양쪽에서 에르치니아의 기사와 유스티아의 기사가 제각기 말을 몰아 들어왔다. 두 사람은 상석에 자리 잡고 있는 영주들에게 짧게 예를 표했다.

“시간의 심판자께 영광을.”

“정의의 수호자께 영광을.”

릴리트와 에드윈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호응해 주었다.

두 기사가 정면으로 몸을 돌려 목검을 들어 올렸다. 에르치니아 일행은 당장 내일 길을 떠나야 했으므로 부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로 긴장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깃발을 크게 휘둘러 시작을 알리자, 말들이 땅을 박찼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목검이 거칠게 맞닿았다. 곧장 검을 비틀어 공격을 흘려내고 수평으로 벤다. 막아내고, 검을 튕겨내며 옆구리를 노렸지만 팔에 막혀 실패한 후 잠시 물러났다가 또다시 목을 노린다.

아슬아슬한 공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따악!

커다란 소리와 함께 클로비스 기사의 목검이 연무장 바닥 저편에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제 목을 겨누고 있는 목검을 발견한 그가 분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승리, 앤드류 누스!”

금발의 기사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고는 연무장을 몇 바퀴 돌았다.

바로 다음 경기를 치르기 위해 대기하던 엘빈은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채 천막 아래로 돌아오는 클로비스 기사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우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 울면 진짜 창피해지는 거 아시죠?”

“넌 죽을 때 입은 꼭 꿰매고 뒤져라.”

“너무해.......”

엘빈은 울상을 지어 보이며 키득거리고는 말 위에 올라탔다. 연무장으로 말을 몰던 그가 레이린을 돌아보며 눈을 가볍게 찡긋하자 그녀는 미간을 팩 구긴 채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에 엘빈은 뾰로통하게 토라진 얼굴로 경기를 치렀다.

이어 치러진 경기의 승자는 엘빈이었다. 그는 상대를 농락하듯 교묘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검술을 사용했다. 에르치니아의 기사는 이런 상대를 만난 것이 처음인 듯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퇴장했다. 엘빈은 승리한 후 잔뜩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연무장을 빙글빙글 돌며 곡예를 선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린은 미친놈, 하고 혀를 찼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던 엘빈은 바로 다음 경기에서 보니파츠 기사단장을 만나 패배했다. 이어 보니파츠 기사단장이 이후의 결승에서 클로비스 기사단장인 패트릭에게 패배하며 시합은 막을 내렸다.

기사들은 아쉬운 기색을 숨김없이 내비쳤으나 그조차도 곧 사라졌다. 시합이 모두 끝난 후로 예정되어 있는, 두 영주의 정식 대련 때문이었다.

대략적인 정리가 끝나고, 릴리트와 에드윈이 몸을 일으켜 연무장으로 내려서자 기사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집중했다. 훌륭한 기사가 검을 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무료한 눈을 하고 있던 레이린조차 허리를 곧게 펴며 전방을 주시했다. 연무장 가운데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릴리트가 목검을 던졌다 받으며 씨익 미소 지었다.

“로드 에드윈. 기왕 할 거, 이런 장난감 말고 진검으로 하는 건 어떤가?”

“어머니!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시면 또 저한테 업무를 다 떠넘기실 거잖습니까! 안 됩니다! 안 돼요!”

저 멀리 에르치니아의 천막 아래 앉아 있던 커티스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보랏빛 눈동자에서는 절박함마저 엿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릴리트의 시선은 에드윈에게 붙박인 채였다.

알 수 없는 얼굴의 그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패트릭을 향해 손짓했다.

“원하신다면.”

“좋아. 오랜만에 재밌겠군그래.”

릴리트가 기분 좋게 웃으며 보니파츠 기사단장을 향해 손짓했다. 보니파츠 기사단장은 평소 그녀가 애용하던 거대한 검을 건넸다. 크고 넓적한 검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느낌을 주었다.

릴리트는 거대한 검을 쥐며 자세를 잡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연습용 롱 소드 아니었나? 그걸 쓰려고?”

“예.”

에드윈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연무장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관리는 잘해 두었지만 수련용으로 여러 개 만들어 둔 평범한 롱 소드였다. 주인의 명에 따라 그것을 가져다준 패트릭마저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주위의 웅성거림과 대조되게 새파란 눈은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고요 아래에 깔린 소리 없는 위압감에 릴리트는 묘한 호승심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선택하시죠.”

그때 자세를 고친 에드윈이 도발하듯 고개를 까딱였다.

선공을 할지 말지 결정하라는 건가, 건방지게. 입매를 비튼 릴리트가 검을 그러쥐며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거대한 검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떨어져 내렸다.

챙-!

어마어마한 쇳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새파란 눈을 번득인 에드윈은 위에서 내리쳐진 릴리트의 검을 흘려 떨쳐 내고 곧장 팔을 움직였다.

카앙!

어깨 부근을 노리던 검이 쨍한 쇳소리를 내며 막혔다. 끼긱, 쇠가 긁히는 소리를 내며 잠시간 힘겨루기를 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검을 거두었다가 재차 움직였다.

쉴 새 없이 맞부딪치던 검이 잠시 떨어지는 찰나를 틈타 거대한 검이 길게 내리그어졌다. 뒤로 상체를 젖혀 공격을 피한 에드윈이 거리를 바짝 좁혀 릴리트의 검을 튕겨내더니 그대로 그녀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큭!”

부지불식간에 공격을 허용한 릴리트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에드윈의 공격이 언뜻 반칙으로 비칠 수 있었으나, 애초에 두 사람은 ‘대련’의 방식에 제한을 둔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상기한 그녀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완벽한 선(善)은 아니라 이건가.’

그러면 이쪽도 거리낄 건 없지. 히죽 웃음 지은 릴리트가 땅을 박찼다. 기다렸다는 듯 공격을 막은 에드윈의 팔 안쪽으로 파고든 릴리트가 그대로 그를 뒤집어 넘어트리고 목을 짓밟으려던 찰나.

“......!”

허벅지 안쪽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멈칫한 릴리트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자, 은빛 검이 허벅지 안쪽 대동맥에 정확히 맞닿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잘 벼려진 날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니 반쯤 짓밟힌 채로도 흔들림 없이 검을 쥐고 있는 에드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투 직후의 흥분으로 미미하게 흐트러진 눈이 그녀를 직시하며 물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내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다리를 망가트리겠다니. 자네 성격이 썩 좋은 편만은 아니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혀를 끌끌 찬 릴리트가 검을 치우고 에드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 그가 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었다.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사들에게서 뒤늦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악! 주군!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거둬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데리고 살아 주십시오!”

기사들은 발까지 동동 구르며 열광했다. 사람들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북처럼 울리는 환청이 들릴 지경이었다.

둥, 둥, 둥.

그 열기로 가득한 흥분 속에서, 레이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시선을 멀리했다. 릴리트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며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돈하는 에드윈의 위로 햇살이 조각조각 쏟아져 내렸다.

“.......”

......빛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문득, 목이 메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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