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87)

* * *

며칠 후. 클로비스 령 끄트머리의 조용한 숲. 평소에는 고요와 바람 울리는 소리만이 가득하던 그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마거릿 영애.”

“오랜만이에요, 아르망 님. 레이린 양도 잘 지내셨죠?”

“걱정해 주신 덕분에 편안히 지냈습니다.”

레이린은 싱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천막 아래, 단정한 옷차림새로 앉아 있던 마거릿이 불퉁하게 입술을 비죽였다.

“저도 레이린 양이랑 같이 참가하고 싶었는데.......”

“영애께서는 홑몸이 아니시잖습니까. 그보다 영식께서 영애 걱정에 덫이라도 밟으실까 염려되는데요.”

발랄하게 말을 내뱉은 아르망이 어깨 너머를 힐긋 돌아보았다. 저 멀리, 귀족들의 틈에 선 베르디는 연신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마거릿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척 보기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혀를 끌끌 찬 마거릿이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저러다 제가 애 낳을 때 되면 기절할 것 같아서 무섭다니까요.”

마거릿은 부끄러움과 사랑스러움을 반씩 담은 눈빛을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느덧 손은 소중한 것을 감싸듯 배 위에 올라가 있는 채였다. 그에 레이린이 픽 웃음을 흘림과 동시에 낮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망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곧 시작하나 보다. 레이린, 너도 가 봐야지?”

“네. 다녀올게요.”

“키스티엘 경에게 배운 걸 몸에 익힐 겸 다녀오는 거라고 했으니까 많이는 안 바랄게. 토끼 한 마리만 잡아다 줘.”

“의뢰비는 선금인데요, 손님.”

“쳇, 치사하게. 됐다, 다치지만 말고 와라.”

입을 한 번 비죽인 아르망은 레이린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이고는 귀족들 틈으로 몸을 옮겼다. 저도 모르게 엷은 미소를 비춘 레이린은 화살 통을 고쳐 메고선 검과 활을 챙겨 들고 발을 움직였다.

영주인 에드윈과 릴리트의 맞은편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일부는 말 위에 올라타 있었고 일부는 산보를 하려는 듯 가벼운 차림이었다. 앞쪽에 자리하고 있던 엘빈은 레이린에게 힐긋, 눈인사를 하고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레이린이 사람들의 뒤쪽에 자리를 잡고 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위가 조용해졌다. 짙은 침묵 위로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들 알겠지만, 오늘은 특별한 손님께서 함께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모쪼록.......”

서늘한 눈이 한순간 레이린을 직시했다. 사람들 틈으로 두 눈이 맞닿았다.

환상이라고 치부해도 좋을 만큼 짧은 시간이 흐르고. 이내 에드윈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다치지 않고.”

“.......”

“무사히 귀환할 수 있길 바랍니다.”

어딘지 기이한 어조의 말이 끝맺어졌다. 레이린은 눈을 천천히 한 번 깜박였다. 어느덧 맞닿았던 시선은 꿈인 듯 사라진 후였다.

무미건조하게 연설을 마친 에드윈이 말머리를 돌리며 덤덤히 명했다.

“출발합니다.”

직후 영주와 그 휘하의 기사들이 어둑한 숲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이어 승부욕 가득한 얼굴을 한 귀족들이 앞다투어 말을 몰았으며, 저들끼리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이들 또한 천천히 발을 떼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레이린은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음산한 빛깔의 먹구름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희미한 물비린내가 훅 끼쳐 왔다. 곧 비가 올 모양이다. 까닭 모를 불안감이 다시금 경종을 울렸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활을 꾹 그러쥔 레이린이 이내 빽빽한 나무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부단장님, 제가 잡은 게 더 큰 것 같은데요?”

“눈 삐었냐? 내가 잡은 놈이 더 크거든?”

엘빈이 으스대자 리오넬이 발끈하며 반박했다. 기사들의 선두에서 어린아이처럼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힐긋 돌아본 릴리트가 씨익 웃었다.

“기사들이 자네랑 다르게 참 활기차군.”

“......칭찬으로 들리지는 않습니다만.”

“아니, 저 정도의 활기는 오히려 필요한 법이지. 우리 기사단에는 날 닮기라도 한 건지 죄다 늙은이들뿐이어서 말이네.”

푸스스 웃음을 흘린 릴리트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숲 저편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가 문득 입을 뗐다.

“로드 에드윈.”

“예.”

“믿어 줘서 고맙네.”

“.......”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말에는 무거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말을 몰았다. 애초에 답을 바라고 내뱉은 것이 아니라는 듯, 릴리트 또한 침묵을 유지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말발굽에 풀잎이 부스러지는 소리,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기사들이 시시한 자존심 싸움을 하는 소리, 하늘이 낮게 우는 소리 등이 겹겹이 쌓여 갔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에드윈이 서늘히 답을 흘렸다.

“저는 당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

“당신이 내건 동맹의 조건들, 그리고 그에 얽혀 있을 목숨의 수를 셈하여 이익이 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거래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한 치의 침범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무정한 목소리였다. 그 적나라한 선 긋기에 릴리트는 쓴웃음을 삼켰다.

‘......조금 변한 것 같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나.’

며칠 전 클로비스 저택에서 재회했을 때, 사실 릴리트는 조금 놀랐었다. 늘 섬뜩한 살기로 그득하던 에드윈의 눈이 잠잠히 가라앉아 있었다. 해일이 지나고 고요함을 되찾은 바다 같은 기색에, 그녀는 한순간 눈을 의심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역시 잘못 본 것이었나 보다. 지금의 에드윈은 처음으로 시르나티스에 참석했던 5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상대를 찢어발길 듯 시린 살기와 위압감이 서린 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에드윈이 열다섯의 나이로 영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 사정은 유스티아 내에서도 극비로 취급받는 것이었다. 하여 릴리트는 그가 어쩌다가 저런 눈을 하게 된 것인지 아는 바가 없었다.

잠시도 경계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가시를 잔뜩 세운 듯 보이는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 착잡한 눈을 한 그녀가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던 순간이었다.

“......!”

우뚝. 릴리트의 몸이 부자연스럽게 정지했다. 그에 놀란 말이 푸르륵, 소리를 내며 우뚝 멈춰 섰다. 에드윈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왜-”

챙!

말 중간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끼어들었다. 제게로 짓쳐들어오는 검을 본능적으로 막아 낸 에드윈이 눈을 부릅떴다. 초점이 사라진 눈의 릴리트가 또 한 번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뒤쪽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으아악!”

“야 이 미친 새끼야! 갑자기 왜 이래! 나라고!”

“이게 무슨......!”

릴리트와 같이 초점 없는 눈을 한 기사 몇이 제 옆의 사람에게 무작정 달려들었다. 보니파츠 기사단과 클로비스 기사단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동료의 검을 막아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말들이 놀라 날뛰고 쇳소리가 난잡하게 뒤엉켰다.

옅은 혼란을 갈무리한 에드윈은 침착한 태도로 릴리트의 검을 쳐냈다. 그의 눈에 여러 생각이 빠르게 스쳐 갔다.

‘주술인가?’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주술뿐이다. 하지만 주술사들의 마을, ‘켈레마’의 촌장들은 대대로 정신 계열 주술과 관련한 모든 것을 엄격하게 금지해온 데다가, 그에 관한 왕명 또한 존재했다. 그런데도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건, 어디선가 금기를 어기고 있다는 뜻. 그리고 그곳이 어디인지는 명확했다.

‘마티아스.’

유스티아와 에르치니아의 ‘친목’에 반응할 만한 이라면 이드리스 프리조프뿐이다. 습격 정도는 해 오겠거니 싶어 일행에게 물리적 타격을 막는 주술석 정도는 지니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주술이기 때문인지 하등 소용이 없었다.

순간, 릴리트가 거대한 검을 재차 내리쳤다.

콰앙!

굉음과 함께 은빛 날이 끼긱 소리를 내며 팽팽히 대치했다. 주술의 영향 때문인지 가히 인간 같지 않은 힘이었다. 핏줄이 불거진 제 손을 힐긋 일별한 에드윈이 잠시 고민했다.

‘깔끔하게 기절시키기엔 시간이.......’

정신을 빼앗긴 사람이 무작위인 것을 보아, 주술석을 이용해 ‘영역’을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 경우 영역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주술석을 모두 부수어야 주술이 파훼된다.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주술석들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부상을 입히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수밖에.

그리 결론 내린 직후, 새파란 눈이 위험한 빛으로 번득였다. 그 순간 흠칫 어깨를 굳힌 릴리트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섬뜩한 살기를 감지라도 한 것인지, 이제껏 무표정하던 얼굴에 옅은 경계심이 차올랐다.

서늘한 얼굴의 에드윈이 릴리트를 쫓아 움직이려는 순간, 재빠르게 몸을 돌린 그녀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기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곧이어 거대한 검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내리쳐졌다. 검이 향하는 곳을 확인한 에드윈이 경악해 소리쳤다.

“피하......!”

헐떡대며 숨을 몰아쉬던 커티스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긴 적갈색의 머리카락이 가벼이 흔들렸다.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검과 그 검을 쥔 자의 얼굴을 확인한 커티스의 얼굴이 희게 질리는 순간.

캉-!

거대한 쇳소리가 메아리쳤다. 커티스를 노리고 움직이던 검은 꺾이듯 튕겨 나왔다. 그 충격에 손목을 감싸 쥔 릴리트가 옅게 신음하며 뒤로 물러났다.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에드윈이 이를 악물었다. 먹잇감을 탐색하는 짐승처럼 배회하던 시선이 한곳에 붙박였다. 그러자 흙바닥 위를 엉망으로 구르는 무언가가 시야에 박혀 들었다.

화살이었다.

사냥 대회가 시작된 직후. 레이린은 숲 외곽을 가볍게 거니는 척하다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후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무기들을 내려놓고 입고 있던 옷을 풀어헤쳤다. 사냥 대회를 위해 갖춰 입은 평범한 상의와 바지 아래, 온통 검은빛 일색인 옷이 드러났다.

겉에 입고 온 옷들을 잘 정리해 감춰 두고,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은 그녀가 품에서 검은 복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마티아스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레이린은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사흘 전, 그녀는 이드리스 프리조프에게 보내는 정기 보고를 작성했다. 개중에는 에르치니아와의 일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 또한 담겨 있었다.

사실 레이린은 이 일을 미리 알리고 싶지 않았다. 본인을 견제하기 위해서 두 도시가 동맹을 맺는다는 소식에 가만히 앉아 있을 위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클로비스 저택의 또 다른 첩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에르치니아의 일을 생략해 보고했다가는 외려 그녀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더불어 녹스의 평판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그러니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녀는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첩자로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저 스스로의 본분을 다한 것이다.

그리 되뇌고 또 되뇌었건만. 레이린은 결국 스스로의 미련함을 인정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손을 들어 목걸이를 풀어 내렸다. 곧 이질적인 광채를 띠는 황금빛이 머리카락과 눈을 물들였다.

그녀는 목걸이를 품에 챙겨 넣고, 검이 아닌 활과 화살 통을 챙긴 채 걸음을 떼었다. 사람들을 피해 기척을 죽인 채로 얼마나 걸었을까. 숲 저편에서 희미한 소란이 전해졌다.

“......아악!”

사람의 비명. 그것을 인지한 레이린이 이를 악물며 곧장 땅을 박찼다. 영주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자 아래쪽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야! 너 손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만둬, 이 미친 새끼야!”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시시덕대던 기사들이 절규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 광경을 본 레이린은 본능처럼 에드윈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선연한 황금색 눈이 가볍게 흔들렸다.

‘설마.......’

기묘한 불안감을 안은 채 고개를 움직이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릴리트의 검을 받아내는 에드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레이린은 그의 모습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삼켰다.

‘그보다, 주술인가.’

이윽고 평정을 되찾은 레이린이 냉정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동료에게 달려드는 이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주술을 이용한 듯싶었다.

정신 계열 주술의 연구나 사용 등은 모두 왕명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하나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그런 것을 신경 쓸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우선 주술석부터 찾아야 한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레이린이 활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사냥감을 덮치기 직전의 맹수처럼 서늘한 시선으로 주위를 훑던 때, 돌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피하......!”

미처 인지할 새도 없이 고개가 돌아갔다. 드물게도 경악한 얼굴을 한 에드윈과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에서 커티스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릴리트의 모습. 일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캉!

매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이 릴리트의 검을 정확히 쳐내자, 커다란 울림이 숲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레이린이 반사적으로 에드윈을 바라봤다.

“.......”

새파란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어둑해졌다. 에드윈은 잠시간 바닥을 구르는 화살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레이린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했지만 그는 담담히 릴리트를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자그맣게 안도한 레이린은 다시금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저 멀리, 나무의 줄기에 박혀 있는 3개의 주술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망설임 없이 활을 들어 올린 그녀가 호흡을 멈추며 시위를 당겼다.

쨍그랑!

‘하나.’

숨을 고르고 재차 화살을 메겼다. 쐐액, 화살촉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온다.

‘둘.’

그리고 마지막.

마지막 주술석은 에드윈과 릴리트 뒤편의 나무에 박혀 있었다. 레이린은 화살을 천천히 시위에 메겼다. 지금껏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던 손에 문득 미약한 떨림이 일었다.

“.......”

화살 끝이 에드윈에게로 향하자 저도 모르게 호흡이 멈추었다. 레이린은 입술을 거칠게 짓씹었다. 어쩐지 구역질이 일 것 같은 기분으로 팔에 힘을 더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겨냥하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 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물결치듯 날아가는 모습이 느릿하게 눈에 박혔다.

-챙!

에드윈과 릴리트의 사이를 스쳐 지나간 화살이 주술석을 박살 냈다. 그와 동시에 검 손잡이로 릴리트의 명치를 가격해 기절시킨 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

“.......”

푸른 눈이 반쯤 어둠에 잠긴 여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복면 너머로 드러난 황금색 눈동자, 머리카락, 활을 쥔 손.

레이린은 저를 하나하나 조각내 삼키듯 짙은 시선에 어쩐지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일순,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

스스로의 생각에 잠시 넋을 놓았던 레이린은 에드윈이 제 쪽으로 다가올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흠칫 정신을 차렸다. 지체하지 않고 땅으로 뛰어내린 레이린은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도망쳤다. 심장이 미친 듯 뛰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헉, 흐.......”

한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이윽고 옷을 정리해 숨겨 둔 곳에 다다르자 걸음이 우뚝 멎었다.

쫓아오는 기척이 없음을 확인하자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가 복면을 내던지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똑.

그때, 빗방울 하나가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투둑, 툭, 빗방울이 하나둘 땅을 적시는 소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레이린은 비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숨만 가쁘게 몰아쉬었다.

‘......미친 거지.’

찰나, 정말이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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