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87)

* * *

어둑한 방 안에 짙은 와인 향이 감돌았다. 테이블 위로 엎드려 잠든 여인의 위로 희미한 달빛이 쏟아졌다. 들릴 듯 말 듯 한 옅은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에드윈은 테이블에 엎드려 잠든 레이린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몸을 기울였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머리카락의 끝을 조금 쥐어 올린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닮았다고 했나.”

우리가 닮았다고 했던 당신의 말. 분명 황당하게만 생각했던 그 말이. 지금은 왜 이렇게.......

“.......”

말없이 레이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에드윈이 고개를 숙였다. 새파란 눈 위로 검은 속눈썹이 비스듬히 늘어졌다.

그는 긴 머리카락 끝에 가볍게 입술을 댄 채로 기원하듯 속삭였다.

“차라리 지금.......”

말로 내뱉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귀로 듣지 않아도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이 빌어먹을 감정에 완전히 잠겨 버리기 전에.

“날 배신해.”

내가 당신을 잘라 낼 수 있도록.

4. 스스로를 불태울지라도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고즈넉한 클로비스 저택의 주변을 이루는 초목도 점차 짙은 초록빛을 띠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손님이 찾아든 것은 그때쯤이었다.

영주인 에드윈을 위시로, 클로비스 저택의 사람들은 긴장한 얼굴을 한 채 저택 정문 앞에 늘어서 있었다.

덤덤한 얼굴의 레이린과 아르망은 저택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시작되는 곳을 바라보았다.

“왔다.”

아르망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사용인들은 제각기 허리를 곧게 세우며 자세를 바로 했다. 레이린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각자 말 위에 올라탄 사람들이 오솔길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일행의 가장 앞쪽에 자리한 여인은 가히 위풍당당하다는 말을 붙여도 될 만큼 인상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적갈색 단발이 어깨 위에서 흔들거렸다.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에는 마주한 상대를 본능적으로 긴장케 하는 카리스마가 깃들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등 뒤에 매달려 있는, 어지간한 성인을 가뿐히 가릴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은 대검이었다.

이윽고 일행이 정문을 넘어섰다. 에드윈의 뒤편, 사용인들의 앞쪽에 일렬로 기립해 있던 클로비스 기사단이 바짝 긴장한 채 그들을 주시했다.

그들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여인은 경쾌하기 그지없는 몸짓으로 말에서 휙 뛰어내렸다. 그녀를 부축해 주려던 기사 하나가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그녀의 대각선 뒤쪽에서 말을 몰던 청년 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여인은 에드윈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주고받기를 얼마. 다음 순간, 저택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커다란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 잘난 얼굴은 더 번지르르해졌군그래!”

“......오랜만입니다, 로드 릴리트.”

“재미없는 성격도 여전하고 말이야.”

여인이 씨익 미소 지으며 툭 내뱉었다. 언뜻 무례하게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에드윈은 그것이 악의가 아님을 알았다.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네, 로드 에드윈.”

에르치니아의 영주, 릴리트 보니파츠가 호쾌한 웃음을 흘리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에드윈과 릴리트는 클로비스 저택 본채에 자리한, 영주의 침실 곁에 있는 깊숙한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다과와 찻잔이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바깥에서 보인 경쾌한 분위기는 어느덧 사라진 후였다.

“그래서.......”

기다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겹친 에드윈이 낮게 물었다.

“정확히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새파란 눈동자가 그의 맞은편에 앉은 여인을 향했다. 어쩐지 참담한 얼굴을 한 릴리트는 한참이나 머뭇대더니 무겁게 입술을 뗐다.

“......로드 에드윈.”

“예. 말씀하십시오.”

“혹 내 남편이 죽은 이유를 알고 있나?”

“......?”

의미를 알 수 없는 물음이었다. 에드윈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릴리트의 남편이라면, 에르치니아의 전 영주였던 베리뮈드 보니파츠를 일컫는 것이었다. 그는 본래 가지고 있던 병이 악화되어 몇 년 전 사망했다.

정확히는 그리 알려져 있었다. 무언가를 직감한 에드윈이 얼굴을 굳혔다.

“병사(病死)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래.”

릴리트는 잠깐 사이 몇 년은 늙은 듯 보이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더니 에드윈과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내 남편이 죽기 한 달 전, 이드리스 프리조프에게서 비밀리에 편지 한 통이 왔네.”

그때 그녀는 남편과 함께 단란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릴리트는 보니파츠 기사단의 일을, 베리뮈드는 영주의 일을 끝마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찻잔을 기울이던 중 편지가 도착했다.

‘이 자가 어쩐 일이지?’

마티아스의 영주인 이드리스와는 공적인 일이 아니고서야 따로 편지를 주고받을 일이 없는 사이였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전달한 편지라니.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베리뮈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수롭지 않은 손길로 봉투를 열었다. 하지만 편지를 읽어 내리는 그의 얼굴은 점차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릴리트가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인데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는 제 눈을 의심하며 흰 종이 위의 글자들을 훑어 내렸다.

「시간의 심판자, 에르치니아의 주인 되시는 분. 그 무엇도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하던가요. 황금빛 찬란한 장미 또한 시간 앞에서는 힘없이 바스러지기 마련. 부디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길 기대하겠습니다.

시간의 그늘 아래 머무는 이들이 평안하시길 바라며. -I.P」

황금빛 찬란한 장미는 유스티아의 상징인 ‘황금빛 장미 덤불에 휘감긴 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손을 잡고 유스티아를 치자. 그리 말하는 건가, 지금?’

베리뮈드가 경악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드리스는 심지어 에르치니아 사람들의 평안을 빈다는 역겨운 말까지 덧붙였다. 그 말의 기저에 깔려 있는 협박이 실로 적나라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잠시간 말을 잃었던 그는 이내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편지를 구겨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괜한 흔적을 남겼다가는 역으로 모함당할 수 있었기에.

불길이 화악 몸집을 부풀리며 편지를 집어삼켰다.

‘미쳤군. 적당히 얌전한 놈인 줄 알았더니 아예 미쳐버린 놈이었나? 어디서 같잖은 협박을 하려 드는 건지.......’

그날의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베리뮈드는 이드리스를 발칙한 미친놈이라 단정했고, 릴리트는 그저 유스티아의 부를 질투하는 치기 어린 서신이라 결론짓고는 그 일에 대해 잊었다.

어쩌면 연륜이라는 오만으로 성급하게 밀서를 없애버린 것이 그들의 실책이었는지도 모른다. 편지를 불태운 날로부터 정확히 한 달 후, 베리뮈드 보니파츠는 소리소문없이 독살당했다.

심증은 명확했다. 하지만 그의 차에 독을 탄 하인이 조용히 자취를 감춰 버림으로써 실질적인 증거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 일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릴리트는 남편의 유언과 평소 그녀가 기사단을 이끄는 모습을 보아온 가신들의 인정을 바탕으로 왕가의 승인을 받아 묵묵히 영주의 자리에 올랐다.

에르치니아를 제외한 지역의 사람들은 여인의 몸으로 영주의 자리에 오른 그녀에 대해서 온갖 헛소문과 모욕적인 말들을 떠들어댔다. 하지만 릴리트는 그런 하잘것없는 말에 신경 쓸 정신조차 없었다. 물밀 듯 쏟아지는 영주의 업무를 처리하는 동시에, 언제 어디서 뻗쳐 올지 모르는 이드리스의 위협에서 에르치니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그렇게 몇 년간 이어지던 아슬아슬한 평화는 이 주일 전에 막을 내렸다. 아들의 시중을 들던 하인 하나가 그의 목에 칼을 꽂으려다가 제압당한 것이다.

그자가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자결해 버린 순간, 그녀는 여실히 깨달았다. 침묵은 그들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다.

“로드 에드윈.”

릴리트가 허리를 곧게 펴며 눈을 빛냈다. 또렷한 자색 눈이 꿰뚫듯 에드윈을 응시했다.

“정의의 수호자, 유스티아의 주인인 그대에게 정식으로 동맹을 제안하겠네.”

* * *

“사냥 대회라.”

레이린은 작은 중얼거림을 흘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잿빛이 감도는 갈색의 속눈썹이 비스듬히 내리깔린 채 팔랑거렸다. 책상 위에는 조금 전 승인을 마친 안건에 대한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에드윈이 잠시 기사단으로 향한 틈을 타, 그녀의 맞은편에서 서류를 얼굴 위에 올린 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아르망이 웅얼웅얼 답했다.

“대놓고 말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이렇게 형식적인 행사라도 치르는 게 더 우아하니까.”

“아.”

아르망의 설명에 레이린이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왜 굳이 돈과 시간을 낭비해 가며 사냥 대회를 치르나 했더니, 이른바 귀족적 화법이라는 소리군.

‘역시 피곤한 삶이야.......’

나름의 적응을 마치긴 했지만, 레이린은 사교적 예절이라는 것이 참 부질없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이런 종류의 기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목을 잘라 버리는 게 편하지 않나.’

레이린은 무덤덤하게 생각했다. 꽤 섬뜩한 생각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퍽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아르망의 얼굴 위에 놓인 서류 아래로 피곤한 말소리가 이어 흘러나왔다.

“이참에 유스티아 내에서 릴리트 님에 대해 헛소리를 지껄이던 골 빈 놈들 입도 좀 닥치게 할 겸 결정된 거지, 뭐.”

읏차, 하고 몸을 일으킨 아르망이 제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은 에르치니아 관련 일로 정신없을 것 같으니까 짬 날 때 틈틈이 짚어 보자. 내가 저번에 준 자료들, 어디까지 외웠어?”

“자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요.”

“좋아. ‘시르나티스’는 뭐지?”

표정을 바꾼 아르망이 늘어진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을 굴려 레이린을 응시했다. 장난기가 완전히 가신 눈을 한 그는 언뜻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에 호응하듯 허리를 곧게 편 레이린이 조곤조곤 답했다.

“1년에 한 번, 다섯 영주가 왕궁에 모여 진행하는 정기 회의를 뜻합니다. 올해의 시르나티스는 대략 한 달쯤 남은 것 같네요.”

“맞아. 그럼 벤투스의 현 상황에 대해 말해 봐.”

“벤투스의 중심인 솔론 가는 타 영주 가문에 비해 이례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방계가 많은 곳이죠.”

레이린은 매끄럽게 말을 잇다가 잠시 아르망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긴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연녹색 눈동자에 불만이 서려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레이린이 말을 마무리했다.

“그 때문에 벤투스 내에서 잡음이 심한 편입니다. 특히 현 영주의 친형이 유난스럽고요.”

“잘 외웠네. 이 정도면 나중에 크게 고생하지는 않을 거야.”

“칭찬 감사합니다.”

레이린은 사무적인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그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아르망이 파드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바람에 그의 얼굴에 엉성히 얹혀 있던 서류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예엑! 들어 오십...... 어라?”

아르망은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낯설다는 것과 애초에 이곳의 주인인 에드윈이 노크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한발 늦게 깨닫고는 어벙한 목소리를 냈다.

그사이 고풍스러운 나무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보기만 해도 개안 되는 것 같은 미모의 청년이 고운 미소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로 올려 묶은 적갈색의 긴 생머리가 가볍게 찰랑거렸다. 청년의 보랏빛 눈을 마주한 아르망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커티스 님? 어쩐 일로.......”

“영주님께서 오늘은 이만 쉬어도 좋다는 말을 전해 달라 하셔서 왔습니다. 조금 전 클로비스 기사단을 한 바퀴 돌아보시더니 특별 훈련을 시작하셨거든요.”

릴리트의 외아들이자 에르치니아의 차기 영주, 커티스가 말을 맺으며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아르망은 그와 대조되게 사악한 기색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호오. 이거 오랜만에 패트릭 경께서 박살 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걸까요.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그리하겠다 나선 것을요.”

생글 미소 지은 청년이 시선을 돌렸다. 그가 레이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린 아제트리아 님. 커티스 보니파츠입니다.”

“레이린 아제트리아라고 합니다, 보니파츠 님.”

“편히 커티스라 불러 주세요. 아무래도 아르망 님께서는 훈련을 구경......하러 가실 듯한데, 괜찮으시다면 동행하시겠습니까?”

“기꺼이요.”

찰나 망설이던 레이린은 현재 에드윈이 기사단 훈련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기의 천재이자 괴물로 불리는 그의 검 실력이 어떠한지 자연스럽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니 구태여 사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직 에드윈이 검을 쓰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 그가 마물을 사냥하는 모습을 스치듯 보기는 했지만.......

‘......조나단.’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던 레이린은 이내 사무적으로 미소를 띠며 아르망과 커티스를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서쪽 별채에 가까워질수록 웅성대는 소리도 성큼 다가왔다. 평소 대련용으로 곧잘 사용되곤 하던 야외 연무장을 둘러싼 기사들의 등 근육이 씰룩대며 말을 주고받았다.

“힉, 어으, 히익, 어흐.......”

“가만히 구경하는 내가 왜 간이 떨리냐. 단장님 이러다 죽는 거 아냐?”

“설마아으으. 와, 방금 진짜 아슬아슬했다.”

기사들은 답지 않게 기죽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등 너머로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레이린은 기사들의 뒤로 조용히 다가섰다.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쉴 새 없이 바닥을 구르는 패트릭과 그런 그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청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패트릭이 반쯤 죽어 가는 얼굴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주, 윽, 주군! 제가 잘못했습니다!”

“단장이 이 모양이니 기사단 전체가 저 모양이지.”

“그! 말씀은, 좀 억울! 합니다악!”

“아직도 말할 기운이 남았나?”

서늘히 내뱉은 에드윈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이를 악문 패트릭이 바닥을 한 바퀴 구르더니 튕기듯 일어나며 에드윈에게 달려들었다. 챙! 커다란 소음과 함께 검을 튕겨낸 에드윈이 눈을 번득이며 상대의 옆구리를 노렸다.

살벌한 대련은 약 10분간 더 이어졌다. 끝내 바닥에 널브러진 패트릭은 제 목을 겨눈 검에 숨을 몰아쉬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졌습니다.”

그에 패트릭의 손목을 발로 짓누르고 있던 에드윈이 숨찬 기색조차 없이 검을 거두었다. 푸른 눈동자에는 무료함만이 가득했다. 지금껏 잔뜩 숨을 죽이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휘익! 역시 주군이십니다!”

“단장님! 전 단장님께 걸었는데 말입니다!”

“야, 닥쳐! 돈 내기 한 거 걸리면 우리 진짜 죽는다.”

“아차.”

몇몇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 요란함 속에서, 레이린은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에드윈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살기로 빚어낸 검이 있다면 꼭 저러할까. 눈을 떼는 순간 잡아먹힐 것 같다.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검이었다. 말로 형용이 불가능했다. 팔에서부터 목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

새파란 눈과 시선이 맞닿은 찰나, 주위의 소란이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으로부터 유리되는 느낌. 깊디깊은 바다 한가운데에 침잠하는 느낌. 이유 모를 감각에 심장이 둥둥 울렸다.

‘......위험해.’

문득 본능이 속삭였다. 살고 싶다면, 저 남자에게서 멀어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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