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87)

* * *

레이린은 순찰 중인 기사들의 눈을 피해 클로비스 저택으로 돌아왔다. 상처 자체가 아물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테지만, 루나의 처치가 워낙 훌륭했던 데다가 붕대로 단단히 동여매 뒀기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라그나르와 키안 또한 윈프리드로 돌아갔다. 레이린은 새삼스레 그들이 어떤 심정으로 이곳까지 달려왔을지 깨닫고는 숙연한 마음이 되었다. 유스티아와 윈프리드 간의 거리와 그들이 도착한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그야말로 ‘미친’ 것처럼 말을 달려 이곳에 온 것이었다.

‘주술석으로 말을 극한까지 몰아붙인 거겠지.’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두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더욱 그랬다.

레이린은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은 모습으로 업무를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한참이나 뒤척이다가 간신히 선잠에 빠지는 듯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헉!”

레이린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번쩍 떴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이불 위로 가쁜 호흡이 내려앉았다. 잠시간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또.......’

그녀는 무릎을 모아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기를 반복했다. 무릎을 감싼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둥둥 박동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레이린은 한동안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미동도 없다가, 어둠이 절정에 달했을 때가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그마한 주술석 등을 한 손에 든 채 쫓기듯 방을 나섰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생각을 고르려 할수록 잡념이 판을 쳤다.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기절하듯 잠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방에는 사무관님들을 위한 술 몇 병이 상시로 구비 되어 있으니 나중에 한번 들러보십시오.’

그때, 일전에 하인트가 지나가듯 흘렸던 말이 떠올랐다.

‘식당 옆방이라고 했던가.’

레이린은 지체하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어둑한 복도를 따라 주홍색 불빛과 긴 그림자가 아롱졌다. 이윽고 방 앞에 다다른 그녀가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아제트리아 양?”

미미한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가 레이린을 반겼다.

그녀의 손에 들린 등에서부터 퍼져 나간 빛이 선객을 물들였다. 짙고 곧은 눈썹을 살짝 덮는 길이의 결 좋은 흑발. 주홍색 빛에 물들어 노을 진 바다와도 같이 보이는 새파란 눈동자. 흐트러진 셔츠 아래로 언뜻 비치는 날렵한 몸.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한 얼굴의 에드윈이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레이린은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그를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평소라면 태연히 답을 내뱉었을 테지만, 지금은 사고를 이루는 구조의 어딘가에 작은 불순물이 낀 것처럼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고장 나 버린 시계가 된 듯한 기분.

무언가 기묘한 빛을 띠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던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들어오시죠.”

반쯤 멍한 상태로 있던 레이린은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문을 닫았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에드윈의 오른편에 자리 잡으며 테이블 위에 등을 올려 두었다.

에드윈은 빈 잔 하나를 꺼내어 레이린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들자 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짙은 자주색의 액체가 잔을 메웠다. 그녀는 말없이 손을 들어 올려 잔을 비웠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새 병을 꺼내고, 따르고, 들이켜고, 다시 잔을 채우는 일이 얼마나 반복되었을까. 레이린이 취기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느릿느릿 깜박였다.

“적당히 마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만.”

어둠에 녹아들듯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린의 시선은 여전히 잔에 고정되어 있는 채였다.

생각이, 사방이 온통 흐릿했다. 하지만 선명히 귓가에 내려앉은 에드윈의 음성이 머릿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수면 아래로 깊이 처박아 두었던 이름 하나가 떠올라 혀끝에 감돌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끝내 그것을 입 안 가득 머금었다.

데릭.

‘레이린.’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곱게 휘어지는 눈, 꽃잎 같다고 곧잘 놀리곤 했던 분홍빛 머리카락.

그는 아마 한평생 레이린의 속에 눌어붙어 있을 진득한 핏자국이었다.

* * *

7년 전.

끼이이익!

마물의 비명이 스산한 숲을 커다랗게 울렸다. 라그나르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피거품을 토해 내는 마물의 목에서 검을 뽑아내며 고개를 돌렸다.

“봤지? 이 마물은 여기를 찌르는 게 제일.......”

라그나르는 설명을 이어 가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그의 곁에 선 레이린이 숲 반대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린? 지금 뭘 보는-”

의문 어린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레이린은 돌연 땅을 박차더니 순식간에 숲 저편으로 달려 나갔다. 당황한 라그나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 뒤를 따랐다.

“잠깐만, 린! 무슨 일이길래......!”

“......세요!”

그때, 숲 저편에서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비명이 들려왔다. 찰나 멈칫한 라그나르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사람? 이런 곳에?’

이곳은 윈프리드의 남서쪽 땅을 장악하고 있는 마물 소굴로, 전 대륙에 악명이 자자한 ‘가시나무숲’이었다. 마물의 부산물로 어마어마한 부를 쌓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생존 자체가 어려운 곳. 윈프리드 내의 수많은 어중이떠중이가 탐욕으로 눈을 빛내면서도 차마 발 들이지 못하는 곳. 그런 곳에 사람, 그것도 퍽 앳되어 보이는 사람의 비명이라?

‘수상하군.’

남색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라그나르는 표정을 굳히며 뛰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찾던 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끼이이익!

거미 형상의 마물이 바닥에 널브러진 채 바르르 경련했다. 마물의 등 한가운데에 검을 꽂아 넣은 레이린이 손에서 힘을 빼며 고개를 돌렸다.

“흐으, 흐.......”

레이린 또래로 보이는 소년 하나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뒤로 물러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둠에 잠겨 조금 어둑해 보이는 분홍빛 머리카락은 피에 전 채였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듯, 그의 전신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소년은 혀를 몇 번 씹을 뻔하더니 간신히 내뱉었다.

“가, 가, 가까이 오지 마!”

“괜찮으니까 진정해.”

“오, 오지 말라니까! 오지 말라고!”

레이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소년 앞에 멈춰 섰다. 히이익, 소리를 낸 소년이 제 뒤에 있는 나무에 등을 바싹 붙이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에는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그를 배려하듯 몸을 낮춘 레이린이 다시금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괜찮아, 도와줄게.”

“.......”

“이름이 뭐야, 너?”

소년의 턱은 아직도 움찔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맨 처음 발악하듯 내보였던 적의는 혼란에 휩쓸려 사라진 후였다.

한동안 경계심과 기이함이 담긴 시선으로 레이린을 마주 보던 그가 희미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릭.”

“뭐?”

“데릭이야, 내 이름.”

그것이 소년, 데릭과 레이린의 첫 만남이었다.

라그나르는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레이린으로 인해 마지못해 데릭을 받아들였다.

가시나무숲으로 토벌을 떠났던 라그나르와 레이린이 웬 소년 하나를 데리고 귀환하자 녹스 전체가 들썩였다. 안 그래도 라그나르가 수장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모두 소년의 존재를 두고 두서없는 추측을 떠들어댔다.

라그나르는 녹스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을 시켜 데릭의 신상을 탈탈 털었다. 하지만 데릭은 그저 도박 빚에 쫓겨 도망치는 아비의 손에 이끌려 살던 터전을 떠나고, 검문소에 지불할 돈조차 없어 가시나무숲으로 등 떠밀려야 했던 가련한 소년에 불과했다.

실제로 숲을 뒤지자 누가 보아도 데릭의 친부임이 분명한 남자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마물들이 뜯어먹어 반절밖에 남지 않은 시신이었지만 얼굴을 확인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그나르는 데릭을 쫓아낼 마지막 핑계마저 사라지자 한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제 살벌한 기세에 짓눌려 주눅 든 얼굴을 한 데릭에게 무심하게 명령했다.

“난 자선 사업가가 아니야. 여기 머물고 싶다면 그만한 값을 해야 해.”

“무슨.......”

“스승을 붙여 줄 테니 기초적인 체술과 호위술을 배워. 수련이 끝난 후 남는 시간에는 린을 만나든 시비 털리고 다니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살아남아.”

여긴 그런 곳이니까. 그리 덧붙인 라그나르는 탐탁잖은 심정으로 데릭을 힐긋 데릭에게 시선을 한 번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어쨌거나 레이린에게 발견될 때까지 마물들 틈에서 살아남아 있던 것을 보면 영 머저리는 아니었다. 적당히 가르쳐서 레이린의 호위로,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일회용 고기 방패의 역할로 쓰일 소년. 라그나르는 데릭의 역할을 그리 못 박고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라그나르의 진짜 의중이 어떠하든, 데릭은 레이린의 호위로서 교육받았다. 스승은 말이 험할지언정 그를 직접 괴롭히거나 때리지는 않았다. 또한 그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물건은 레이린의 입김이 닿아 최상품에 가까운 것으로 준비되었다.

레이린은 또래 친구라고는 한 명도 없는 길드 내에서 적잖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지라 데릭을 많이 아꼈다. 데릭 또한 자신을 구해 주고 일자리까지 내어 준 레이린에게 신뢰와 호의를 내보이며 그녀를 한결같이 다정하게 대했다. 두 사람은 영락없는 친구 사이였다.

그렇게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레이린이 ‘본격적인’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헉......!”

침대가 축축해질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뒤틀던 레이린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목덜미에 엉망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덜덜 떨리는 상체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뭐, 무, 무슨, 이게.......”

턱이 부들거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전신이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렸다. 그만큼 조금 전 꿈에 보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데릭이, 그가 무언가에 난도질당해 죽어 있는 모습.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채로 바닥에 기괴하게 널브러져 있던 모습이 시야에 새빨갛게 비쳤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죽는 꿈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부터 줄곧 보아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충격에서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아니, 안, 안 돼, 데릭.......”

레이린은 두서없는 중얼거림을 반복하며 제 방을 나섰다. 그녀의 요청으로 데릭은 별관 1층의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지금 당장 그가 무사한 모습을 확인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기척은 죽인 채였다.

이윽고 1층에 다다르자, 데릭의 방에서 새어 나온 한 줄기 불빛이 계단 주변을 어른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다행이다.’

살아 있구나. 레이린은 그것을 확인하고 조금 안도했다.

‘역시 그냥 악몽이었.......’

아까보다는 확연히 풀어진 표정을 한 그녀가 문고리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걸 몰랐다고는 하지 않겠지.”

낯선 목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레이린은 문고리로 향하던 손을 저도 모르게 멈춰 세웠다. 반사적으로 숨을 죽이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분명 익숙지는 않지만, 언젠가 들어 보았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어차피 넌 한 번 쓰고 버려질 방패일 뿐이다.”

“.......”

“잘 생각해 봐라. 그것들이 정말로 네가 좋아서, 바라는 것 하나 없이 옆에 두는 것 같으냐?”

레이린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이게 다 무슨 말이지?

귀를 통해 머리로 전달된 말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듯한 기분. 레이린이 혼란스럽게 숨을 죽이는 사이, 낯선 목소리가 이어 흘러나왔다.

“그럴 리가 없지. 지금의 넌 상황이 조금만 변하면 가차 없이 잘라 낼 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레이린은 조심스럽게 문 뒤쪽으로 다가선 뒤, 조금 벌어진 틈새로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키가 작은 남성의 뒷모습 너머로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데릭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일순 숨을 멈췄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뱀의 속삭임 같은 말이 이어졌다.

“누굴 죽이라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쉬운 일이다. 이 가루를 물에 한 줌만 타서 먹이면 돼.”

남자는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데릭의 손에 자그마한 주머니를 억지로 쥐여 주었다.

“겁내지 마라. 몸을 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잠시간 움직이지 못하게 할 뿐이야.”

데릭은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 뿌리치지는 않았다.

“이 일만 잘 해내면 네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부를 안겨 주마. 이 거지 같은 처지에서 벗어날 기회를 주는 거다. 두 번은 없어.”

“.......”

“잊지 마라. 오늘 저녁.......”

레이린은 더 듣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무언가에 쫓기듯 소리 없이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그녀의 등 뒤로 불빛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레이린은 그날 내내 멍한 상태였다. 오전에 라그나르와 식사할 때도, 오후에 마물 사육장에 다녀올 때도 그녀는 줄곧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녀와 비슷하게, 온종일 빽빽한 일정을 끝마친 데릭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까지도 그랬다.

“린, 나 왔어!”

데릭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린에게 다가왔다. 양손에 들린 쟁반 위에는 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투명한 물이 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아. 왔구나.”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레이린이 무감정한 웃음을 띠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에 데릭이 한순간 어깨를 흠칫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을 숨긴 그는 침대 옆 협탁에 쟁반을 내려놓고 잔을 들어 올렸다.

“자, 마셔. 너도 훈련 끝나서 목마르지?”

말간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들이밀어지는 유리잔. 투명한 물이 유혹하듯 찰랑거리고, 유리잔의 표면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으며. 아나스타시아꽃 가루가 들어 있는.

“......데릭.”

레이린은 그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데릭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늘 꽃잎 같다고 놀리곤 했던 그 분홍빛 눈을 마주하자 목이 턱 메었다. 몇 번 입을 달싹인 레이린은 끝내 참담한 심정으로 미소 지었다. 힘없는 속삭임이 허공에 작게 울려 퍼졌다.

“그러지 마.”

“......응?”

“......그러지 마, 데릭.”

레이린의 힘없는 웃음을 본 데릭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경악한 듯 힘이 빠진 손에서 물기 가득한 잔이 미끄러졌다.

쨍그랑!

유리잔이 산산이 부서지며 내지른 비명과 함께, 방 바깥의 소란이 귓가에 희미하게 닿아 왔다.

“막......!”

“......져! 린! 내 말 들리면 대답......!”

살기 형형한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언뜻 들렸다가 사라졌다. 방 바깥에서는 날붙이들이 부딪치는 소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이를 아득, 간 데릭이 번개같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직후 망설임 없이 레이린을 노리고 달려들던 단검이 우뚝 정지했다. 허공에서 핏방울이 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고 데릭의 단검을 맨손으로 잡아챈 레이린이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데릭.”

“......!”

“왜?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우린.......”

친구였잖아. 그리 내뱉으려는 순간, 날카로운 비소를 흘린 데릭이 눈을 부릅뜨며 발악했다.

“입 닥쳐! 누구 멋대로 그렇게 부르는 거야! 난 그냥 너희 거지 같은 것들의 비위를 맞추려 기를 써야 했던 개새끼에 불과했어!”

데릭은 거칠게 씨근덕거리며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피에 물든 칼날이 레이린의 손을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뱀처럼 팔을 타고 흘렀다.

“허울 좋은 소리 집어치워. 내가 너희들이 밥 먹듯이 갈아치우는 하인이랑 다를 게 뭐였는데?”

데릭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그 웃음은 그대로 레이린의 시야에, 심장에 내리꽂혔다.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기에 더욱 매섭게 귀에 들려오는 말들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데릭은 그런 레이린의 상태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봇물이 터진 듯 욕설을 쏟아 냈다.

“말 잘 들을 때 예쁘다며 머리 쓰다듬고, 기분 좋을 때 간식 하나 더 던져 주는 게 친구라니, 구역질 나는.......”

콰앙!

그때 방문이 부서지며 굉음이 울렸다. 데릭과 레이린이 무언가 반응을 내보이기도 전.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위압감을 내뿜는 라그나르가 데릭의 뒷덜미를 잡아채 그대로 내던졌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데릭의 몸이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을 굴렀다. 강한 충격으로 인해 숨이 쉬어지지 않는 듯 그가 꺽꺽대며 복부를 부여잡았다. 그 앞으로 다가간 라그나르가 데릭의 뒷목을 콱 짓밟았다. 남색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이 개새끼가.......”

“오빠! 잠깐만! 죽이지 마!”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레이린이 절박하게 외쳤다.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라그나르가 고개를 돌렸다.

“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난처함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라그나르는 찰나 데릭의 목을 짓밟고 있는 발에 힘을 풀 뻔했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순간 실감해 버렸다.

“......린?”

그가 멍하니 제 동생을 불렀다. 그의 등 뒤까지 다가온 레이린이 희미하게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애써 웃음 지었다.

하지만 차라리 웃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아예 용서해 달라는 말이 아니야. 안 그래. 그래도 죽이지는 말아 줘. 응?”

“.......”

“부탁이야.......”

레이린은 울며 웃고 있었다.

그 후 반란을 주도했던 간부 무리는 모조리 목이 잘렸다. 라그나르가 녹스의 본채를 빼곡히 메웠던 이들을 모조리 몰살하며 별채로 향하는 모습을 본 길드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데릭은 레이린의 간곡한 청으로 인해 홀로 목숨을 부지한 채 지하에 갇혔다. 물론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라그나르는 손수 그의 혀를 잘라 내고 발목의 힘줄을 끊어 놓은 것으로 그의 처벌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는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독을 마시고 죽었다. 사방이 고립된 감옥 안에서 어떻게 독을 손에 넣었는가에 대한 조사로 한동안 소란스러웠지만, 끝내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 뒤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라그나르가 길드원들을 몰살하는 것을 보고 감탄한 키안 에레즈가 그의 비서를 자청했으며, ‘프랭크’라는 독 제조계의 천재가 녹스에 들어왔다. 라그나르와 키안, 그리고 레이린이 끊임없이 뒷걸음질 쳤음에도 지나치게 뻔뻔한 얼굴로 거리를 좁혀 오던 프랭크. 거기에 간부인 안톤.

레이린은 그 넷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항상 입가에 자리하던 미소는 어느덧 닳아 그 흔적만이 희미하게 엿보였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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