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87)

* * *

음산한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는 길드 녹스의 본부. 녹스의 간부 10인 중 한 사람인 안톤은 늦은 시간까지 자신의 집무실에 남아 있었다. 그는 어딘지 초조한 얼굴로 책상을 두드렸다.

톡, 톡, 톡.

“왜 이리 늦......!”

결국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 집무실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커헉!”

열린 문으로 피투성이의 사람이 털썩 내던져졌다. 녹스의 말단 심부름꾼인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연신 피를 토해 냈다. 금세 집무실 바닥이 검붉은 피 웅덩이로 흥건해졌다.

“씨발, 좀 잠잠해졌다 싶더니.”

핏물 위로 발걸음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심기 불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나라한 살기에 안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문간을 바라보았다.

“너, 네가 어떻게.......”

“닥쳐. 지금 당신 혓바닥을 세 조각으로 찢어놔도 성에 안 찰 것 같으니까.”

얼굴의 반이 피범벅인 미청년이 섬뜩하게 미소 지었다. 짙은 남색의 눈에서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광기가 엿보였다. 레이린이 흐린 날의 하늘을 닮았다 칭하곤 하던 결 좋은 머리카락의 끄트머리에서 핏방울이 노을처럼 방울져 떨어졌다.

라그나르가 안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안톤이 민첩한 손놀림으로 주술석을 꺼내 들었지만 의미는 없었다.

“크아아악!”

어느 틈에 날아온 건지 모를 단검이 그의 손을 꿰뚫었다. 안톤이 주술석을 떨어뜨리며 제 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라그나르의 비서인 키안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냉혹한 얼굴로 뇌까렸다.

“지금 당신이 고민해야 할 건 어떻게 발악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덜 괴롭게 죽을 지입니다.”

“끄윽, 끅......! 네놈들이 어떻게, 분명, 아까 함정에.......”

“미친 새끼. 그딴 것도 함정이라고.”

쾅!

책상 앞에 다다른 라그나르가 돌연 안톤의 뒷목을 움켜쥐더니 그의 머리를 그대로 책상에 처박았다. 굉음과 함께 피가 튀었다. 안톤은 뒷목을 그대로 끊어 버릴 듯한 악력에 고성을 내지르며 발악했다.

“끝까지, 도움 안 되는 애새끼들 같으니! 그 자리는 내 거다! 40년 전부터 내 것이었어. 그런데 어딜 되지도 않는 애송이들이......!”

간신히 고개를 비틀어 시야를 확보한 안톤이 라그나르를 씹어먹을 듯 노려보았다. 실핏줄이 터진 눈이 형형했다.

안톤은 선대 길드장이 라그나르를 제 후계라 공언했을 때부터, 그리고 라그나르가 제 친부인 선대 길드장을 죽이고 타 간부들의 동의를 받아 그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부터 줄곧 제정신이 아니었다. 분명 당시 녹스의 일원 중 차기 길드장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그였다. 뒷받침할 세력도, 존경도 모두 충분했다. 모두가 암암리에 그를 차기 길드장으로 대우했다. 모든 게 보장된 삶이었다. 그것이 틀어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순간에 뒤집혔다. 라그나르가 제 친부의 호위를 몰살하고 그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모습을 본 간부들은 언제 안톤을 지지했냐는 듯 라그나르의 앞에서 비굴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안톤은 분노로 눈앞이 새빨개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체감했다. 하지만 한순간의 분노로 모든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한 번뿐일지 모르는 기회를 이리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었으니까.

최소한의 인내심을 그러모은 그는 일부러 누구보다도 선하고 순종적인 모습으로 라그나르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 남매에게 친절한 척 굴며 경계심을 늦추었다.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며 그리 인내했다.

그런데, 어째서! 대체 왜 이런......!

안톤이 이를 아득, 갈았다. 핏물로 젖은 얼굴이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보통 사람이 보았다면 절로 오금이 저릴 만큼 오싹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조차도 그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이의 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를 죽이려고 한 건 상관없어. 애초에 너 같은 새끼들한테 뭘 기대한 적도 없으니까.”

라그나르가 언뜻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안톤의 귓가에 속삭였다. 분명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그것이 마치 목을 조르는 듯해 안톤은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린은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라그나르는 레이린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희미하게 속살거렸다. 안톤의 뒷목을 짓누르는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내가 가장 화가 나는 건.......”

“끄윽! 끅!”

안톤이 숨을 허덕이며 팔다리를 움직였다. 실핏줄이 터진 눈이 고통에 반쯤 뒤집혔다.

“너 같은 개새끼들 때문에 그 애가 또 상처 입었다는 사실이야.”

나긋하게 속삭인 라그나르가 그의 귓가에서 얼굴을 뗐다. 짙게 가라앉은 남색 눈동자가 더없이 차갑게 안톤을 내려다보았다. 본인을 노리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었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레이린, 그녀와 관계된 일이라면 티끌 하나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항상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데에는 도가 텄지만 속이 새까맣게 곪아갈 그녀를 알기에.

차가운 척해도 저도 몰래 어렴풋이 미소 짓는 그녀를 알기에.

끝내는 스스로를 먼저 바스러뜨릴 그녀임을 알기에.

그렇기에 라그나르는 그녀를 위해 그 누구보다 잔인해질 수 있었다.

“안톤. 이게 뭔지 알아?”

돌연 방긋 미소 지은 라그나르가 키안에게서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작은 병에는 보랏빛 액체가 맑은 소리를 내며 찰랑대고 있었다. 불길함을 직감한 듯 안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느새 절명한 심부름꾼의 시체를 한쪽으로 밀어 놓은 키안이 집무실의 문을 닫아걸었다. 라그나르가 더더욱 환한 미소와 함께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프랭크가 이번에 새로 실험해 보겠다고 만든 약이야. 와, 세상에나. 이걸 한 방울이라도 들이켜면 감각이 평소의 20배나 예민해진다더라.”

그 말에, 이제는 푸르죽죽한 낯을 한 안톤이 재빨리 혀를 깨물려 했다. 하지만 번개 같은 속도로 안톤의 입을 우악스럽게 잡아 벌린 라그나르가 그의 입에 약을 흘려 넣은 것이 먼저였다.

“욱, 컥......!”

“기껏 비싼 약까지 낭비했으니, 그 값은 해야겠지?”

그러니 부디 오래 버텨줘. 다정한 속삭임이 울려 퍼진 직후, 찢어지는 비명이 둔탁한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그 뒤로 한참이나 이어지던 비명은 어느 순간 칼로 잘라 낸 듯 뚝 끊겼다.

* * *

‘자, 마셔. 목마르지?’

말간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들이밀어지는 유리잔. 투명한 물이 유혹하듯 찰랑거리고, 유리잔의 표면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레이린은 그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

상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벌어졌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흐릿했던 흰 빛이 점차 밝아지며 시야가 돌아왔다. 레이린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빛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빛에 익숙해지길 기다리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귓가를 간질였다.

“린, 일어났어?”

“......오라버니?”

몽롱했던 정신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단박에 돌아왔다. 흠칫 어깨를 떤 레이린은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밀려오는 통증에 작게 신음했다.

“조심해! 아직 무리하면 안 된다고 했단 말이야!”

레이린보다 더욱 기겁한 라그나르가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 기대어 앉히며 핀잔했다.

잠시간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예고 없이 몸을 기울였다. 풀썩, 작은 소리와 함께 여린 몸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진짜네.”

라그나르의 목을 감싸 안은 레이린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피부에 닿아 오는 온기는 허상이 아니었다. 비 오는 날과 같은, 익숙한 체향 또한 현실이었다.

한순간 굳어졌던 그가 이내 그녀를 부드럽게 마주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에서 긴장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럼, 진짜지. 세상에 나 같은 얼굴이 둘이진 않을 거 아냐.”

“그 말을 들으니 더 실감 나네.”

“너무해....... 우리 엄청 오랜만에 만난 건데 이럴 거야?”

라그나르가 고운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칭얼거렸다.

한편,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레이린은 그에게서 몸을 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깐. 그보다 어떻게 여기 있어? 난 분명.......”

사방에 약초가 담긴 서랍이 가득하고, 허공에도 알싸한 향이 맴도는 것을 보니 이곳은 루나의 집임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확신하자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물밀 듯 펼쳐졌다.

레이린은 안톤의 별장에서 티르소를 비롯해 스무 명에 가까운 이들을 상대해야 했다. 물론 평소였다면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정리할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주술석이라는 걸림돌이 존재했다.

티르소는 성가시게도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한 것인지, 다양하기 짝이 없는 주술석들을 지니고 있었다. 저만한 주술석을 장만하려면 대체 뒷돈을 얼마나 받아야 하려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가 주술에 어느 정도의 내성이 있다 한들, 찰나의 틈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일 뿐이었다. 하물며 수십 개의 주술을 동시에 견뎌낼 수 있는 자는 아마 이 땅엔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나마 레이린이었기에 ‘버텨낸’ 것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려 그들을 몰살한 그녀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개중에는 그녀의 피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작 실신했을 만한 상처를 단 채, 레이린은 말을 몰아 루나의 집 앞까지 돌아왔다.

문을 두드리려 손을 들어 올린 순간을 기점으로 기억이 끊겨 있었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긴 했던 것 같은데.......”

레이린이 이마를 짚으며 기억을 더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라그나르가 작게 한숨을 삼켰다. 회청색 속눈썹 아래의 남색 눈은 기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온몸에 약초와 붕대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레이린은 결코 ‘무사히’라는 말을 뱉을 상태가 아니었다. 문 앞에 쓰러져 있는 레이린을 발견한 루나가 한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옷과 이불에 가려 보이지 않는 상처들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저리 당연하게 내뱉어지는 말에, 속이 못내 쓰렸다.

하지만 라그나르는 늘 그렇듯 그러한 기색을 잘 갈무리했다. 언제 가라앉아 있었냐는 듯 맑은 얼굴을 한 그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톤은 처리했어. 네가 가 있던 별장 쪽 정리도 끝났고. 다른 간부 하나가 공모한 것 같기는 한데, 꼬리를 빨리 자른 모양이야.”

“......그렇구나. 고생했겠네.”

담담한 얼굴의 레이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치료를 위해 목걸이를 풀어놓았기에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은 선명한 황금빛이었다. 알 수 없는 생각을 담고 있는 황금빛 눈은 비스듬히 내리깔려 있었다. 그 위로 드리워진 금색 속눈썹이 신이하고, 한편으로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처연했다. 그 덤덤한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라그나르의 눈에는 어떠한 결의가 깃들었다.

“린.”

희고 고운 얼굴이 진중한 빛을 띠었다. 레이린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라그나르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선연한 온기가 차가운 손을 차츰 데워 갔다.

깊이 숨을 들이켠 라그나르가 잠잠히 입을 뗐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게 해서 미안해.”

“......오라버니.”

“애초에 너만큼은 이런 곳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걸 막지 못한 것도 미안해.”

“오빠.”

“그러니까.”

라그나르는 드물게도 레이린의 말을 끊으며 설핏 웃음 지었다. 문득 해맑은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럼 오빠라고 불러도 돼?’

태양 아래에 서서 환한 웃음을 머금던 소녀. 그 기억을 떠올리는 그의 눈이 선명한 빛을 띠고 빛났다.

“다시는.”

“.......”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할게.”

나는 이 생을 모두 바쳐서라도 널 지키겠다, 그리 다짐했으니까. 라그나르는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아프게 삼키며 방긋 미소 지었다. 유리 조각이 박힌 듯, 보는 사람의 속마저 시리게 하는 아름다움이었다.

찰나 의구심 어린 눈을 하던 레이린은 해사한 웃음을 유지하는 라그나르에 끝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주 웃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그가 본격적으로 그녀의 상처를 질책하려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벌컥!

“아, 안 죽어요! 안 죽는다고!”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저희 아가씨께서는 특히 더 연약하신 분이시란 말입니다!”

키안은 진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어찌나 큰 목소리였던지 라그나르가 재빨리 손을 뻗어 레이린의 귀를 가렸을 정도였다.

루나는 키안을 향해 기가 찬 어조로 중얼댔다.

“쟤가 연약하다니, 세상 연약이 다 죽은 뒤에나 할 수 있는 말일 텐데.......”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원래 끽하면 죽는 게 사람인데!”

그 순간 루나가 고개를 홱 돌렸다. 짙은 녹색 눈에 찰나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말 한번 잘하셨네요.”

한순간 기가 눌린 키안이 입을 합 다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으며 빠르게 말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나한테 이럴 게 아니라 당신네 그 귀한 아가씨한테 충언이나 좀 해요! 지금 당장은 안 죽어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몸 막 굴리면 꼭 죽는다고.......”

루나는 말을 이어 가며 무의식중에 시선을 돌리다가 멈칫했다. 레이린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추며 어깨를 굳혔다.

“아가씨!”

그 자리에서 펄쩍 뛴 키안이 재빠르게 레이린의 침상 옆으로 다가섰다.

“깨어나셨습니까? 어디 아픈 곳은.......”

“안 그래도 피곤할 애 귀찮게 하지 말고 입 닫아라.”

라그나르가 살벌한 웃음을 지으며 키안을 밀쳐 냈다. 순식간에 뒤로 밀려난 키안이 억울하다며 퍼덕거렸다.

익숙하다는 듯 그 광경에서 시선을 돌린 레이린은 루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루나의 팔에 들린 그릇 안에는 약초 무더기와 붕대 등이 담겨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지친 얼굴을 한 루나가 문간에 삐딱하게 기대어 선 채 생긋 미소 지었다.

“그래서 망각의 강은 어땠어? 물은 맑든?”

망각의 강이란 죽은 자의 땅을 둘러싸고 있다 전해지는 허상 속의 강이었다. 루나의 말이 잘 돌려 말한 비아냥이라는 것을 알아챈 레이린이 난처하게 입매를 누그러뜨렸다.

“미안해.”

“정확히 어떤 점에 대해서 미안한 건데?”

“......걱정시켜서 미안해.”

“그래. 정확하게 말해야지. 알고 있으니까 이번만 봐준다.”

그제야 표정을 푼 루나가 레이린의 곁으로 다가오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자. 이제 붕대 갈아야 하니까 신사분들께서는 신속하게 사라져 주세요.”

그 말에, 여태껏 레이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라그나르가 루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이린을 볼 때와는 선연히 다른 눈을 한 그가 루나를 바라보며 경고했다.

“허튼짓하면 그대로 목이 날아갈 줄 알아.”

“저런. 그런데 그건 당신 동생의 판단을 무시하는 발언 아닌가요?”

하지만 루나는 동요하지 않고 곧장 레이린을 들먹였다.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기는 그녀의 태도는 자못 당당하기까지 했다.

“.......”

그에 라그나르가 루나를 노려보았다. 남색 눈이 스산하게 번득였다. 당장에라도 사람을 찢어발길 듯 사나운 눈빛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목을 자르겠다느니 하는 식의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레이린은 내심 놀라워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보통은 라그나르의 살벌한 기세에 눌려 말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루나는 벌써부터 그를 다루는 모양새가 퍽 능숙했다. 레이린은 내심 놀라워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루나는 라그나르와 키안의 등을 떠밀며 무어라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반박의 말을 내뱉다 말고 또다시 투덕거렸다.

“네가 먼저 나가.”

“수장님께서 먼저 나가시죠.”

“하여간 비서라는 게 매번 딴죽이나 걸고. 확 해고해 버리는 수가 있어.”

“그럼 아가씨께 고용해 달라 하면 되니 걱정 없습니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편이 낫겠군요. 사직서 써내면 받아 주실 겁니까?”

“이게 진짜.......”

“둘 다 작작하고 나가요.”

루나는 끝내 지친 웃음과 함께 그들을 방 밖으로 내쫓았다.

그 모습이 퍽 정겨워, 레이린은 엷은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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