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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스 멘보르크는 영주를 독살하려 하고 반역을 꾸민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그와 공모한 멘보르크 가의 차남 로빅 멘보르크 또한 신분을 박탈당하고 처형당했으며, 가문은 장남인 시무스가 이어받게 되었다.
이번 일과 관련된 서류들을 모두 처리하는 데에만 일주일 가까이 걸렸다. 레이린은 비로소 평소와 비슷하게 돌아온 (물론 다른 사람이 보면 기겁할) 업무량에 안도의 숨을 흘리며 집무실을 나섰다.
어느덧 창밖은 새까만 장막에 가려진 듯 어두웠다.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말린 뒤 그대로 침대에 엎어지고 싶었지만 방으로 돌아가 쉴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며 기사단 건물로 향했다.
“아, 왔네?”
목검 하나에 기대어 서 있던 엘빈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새하얀 은발 아래 자리한 붉은 눈이 해사하게 휘어졌다.
달빛 아래에 선 엘빈의 모습은 언뜻 동화 속에 언급되는 요정처럼 신비하게 보였다. 그러나 고된 업무 후의 휴식 시간을 강탈당한 레이린에게는 마물보다도 못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웃음에 화답해 주는 대신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대가를 받아도 꼭 이렇게 귀찮은 방식으로 받아야겠어?”
“너무하네. 내가 손수 핑계를 만들어 주겠다는 건데.”
엘빈이 짐짓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레이린은 코웃음을 쳤다. 저 선한 얼굴 너머에 영악한 여우 새끼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진즉 눈치챈 상태였으니까.
“자, 일단 이것부터 받으시고!”
그때, 해맑은 목소리와 함께 목검이 휙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쥔 레이린이 고개를 돌리자 엘빈이 싱긋 미소 지었다.
“녹스에서는 ‘암살’에 특화된 전투를 위주로 교육받았을 테니 아마 정식 기술들은 많이 익히지 못했겠지. 그러니 이번 기회에 정석적인 검술도 좀 배워 둬.”
“녹스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키스티엘 경.”
레이린은 온화한 목소리를 내며 목검을 고쳐 쥐었다. 이미 들켰으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면전에서 인정하느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들이 꽤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암묵적인 합의하에 형성된 표면적인 평화일 뿐이다.
녹스와 적령. 그들은 먹잇감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를 경계하는 맹수와 다를 바 없는 관계였으니까.
레이린은 동요 한 점 없는 얼굴을 유지하며 웃음 지었다. 그 모습에 고개를 모로 기울인 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모르는 척할 거면 그러든가. 아무튼, 대외적으로 너는 내게 ‘기초 검술과 궁술’을 배우는 거야.”
엘빈은 저를 서늘하게 응시하는 레이린을 향해 구김 없이 웃어 보였다.
“저번에 마거릿을 도왔던 것처럼,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재능 탓이라 핑계를 대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말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겸사겸사 너랑 있는 시간도 늘리고, 재미도 좀 챙기고. 그리 덧붙인 엘빈이 레이린을 향해 목검을 겨누며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숙녀 먼저?”
제게 겨눠진 검 끝을 가만히 응시하던 레이린이 돌연 비소했다.
“그럼 사양 않고.”
직후 레이린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흠칫한 엘빈이 곧장 몸을 틀며 목검을 휘둘렀다.
깡!
둔탁한 소음과 함께 목검이 가각, 소리를 내며 거칠게 비껴갔다. 레이린은 놀란 듯 굳어 있는 얼굴을 마주하고는 눈을 곱게 휘며 속삭였다.
“그런데, 누가 누굴 가르치게 될지는 모르는 거 아냐?”
한순간 멍하니 그 눈을 마주하던 엘빈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팔에 힘을 주었다. 레이린이 곧장 뒤로 물러나며 자세를 잡자 그가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하! 그것참 없던 승부욕도 돋아나게 하는 말이네!”
레이린은 어느새 무감해진 얼굴로 그의 검을 흘려냈다. 이어 목검이 쐐액, 공기를 가르며 엘빈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퍽!
“큭......!”
엘빈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며 검을 휘두르는 속도를 높였다. 막고, 공격하고, 또다시 막아내는 공방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둔탁한 소음이 빠르게 울려 퍼졌다. 눈 깜짝할 새에 셀 수조차 없이 수많은 공격을 막아 내고 행한 손목이 불만을 표하듯 짧게 시큰거렸다.
엘빈은 애초의 목적대로 클로비스 가문의 검술을 사용해 그녀를 상대했다. 클로비스 가의 검술은 헤르기아스 대륙 내에서도 가장 어렵기로 손꼽히는 것이었다. 한 지역의 천재라는 이명을 거쳐 온 자들조차 최소 한 달은 교육을 받아야 기본기를 잡을 수 있는, 어쭙잖은 ‘천재’라는 말로는 결코 소화해낼 수 없는 난이도.
그리고 지금, 그의 눈앞에서 그 기록이 깨지고 있었다.
‘미친 거 아니냐고......!’
엘빈은 헛웃음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대련 초반. 레이린은 분명 ‘암살자’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검술을 사용했다. 그 또한 적령의 후계자로서 교육받은 바가 있으니, 아무리 속도와 위력이 우수하다 한들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짧은 새에 레이린의 검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변화했다. 엘빈이 보여 준 클로비스의 검술을 완벽하게 익혀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외려 본인 특유의 검술에 도움이 될 만한 부분만 귀신같이 파악하여 검에 입히고 있었다.
사납고도 정갈한,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공격들이 단숨에 급소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성질들이 그녀의 검에 스며드는 순간, 그것들은 마치 본디부터 그러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야말로 괴물이라 불릴 만한 습득력과 활용력. 검술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상대를 ‘죽이는’ 목적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검. 그를 상대로 승패가 갈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따악-!
“......!”
마지막을 알리듯 커다란 소음이 청각을 자극했다. 허공을 빙그르르 가른 목검이 텅! 하고 바닥에 부딪히더니 연무장 저편을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헉헉대며 숨을 고르던 엘빈은 목덜미에 바짝 다가선 목검에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한껏 긴장한 근육 위로 동그란 땀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맞은편에 선 레이린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오만한 웃음을 띠었다.
“그래서, 소감은?”
“.......”
엘빈은 한순간 숨을 멈추었다. 조금은 어둑한 불빛 아래 떠오른 미소는 지독하리만치 매혹적이어서, 차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레이린의 입가를 배회하던 시선이 가까스로 떨어져 나갔다. 늦게나마 평정을 되찾는 데 성공한 엘빈이 제 목을 겨누고 있는 목검을 치워 내며 생글생글 웃었다.
“새삼 반할 것 같다, 뭐 이런 거?”
“헛소리.”
레이린이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과 함께 걸음을 물렸다. 엘빈은 보란 듯 그 거리를 도로 좁히며 물었다.
“키스하면 안 되겠지?”
“턱이 나가고 싶은 거라면 시도해 보든가.”
“어차피 시도하게 둘 것도 아니면서.”
“알면 입 다물어.”
“매정하네.”
그래서 더 홀릴 것 같지만. 엘빈은 그리 속삭이며 작정하고 눈을 휘었다.
하지만 그 웃음을 감정 없이 바라보던 레이린은 말없이 검을 고쳐 쥐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기겁한 엘빈이 다급하게 뒷걸음질 쳤다.
“야, 잠깐......! 나 지금 목검도 없는데!”
“내 알 바는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악! 아프잖아!”
이윽고 고요한 저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란이 다시금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달빛 한 점 깃들지 않은 짙은 어둠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엘빈과의 대련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레이린은 묘한 이질감을 감지하고 미간을 움찔, 구겼다.
“.......”
한동안 침묵하던 레이린의 표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며 방과 외부가 오롯이 분리되었다.
그녀는 숨을 깊게 한 번 들이쉰 뒤 방문에서 등을 떼어 걸음을 옮겼다.
달칵.
어둑한 방 안에 엷은 주홍빛이 퍼져 나갔다. 잿빛이 감도는 갈색의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사르륵 흘러내렸다. 레이린은 주술석 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술을 움직였다.
“분명 호위는 필요 없다 말하지 않았나, 티르소.”
주홍색 불빛이 벽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를 그려냈다. 이내 소리 없이 그녀의 곁에 모습을 드러낸 티르소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날, 저는 아가씨의 명에 따라 제 주인의 곁으로 복귀했습니다. 오늘은 주인님의 부탁을 전해 드리려 방문한 것입니다.”
“......안톤 아저씨께서? 부탁?”
“예.”
레이린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잠시간 티르소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편하게 등을 기대었다.
“일단 편지부터.”
상체를 바로 한 티르소가 곧장 품에서 편지를 꺼내 건넸다. 그것을 받아 연 레이린의 시선이 흰 종이 위로 내려앉았다.
「오랜만이구나, 레이린. 잘 적응할까 걱정이 되어 티르소를 보냈는데, 역시 내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다.」
편지를 읽던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렸다. 아마 안톤이 제 앞에 있었다면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 눈에 훤한 탓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어 그녀의 시선이 편지의 아랫부분을 향해 움직였다.
「실은, 네게 부탁할 것이 있어 이리 연락을 보낸다. 아마 너는 모를 테지만, 나는 아주 오래전에 유스티아의 바르베타 령에 작은 별장 하나를 사 두었다. 그리고 그곳에 보안용 주술석들을 설치하고 귀중품들을 보관해 놓았지.
그런데 그 열쇠 역할을 하는 주술석이 어디로 갔는지 영 찾을 수가 없구나. 보관해 두었던 것을 급하게 쓸 일이 생겼는데, 영 난처하게 되었어. 지금 내 아랫것들은 가시나무숲에 토벌을 위해 가 있고, 티르소는 그 별장에 무사히 잠입할 만한 실력이 되질 않는다. 헌데 마침 네가 그곳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지 뭐냐.
물론, 단지 부탁일 뿐이니 거절해도 상관없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야. 네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나만큼 아는 이가 네 오라비를 제외하면 몇이나 되겠어.
그럼 답변 기다리마. 날이 슬슬 더워지려 하니 몸조심하고. -안톤 케르티아」
레이린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어둑한 방 안, 주홍색 불빛이 비쳐 어스름한 황금빛을 띠는 긴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였다.
알 수 없는 시선으로 편지를 들여다보던 그녀가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날 찾아왔다는 건, 네 주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인가?”
“예.”
“그래, 그렇단 말이지.......”
머릿속에 흐린 날의 하늘을 닮은 색이 아른거렸다.
레이린은 책상 위에 펼쳐진 편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나가는데도 라그나르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해져 물어본 것이었다. 녹스에 머물 적에는 한 시간 간격으로 만나도 부족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을 의심받게 할 만한 멍청한 행동을 자처할 사람이 아니었다. 더불어 티르소가 저를 찾아온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고도 하니 대충 납득이 갔다.
‘곧 오겠네.’
이제는 자신의 위치가 꽤나 안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아마 서신 정도는 보내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 생각을 정리한 레이린이 몸을 일으키며 티르소를 돌아보았다.
“내일 저녁. 클로비스령 외곽 검문소 앞에서 대기해.”
“예, 아가씨. 감사합니다.”
티르소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새까맣게 일렁거렸다.
다음 날, 늦은 저녁. 레이린은 업무를 모두 끝마친 후 지체 없이 약속 장소로 향했다. 기사도 아닌 일개 경비병들의 눈을 피하는 것은 그녀에겐 숨 쉬듯 쉬운 일이었다.
레이린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하품을 하는 경비병의 눈을 피해 문을 지나쳤다. 그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음 날 올릴 보고서에 저 경비병의 이름을 적어 넣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였다.
무사히 바깥에 안착하니 건물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티르소가 말 두 필을 끌고 나타났다.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입을 다문 채 말 위에 올랐다.
바르베타령은 클로비스령과 맞닿아 있는 곳이었기에 밤이 깊어갈 때쯤에는 안톤의 별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별장의 정문에 다다르자 레이린과 티르소가 차례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곳입니다.”
거대한 철문 앞에 멈춰 선 티르소가 허리를 숙였다. 레이린은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 산처럼 버티고 선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잇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작긴 무슨.’
클로비스 저택만큼은 아니었지만, 어지간한 귀족저에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의 위용이었다. 정문과 저택 사이를 메우는 드넓은 정원에서는 대리석 조각상으로도 모자라 금장식이 붙은 분수마저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간 그 휘황한 자태를 감상하던 레이린이 티르소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넌 여기서 대기하는 건가?”
“예, 아가씨. 보좌할 실력조차 되지 않아 면목이 없을 따름입니다.”
“......됐어. 문이나 열어.”
레이린은 후드를 벗어 말 위에 얹고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올려 묶었다. 그녀가 단검을 비롯한 무기를 챙기는 동안 티르소는 거대한 철문을 양쪽으로 열어젖혔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별장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레이린은 채비를 끝마친 후 갈라진 철문 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희미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레이린은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빠르게 정원을 가로지른 그녀는 티르소가 가져다주었던 별장 내부의 도면, 주술석의 위치 등을 머릿속으로 상기하며 한 창문 아래로 다가갔다.
‘여기였지.’
눈을 가늘게 뜨고 거리를 가늠한 레이린이 발끝으로 땅을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곧장 뛰어올랐다. 검은 옷에 휘감긴 몸이 허공을 휙 가로질렀다. 스산한 밤바람이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는 옷자락을 장난치듯 스치고 갔다. 보통 사람이 보았다면 기겁할 정도의 높이였지만 손쉽게 창턱에 안착한 레이린의 얼굴은 태연했다. 그녀는 창문을 일부 부수어 잠금쇠를 연 뒤 방 안에 내려섰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그득한 방은 조금 오싹했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것인지 묵은 먼지 냄새가 방 안을 메우고 있었다. 그녀가 방 안쪽의 그림 앞으로 다가서자 발걸음마다 바닥이 작게 삐걱거렸다.
“.......”
이윽고 레이린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그림은 흔하다면 흔한 것이었다. 헤르기아스 대륙의 유일 왕가, 루에이리 왕가의 신화. 태양과도 같이 보이는 황금빛 형체가 땅을 향해 손을 뻗자, 메마른 땅에 절하듯 엎드려 있던 ‘하얀’ 인간이 반쯤 몸을 일으키는 장면.
레이린은 무심결에 시선을 내렸다. 엷은 회갈색 눈이 자그마한 글자 위를 찬찬히 배회했다. 그림의 아래쪽에는 상투적인 어조로 신화의 일부가 적혀 있었다.
「......신의 분노가 차디찬 칼바람이 되어 온 대륙을 휩쓸었을 때. 원망과 울음만을 토해 내던 사람들 사이에서 티끌 한 점 없는 진심으로 이 땅의 안녕을 기도하던 소년이 있었다.
신은 소년의 마음을 갸륵히 여겼다. 모든 인간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지만, 투명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소년을 위해 기회를 주기로 했다.
신이 손을 뻗자 황금빛 광채가 터져 나왔다. 땅 위를 뒤덮은 신성한 빛에 칼바람이 멎고 하늘에서는 소리 없이 눈이 내렸다.
제 할 일을 다 한 빛은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와 이번엔 소년의 몸을 감쌌다. 검은 머리카락이 희게 물들고, 눈은 하늘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 빛났다. 뒤늦게 이변을 감지한 소년이 놀라 고개를 들자 신은 자비로이 웃어 보였다.
‘가라. 가서 그들을 구원하라.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보이는 마지막 자비일지니.’
소년은 그 말에 홀린 듯 걸음을 뗐다. 소년이 손을 뻗으면 이지를 잃어 가던 사람들의 눈이 맑아졌으며, 피 흘리며 죽어 가던 이들이 제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속절없이 스러질 뻔한 목숨들은 그를 목격하고는 신의 자비를 찬양하며 눈물지었다.
개중에서도 앞장서 사람들을 구하고 이끌던 다섯 인간이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새하얀 소년 앞에 엎드려 절하고 이 땅의 왕이 되어 달라 간곡히 청하였다. 소년은 그렇게 왕이 되었다.」
그 구절을 눈에 담은 순간. 낯선 목소리가 벼락처럼 귓전을 때렸다.
‘역시 ......이라 이건가?’
놀란 레이린이 몸을 휙 돌렸다. 어느새 공격할 태세를 갖춘 몸에는 바짝 힘이 들어간 채였다.
하지만 텅 빈 방 안에 인기척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의아해 눈살을 찌푸림과 동시에 관자놀이가 재차 아파 왔다.
‘대단하네. 이딴 괴물이 뭐라고.......’
비웃음이 가득 담긴 어조에 한순간 심장이 덜컹거렸다. 갑작스럽게 속을 들쑤시는 살의에 놀란 레이린이 가슴팍을 움켜쥐며 숨을 헉, 들이켰다. 하지만 목소리와 통증은 갑작스럽게 찾아든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레이린은 잠시간 상체를 숙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통증은 가셨지만 심장의 박동은 여전히 빨랐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린 레이린이 긴장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벽에 걸린 그림을 뚫어져라 응시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머릿속을 울렸던 기이한 목소리마저 착각인 듯 희미해져 갔다.
“방금, 대체.......”
의구심에 미간이 좁혀졌다. 잠시간 경계 어린 눈으로 그림을 노려보던 레이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유를 알 수조차 없는 일에 신경을 쏟는 것보다는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레이린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흰 손가락이 그림 일부분을 꾹 누르자 벽 안쪽에서 둔탁한 소음이 일며 그림이 움직였다.
‘꽤 어둡네.’
그림이 옆으로 움직이자 드러난 비밀 통로 내부는 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숨을 깊이 들이쉰 그녀가 통로 안으로 한 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즉시 찢어지는 소음과 함께 화살 한 대가 날아들었다.
‘......환영 인사도 아니고.’
놀라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화살을 피한 레이린은 무심하게 한숨을 삼키고는, 이어 안쪽으로 발을 뗐다.
그녀는 안으로 향할수록 왜 안톤이 ‘무사히 잠입할 만한 실력’을 운운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통로 내부는 그 자체로 함정이나 다름없었다.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화살이나 도끼, 독침은 기본이고 주술석으로 인한 환각 또한 예삿일이었다.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채 열 걸음을 떼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으리라.
[고마운 줄 알-]
레이린은 서른여섯 번째로 마주하는 환각을 무심하게 파훼했다. 추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기억 속 대화를 읊던 친부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녀는 이제는 지겹다는 감상과 함께 작게 한숨을 삼켰다.
환각으로 인해 여덟 갈래로 갈라진 듯 보이던 길이 다시금 두 개로 합쳐졌다. 안톤에게서 언질 받은 대로 왼쪽 길로 들어서자 길 끄트머리에 작은 문 하나가 보였다.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아래로 훅 꺼지는 바닥을 자연스럽게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생각보다 휑하고 넓은 편이었다.
‘방 안에 별다른 장치는 없는 것 같긴 한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위를 살핀 레이린이 시선을 돌렸다. 입구에서 맞은편 중앙, 그곳에 자리한 받침대 위에 자그마한 열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
레이린은 알 수 없는 눈으로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짙게 가라앉은 눈을 한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떼어 받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열쇠로 손을 뻗는 순간.
쐐액-!
“......이런 예상은 좀 빗나가면 덧나나.”
탁.
눈 깜짝할 새에 몸을 돌려 화살을 잡아챈 레이린이 작게 자조했다. 눈동자를 슬쩍 굴려 확인하자 화살촉에는 독까지 묻어 있었다.
느리게 시선을 돌리자 검은 옷의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입구의 오른쪽 벽에 생겨난 네모난 구멍 앞에 선 그들은 경악한 듯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린은 시선을 내리깔고 제 손에 들린 화살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티르소.”
그 부름에, 복면을 쓴 자 중 가장 앞쪽에서 활을 든 채 굳어 있던 이가 어깨를 움찔했다. 레이린은 보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네 주인이 날 빌미로 뭔가 하려고 한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
“그리고 ‘간부’라는 직위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세력도 없는 나를 빌미로 얻어낼 수 있는 건 딱 하나지.”
흰 손에 들린 화살이 티르소를 겨누고 멈춰 섰다.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한순간 목덜미가 오싹해져 그는 활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라그나르 브리어스의 목.”
그래.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지금껏 그녀 자신을 빌미로 라그나르의 목숨을 취하거나 길드장의 자리를 빼앗으려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느냐, 하면 셀 수조차 없었다. 그만큼 많은 고비를 넘기며 자라난 ‘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하여 안톤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곳까지 발걸음 한 이유는, 한 줌의 미련과 나약함 때문이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제 감이 틀리지 않았을까. 그는 어렸을 적부터 라그나르와 저를 살뜰히 챙겨 주며 미소 짓던 이였으니까. 마지막의 마지막에라도 제정신을 차리고 돌아서지 않을까. 그리 기대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또다시.
“......하나 더 알아 둘 건.”
레이린은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을 애써 갈무리하며 입꼬리를 길게 끌어당겼다. 곧 그녀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자 흠칫하며 정신을 차린 복면을 쓴 자들이 또한 제각기 검을 들어 올렸다. 개중에는 주술석을 꺼내 드는 이도 몇 있었다.
‘주술석을 좀 더 챙겨올 걸 그랬나.’
방어용 주술석은 몇 개 안 가져왔는데. 어느 정도 다치는 건 어쩔 수 없겠군. 그리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건조하게 읊조렸다.
“애초에 살아 나갈 자신이 없으면 들어오지도 않았어, 여기.”
금방이라도 버석거리는 소리가 날 것처럼 메마른 미소와 함께, 그녀가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