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87)

* * *

클로비스 저택은 다시금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레이린은 근신이 끝난 이후 몇 배로 불어난 서류들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그래, 내가 자초한 일이지.......’

그녀는 한탄하며 깃펜을 쥐었다. 맞은편에서는 이미 아르망이 넋을 놓은 채 서류를 휙휙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낮은 목소리가 불쑥 침묵을 깼다.

“카르키오 상단과 도적단 간의 거래 경로에 대해서는 더 알아낸 바가 없다던가?”

“에르멧 공께서 얼마 전에 보내신 서신에 따르면, 일주일쯤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르망보다는 상태가 괜찮은 레이린이 차분히 답했다. 에드윈은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똑똑.

“영주님, 하인트입니다.”

“들어오십시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하인트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인 그가 입을 뗐다.

“영주님. 멘보르크 공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짙은 흑색의 눈썹이 가볍게 움직였다. 에드윈은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얼음처럼 새파란 눈에 이질적인 의아함이 깃들었다.

“언질도 없이?”

“예. 우선 응접실로 모셨습니다만.......”

하인트가 의견을 묻듯 말끝을 흐렸다. 잠시 고민하던 에드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레이린은 서류를 살피던 중 그의 인기척을 감지하고는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에드윈은 그런 그녀를 일별하고는 하인트를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내려가지요.”

하인트와 에드윈이 집무실 밖으로 사라지자 아르망은 곧장 책상에 얼굴을 처박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서류가 들썩였다.

레이린은 시선을 집무실 문 쪽으로 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말없이 찾아오시는 분들은 돌려보내는 편 아니었나요?”

“아, 그거.......”

레이린의 맞은편에 널브러져 있던 아르망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이내 제 머리칼을 마구 헝큰 그가 퀭한 눈으로 말했다.

“멘보르크 공은 영주님께서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신 데다, 취임 초기부터 예의를 잘 지키시기로 손꼽히는 분이라 그러실걸?”

아르망은 그 당시를 회상하듯 허공을 응시하며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아무래도 초반에는 스물도 채 안 된 애송이라고 여기저기서 많이 깔봤었거든.”

지금은 영주님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말이야. 그는 어쩐지 저가 의기양양한 듯이 덧붙였다. 그러고는 자신이 에드윈과 처음 만났을 때의 감상을 주절주절 풀어놓았다.

‘뭐지?’

한편 레이린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미간을 설핏 좁혔다. 에드윈이 시야에서 사라진 이후부터 계속된, 기이한 직감 같은 불안이었다.

‘......착각이겠지.’

그녀는 괜스레 집무실의 문을 한 번 힐긋 바라봤다가, 다시금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흰 손이 가지런히 감싸 쥐고 있던 깃펜의 끝이 조금 떨렸다.

에드윈은 응접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한가운데의 테이블 위에는 정갈한 다기들이 놓여 있었다. 엷은 갈색 찻물이 담긴 찻잔에서는 잔잔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성이 잔잔한 미소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멜로스 멘보르크가 유스티아의 주인을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멘보르크 공. 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앉으시지요.”

멜로스는 어딘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제 맞은편을 손짓했다. 에드윈은 미간을 살풋 찌푸린 채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멜로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리 무례하게 찾아뵙게 되어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한데 왜.......”

“다름이 아니라, 제 첫째 아들에 관하여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무스 영식 말씀이십니까.”

“예.”

에드윈은 멜로스의 첫째 아들, 시무스 멘보르크와 이전에 몇 번 조우한 적이 있었다. 자신보다 두 살이 많은 청년은 영특하고 책임감 있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하여 몇 년 전에 후계자 승인을 내려 주기도 했다.

멜로스는 제 맞은편의 청년을 힐긋 일별하더니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얼마 후, 그가 머뭇대며 품 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이것을 봐주시겠습니까.”

에드윈은 멜로스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들고 시선을 내렸다. 멘보르크 가문의 주치의가 써 내려간 글을 읽는 동안 에드윈의 얼굴이 점차 굳어 갔다.

“......광증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멜로스는 자신을 향하는 형형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파득 떨었다. 급히 헛기침을 해 그러한 기색을 떨쳐 낸 그가 침울한 얼굴로 답했다.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사람을 물어뜯으려 하기도 하고, 자꾸만 헛것을 보는 것처럼 허공을 향해 말을 걸더군요.”

“.......”

“원인도, 치료법도 모두 불투명한 상황인지라.......”

멜로스의 눈이 힐긋 문 쪽을 향했다가 되돌아왔다. 그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여 만일을 대비해 둘째인 로빅을 당분간이나마 후계자로 세우려 합니다. 그에 대한 승인을 요청드리려 이리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멜로스는 에드윈에게서 서류를 돌려받으며 그에게 찻잔을 밀어 주었다. 에드윈은 시무스의 일에 정신이 쏠린 듯 아무런 의심 없이 찻잔을 집어 들었다. 엷은 갈색의 찻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목울대가 일렁였다. 멜로스의 시선이 일순 상대방의 목을 향했다.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기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이 일련의 행동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던 차에. 에드윈의 입에서 피가 왈칵 흘러나왔다.

“커헉!”

쨍그랑!

피 섞인 기침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검붉은 피가 테이블보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에드윈은 찻잔을 내던지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은 곧장 소파 위로 무너졌다. 소파를 짚은 채 또 한 번 피를 토해 낸 에드윈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멜로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나 침착했다. 마치 이리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에드윈이 실핏줄이 터진 눈을 부릅뜨며 멜로스를 노려보자 그는 비스듬히 시선을 피했다. 이내 멜로스의 잇새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안녕히 가십시오, 영주님.”

그가 사용한 것은 1분 안에 사람의 숨통을 끊어 놓는 극독이었다. 이제 곧 절명할 영주 앞에서 그는 일말의 죄책감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울컥 피를 토해 내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오고, 이어서.......

챙-!

“하인트!”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검을 뽑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놀란 멜로스가 눈을 번쩍 떴다.

“무슨......!”

하지만 그는 경악의 말조차 끝맺을 수 없었다. 서늘한 칼날이 어느새 그의 목을 옅게 파고들고 있었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보는 사람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얼굴은 핏기가 가셔 사람이 아닌 조각처럼 보였다. 실핏줄이 터진 새파란 눈이 위압적인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멜로스를 마주 보고 선 에드윈은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짓씹듯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멜로스 멘보르크.”

“어떻, 어떻게.......”

“나는 마지막까지 네게 기회를 주었다. 이 정도로 코앞에서 독을 넣는 것을 내가 보지 못했으리라 생각하나.”

멜로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마주한 이에게서부터 끼쳐 오는 살기에 본능적으로 턱이 떨렸다. 멜로스의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곧이어 바깥이 소란해지며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에드윈은 일말의 감정조차 깃들지 않은 새하얀 얼굴로 피 묻은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너는 끝내 목숨을 버리는 길을 택했군.”

“잠깐......!”

경악한 하인트가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는 순간, 멜로스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하인트에 이어 달려온 레이린과 아르망이 기겁해 소리쳤다.

“영주님!”

푸른 시선이 찰나 레이린을 향했다. 에드윈은 가물가물한 눈을 깜박이며 다가오지 말라 말하려 입을 뗐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에서 피로 물든 검이 빠져나가는 것이 먼저였다.

그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가신 된 자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유스티아의 경계를 담당하고 있는 에르멧 가문의 가주, 펠릭스 에르멧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짙은 적색의 머리칼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사르륵 흘러내렸다.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던 레이린이 담담한 웃음과 함께 화답했다.

“시무스 멘보르크 영식께서 보내신 편지를 들고 바로 달려와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부디 자책하지 마시길.”

“하지만 제가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다면 애초에 생기지 않았을 일이 아닙니까. 이번 일은 명백히 제 실책입니다.”

펠릭스는 우울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그는 조금 전, 멘보르크의 가주에 의해 방 안에 감금되어 있던 시무스 멘보르크의 편지를 받고 급히 클로비스 저택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그가 자그마한 중얼거림을 내뱉으며 문틈을 힐긋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정말 멘보르크 공께서 도적단의 출입을 묵인하고 계셨을 줄이야.......”

레이린은 펠릭스가 응시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좁은 문틈으로 방 안의 모습이 비쳐들었다. 침대에 기대어 앉은 에드윈은 무감한 얼굴을 한 채 한 청년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시무스 멘보르크였다.

시무스는 제 아버지가 에르멧 가문의 눈을 피해 도적단의 출입을 허락해 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은 사실을 우연히 눈치채고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곧장 이 사실을 영주인 에드윈에게 고하려 했다. 하지만 호시탐탐 후계자 자리를 노리던 동생에게 꼬리를 밟혀 외려 저택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멜로스는 그런 시무스의 반발에 불안감을 느껴 에드윈을 독살하고 영주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극단적인 시도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두 가지에 저지당했다. 하나는 평소 사용인들에게도 호평이 자자했던 시무스가 동생의 눈을 피해 편지를 보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무리 내성이 있다고 한들 멀쩡하신 건 아닐 텐데.......”

펠릭스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레이린이 넌지시 물었다.

“이번에 멜로스 멘보르크가 쓴 독은 사지를 마비시키고 속부터 태우는 종류의 극독이었다죠. 학자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것이라던데, 영주님께서는 어쩌다가 그런.......”

“아.......”

그녀의 물음에 펠릭스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흐렸다. 자색 눈동자가 곤란함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한 레이린이 재빨리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것을 여쭈었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알려드릴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나중에 영주님께 직접 듣는 편이 나으실 것 같습니다.”

한결 가벼운 얼굴로 답한 펠릭스가 다시금 시선을 방 안으로 돌렸다. 레이린은 그를 따라 시무스의 어깨를 두드리는 에드윈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잔잔했다. 핏기가 가셔 창백한 얼굴만이 그가 낮에 들이켠 독의 후유증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때, 레이린의 회갈색 눈동자에 불빛 한 줄기가 비쳐들었다. 문득 귓가에 서글픔을 담은 말이 닿아 왔다.

“......원래부터 저리 냉정한 분은 아니셨는데.”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어느 날을 회상하는 듯한 속삭임이었다. 이내 적막한 침묵이 내리깔렸다.

레이린은 흑색 머리칼 아래에 자리한 조각 같은 얼굴을 얼마간 눈에 담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과 달랐다는 그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런 의문을 애써 한쪽으로 밀어 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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