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87)

* * *

그로부터 얼마 후. 마거릿 리브릭과 베르디 루비아스의 결혼식 날이었다. 리브릭 저택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로 인해 드물게도 복작복작했다.

“아, 영주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마거릿 리브릭이 환한 미소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대기실에 모여 신부의 준비를 돕던 사람들이 약속한 것처럼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신에 대한 영주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결혼을 축하합니다, 영애.”

무심한 목소리가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은은한 윤기가 흐르는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에드윈이 신부 대기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 모습이 가히 포식 후 나른하게 늘어진 흑표범을 연상케 했다. 그의 뒤로 진회색의 예복을 갖춰 입은 아르망과, 마거릿이 선물한 연하늘색의 가벼운 드레스를 걸친 레이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거릿의 얼굴이 보다 환한 미소로 물들었다.

“레이린 양! 와 줬군요!”

“초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이런 근사한 선물까지 보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마거릿 영애.”

레이린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며 사무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 곁에 서 있던 아르망이 짓궂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저는 보이지도 않으시나 봅니다, 영애?”

“어머, 그쪽 신사분께서는 누구신지......?”

“......진심은 아니시죠? 진심이시라면 저 좀 울어도 됩니까?”

“로저 님도 참! 당연히 농담이죠! 오늘 멋지시네요.”

마거릿이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자 아르망 또한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그때, 하녀 한 명이 대기실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 죄송하지만 곧 식이 시작할 시간입니다.”

그 말에 마거릿이 아, 하며 입을 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자리는 식장 입구에 서 있는 하인이 안내해드릴 겁니다. 다시 한번 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에드윈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기실을 나섰다. 그들은 곧 손님들을 들여보내느라 정신이 없는 두 가주를 지나쳐 결혼식장의 안으로 들어섰다.

세 사람이 결혼식장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두런두런 오가던 말소리가 찰나 잦아들었다. 일순 조용해졌던 내부는 이내 어수선한 속삭임들로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저기.......”

“영주님께서.......”

“저번에 바뀌었다던 수행 비서가.......”

일부는 레이린을 흘끔거렸고, 몇몇은 에드윈을 발견하고는 말을 붙여 보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평소 얼굴을 자주 마주할 수 없는 영주에게 이 기회에 눈도장이라도 찍어볼 속셈이었다.

에드윈은 그들을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그저 응시할 뿐이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원체 차가웠던지라 마치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 자리에 손님으로 참석한 입장이었다. 다른 이를 축하하러 모인 자리에서 제게 줄을 대려 안달 난,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이들을 상대해 줄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영주의 눈빛에 담긴 경고를 알아들은 이들이 움찔하더니 엉거주춤 자리에 도로 착석했다.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뒤이어 에드윈 일행 또한 하인의 안내에 따라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 시작한다.”

은은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아르망이 작게 중얼거렸다. 레이린은 허리를 곧게 편 채 식장으로 들어서는 베르디와 마거릿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각기 흰 예복과 드레스를 갖춰 입은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그야말로 만면에 미소가 한가득 고인 얼굴. 두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과 꽃가루, 환호가 쏟아졌다.

“결혼 축하합니다!”

“행복하게 잘 살아요!”

사람들이 축하의 말과 함께 박수갈채를 보냈다. 마거릿과 베르디는 수줍음과 기쁨이 뒤섞인 웃음을 띤 채 그에 화답했다. 서로 으르렁대기 바쁘던 두 가주마저 서로를 얼싸안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레이린은 그들 가운데에 앉아 습관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따라 무미건조하게 손뼉을 치다가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명이 아닌 환호 소리, 핏방울이 아닌 장미꽃잎. 그 선명한 괴리감에, 일순 제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게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다.

‘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제게는, 평생 와 닿지 않을 행복일 것 같다고.

환호와 축복 속에서 결혼식이 마무리되고, 피로연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발랄한 음악에 피로연장이 흥겹게 달아올랐다. 오늘의 주인공인 마거릿과 베르디는 댄스 플로어 위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물론 그사이 춤이 아닌 다른 일로 바쁜 이들 또한 많았다. 레이린은 아르망을 따라 타 가문의 보좌관들과 인사를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요 가신 가문의 보좌관들만 해도 스무 명에 가까웠다. 거기에 여타 방계 가문의 사람들까지 합치니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너 괜찮아?”

한동안 몰려드는 사람들을 상대하던 중, 잠깐의 여유가 찾아왔다. 아르망은 이처럼 많은 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처음일 레이린을 향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창백한 얼굴의 그녀가 영혼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네. 같은 인사를 백 번쯤 반복하느라 조금 피곤한 것 빼고는요.”

그리 중얼거리는 레이린의 얼굴은 흡사 시체를 연상시켰다. 항상 눈 밑에 자리 잡고 있던 눈그늘이 어찌나 짙어졌던지, 이제는 스쳐 지나가던 사람마저 놀라 흠칫하게 할 정도였다. 아르망은 측은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 괜찮구나. 나도 처음엔 그랬어. 아무튼, 이만하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한 번씩 만나 봤으니 밖에서 좀 쉬다가 와. 그동안 내가 적당히 상대하고 있을게.”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레이린은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가득 담아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5분만 더 이곳에 머물렀다가는 내내 웃음을 띠고 있던 입가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지나가던 하인에게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넘기고는 슬그머니 피로연장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훅 밀려오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하.......”

레이린은 양손을 들어 올려 바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꾹꾹 눌렀다. 몇 시간 동안 미소를 유지하는 것은 보통 사람일지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물며 본디 웃음이 많지 않은 그녀에게는 더더욱.

아르망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이대로 한 3시간쯤 돌아가지 않아 버릴까, 그런 충동에 갈등하며 복도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툭!

자그마한 무언가가 모퉁이 너머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레이린의 복부 즈음에 머리를 박은 자그마한 소녀가 크게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콰당!

“으......!”

제법 큰 소음과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경련하는 입꼬리를 매만지고 있었던 탓에, 간발의 차로 소녀를 붙잡지 못한 레이린이 다급히 몸을 낮췄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신가요?”

“아, 흐으.......”

그녀의 허리께에 닿을락 말락 한 키의 소녀가 제 입을 양손으로 꾹 막고 있었다. 커다란 남청색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고인 채였다. 그 와중에도 눈물은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고 있는 드레스의 품질이나 머리에 꽂은 장신구를 보아하니 적어도 귀족 가문의 아이인 듯했다. 그만한 지위의 아이가 어째서 하녀 하나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당황하던 레이린은 경계심 많은 야생동물을 대하듯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다. 그녀는 라그나르의 것과 닮은 소녀의 눈을 응시하며 조곤조곤 입을 떼었다.

“많이 아프세요?”

“.......”

“혹시 손을 떼면 비명을 지를 것 같아서 그러고 계신 건가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어쩐지 망설이는 기색이던 소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여전히 입은 양손으로 막은 상태였다. 그래도 대답 비슷한 것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한 레이린이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손을 뻗었다.

“우선 제 손 잡고 일어나세요. 가까운 휴게실까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놀란 듯 동그랗게 뜨인 눈이 몇 번 깜박였다. 레이린은 일부러 선한 미소를 입에 걸고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한동안 머뭇대다가 레이린의 손을 살짝 붙잡은 소녀가 뒤늦게 입술을 달싹였다.

“......해서.......”

“네?”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녀의 신속한 반응에 소녀는 되레 놀라 어깨를 움찔 떨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레이린은 독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 침묵이 도움이 된 것일까. 이내 굳어 있던 어깨를 늘어뜨린 소녀가 자그맣게 말했다.

“아픈, 티를 내면 안 된다고 해서.......”

“그게 무슨.......”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가 뚝 끊겼다. 드레스가 비스듬히 찢어져 무릎 아래가 훤히 드러난 소녀의 다리에 레이린의 시선이 붙박였다. 희고 여린 종아리는 온통 회초리 자국으로 가득했다.

“......영애.”

“아비시카 클라만시아.”

레이린이 가라앉은 목소리를 냄과 동시에 차디찬 부름이 불쑥 끼어들었다. 소녀가 흠칫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소녀를 보호하듯 끌어당기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 품위 없는 모습은 대체....... 언제 어디서나 지위에 걸맞은 모습과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주홍빛 머리카락을 깔끔히 틀어 올린 여인이 우아한 자태로 걸어왔다. 하지만 고아한 움직임과 달리 청록색 눈동자는 온기 한 점 없이 서늘했다. 청아한 목소리 또한 제 딸아이를 부르는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무감정했다.

레이린은 ‘아비시카 클라만시아’라고 불린 소녀를 힐긋 바라봤다. 그녀의 뒤에 반쯤 몸을 숨기고 있는 소녀는 눈에 띄게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남색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고, 레이린과 맞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클라만시아 가문은 클로비스 가문의 가신 중 하나. 그런 가문의 여식을 저리 스스럼없이 질책할 수 있는 위치의 여인이라면, 레이린이 알기론 단 한 명뿐이었다. 아비시카를 서늘하게 응시하던 여인의 시선이 한발 늦게 레이린을 향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영주님의 수행 비서인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에밀리 클라만시아 님.”

잠시 침묵하던 레이린은 이내 클라만시아 가문의 안주인인 에밀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이름을 들은 에밀리의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실례했네. 딸아이가 길을 잃은 듯해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이리 무사히 데리고 있어 주어 고맙군.”

에밀리는 사무적인 말을 끝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엄격한 시선이 제게 닿은 순간, 아비시카의 몸이 움찔했다.

“아비시카, 이만 이쪽으로 오거라.”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아비시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체념 어린 얼굴을 한 채 힘없이 웃어 보였다. 이어 레이린의 손끝을 붙잡고 있던 아비시카의 손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 순간,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소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아제트리아 양?”

에밀리가 머뭇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희고 고운 미간이 의아함으로 살풋 접혔다. 아비시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레이린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아비시카가 의문이 담긴 목소리를 냄과 동시에, 레이린은 종아리의 상처를 주의하며 소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얼결에 레이린의 팔에 걸터앉게 된 아비시카가 히익, 하며 반사적으로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죄송하지만.”

레이린이 굳은 얼굴의 에밀리를 향해 더없이 말간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와 달리 엷은 잿빛이 감도는 갈색 눈은 싸늘했다.

“영애께서 다리를 다치셨으니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언뜻 정중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어조는 달랐다. 이것이 질책임을 알아차린 에밀리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외려 제 쪽에서 여쭈고 싶은 말입니다만. 설마 이것을 훈육이라 포장하진 않으시겠죠.”

레이린은 영혼 없는 미소를 입가에 단 채 에밀리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자 에밀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닌가? 나랑 남편만 해도 교육을 받을 때 그것보다 훨씬.......”

“본인이 당한 일을 기준으로 정당성을 부여하지 마십시오.”

에밀리의 말을 칼같이 잘라 낸 레이린이 일갈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식을 강하게 키운다는 명목하에 저를 마물이 바글거리는 숲속으로 밀어 넣고 손톱만큼 작은 칼날을 던져 주던 아비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고마운 줄 알아라. 내가 네 나이였을 적에는 이것조차 없이 맨손이었으니.’

그는 숲을 떠나기 전 레이린의 손목을 짓밟아 부서뜨리며 웃었다. 그 또한 발목이 부서졌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손톱만 한 칼날을 쥐고 피투성이가 된 레이린이 본부로 돌아온 직후. 그는 라그나르의 손에 사지가 잘려 레이린이 던져졌던 그 숲 한가운데에 묶였다.

그때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자 마음이 한층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레이린은 과거와 현재에 반쯤 걸쳐진 듯한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인께서 당한 일이 정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진심으로?”

“.......”

“그것 또한 폭력이었습니다.”

청록빛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묵직한 침묵이 주위를 짓눌렀다. 에밀리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아비시카의 등을 멍하니 응시했다. 레이린은 제 목을 감싸는 팔에 힘이 실리는 것을 깨닫고 소녀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

그리고 그때.

“아까 영애의 걸음걸이가 신경 쓰여 확인하러 왔더니.......”

낮은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어깨를 흠칫한 레이린이 몸을 돌렸다. 짙은 바다를 담은 눈이 알 수 없는 빛을 띤 채 그녀를 응시했다.

“......기우는 아니었군.”

그리 중얼거린 에드윈이 충격으로 굳어져 있는 에밀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흑색 머리칼 아래로 새파란 눈동자가 무감하게 빛났다.

“에밀리 클라만시아.”

에밀리는 그 부름에 청록빛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직후 화들짝 정신을 차린 그녀가 복잡한 기색이 깃든 얼굴로 허리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예, 영주님.”

“그대가 당한 일은 분명 부당한 것이었습니다.”

“.......”

“그러니 또다시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진 마시길.”

희미한 경고가 깃든 말이 떨어졌다. 에밀리는 그 말에 고개를 살짝 틀어 아비시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차가움이 아닌, 혼란과 자책이 뒤섞인 어지러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레이린에게 안겨 있는 딸을 바라보던 에밀리가 몸을 앞으로 돌려 다시금 허리를 깊이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뒤, 그들은 클라만시아 저택으로 돌아갔다. 에드윈이 나직한 경고의 말을 남기자 클라만시아 가주 부부는 사과와 함께 겸허히 허리를 숙였다.

“놀러 와 줄 거죠?”

떠나기 직전. 레이린의 손끝을 꼭 쥔 아비시카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달싹였다. 레이린은 그 말에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건.......”

마음 같아서는 흔쾌히 승낙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에드윈의 곁에 하루의 절반은 붙어 있어야 했기에 퍽 곤란했다. 업무가 끝날 때쯤이면 거의 한밤중일 테고, 그때쯤이면 아비시카는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일 테니.

레이린이 어렵사리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 입을 떼던 중이었다. 에드윈이 돌연 몸을 낮추더니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아비시카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경악했다.

“타 지역으로 시찰을 가는 것이 아닌 이상, 일주일에 한 번은 볼 수 있을 겁니다.”

레이린은 그가 한 말을 듣고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드윈은 한결같이 고요했다. 푸른 눈은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잔잔하고 깊었다.

아비시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요?”

“예.”

곧장 답이 돌아왔다. 아비시카는 그제야 방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이 조용히 손을 뻗더니 소녀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그 곁에서, 레이린은 놀란 눈을 한 채 그 생경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미묘한 차이었다. 하지만 그 자그마한 차이가, 평소 살아 움직이는 조각상 같던 그의 얼굴을 인간으로 보이게 했다. 레이린은 홀린 듯 그 얼굴을 응시했다.

‘......저런 얼굴을 할 줄 아는 사람이던가.’

왜인지, 속이 기이하게 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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