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87)

* * *

메나스와 벤딜은 아르망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난색을 표했다. 결국 그들은 에드윈이 다이아몬드 광맥을 클로비스에 귀속시키겠다는 협박을 가하고 나서야 반쯤 우는 듯한 웃음과 함께 손을 맞잡았다.

몇 년간 칼을 갈던 리브릭 가문과 루비아스 가문의 화해 소식, 그리고 각 가문의 후계자인 베르디와 마거릿의 결혼 소식에 유스티아의 사교계가 떠들썩해졌다.

귀족들은 이 일로 인해 얻게 될 것, 잃을 것들을 따지느라 바쁘게 편지를 주고받았다. 한편, 그런 소란에 하등 관심이 없는 레이린은 여유롭게 대로를 거니는 중이었다.

“저건 어때? 저런 식탁보도 하나 있으면 좋지 않을까?”

“나중에는 구석에 처박혀 있게 될 것 같긴 한데, 예쁘긴 하다. 하나 살까......?”

“저 컵도 무난해 보이는데.”

“가격 괜찮네. 사야겠다.”

레이린과 루나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잡다한 세간들을 사들였다.

레이린은 상인에게서 건네받은 종이봉투를 엘빈의 손으로 넘겼다.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든 그가 어딘지 허탈한 어조로 중얼댔다.

“물론 내 의지로 따라온 거긴 한데, 너희들 지금 신혼집에 물건 채우러 돌아다니는 신혼부부 같다는 건 알아......?”

“아, 저것도 예쁘다.”

“이거 얼마예요?”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린과 루나는 상인과의 대화에 열중했다. 엘빈은 허탈한 시선으로 레이린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비죽였다.

오늘은 레이린의 근신 마지막 날이었다. 그동안 제 방에 조용히 머물던 그녀는 엘빈을 통해 루나의 부름을 받고 바깥으로 나온 참이었다. 사실 자체적으로 방에 처박혀 있는 레이린 탓에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그가 루나를 부추긴 것이었지만.

뭐 어떤가. 당사자가 모르면 그만이지. 만족스럽게 웃어 보인 엘빈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레이린을 살펴보았다.

‘어디 상한 데는 없는 것 같네.’

어깨를 으쓱인 그가 손에 든 것들을 정리하며 입을 떼려던 차였다.

“.......”

레이린과 엘빈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 튀었다. 한순간에 그들 주위의 공기가 달라졌다. 찰나 굳어졌던 레이린은 곧장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며 물건을 가판대에 내려놓았다. 그 뒤편에 서 있던 엘빈은 주위를 구경하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골목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것을 눈치챈 루나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레이린?”

그 부름에, 레이린이 루나에게 힐긋 눈짓하더니 엘빈을 보며 환히 미소 지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입술이 곱게 휘었다. 잇새로 속삭임이 튀어나온다.

“몇 명이야?”

“아마도 열둘.”

“너 때문이지?”

“미안. 아마 너희 쪽으로도 몇 명 붙을 거야.”

웃는 얼굴을 한 두 사람이 짐과 속삭임을 번갈아 주고받았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루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너희 지금 무슨.......”

“지금.”

“8시 방향.”

그 순간, 레이린이 루나의 손을 잡아채며 가까운 골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엘빈이 반대 방향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엉겁결에 레이린을 따라 달리게 된 루나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왜-”

“저 녀석한테 암살자가 붙었어. 우리 쪽으로도 올걸? 아, 왔네.”

루나를 이끌며 골목을 빠르게 내달리던 레이린이 등 뒤를 힐끔 일별했다. 검은 옷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는 암살자 넷이 어느새 두 사람의 뒤를 쫓아 달려오고 있었다. 섬뜩한 살기에 피부가 다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히익!”

그제야 작게 질겁하는 루나의 모습에 레이린이 픽, 웃음을 흘렸다.

“걱정 마.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그럼 지금 이건, 헉, 일도 아니냐!”

루나가 숨을 몰아쉬며 버럭 외치자 레이린이 눈을 도르륵 굴렸다.

“정정할게. 앞으로 없...... 아, 다 왔다.”

그때, 그들이 달리던 길의 끝에 막다른 벽이 나타났다. 레이린이 우뚝 멈춰 서자 루나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뭐, 뭐야. 왜 막혀 있는 건데?”

레이린은 말없이 등 뒤를 확인했다. 어느새 속도를 줄인 암살자 넷이 제각기 무기를 빼 들고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목표물이 막다른 곳에 다다른 것을 확인한 듯 여유마저 엿보이는 걸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근신 중인데.’

글렀군. 문득 그런 상념이 머리를 스쳐 갔으나 곧 가라앉았다. 루나의 어깨를 살짝 눌러 그녀를 담벼락에 기대어 앉게 한 레이린이 속삭였다.

“후드 뒤집어쓰고 100까지만 세.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닐 테니까.”

혼란스러운 눈을 하던 루나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 믿기지는 않지만, 녹스의 간부쯤 되는 이가 이런 곳에서 죽지는 않겠지.

곧 붉은 머리카락이 후드 아래로 흔적 없이 감춰졌다. 레이린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품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어느덧 그녀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감정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직후, 서늘한 눈을 한 그녀가 암살자들에게로 달려들었다.

* * *

“멍청한 놈 밑에서 일하느라 고생한다, 너희도.”

푹-!

엘빈은 중얼거림과 함께 마지막 남은 이의 목을 검으로 꿰뚫었다. 이내 암살자의 목에서 피가 팍, 솟구쳤다. 엘빈은 제 얼굴 위로 튀어 오르는 핏방울에 험악하게 미간을 구겼다. 한눈에 보아도 불쾌하기 그지없다는 태도였다.

피로 붉게 물든 은발을 탈탈 털어 낸 그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빨리빨리 좀 올 것이지.”

“죄송합니다.”

“치워. 몇 명은 따라오고.”

엘빈은 냉소적인 얼굴로 골목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들을 향해 턱짓해 보였다. 그가 뒤돌아보지 않고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담벼락의 그늘진 곳에서 사람 몇 명이 튀어나오더니 피투성이의 시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그곳은 언제 싸움이 있었냐는 듯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엘빈은 적령의 그림자들에게서 건네받은 물을 머리에 쏟아부었다. 그러자 머리카락과 얼굴을 뒤덮고 있던 피가 사르르 씻겨나갔다. 붉게 물든 물방울이 날렵한 턱선을 타고 똑, 하고 떨어진다.

“이번에도 노아지?”

“예.”

“하여간 성가신 놈. 천한 것이 주제를 모르고 까부는 걸 받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지.”

엘빈의 핏빛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에 몸을 감추고 따라오던 그림자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천천히 숨을 고르던 엘빈이 느른히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그건 그렇고, 이런 잡것들은 분명 너희 선에서 처리하라고 해 뒀을 텐데.”

“......죄송합니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두 번은 없다.”

“선처 감사합니다.”

긴장감을 갈무리한 그림자들이 다시금 인기척을 지웠다.

엘빈은 얼굴을 굳힌 채 발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노아. 그 이름을 되뇌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

‘형님은 지랄.’

적대감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않는 목소리가 불쑥 귓가를 어지럽혔다.

흰빛을 띠는 은발을 제외하면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는 얼굴. 불쾌하고 더러운 무언가를 마주한 듯 한껏 비틀린 입매. 제 허리께쯤 오는 자그마한 소년 하나가 도발하듯 눈을 빛냈다.

‘......더러운 가짜 주제에.’

그 말에 한순간 눈앞이 새빨개졌다. 그저 기억일 뿐이었음에도 흉흉한 살의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날뛰었다. 엘빈은 저도 모르게 이를 빠득, 갈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거지 같은 새끼.’

섬뜩한 살기와 함께 핏빛 잔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혀를 뽑아 버릴까, 아니면 눈을 파버릴까. 힘줄 하나하나를 도려내고 가죽을 벗겨내도 시원찮을 만큼 뿌리 깊은 증오와 광기가 이성을 흐렸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주먹에는 힘이 한껏 들어가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비쳤다. 끝내 찌릿한 통증이 이는 순간.

‘하라며, 키스.’

문득 레이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제 코앞까지 다가와 매혹적인 웃음을 흘리던 그 얼굴이.

그 모습을 떠올린 순간, 살의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하.”

순식간에 제정신을 차린 엘빈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입가에는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성은 언제 자취를 감추었냐는 듯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그야말로 유령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만 같은 기분.

‘......이제는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나오려나. 픽 웃음을 흘린 엘빈은 그리 자문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레이린과 루나가 사라졌던 골목길에 다다랐다.

앞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든 엘빈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야, 깔끔하네.”

어둑한 골목 안쪽. 검은 옷을 휘감은 사람 넷이 바닥에 기괴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서서 숨을 크게 내쉰 레이린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귀찮은 놈.......”

“그렇게 대놓고 들으라고 말하면 나 좀 상처받거든?”

엘빈은 짐짓 입을 비죽이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눈치를 보며 튀어나온 적령의 길드원들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레이린은 그사이 담벼락 한쪽에 웅크려 있던 루나에게로 다가갔다.

“루나. 이제 끝났.......”

손을 뻗으며 몸을 숙인 순간, 레이린은 후드 사이로 빼꼼 튀어나와 있는 녹색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 흠칫 놀라 몸을 물렸다.

설마 보고 있었나? 언제부터? 혹시 겁이라도 먹은 건가?

“저, 루나.......”

그때, 어쩐지 멍한 얼굴의 루나가 입을 달싹였다.

“이야, 역시 내가 줄 하나는 제대로 섰구나.......”

“.......”

진심이 한가득 담긴 감탄에, 엘빈과 레이린은 잠시 침묵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춘 그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얘도 썩 정상은 아니었지.

레이린은 엘빈에게 이번 습격에 대해 캐물으려 했으나.

‘자자, 내일부터 업무에 복귀하는 비서님을 애도하는 의미로 한잔해야지!’

라는 말과 함께 저를 떠미는 손길에 장렬히 실패했다.

그녀는 한껏 신이 난 엘빈과 루나와 함께 작은 술집을 동낼 기세로 술을 들이부었다. 그리고 정확히 다섯 시간 뒤, 루나와 엘빈은 시체가 되어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술값.......”

“단장님 저 당번하기 싫은, 아.......”

테이블 위에 얼굴을 기댄 두 사람이 제각기 뭉개진 말을 웅얼거렸다. 참으로 본성에 가까운 속내였다.

한편, 그 맞은편에 앉아 유일하게 정상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레이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가셔.......”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밝은 은색의 머리통을 노려보았다. 엘빈이 무어라 입을 달싹일 때마다 결 좋은 은발이 덩달아 살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낮에도 저놈 때문에 귀찮은 일이 한 번 더 있었지.

‘하여간 도움이라곤 안 되는 놈.’

작게 투덜거리던 레이린은 무언가 결심한 얼굴을 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루나를 부축해 챙긴 그녀가 테이블 위에 엎어져 숙면을 취하는 중인 엘빈을 힐긋 일별했다.

‘어차피 길드원들이 알아서 챙기겠지. 습격이 또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한 작은 심술이었다. 레이린은 엘빈을 내버려 둔 채 루나를 집에 데려다준 후 클로비스 저택으로 돌아갔다.

어느덧 사위는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세 사람 중 가장 정상에 가까웠다고는 하나, 그녀 역시 상당히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습관적으로 방 안에 들어서려던 레이린은 계단을 오르다 말고 멈칫했다. 그녀는 자꾸만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에 고개를 숙여 제 옷을 살피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술 냄새.’

온몸에서 지독한 알코올 향이 풀풀 풍겼다. 이대로 침대에 쓰러졌다가는 방 안에 냄새가 짙게 밸 것이다. 아침에 그 냄새를 맡은 루시가 잔소리를 퍼부을 것은 자명한 일이고.

바람이나 조금 쐬다가 들어가야겠다. 그리 결론을 내린 레이린은 계단을 돌아 내려갔다. 정신이 조금 몽롱했다.

그녀는 술기운 탓에 홧홧해진 얼굴을 식히려 본능적으로 바람이 가장 잘 부는 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이내 레이린은 어느 평평한 곳에 털썩 몸을 뉘고 눈을 감았다. 밤바람이 달아오른 볼을 기분 좋게 스쳐 지나갔다.

“.......”

들뜬 기분을 반증하듯, 평소보다 붉은빛을 띠는 입술 새로 기묘한 흥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생전 처음 듣는, 어딘지 낯설면서도 그리운 느낌이 드는 가락이.

그리고 그때.

“......술이라니.”

어렴풋한 못마땅함이 깃든 낮은 목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다. 레이린의 눈이 스르륵 뜨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마주쳐오는 짙푸른 눈.

레이린은 바다의 밑바닥을 굽어보듯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에드윈이 그녀를 향해 눈썹을 까딱였다.

“최소한의 체면치레도 집어치우기로 한 겁니까?”

기실 외출은 본인이 허락한 일이었음에도, 그는 짐짓 불쾌한 기색이었다. 평소의 레이린이었다면 그 미묘한 기색을 눈치챌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는 상당히 멍한 상태였다.

레이린은 그의 꾸짖음 같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비웃는 기색도, 자조적인 기색도 일절 스미지 않은, 그야말로 말간 웃음 그 자체. 그 미소를 목도한 에드윈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

“걱정하셨나요?”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술기운을 핑계로 자꾸만 속을 어지럽히는 이 감정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던 것인지. 레이린은 자못 스스럼없는 태도로 물음을 내뱉었다.

자그마한 목소리가 스러지자 정적이 찾아들었다. 어둠에 덮인 푸른 눈이 미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는 곧 언제 동요했냐는 듯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지나치게 방자한 보좌관을 꾸짖었을 뿐입니다.”

“방자하다, 라.......”

레이린은 살포시 눈을 감으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그녀가 불현듯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것은 즐거움이나 기쁨보다는 자조에 가까워 보였다. 엷은 바람이 그녀의 이마 위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장난치듯 흐트러트렸다.

“그러네요.”

조용한 긍정의 말이 선명하게 귓가에 와 닿았다.

“아무래도 제가.......”

“.......”

“영주님과 제가,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어쩐지 나를 닮은 듯한 당신의 모습이, 자꾸만 마음을 들쑤셔서. 그리 덧붙인 레이린이 미소 띤 얼굴로 입술을 닫았다. 가물가물하던 의식이 마침내 수면 아래로 오롯이 가라앉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차츰 미소가 사라지며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때까지도 미동 없이 서 있던 에드윈이 비소와 함께 몸을 낮췄다.

“......닮았다고.”

당신과 내가.

레이린의 말을 한 번 곱씹은 그는 차분한 손길로 잠든 그녀를 안아 들었다. 등과 무릎 아래를 안전히 받쳐 안자 고개가 가슴팍에 툭 닿아 왔다. 흰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희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허공을 떠돌던 의미 모를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그는 바람과 나뭇잎의 소리를 등지고는 동쪽 별채를 향해 발을 떼었다.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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