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87)

* * *

레이린과 에드윈은 편지 뭉치를 빠르게 훑어보자마자 제각기 다른 곳으로 내달렸다. 레이린은 급한 마음에 계단을 두 개씩 뛰어넘으며 마거릿의 방으로 향했다. 깊은 잠을 방해받은 하녀는 마거릿의 방문을 열어 달라 요청하는 레이린을 당혹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이 시간에요? 왜.......”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레이린은 하녀의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문이 열리자마자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낮에는 비밀 장치의 유무만 확인하고 나왔던, 한쪽에 위치한 드레스룸으로 뛰어 들어간 그녀가 드레스들을 덮고 있는 천을 휙 걷어 냈다. 다급하게 따라 들어온 하녀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보, 보석들이.......”

본디 보석이 달려 있어야 할 자리에는 희미한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그를 확인한 잿빛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예상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레이린은 하녀에게 드레스에 달려 있던 보석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묻고는 곧장 저택의 앞뜰로 향했다. 에드윈이 빠르게 불러 모은 기사들이 그곳에 모여 작게 웅성대고 있었다.

“주군, 이 시간에 갑자기 어쩐 일로.......”

기사들의 가장 앞쪽에서 의문 어린 얼굴을 하고 있던 엘빈이 레이린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그와 마주한 채 서 있던 에드윈이 몸을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어떻습니까.”

“전부 눈에 띄는 것들이에요. 보석상에 팔았다가는 금세 추적당할 테니, 장물인 척 팔았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레이린이 돌연 고개를 돌려 엘빈을 응시했다. 그녀가 보란 듯 해사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키스티엘 경께서는 클로비스 기사단에 입적하기 전, 리브릭령에서 용병으로 활동하신 적이 있다고 하셨죠. 혹시 도움이 될 만한 분을 알고 계시나요?”

섬세한 붓으로 그려낸 듯 부드러운 눈매가 온화하게 휘어졌다. 하지만 온기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시선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이래도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그에 엘빈이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 순간에조차 덜컹 내려앉은 심장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이럴 땐 기분이 나빠야 정상 아닌가?’

분명 그러할진대. 하지만 저 오만한 미소에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싹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곱게 휘어진 입술에 시선이 닿자마자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움직였다.

......키스하고 싶다.

‘미쳤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엘빈은 체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리도 명확한 감정을 무시하려 애쓰는 것은 시간 낭비나 다름없을 터.

‘뭐, 좀 미치면 어때.’

이미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안내하겠습니다.”

스스로의 ‘노력’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에드윈 일행은 엘빈의 옛 지인(이라고 주장하는 적령의 길드원)의 안내에 따라 곧장 뒷골목을 뒤엎었다. 그 결과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벌벌 떨며 사실을 실토하는 장물상 하나를 잡아낼 수 있었다.

“죄, 죄, 죄송합니다! 그, 그런 귀한 분들이실 줄 알았다면.......”

“혹 다른 곳에서 입을 놀린 적이 있습니까.”

에드윈이 무감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공허한 목소리와 별개로, 감정이라고는 일절 드러나지 않는 새파란 눈동자가 그리 살벌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기세에 질겁한 장물상이 눈물을 줄줄 흘려대며 말을 뱉었다.

“히이익! 저, 저녁에 술집에서 자랑을 좀 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장물상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렸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인 채 울듯이 사정했다. 실제로 닭똥 같은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져 동그란 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기사단을 이끌고 몸을 돌렸다. 기사 하나에게 장물상을 경비대로 보내라 이른 에드윈이 리오넬과 말을 주고받았다.

“소문이 퍼졌을 가능성이 높겠군.”

“예. 아무래도 산적들이 이 소식을 이미 접했을 가능성이 크겠죠. 그리고 이 마을 근처의 산은 하나뿐입니다.”

그 말에 에드윈이 저를 따르던 이들을 돌아보며 무덤덤하게 명령했다.

“부단장을 포함한 기사들은 지금부터 나를 따라 산을 수색한다. 그리고.......”

푸른 시선이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여인에게로 가 닿았다.

“아제트리아 양은 키스티엘 경과 함께 이곳에 남으십시오.”

“......알겠습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

레이린은 조용히 고개를 꾸벅였다. 엘빈은 잠시간 눈을 동그랗게 뜨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와 단둘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들였다.

에드윈과 기사들은 그 즉시 마을을 떠나 산으로 향했다.

레이린은 어둠 저편으로 멀어져 가는 이들을, 정확히는 그들을 이끄는 이의 뒷모습에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서 있던 엘빈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하필 날 남기신 거지? 아까 둘러댄 대로라면 여기 지리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건 나일 텐데?”

“......너.”

“응?”

엘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레이린을 돌아보았다. 묘하게 가라앉은 기색의 그녀가 정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너 분명 예전에, ‘단장님과 부단장님을 제외하면 내가 제일 실력이 뛰어나다’라고 말한 적 있었지. 그거 진짜야?”

“사실이 맞기는 한데, 그건 갑자기 왜......?”

그가 의문을 드러내듯 미간을 설핏 좁혔다. 하지만 레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시야를 완전히 벗어난 이들의 잔흔을 쫓듯 시선을 돌리지 않던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겠지.’

고작 저 하나를 보호하자고, 단장 패트릭과 부단장 리오넬을 제외한 가장 뛰어난 실력자를 이곳에 둔 것은 단연코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지. 그저 자신이 엘빈과 퍽 친근해 보였기에 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헌데 자꾸만 속을 들쑤시는 이 감정은 뭘까.

‘미치기라도 했나.’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제 죽음까지 남은 시간은 길지 않다. 이용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이용하여 이곳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것. 그게 제 할 일이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훗날 편을 들어줄 사람들을 최대한 늘려놓는 편이 낫겠지.’

그리 생각하던 레이린은 일순 헛웃음을 지었다.

이것 참.......

‘첩자다운 생각이네.’

찰나 자조한 그녀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며 엘빈을 돌아보았다. 미약한 동요를 순식간에 지워 낸 그녀가 돌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더니 은근하게 속삭였다.

“키스티엘 경.”

“갑자기 무섭게 무슨.......”

“마거릿 영애와 베르디 영식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경께서는 알고 계시죠?”

레이린의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이 꽤 명백했다. 엘빈은 순식간에 레이린의 의도를 파악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는 그 적나라한 반응에도 흔들림 없는 웃음과 함께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짐이 되기 싫거든요. 영애와 영식께서 위험하실지도 모르는 상황에, 저 하나 때문에 키스티엘 경 같은 인재를 붙잡을 수야 없죠.”

레이린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가볍게 한숨까지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빈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으나 제대로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가 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힘겨울 수도’ 있겠지만, 키스티엘 경의 ‘뒤를’ 최선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지름길, 알고 계시죠? 레이린은 그리 덧붙이며 환히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해사하고 티 없는 미소였다.

* * *

푹-!

“베르디!”

검이 살을 가르는 소리와 높은 비명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커헉, 하는 소리를 토한 베르디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의 옆구리에서 피가 울컥 솟아났다. 곧이어 고통으로 짓뭉개진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으, 헉.......”

“휘유. 그러니까 곱게 모셔준다고 할 때 말 좀 듣지 그랬어.”

“하여간 이놈도 그렇고 저년도 그렇고, 모기 한 마리 못 잡을 것 같은 팔로 뭘 그리 발악을 해?”

“그러니까 결국 이 꼴인 거 아니겠냐.”

산적들이 낄낄대는 웃음과 함께 조롱을 주고받았다.

이내 피 묻은 검을 든 산적 하나가 베르디의 머리채를 잡아 쥐며 그의 목에 보란 듯 검을 겨누었다.

어둑한 오두막의 저편에서, 검을 든 채 얼어붙어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어떡하시렵니까, 아가씨? 애인 놈이 죽는 꼴을 가만히 보고만 계실 건가? 당장 칼 버려.”

그 말에, 산적의 손에 머리채가 붙들린 채 힘겹게 눈을 깜박이던 베르디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거릿, 안......!”

“도련님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닥치시지.”

산적이 피를 토하듯 소리치는 베르디의 복부를 퍽, 걷어찼다. 그에 옆구리의 상처에서 피가 다시금 울컥 터져 나왔다.

산적이 정신을 잃고 축 널브러진 베르디의 머리채를 더욱 높이 들어 올리며 윽박질렀다.

“내 말 안 들려? 칼 버리......!”

바로 그 순간, 가만히 굳어 있던 마거릿이 눈 깜짝할 새에 제 목에 검을 들이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려움과 공포로 점철되어 있던 두 눈은 어느새 부릅떠진 채 형형한 빛을 내고 있었다. 경악한 산적들이 두서없이 소리를 질렀다.

“뭐, 뭐하는 거야!”

“당장 칼 치워!”

“젠장, 이놈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당황한 산적이 베르디의 목에 검을 더욱 가까이 댔다. 그러자 마거릿이 들고 있던 검 또한 보란 듯 그녀의 목을 파고들었다. 칼날이 목을 파고들고, 붉은 선혈이 목을 타고 주룩 흘러내리자 한순간 움찔했던 그녀는 검을 쥔 손에 필사적으로 힘을 더했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어둠을 울렸다.

“내 몸값을 무사히 받아내고 싶다면 베르디부터 치료해.”

“이 미친년이......!”

“너희가 우리 몸값을 받아낼 수 있는 건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거야. 그러니 살려, 당장.”

마거릿은 이를 악물고 말을 짓씹었다. 어둠 속에서 이채를 머금고 빛나는 적갈색 눈동자에 일순 여러 기억이 스쳐 갔다.

‘뭐? 널 후계자로 여겼던 것 아니냐고?’

갑작스러운 약혼식 소식을 접하고 놀라 달려갔던 날. 그녀의 아버지인 메나스 리브릭은 철없는 어린아이를 보듯 측은한 얼굴로 그리 말했더랬다.

‘얘야, 이런 일은 여자인 네겐 너무 고되잖느냐. 어차피 결혼 후에도 지금처럼 남편을 조금씩 도우면 될 것 아니냐? 그것만으로도 과해.’

‘아버지!’

‘어허! 어디서 아비한테 소리를 질러! 이게 다 너 편하라고 하는 일 아니야!’

메나스는 거세게 반발하는 마거릿을 향해 커다랗게 호통을 쳤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그녀를 방에 반쯤 가두다시피 하며 감시했다.

마거릿이 도망을 결심한 건 그래서였다. 아버지를 도와 리브릭 가의 업무 절반 가까이 담당하고 있던 자신이 없어진다면 필시 혼란이 찾아올 테니까.

다급히 사람을 구해 보려 노력한다 해도 결국엔 깨닫게 될 것이다. 이 가문에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절대로 못 죽어.’

살아서 제 것을 되찾을 때까지는 죽어도 죽지 않겠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기회를 만들어 내리라. 이를 갈며 다짐한 그녀가 다시금 산적을 재촉하려던 때, 불현듯 바깥이 소란해졌다.

“으아악!”

“뭐, 뭐, 이 미친놈은 뭐야!”

“도망.......”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음과 비명이 한데 섞여들었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와 있던 산적들이 당황을 표했다.

“무슨 일이냐!”

“이상한 놈이 하나......!”

베르디의 머리채를 잡아 쥐고 있던 산적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 순간. 눈을 번쩍 빛낸 마거릿이 산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은색의 칼날이 길게 내리그어졌다.

“아아악!”

팔을 길게 베인 산적이 베르디의 머리채를 뿌리치며 비명을 질렀다. 마거릿은 그 틈을 타 베르디를 껴안고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미처 몸을 빼기도 전, 억센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홱 잡아당겼다.

“이년이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피하지 못한다.

마거릿은 본능적으로 베르디를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작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미안해요.”

서걱-

직후,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반으로 잘려나갔다. 그 반동으로 마거릿과 산적의 몸이 반대 방향으로 휘청 기울어졌다. 두 사람의 사이를 파고든 레이린이 교묘하게 산적의 다리에 제 다리를 걸며 곧장 검을 내질렀다.

콱!

“히이익!”

날붙이가 거친 소음과 함께 산적의 목덜미를 지나쳐 바닥에 박혔다. 저도 모르게 질겁한 산적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덜덜 떨었다. 그 모습을 본 또 다른 산적 하나가 뒤늦게 정신을 되찾고 검을 고쳐 쥐었다.

“이건 또 뭐.......”

하지만 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 그의 복부에서부터 은빛 날이 불쑥 솟아났다. 산적은 잠시간 제게 벌어진 일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만 끔벅였다.

“......어?”

얼떨떨한 신음과 동시에 칼날이 제자리를 찾아 빠져나갔다. 그 자리에서 곧장 피가 솟구치더니 산적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눈을 찡그린 레이린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핏방울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검을 휙 휘둘러 핏방울을 털어 내는 엘빈을 향해 못마땅하게 속삭였다.

“조심 좀 하라니까. 난 피 묻으면 안 돼.”

“가만히 보면, 너는 애가 참 양심이란 게 없어.”

“적령 주제에 그런 걸 기대한 네가 더 신기하네. 입 다물고 정리나 해. 영주님 일행이 곧 도착할 것 같으니까.”

“분부대로 합죠. 대신 대가는 확실히 받아낼 겁니다, 이거.”

엘빈이 산적들을 향해 돌아서며 비아냥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린은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산적들을 도륙하는 그를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어느새 산적들의 시체 틈으로 내던져진 채였다.

순식간에 ‘선량한’ 이의 모습으로 돌아온 레이린이 침착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영애.”

레이린이 베르디의 위로 엎어진 채 미동이 없는 마거릿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작게 움찔한 그녀가 상체를 홱 들어 올렸다.

서로 미묘하게 다른 갈색의 두 눈동자가 마주쳤다. 마거릿이 멍한 목소리를 냈다.

“......누구?”

“영주님의 수행 비서인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수행 비서......?”

마거릿은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눈을 깜박였다. 수행 비서라니? 방금, 제 머리카락을 자르며 산적을 막아섰던 이는 저 여인이 아니었던가? 머리카락을 잘라 내며 미안하다고 속삭이던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귓가에 선명했다. 그 혼란을 읽어낸 레이린이 짐짓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소곤댔다.

“사실 제가 호신용으로 검을 조금 배웠거든요. 하지만 변변찮은 실력이라 부끄러우니 다른 분들께는 비밀로 해 주시겠어요?”

“하지만 방금은.......”

마거릿은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를 흘렸다.

상식적으로는 마거릿의 반응이 옳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것이 ‘상식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거지만 말이다.

레이린은 그녀의 의문을 지그시 밟아 없애듯 나직한,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급한 마음에 생긴 우연이에요. 게다가 제가 운이 좋거든요. 그런데.......”

“커흑!”

레이린은 마거릿 몰래 베르디를 발로 슬쩍 건드렸다. 그 몸짓을 따라 타이밍 좋게 베르디의 입에서 기침 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리는 마거릿을 향해 말했다.

“그보다는 영식의 응급 처치가 먼저인 것 같네요.”

“아, 네! 그리고 도와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마거릿이 눈물이 고인 눈으로 레이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 한가득 담긴 그 인사에 한순간 레이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별말씀을요.”

레이린은 가까스로 꽉 잠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조금 더 환한 미소를 띤 채 답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녀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마거릿을 도와 베르디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그럼에도 가슴께는 여전히 욱신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