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87)

* * *

레이린은 하루 가까이 엘빈과 투덕대며 ‘마거릿 리브릭’에 대해 조사했다. 하지만 엘빈과 헤어져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아가씨께서는 굉장히 영민하신 분이에요.’

‘루비아스 영식과의 사이요? 음...... 파티에서 만날 때마다 으르렁대시는 걸 보면 사이가 안 좋아 보이긴 하는데.......’

‘아무래도 가주님들의 사이가 안 좋다 보니까 두 분도 그 영향을 받으신 것 같긴 해요.’

사용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후계자라는 직위에 굉장히 어울리는 사람이었다는 평과, 베르디 루비아스와는 앙숙 관계였다는 말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동시에 사라질 수가 있나? 꼭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레이린은 미심쩍은 기분에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시달리던 그녀는 결국 밖으로 나와 저택을 몇 바퀴 돌았다.

리브릭 저택의 정원에는 사람의 허리께 정도 오는 높이의 고즈넉한 돌담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레이린은 답답한 기분에 돌담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갔다. 폭이 상당히 좁았지만 이 정도는 그녀에게 평지와 다를 바 없었다.

‘나오길 잘했네.’

높은 곳에 올라서자 상쾌한 바람이 폐부를 간질였다. 기묘한 해방감에 작게 장난치듯 발을 움직이던 그녀는 문득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영주님?”

레이린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놀라긴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오전에 보았던 차림 그대로의 에드윈이 새파란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왜 나와 있습니까?”

“잠이 안 와서 산책이나 할까 하고....... 그보다, 지금 돌아오신 건가요?”

“예. 헌데 당신은 왜 그런.......”

에드윈은 말끝을 흐리며 돌담을 힐긋 일별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레이린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습관입니다.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다시피, 높은 곳을 좋아하거든요. 속이 탁 트이는 기분인지라.”

“......혹시 모르니 내려오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제 반사 신경을 칭찬해 주시지 않았던가요? 피곤하실 텐데 이만 들어가 쉬세요.”

레이린은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오묘한 갈색의 머리카락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산들거렸다.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응시하던 에드윈이 그녀의 옆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덤덤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온다.

“마거릿 리브릭 양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레이린은 그가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으나 곧 감정을 지우고 여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딱히 단서라고 할 만한 것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방을 둘러보았지만 수상한 점도 없었고요.”

레이린은 말을 마치며 힐끔 시선을 돌려 에드윈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 시선을 느낀 에드윈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사용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영민한 사람이었다, 베르디 루비아스 영식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 말뿐이었습니다. 실종 전 별다르게 이상한 행동을 한 적도 없다고 하더군요.”

말을 마친 레이린이 다시금 에드윈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둠이 만연함에도 그림 같은 이목구비는 선명했다. 그녀는 그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흑발, 비스듬히 내리깐 푸른 눈동자, 장인이 혼을 갈아 그려낸 듯 반듯한 콧날을 따라 저도 모르게 시선을 움직였다.

‘잘생겼네.’

새삼스럽게 그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레이린이 눈부신 무언가를 바라보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실소를 흘렸다. 에드윈이 워낙에 사람 같지 않은 외모의 소유자여서일까. 그래서 저답지 않게 쓸데없는 상념마저 드는구나 싶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편 고민에 잠긴 얼굴이던 에드윈이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덜컥.

그때, 레이린이 발을 내디딘 부분의 돌이 크게 흔들렸다. 그저 흔들림뿐이었다면 곧장 균형을 잡았을 테지만, 모서리에 위치해 있던 돌은 곧장 바깥으로 떨어져 나갔다.

“......!”

발목이 크게 꺾이며 몸이 땅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평소였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겠지만, 바로 옆에 에드윈이 있으니 별다른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레이린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순간.

“이러니.......”

털썩-

서늘한 목소리가 한숨과 함께 내려앉았다. 레이린은 예상했던 충격 대신 제 몸을 단단히 받치는 온기에 놀라 고개를 휙 들었다.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거리에서 시선과 숨결이 뒤얽힌다. 그녀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눈을 뗄 수가 없지.”

등줄기가 저릿해질 만큼 낮은 중얼거림.

새파란 눈이 레이린의 얼굴을 따라 무심히 움직였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이마, 눈, 콧날. 그리고 입술까지. 짙은 심해처럼 잔잔한 시선이 고요히, 동시에 짙게 쏟아졌다. 단지 그뿐인데도 발끝이 곱아드는 느낌이었다. 당황해 얼굴을 굳힌 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내려 주시죠.”

“발목은 어쩌시려고.”

“부러진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레이린의 말에, 지금껏 잔잔한 얼굴을 유지하던 에드윈이 철없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처럼 그녀를 응시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본인 몸을 혹사하는 게 취미입니까?”

“저만큼 자기 몸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도 드물걸요. 그러니 어서 내려 주세요.”

레이린은 빠르게 동요를 갈무리하고 단호히 내뱉었다. 그녀와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던 에드윈은 이내 몸을 낮춰 그녀를 내려 주고는,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믿음이 안 가는데.”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하시죠.”

그 말에 한순간 흠칫한 레이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에드윈의 ‘믿음이 안 간다.’는 말에, 찰나지만 섬뜩함을 느꼈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제정신을 되찾은 듯했다.

사실 최근 들어 조금 방자해지긴 했다. 클로비스 저택의 이들이 너무도 따뜻해서, 잠시나마 본분을 잊어버릴 정도로 포근해서, 자꾸만 긴장이 풀어지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레이린 아제트리아’여야 했다.

‘정신 차리자.’

레이린은 에드윈의 말 한마디에 찬물을 뒤집어쓰듯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첩자였다. 이들과는 영원히 섞일 수도, 섞여서도 안 되는 그림자 속의 사람. 그것을 상기하자 가슴 한구석이 괜스레 허했다. 경계심을 놓지 않으면서도 정중함을 잃지 않던 그가 이상하리만치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빛이 들지 않는 자리에 선 채로, 쏟아지는 빛을 맞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 평소에는 안도감을 불러일으키던 그 거리감이 지금은 어째서인지 조금.......

“.......”

그녀는 혼란을 감추기 위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조각을 발끝으로 툭 건드리며 아무렇게나 입을 열었다. 돌이 가볍게 흔들리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딱히 오래된 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이게 왜.......”

무의식중에 돌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레이린이 멈칫했다. 에드윈은 그녀를 따라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새파란 눈동자에 일순 놀라움이 스쳐 갔다.

“이거.......”

돌이 떨어져 나간 자리. 그 사이에 두툼한 종이 뭉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끄집어낸 레이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편지?”

* * *

이제는 아득한 과거의 어느 날, 바르베타 저택.

‘아니, 저런 멍청한 놈들이!’

마거릿은 테라스의 커튼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씩씩댔다. 두터운 커튼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왁자지껄한 파티장의 모습을 시야에서 감췄다. 차디찬 밤바람도 그녀의 분노를 이기지는 못했다. 마거릿은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은 듯 숨을 몰아쉬며 연신 입술을 짓씹었다.

‘척 봐도 가짜잖아. 다들 단체로 눈이 삔 것도 아니고......!’

현재 파티장에서는 바르베타의 가주가 벤투스산 털목도리를 자랑하고 있었다. 조카가 큰돈을 들여 선물해 줬다며 몇 번이고 요란스러운 함박웃음을 지어대기에, 마거릿은 호기심이 들어 목도리를 구경하러 갔었다.

하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한 털목도리는 기대와 달랐다. 은은하고도 자연스러운 빛이 감도는 벤투스산 제품과 달리, 바르베타 가주가 목에 걸치고 있는 목도리에는 퍽 인위적인 광택이 감돌았다.

마거릿은 평소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벤투스산 털가죽의 진위를 가려내는 법을 터득했기에 그 사실을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미묘한 차이였기에, 보통 사람들은 털목도리가 가품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가주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은 칭찬을 던지기 바빴다.

‘이참에 이 녀석이 새로 시작할 사업을 도와주기로 했다네!’

바르베타의 가주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조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조카라는 남자는 비열한 웃음을 띠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척 보아도 사기꾼의 얼굴이었다.

사교계에 오래도록 몸담은 이였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가만히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입을 열어 봤자 득보다 실이 많을 테니.

하지만 마거릿은 사교계에 막 나선 참이라 요령이나 경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녀는 결국 짧은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벤투스산 털목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광택의 차이로 보아 가품일 가능성이.......’

‘뭐, 무, 무슨! 영애, 지금 저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바르베타 가주의 조카가 펄쩍 뛰며 마거릿을 손가락질했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적반하장인 태도에 황당해진 그녀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 가주에게 잘 보이려 애쓰던 사람들의 차디찬 시선이 쏟아졌다.

‘어머, 어떻게 광택만으로 진품과 가품을 구분한다고.......’

‘말도 안 되지 않나요?’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굳이 이렇게 공개된 곳에서 망신을 주어야 했는지 모르겠네요.’

사람들의 말마따나, 졸지에 가품을 진품이라 자랑한 사람이 된 바르베타 가주의 얼굴이 알게 모르게 일그러졌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테라스를 손짓했다.

‘아무래도 영애는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돌아오는 편이 낫겠군.’

마거릿은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상대에게 망신을 준 파렴치한’이 되어 버린 스스로의 처지에 기가 찼다.

결국 그녀는 쫓겨나듯 테라스로 나와 분통을 터트렸다. 한참이나 씩씩대며 허공에 주먹질을 해대던 중, 등 뒤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 벌레라도 있습니까, 영애?’

‘밖이 아니라 안에 바글바글.......’

마거릿은 분노에 가득 차 대답을 내뱉다 말고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분명 커튼을 쳐 두었는데 이게 무슨 무례죠?’

몸을 휙 돌린 그녀가 테라스로 걸어 들어오는 선한 인상의 청년을 경계하듯 노려보았다. 그가 난처하다는 듯 입꼬리를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제 무례에 대해선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아까 영애께서 하셨던 말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말입니다.’

‘내가 뭘요? 사기꾼한테 사기꾼 취급을 당한 게 그렇게 인상적이었나요?’

아까의 상황이 다시금 그녀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그에 불쾌감이 배가 된 마거릿이 빈정댔다. 하지만 청년은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진정한 사기꾼은 그자가 아닙니까. 저는 영애를 비웃으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마거릿이 무안함을 느낄 만큼 진중한 얼굴을 한 청년이 항복을 표하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마거릿은 과하게 날카로운 반응을 내보였던 스스로의 행동이 뒤늦게 민망해졌다. 크흠, 가볍게 헛기침한 그녀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럼 나한테 말은 왜 걸었어요?’

마거릿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는 것을 느낀 청년이 싱긋 미소 지으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두 눈을 반짝이며 명료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제게 벤투스산 털가죽을 구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미쳤어요? 당신은 지금 장인한테 찾아가서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드러눕는 거랑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무상이라고는 안 했습니다.’

그가 조금 전보다 한결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 당당하고도 환한 미소에 그녀는 찰나 할 말을 잃었다.

‘그 대가로 에르치니아산 약초의 구별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마거릿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벤투스산 털가죽의 구별법과 마찬가지로, 에르치니아산 약초의 구별법은 명백히 영업 비밀로 취급되었기에 쉽사리 공유되지 않았다. 이런 기회는 결코 흔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장인의 발목을 붙잡고 몇 번이고 사정해도,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붓는다고 한들 십에 구 할은 배울 수 없는 것이 바로 기술이니까.

안 그래도 그녀의 아버지가 약초 사업을 고민하고 있던 차였던지라 수락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고심 끝에 결론을 내린 마거릿이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지만 다시 한번 소개하죠. 마거릿 리브릭입니다. 영식께서는?’

눈을 몇 번 깜박인 청년이 부드러이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영애. 제 이름은.......’

연하늘색의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엷은 눈 색만큼이나 맑은 미성이 귓가를 간지럽게 파고들었다.

‘베르디. 베르디 루비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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