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87)

* * *

레이린은 엘빈이 임시로 내어 주었던 적령의 안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루나의 집을 구했다. 라그나르가 마음껏 쓰라며 숨겨 둔 자금 덕에 그녀는 편한 마음으로 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

레이린은 극구 사양하는 루나에게 집문서를 반강제로 떠안겼고,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펄쩍 뛰며 거부했다. 하지만 며칠이나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던 루나는 ‘내 이름으로 집을 샀다가는 괜한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는 레이린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서류를 받아 들었다.

“잠시만 맡아 두는 거야.”

말을 놓기로 한 루나가 험악한 얼굴로 경고했다. 그에 레이린은 태연한 웃음과 함께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처음부터 루나의 이름으로 구입했지만 그 사실은 잠시 숨겨 두는 게 좋다는 생각과 함께였다.

그 이후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복귀했다. 곧 리브릭령과 루비아스령을 시찰하러 떠나야 했기 때문에 업무가 평소의 배는 밀려들었다.

“내가, 이번 시찰 끝나면, 하루 내내 잠만 잘 거다.......”

레이린은 형형한 눈으로 그리 중얼대는 아르망을 무시하며 빠르게 서류를 처리했다. 최근 리브릭령에 산적이 들끓어 골치가 아픈지, 그곳에서 온 서류 뭉치들은 두텁기 짝이 없었다.

어마어마한 업무량 탓에, 하루치 일을 간신히 끝마쳤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녀는 그워어거리며 걷는 아르망을 3층에서 배웅하고 제 방으로 올라왔다.

돌아오자마자 커튼을 모조리 내린 레이린이 깜깜한 방 안에서 주술석 등을 켰다. 이내 주홍색 불빛이 은은하게 방 안을 물들였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편지지와 펜을 꺼내 들었다. 이내 흰 종이 위로 반듯한 글씨가 내려앉았다.

「1차 상황 보고」

레이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편지를 써 내려갔다. 최근 클로비스 저택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간략한 요약, 사용인들에 관한 정보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간추려진 편지가 곧 완성되었다.

펜을 내려놓은 레이린은 편지를 반으로 접고, 서랍 안에서 검은 벨벳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러자 엄지손톱 정도 크기의 동그란 주술석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제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는 검은색 주술석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한 종류의 주술인데.......’

눈을 가늘게 뜬 레이린은 검은 주술석을 책상에 대고 세 번 두드린 후 편지지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뒤, 주술석이 붉은빛을 내며 한차례 빛나더니 이내 투명한 구슬처럼 바뀌었다.

레이린은 쓸모를 다한 주술석을 한쪽으로 치워 두고 편지를 펼쳤다. 분명 반듯한 글씨로 빼곡했던 편지지가 새 종이처럼 변해 있었다. 마치 글자를 누군가 빼내어 간 것처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두 번째로 보는 건데도 역시 신기하네.”

이 주술석을 손에 넣게 된 건 며칠 전이었다.

저녁 늦게 일을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제 방 창틀에 앉아 있는 송골매 한 마리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루시가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 놓은 틈을 타 들어온 것 같았다.

‘......새?’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엷은 회갈색 눈이 갑자기 들이닥친 새를 미심쩍다는 듯 훑어봤다.

‘꾸르륵!’

한편, 레이린을 발견한 송골매가 다리를 탁탁 구르며 울부짖었다. 그제야 새의 다리에 묶인 작은 주머니와 쪽지를 발견한 레이린이 재빨리 그것을 풀어냈다. 물을 조금 따라 주자 그것으로 목을 축인 송골매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설마.......’

고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엷은 회갈색 눈동자에 불쾌함이 자리 잡았다.

레이린은 주머니를 책상에 올려놓고는, 내키지 않는다는 티를 풀풀 풍기며 쪽지를 펼쳐보았다. 이윽고 낯익고도 기분 나쁜 글씨체가 그녀를 반겼다.

「앞으로 약 1달 주기로 클로비스 저택 내부의 일, 특히 영주의 일정이나 업무와 관련된 사안을 상세히 보고할 것. 동봉한 주머니에 담긴 주술석은 책상에 대고 세 번 두드린 뒤 편지 위에 올리면 이쪽으로 내용이 옮겨지는 원리. 주의해서 사용하길 바람. -I.P」

쪽지를 내려놓은 레이린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주머니에서 주술석 하나를 꺼냈다. 책상 위에 올린 주술석을 세 번 두드린 후, 쪽지 위에 올려놓자 붉은빛과 함께 글자가 주술석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생소하기 짝이 없는 주술에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잠깐.’

기억을 되짚던 레이린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쪽지에 적혀 있던 내용이 불쑥 신경을 자극해서였다.

“기사단의 일과나 경비 체계에 대해 보고하라는 이야기는 왜 없었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기이했다. 보통은 첩자를 심어서 얻고자 하는 것 중 가장 첫 번째로 원하는 것이 군사 정보 아니던가. 한데 왜 그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지? 첩자가 정체를 들켜 곤란해질까 봐 걱정할 위인은 아닐 텐데.

생각을 이어 가던 레이린은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 암살자.’

조나단이 죽은 그날. 그와 마주쳤던 암살자는 어떻게 저택의 경비를 피해 후원까지 숨어들 수 있었을까?

조나단이 사망한 직후, 전 클로비스 기사단이 저택을 포함한 클로비스령을 쥐 잡듯 뒤졌는데도 암살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클로비스령의 경비 체계를 미리 꿰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일.

“.......”

결국 그녀를 제외한 또 다른 첩자가 이 저택에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는 의문 하나.

‘그렇다면 왜.......’

왜 나를 에드윈의 곁으로 보낸 거지?

생각이 복잡해진 레이린은 바람이라도 쐴 생각으로 후원으로 발을 옮겼다. 일전의 흰 원피스 잠옷은 핏물로 엉망이 되어 버렸기에, 낙낙한 바지와 셔츠 차림으로 얇은 숄을 둘렀는데도 아직은 밤이 쌀쌀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가제보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멈칫했다.

“.......”

어둠 속에 잠긴 가제보는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곳이 가제보 앞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레이린은 자꾸만 붉은 피 웅덩이가 시야에 아른거리는 듯해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쏴아아-

바람에 나뭇잎들이 스치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귀를 자극했다. 잿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이 물결을 그리며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목걸이를 한 손으로 꾹 쥐며 속으로 되뇌었다. 흰 눈밭 위로 흩어져 있던 붉은 핏자국이 자꾸만 머리를 어지럽혔다.

‘생각하지 마.’

흔들림을 내보여서는 안 된다. 레이린은 그리 되뇌며 이를 악물고 상념을 지워 내려 애썼다.

아마 지금쯤 엘빈은 그녀가 녹스라는 사실을 거의 확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만한 증거가 없는 한 무조건 잡아떼야 했다. 자칫 실수라도 했다간 라그나르와 녹스에 피해가 갈지도 모르기에 흔적조차 남겨서도 안 되었다.

그러니.

‘내가 죽더라도.......’

바스락.

“......!”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퍼뜩 정신을 차린 레이린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꾹 말아 쥔 주먹에 닿아 온 것은 선명한 온기였다.

“......키스티엘 경이 했던 말이 진짜였군요.”

턱-

새파란 눈이 어둠 속에서 깊게 가라앉았다.

덤덤히 말을 내뱉은 에드윈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손마디가 새하얗게 질려 있던 주먹이 그의 손길에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레이린이 기겁하며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온기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읏.”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감촉이 지나치게 선연하다. 괜스레 온몸이 간질거렸다. 손끝이 움찔거리며 자그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맞닿은 손에 찰나 힘이 들어가는 듯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손깍지를 낀 채 레이린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에드윈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레이린 아제트리아.”

“.......”

“당신은 왜 매번.......”

무어라 입을 달싹이던 에드윈이 돌연 침묵했다. 새파란 눈동자가 마주한 상대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나뭇잎과 바람이 뒤엉키는 소리가 기이한 정적을 메웠다. 잠시간 그의 답을 기다리던 레이린이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영주님!”

본채의 뒷문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 나왔다. 화들짝 놀란 레이린이 에드윈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냄과 동시에 그가 몸을 돌리며 의문이 담긴 목소리를 냈다.

“하인트?”

두 사람의 앞으로 빠르게 달려온 하인트가 숨을 헉헉, 골랐다. 그는 레이린과 에드윈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다급하게 말을 토해 냈다.

“리, 리브릭 가의 따님과 루비아스 가의 아드님께서 실종되셨답니다!”

* * *

푸르스름한 새벽. 리브릭 저택의 정문에서는 날 선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시치미냐! 내 아들을 어디에 숨겼느냔 말이야! 대답해라, 메나스 리브릭!”

“헛소리 작작해라, 벤딜 루비아스! 너야말로 내 딸을 납치하지 않았나!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탐났기로서니, 이런 더러운 수를 써! 파렴치한 같으니!”

리브릭 가문의 가주, 메나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얼굴은 원수를 노려보듯 섬뜩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리브릭 가문과 루비아스 가문은 본디 사이가 퍽 괜찮은 편이었다. 각자 다스리는 곳이 바로 옆에 위치해 있기도 했고, 전대 가주들 또한 서로 막역한 사이였기에 메나스와 벤딜은 어릴 적부터 퍽 가까이 지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리브릭령과 루비아스령의 경계에 걸쳐져 있는 다이아몬드 광맥이 발견되면서부터 깨졌다.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는 단박에 그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메나스와 벤딜은 자연한 수순처럼 등을 돌렸다.

그 이후, 그들은 영주에게 제지받지 않을 만한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싸움을 이어왔다. 그러니 지금, 각 가문의 외동딸과 외동아들에게 해를 가할 가장 유력한 후보가 서로일 수밖에 없었다.

“이, 이......! 지금 감히 누구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가!”

벤딜이 시뻘건 얼굴로 부들대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메나스 또한 반사적으로 검을 손에 쥐었다.

“주군을 지켜라!”

“주군을 지켜라!”

챙-!

뒤이어 날카로운 쇳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들의 뒤편을 각각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당장이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그만.”

싸늘한 목소리가 대번에 소란을 잘라 냈다. 그 목소리에 담긴 살기에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아났다. 가주 두 사람을 포함한 이들이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검은 말 위에 올라앉은 청년이 그들을 서늘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 좋은 흑발과 새파란 눈동자가 뇌리에 박힐 만큼 선명했다. 이목구비 하나하나에 장인의 손길이 닿은 듯했다. 마치 신이 공들여 그려낸 것만 같은 그 모습. 조각 같은 얼굴에 찰나 넋을 놨던 두 가주가 펄쩍 뛰었다.

“여, 영주님!”

“여긴 어떻게.......”

리브릭 저택 앞에서 대치하던 이들이 ‘영주’라는 말을 듣고는 허둥지둥 검을 거둬들였다.

에드윈은 말없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 뒤로 아르망과 기사들이 차례로 땅을 디뎠다. 엘빈과 함께 말 위에 올라앉아 있던 레이린은 습관적으로 뛰어내리려다 말고 들려온 속삭임에 멈칫했다.

“너, 지금 뛰어내리면 승마 처음이라고 거짓말한 거 다 들통나는 거 알지?”

“......멋대로 말 놓지 마시죠, 키스티엘 경.”

레이린이 서늘한 어조로 중얼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빈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말에서 내려와 그녀를 향해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순한 눈매가 보란 듯 휘어진다.

“내려오시죠, 아제트리아 님.”

붉은 눈동자에 명백한 장난기가 떠올랐다. 레이린은 속으로 이를 갈며 사무적인 미소를 띤 채 그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아르망이 태워 준다 했을 때 바로 승낙할 것을.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호들갑을 떨며 끼어든 엘빈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저놈은 강아지 행세를 하는 여우 새끼인 걸 몰라보고.......’

그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땅을 디딘 그녀가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순간이었다. 쩔쩔매는 두 가주를 등진 채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에드윈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새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스친 찰나, 심장이 기이하게 덜컹거렸다.

‘......?’

이유 모를 감각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는 레이린의 옆에서 엘빈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진짜 들킬 뻔했네.”

“닥.......”

“오오. 엘빈 너, 아제트리아 님과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레이린이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속삭이던 차에 리오넬의 해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엘빈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활짝 웃었다.

“역시 그래 보이십니까? 며칠 전에 얘기를 나누다 보니 동갑인 걸 알게 돼서요. 그래서 이참에 말도 놓고 친하게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레이린이 살벌하게 속삭였다.

“미쳤어?”

“내가 에피에온 뒤처리랑 입단속까지 무상으로 해 줬는데 이러기야?”

“그 대신 가끔 귀찮게 하는 것까지는 허락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

“감읍하기도 해라. 가끔 귀찮게 구는 게 괜히 이상하게 비치지 않으려면 친구라고 선수 쳐 놓는 게 낫지.”

“지랄도 가지가지.......”

“그나저나 표정 좀 풀지? 부단장님께서 아직 보고 계시거든?”

엘빈이 작게 덧붙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레이린은 언젠간 반드시 이놈의 목을 따버리겠다는 생각과 함께 영혼 없이 웃었다. 어쨌거나 겉보기에는 화기애애한 광경이었다.

벤딜 루비아스, 메나스 리브릭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채 안절부절못하며 상석을 힐긋거렸다. 어디 하나 닮지 않은 생김새의 두 사람이었지만, 그 얼굴에 서린 두려움만은 똑 닮아 있었다.

응접실 내부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자리 잡았다. 차를 내오는 하인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에드윈은 양쪽으로 나뉘어 앉은 두 가주의 시선을 무시하며 시리게 침묵했다. 그의 뒤쪽으로는 무표정한 얼굴의 아르망과 레이린이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두 가주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질 때쯤에야 짤막한 명령이 떨어졌다.

“해명해 보십시오.”

그에 메나스 리브릭이 곧장 입을 열었다.

“루비아스 공이 제 딸을 납치해 갔습니다, 영주님.”

“아니, 이......! 저자야말로 제 아들을 납치했습니다!”

벤딜 루비아스가 격분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침묵으로 점철되어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격렬해졌다.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메나스 리브릭이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차디찬 목소리가 분란을 일축했다.

“그만. 벌써 두 번째로 말하는 겁니다. 입 닫고 앉으십시오.”

“......크흠.”

“흠, 흠.”

두 가주는 그 섬뜩한 기세에 헛기침을 하며 얌전히 엉덩이를 붙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렸다. 눈을 굴리며 에드윈의 눈치를 보는 두 가주의 모습이, 어쩐지 치고받고 싸우다가 부모에게 한소리를 얻어듣고는 침울해진 형제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만 같아서였다.

물론 그것은 아주 잠시의 감상일 뿐이었다. 레이린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허리를 곧게 폈다.

들릴 듯 말 듯 한 한숨을 내쉰 에드윈이 무표정한 얼굴로 읊조렸다.

“납치라는 확증도 없는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굴지 마십시오.”

싸늘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이 메나스와 벤딜을 번갈아 응시했다. 명백한 경고의 눈짓에 두 가주가 서둘러 입을 다물자 에드윈이 말을 이었다.

“리브릭 공, 마거릿 리브릭 양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습니까?”

“저는 그 당시 집무실에 있었고, 딸아이의 전속 하녀가 마지막으로 딸을 보았던 게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침통한 얼굴을 한 메나스 리브릭이 작게 덧붙였다.

“그런데 딸아이가 잘 때 창문을 열어 놓는 습관이 있어서....... 하녀가 몇 시간 뒤에 창문을 닫아주러 들어가 보니 방이 비어 있었다는군요.”

메나스의 주름진 눈가가 울음을 참는 듯, 안쓰럽게 바르르 떨렸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이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다음 주면 약혼식을 치러야 할 아이가 대체 어딜 간 건지.......”

탄식 섞인 목소리의 끝이 우울하게 흐려졌다. 메나스가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을 닫자, 에드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가 벤딜 루비아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루비아스 공께서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녀석이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해 가 보았더니.......”

두 가주는 으르렁대던 것도 잊고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저 자식 걱정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에드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선 알겠습니다. 저희는 따로 조사에 착수할 테니 순찰과 검문을 강화하라 이르시고, 경비대와 기사들을 동원해 계속해서 흔적을 쫓으십시오. 시찰은 그 이후로 미루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영주님.”

메나스와 벤딜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레이린과 아르망이 에드윈의 뒤를 쫓아 응접실을 나섰다. 복도에 들어선 그가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아르망, 너는 부단장과 함께 루비아스 저택으로 가라. 베르디 루비아스가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 인간관계는 어땠는지를 중점적으로 조사해. 원한다면 사람을 더 붙여 주겠다.”

“아뇨, 충분합니다.”

아르망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싱긋 웃었다. 이어 푸른 시선이 레이린을 향했다.

“그리고 아제트리아 양. 그대는 키스티엘 경과 함께 마거릿 리브릭 양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조사하십시오.”

“예. 그런데, 영주님께서는?”

“나는 경비대와 기사단을 도와 바깥을 수색할 겁니다. 한시가 급박하니 이만 움직이죠.”

“알겠습니다.”

직후 에드윈은 리브릭과 루비아스의 기사들을 이끌고 바깥으로 나섰다. 한편 아르망은 클로비스 기사단의 부단장인 리오넬과 함께 루비아스령으로 말을 달렸다.

또다시 엘빈과 둘만 남게 되다니. 이건 우연일까 악연일까. 잠시간 제 신세를 한탄하던 레이린은 등 뒤에 엘빈을 단 채로 마거릿의 방을 찾아갔다. 마거릿의 전속 하녀가 방문을 열어 주며 울적하게 말했다.

“혹시나 가출이라도 하신 걸까 싶어서 살펴봤지만, 돈은 한 푼도 안 가지고 나가셨어요. 저희 아가씨 좀 꼭 찾아 주세요.”

“최선을 다하죠.”

레이린은 고개를 까딱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엘빈이 그녀를 뒤따라오며 문을 틈 없이 꽉 닫았다.

마거릿의 방은 퍽 넓었다. 주인의 취향을 보여 주듯, 방 전체는 대부분 단조롭고도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곧장 흩어져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흰 레이스 캐노피를 걷어 낸 레이린이 침대 아래를 살펴보며 물었다.

“그쪽엔 뭐 없어?”

“음...... 글쎄, 딱히. 그냥 평범한데?”

“적령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고?”

“아무리 제가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라지만, 그렇게 대가 없이 내놓으라는 소리는 하시면 안 되죠, 손님.”

지극히 공손한 어조에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엘빈은 돌아보지 않고도 그녀의 반응을 짐작한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더니 말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됐어. 입 닫고 찾기나 해.”

“포기가 너무 빠른 거 아냐?”

서랍장 뒤를 더듬거리던 엘빈이 문득 짓궂은 미소를 띠며 몸을 돌렸다. 일전에 레이린이 그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이 흘러나왔다.

“정 알고 싶으면 키스라도 한 번 해 주든가. 혹시나 네 키스가 만족스럽다면 내가 뭔가를 알려 줄 수도 있지 않겠어?”

빈정거림이 한가득 담긴 말에, 침대 끄트머리를 들춰 보던 레이린이 멈칫했다. 오묘한 긴장감이 어린 공기가 허공을 맴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잿빛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엘빈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

침묵을 유지하던 레이린이 돌연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발을 뗐다. 엘빈은 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주춤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덜컹, 소리와 함께 서랍장에 걸쳐진 그의 허리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야, 너 지금 무슨.......”

“하라며, 키스.”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엘빈의 코앞까지 다가온 레이린이 그의 옷깃을 잡아 쥐더니 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잠깐......!”

당황한 엘빈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빼며 숨을 흡, 들이켰다. 하지만 다음 순간, 숨결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우뚝 멈춰 선 레이린이 은근하게 속삭였다.

“어차피 진심도 아닌 주제에.”

“.......”

“겨우 이까짓 일로는 안 돼. 적령을 통째로 넘겨도 될까 말까 한 일을 바라다니, 욕심이 많네.”

한껏 비웃음을 지어 보인 레이린이 그의 옷깃을 성의 없이 뿌리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엘빈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터트리며 한발 늦게 몸을 일으켰다.

“자꾸 깔짝대지 말고 일이나 해. 더 상대해 줄 시간 없어.”

레이린은 그 말을 끝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열린 창으로 바람이 밀려 들어오며 반투명한 커튼이 휘날렸다. 고운 물결을 그리며 춤추듯 흔들리는 긴 머리카락.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엘빈이 불현듯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늘 평온하기 그지없던 심장이 지금은 놀람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으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왠지, 이거.......’

잘못 걸린 느낌인데. 그것도 엄청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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