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87)

* * *

루나는 쇠창살만 없을 뿐이지 감옥이나 다름없는 방 안을 끊임없이 서성거렸다. 한 시간 가까이 방을 이곳저곳 뒤지던 그녀는 결국 한숨과 함께 의자를 낑낑대며 들어 올렸다. 일반적인 의자에 비해서는 발 받침대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선천적으로 힘이 약한지라 그마저도 힘에 부쳤다.

그녀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 썩을. 이거 다리만 떼어 낼 수는 없나? 벽에 휘두르면 부서질 것 같긴 한데, 소리가 나잖아.......”

결국 문 앞에 의자를 내려놓은 루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바닥에 놓인 의자를 살펴보았다. 낡아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이걸 부순다면 꽤나 큰 소리가 나겠지.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이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탈출이 더욱 어려워진다.

이리저리 고민하던 루나가 분통을 터트렸다.

“아악! 망할! 이 잡것들이 기어코 나를 끌고 와? 내가 어떻게 도망쳐 다녔는데!”

약 하루 전. 루나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집 밖으로 나왔다. 평소였다면 밤에는 집에 틀어박힌 채 절대로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을 테지만, 레이린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 발이 먼저 움직였다. 시장에서 피로 완화에 좋다는 차라도 사다 놓을 생각이었다.

한데 그렇게 나선 길에, 지난 1년간 거주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수고까지 감수하며 피해 다니던 에피에온의 단원을 마주친 건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필 그때 제 곁을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쳐 그 충격으로 후드가 흘러내릴 확률은 또 얼마고?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1년 동안이나 성공적으로 도망 다녔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잡혀 버리다니.

루나가 지친 미소를 띠며 문득 중얼거렸다.

“내가 없어진 건 알려나 몰라.”

어제 레이린을 떠보려다가 그녀의 화를 샀으니, 아마 영영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그사이에 어디로든 팔려 가겠지. 선금이 아깝긴 하겠지만, 어차피 사람은 새로 고용하면 되는 노릇이고, 더군다나 자신은 주제넘게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려 하지 않았나.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그래도 탈출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죽이지는 않겠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끊임없이 발버둥 칠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상품’이니 정도 이상의 흠집을 내지는 못할 터. 이미 탈출에 한 번 성공했던 적도 있으니, 죽지만 않는다면 이 상황에서 무얼 못 하겠는가.

루나가 그리 되뇌며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바깥에서부터 희미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흠칫한 그녀가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고 의자를 들어 올렸다.

‘한 번에 기절시켜야 해.’

그녀는 벌써부터 후들거리는 팔에 힘을 더하며 문이 열리는 쪽의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점차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그녀의 방 앞에서 뚝 멎었다.

콰앙!

직후 굉음과 함께 문이 홱 열렸다. 잠금쇠를 푸는 소리가 들리길 기다리던 루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흡 들이키며 의자를 힘껏 휘둘렀다. 묵직한 바람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던 의자가 누군가의 손에 잡혀 우뚝 멈췄다.

“이게 뭐야?”

황당함이 담긴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고왔으나 남성의 것임이 분명한 목소리였다. 역시 무리였나. 루나가 손톱을 바짝 세우며 이를 으득 갈았다.

그때, 다른 누군가가 방 안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 얼굴을 확인한 루나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당신 뭐.......”

“루나.”

피투성이가 된 레이린이 어딘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한 발 다가왔다. 의자를 쥐고 있던 루나의 손이 힘없이 떨어지고, 진녹색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엘빈이 혀를 쯧쯧 차며 의자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그 순간, 높은 비명이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게 뭐야! 뭐냐고! 당신 미쳤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오길 와! 미쳤어!”

“아니, 루나. 잠깐만 진정-”

당황한 레이린이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루나는 연신 비명을 질러대며 그녀의 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심지어 다쳤잖아! 맙소사, 피를 대체 얼마나 흘린 거예요! 미쳤어, 미친 게 틀림없어! 어디.......”

그때, 레이린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미안해.”

“......뭐?”

루나는 순간 귀를 의심하며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방이 먼저 그 손을 잡아채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젠 내가 말이 심했어. 정말 미안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너한테 괜히 화풀이한 것 같아서, 내가.......”

“아니, 아니, 잠깐만. 잠깐만요.”

루나가 혼란스러운 듯 이마를 짚으며 손을 내저었다. 뒤늦게 평정을 되찾은 레이린이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루나가 물었다.

“그러니까, 사과하려고 내 집을 찾아갔다가 내가 없어서 찾으러 온 거예요?”

“......응.”

“......여긴 어떻게 알고? 돈으로?”

“적령에 의뢰했어.”

레이린이 고개를 끄덕여 루나의 물음에 답했다.

그녀는 옆에서 “그거 의뢰가 아니라 협박.......”이라고 중얼거리는 엘빈의 복부를 즉시 걷어찼다. 반사적으로 양팔을 겹쳐 그것을 막아 낸 그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 당신 원래 성격이 이 모양이었던 거야?”

“닥쳐.”

“무서울 지경이네. 이건 연기가 아니라 사기잖아.......”

엘빈이 경악한 듯 중얼댔다. 루나는 의심 어린 눈으로 엘빈을 힐긋대다가 레이린을 향해 재차 물었다.

“그 피는 또 뭐고?”

“아, 이건 내 피 아니야.”

“아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피가.......”

무어라 입을 열던 루나의 몸이 일순 휘청했다. 놀란 레이린이 반사적으로 루나를 붙들어 안았다. 그녀가 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루나?”

“아, 나 긴장이.......”

풀린 것 같은데. 루나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레이린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꼭 저를 걱정하는 것만 같아,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루나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몇 시간 뒤였다. 그녀는 등 뒤로 닿아 오는 푹신한 감촉에 어리둥절해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루나.”

방 안을 서성거리던 레이린이 그 기척에 놀라 침대 곁으로 달려왔다. 피투성이였던 얼굴이 말끔해져 있었고 옷도 새것이었다. 루나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레이린...... 님? 여긴 어디예요?”

“적령 쪽에서 마련해 준 안가야. 거처는 내가 집을 구해 주는 대로 옮기게 되겠지만, 앞으로는 안 보이는 곳에서 적령의 호위가 붙을 테니 외출할 때도 안전할 거야.”

“호위요?”

호위는 귀족들이나 부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안도감이 당황을 덮었다.

이내 루나는 한발 늦게 무언가를 기억해내고는 경악해 물었다.

“잠깐, 내가 잘못 들은 거죠? 집을 사 주겠다고요? 나한테?”

“맞게 들었어. 적령에 빚을 지고 싶지도 않고, 그럴 만한 능력은 충분하니 괜찮아.”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요? 선금이 아까워서 그래요?”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왔다. 그 말에 잠시간 입을 닫았던 레이린이 머뭇대며 중얼거렸다.

“그건.......”

작게 입을 달싹이던 레이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떨었다. 그 흔들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나의 입이 불쑥 열렸다.

“제 어머니는 창부였어요.”

그녀는 상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뜬금없는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냥 충동은 아니었다. 잿빛이 감도는 갈색의 눈을 본 순간, 어떤 깨달음과 함께 결심이 섰기 때문이었다.

레이린이 멈칫하며 말을 멈추었다. 침묵이 방 안을 짓눌렀다. 루나는 양팔로 무릎을 당겨 안으며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어머니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었고, 성격이 드셌죠. 허구한 날 소리 지르면서 싸우는 게 일상이었어요.”

덤덤히 말을 내뱉은 동시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저와 같은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여인이 제 머리채를 쥐던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마을을 지나던 어느 용병단, 아니, 사실 도적단이나 다름없었죠.”

루나는 “그래, 날강도들이었지.”하고 혼잣말을 중얼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하튼, 그곳의 단장을 손님으로 받았어요. 그는 제 얼굴을 보더니 비싸게 팔릴 것 같다며 저를 사고 싶다고 했죠.”

“.......”

“저희 엄마가 그 말에 뭐라고 답했을 것 같아요?”

레이린은 입을 꾹 다문 채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섬뜩하게 빛나는 두 눈에는 이미 답이 떠올라 있었다. 루나가 수긍하듯 웃었다.

“고작 그 정도를 받고는 못 판다고 난리를 치다가, 단장이 1골드를 더 얹어 주니까 저를 바로 내팽개치더군요.”

뭐, 어차피 그 집에 계속 있었다면 저도 그 사람처럼 됐겠지만. 루나는 그리 덧붙이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제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인 양 이야기를 이었다.

레이린은 침묵을 유지한 채 그녀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마을을 떠났어요. 아니, 팔려 갔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그런데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제가 꽤 예쁜 편이잖아요?”

“예쁜 편이 아니라 예뻐.”

레이린이 단호히 끼어들었다. 잿빛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에 흔들림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입을 헤 벌렸던 루나가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까딱했다.

“......고, 고맙습니다. 아무튼, 제가 어렸을 적부터 퍽 예뻤던지라 단원들이 심심하면 지랄에 지랄을 해댔...... 죄송합니다. 자제할게요.”

“아냐, 괜찮아. 편하게 말해.”

“그럼 사양 않고. 그 뭣 같은 놈들이 틈만 나면 수작질에 별의별 더러운 짓을 다 하는데.......”

단숨에 거친 욕지거리를 내뱉은 루나가 홀가분한 숨을 내쉬었다.

“단장은 ‘상품이니 적당히 해라’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귀찮은 얼굴을 하더군요.”

그때 그놈 가랑이 사이를 차버려야 했는데. 단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던 루나의 얼굴에 문득 미소가 떠올랐다. 그 얼굴에 레이린이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자 루나가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리고 저를 팔겠다고 했던 성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밤에, 어떤 사람들이 용병단을 습격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저를 구했죠.”

루나가 싱긋 웃었다. 이제는 아득한 추억이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들은 어린 저를 대가 없이 보살펴 줬어요. 입히고, 먹이고, 약초에 대해서도 가르쳐 줬죠.”

저는 그렇게 그들과 8년을 살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그 말을 내뱉은 루나의 진녹색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선명한 목소리를 냈다.

“나름대로 유대를 쌓았다 믿었던 친모조차 돈에 저를 팔아넘긴 것과, 죄가 없음에도 인간의 욕심 탓에 죄인처럼 숨어 살고, 정체를 숨겨야 하기 때문에 어딜 가나 박대받는 그들을 보면서.......”

“.......”

“아, 돈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구나.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 또한 돈이구나. 점점 망해 가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는, 돈이라는 것이 곧 나를 지킬 힘이구나.”

그렇게 깨달았죠. 작게 덧붙인 루나가 레이린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녀는 형언할 수 없는 얼굴을 한 레이린을 바라보며 해사하게 눈을 휘었다.

“그래서 저는 돈이 좋아요. 한 번 손에 들어온 돈은 절대로 저를 배신하지 않거든요.”

레이린은 루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이 아닌 돈을 믿게 되었다는, 언뜻 듣자면 헛웃음을 자아내기도 하는 그 말이 어째서인지 이해가 가서. 가슴 한쪽이 희미하게 지끈거렸다.

“그런데 당신은...... 왠지 돈이 담보로 걸리지 않아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어쩌면 저를 찾아 피투성이가 된 채로 달려왔던 레이린의 모습을 보았던 그 순간부터. 걱정으로 흔들리는 눈으로 사과하는 그녀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 또한.

“이거 제 기준에서는 엄청난 칭찬이에요. 알죠?”

그리 말한 루나가 레이린의 손을 찾아 쥐었다. 굳은살이 박인 흰 손끝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당신을 믿어 보겠다는 의미로 내 이야기를 했어요.”

“.......”

“당신은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대신 할 말, 없어요?”

어색한 얼굴로 손끝을 움찔거리던 레이린이 끝내 마주 웃었다.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인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소개할게.”

레이린이 제 목에 걸린 목걸이로 손을 가져갔다. 달칵, 하는 자그마한 소리와 함께 목걸이의 잠금쇠가 풀렸다.

그녀를 의아한 눈으로 보던 루나가 다음 순간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밤에 뜬 태양처럼 찬란한 빛으로 물들었다. 황금을 그대로 녹인 듯 찬연한 금빛 눈동자가 온화하게 휘어졌다.

“......내 본명은 레이린 브리어스. 길드 녹스의 간부야.”

3. 어쩔 수 없는 인간

딸랑-

밤의 끄트머리, 적령 제7지부의 문이 맑은 종소리와 함께 열렸다. 어둑한 서점 내에 주술석이 내는 빛이 아롱거렸다.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던 루드위그가 고개를 들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어어. 다녀왔어, 영감.”

엘빈은 손을 휘적휘적 내저으며 한구석에 놓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뒤로 젖혀 소파에 기대고, 다리 하나를 손잡이에 올리며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그가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진짜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지?”

“예?”

“영감, 레이린 아제트리아에 관해 추려 놓은 것 좀 줘 봐.”

“아, 그분 말입니까. 여기 있습니다.”

루드위그는 등 뒤의 책장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어 건넸다. 유달리 얇디얇은 서류철을 받아 든 엘빈이 소파에 반쯤 누운 자세로 그것을 무심하게 읊기 시작했다.

“레이린 아제트리아. 루에이리력 346년 10월 4일생. 나랑 동갑인 건 알고 있었고, 형제 없음. 특이 사항이라고 할 만한 게 2년간 링우드 상단주의 비서로 근무...... 이거 확인은 한 거지?”

“당연합니다. 매수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답하더군요. 어지간한 측근들은 그녀에 대해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루드위그가 외알 안경을 벗어 천으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말단으로 갈수록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비서쯤 되는 사람이 말단과 마주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을 테니 확신할 수는 없고요.”

“알아낼 수 있는 선에서는 완벽하다는 거네, ‘서류’상으로.”

“예. 아마 영주도 그녀를 비서장으로 채용하기 전, 그 서류의 진위를 모두 확인해 보았을 겁니다. 도련님께서도 일전에 다 확인하신 내용이지 않습니까.”

엘빈이 서류철을 테이블 위로 휙 내던졌다. 곱슬곱슬한 은발을 마구 헝클어트린 그가 물었다.

“그 이후의 행적들은 전부 입막음당한 뒤고?”

“그렇습니다.”

“보면 볼수록 웃기네. 너무 얄미워서 짜증 날 지경이야.”

엘빈이 날카롭게 웃었다.

그전까지는 마냥 완벽한 수행 비서인 것처럼 굴다가, 적령의 입을 막자마자 돌변하다니. 딱 보아도 계산된 행동이 아닌가.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던 엘빈이 품을 뒤적거려 금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레이린이 루드위그를 통해 건넨 것이었다.

주술석의 불빛에 황금색 광채가 반짝였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그것을 응시하던 엘빈은 문득 한 여자를 떠올렸다. 사람 같지 않은 찬란한 황금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조나단을 구해내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던 그 여자.

“흥미롭네.”

기분 나쁜 흥미가 아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런 느낌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심지어 하나도 아닌 둘이나. 물론 조금 더 흥미를 끄는 쪽은 당장 눈앞에 있는 레이린이었다.

적령의 절반이 동원되다시피 했는데도 진실을 알아낼 수 없다면, 가능성은 둘이다. 첫째,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홀로 수련한 천재. 하지만 레이린이 클로비스 저택에 도착한 첫날 전달받았던 쪽지의 존재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밀었던 금괴 궤짝이 이 가설을 부정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왕성에마저 거리낌 없이 숨어드는 적령이 헤르기아스 대륙에서 유일하게 손을 댈 수 없는 곳.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증인이 될 이들을 모조리 매수하고 적령의 입을 막을 만한 능력과 재력을 지닌 곳.

‘......녹스인가.’

금괴를 가볍게 던졌다 받은 그가 씩,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새 장난감을 보고 눈을 빛내는 아이 같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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