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날. 레이린은 찜찜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어제 루나의 물음에 너무 과한 반응을 내보인 것 같아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상처를 찔린 야생동물이 날카롭게 울부짖듯이 반응한 스스로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적당히 웃어넘길걸.’
아예 연기를 하고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저도 모르게 긴장을 놓고 있었던 탓에 막을 새도 없이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표출되었다. 맞은편 책상 위에 엎어진 아르망이 무어라 중얼대건 한 귀로 흘려보낸 그녀가 서류를 넘기며 고심했다.
‘사과......해야 하나.’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어색함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오려 했다.
레이린은 한숨을 삼키며 깃펜을 움직이는 데 집중하려 했지만 또다시 상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녀가 녹스에 머물 때, ‘친구’에 가까웠던 사람은 오직 프랭크뿐이었다. 하지만 라그나르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탓에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적었다. 더불어 대개 프랭크의 깐족거림이 선을 넘기도 전에 키안이 그의 멱살을 잡아채곤 했기에 서로 기분이 상할 일도 없었다.
‘사과한다고 해도, 말을 어떻게.......’
레이린은 고민에 잠겨 깃펜을 쥔 손이 멈춰 있는 것조차 모르는 듯했다. 새까만 잉크가 어느새 종이 위로 동그란 웅덩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사이 집무실의 반대편, 검은 머리칼 아래의 푸른 눈은 습관처럼 레이린의 얼굴로 향했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레이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그녀가 놀라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무심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제트리아 양.”
“......네. 부르셨습니까?”
레이린은 재빨리 사무적인 미소를 띠며 고개를 돌렸다. 책상 너머에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에드윈이 툭 말을 내뱉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십시오.”
“네? 하지만 일이 남아 있는데.......”
“아르망에게 넘기면 됩니다. 방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아니, 저기요? 제 의견은요?”
퀭한 눈으로 서류를 팔락대던 아르망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황당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금 서류로 시선을 내린 에드윈이 조용히 반복했다.
“저번처럼 직접 방까지 데려다드려야 돌아가실 겁니까?”
“무슨.......”
반사적으로 되묻던 레이린이 흠칫 말을 멈췄다. 조나단의 죽음에 정신을 반쯤 놓고, 에드윈의 목을 끌어안은 채 안겨 돌아왔던 날의 기억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직후 자리를 박차듯 몸을 일으킨 그녀가 지체 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남은 업무는 제가 내일 처리하겠습니다.”
“쉬십시오.”
에드윈이 서류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짤막하게 대꾸했다. 아르망이 본인은 사람도 아니냐며 울부짖는 소리를 뒤로하고 레이린은 제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내내 심장이 기이하게 뛰었다.
‘......내가 미쳤지.’
레이린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반쯤 넋을 놨다고 해도 그렇지. 에드윈이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그의 목을 바싹 끌어안고, 죽지 말라는 말까지 내뱉었다니. 정녕 미쳤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레이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방문을 닫았다. 그녀는 루시에게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으니 잠을 청하겠다고 일러두고 문을 잠갔다. 아무래도 에드윈이 방으로 돌아가 쉬라고 한 상황에 드러내놓고 외출을 하기는 조금 꺼려져서였다. 무거운 마음 탓인지 자꾸만 미적대는 팔을 움직여 옷을 갈아입은 레이린이 후드를 뒤집어썼다.
기사단의 순찰 시간을 확인한 그녀가 창밖으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건물 가까이에 위치한 나뭇가지를 한 번 밟고, 이어 풀숲 위로 한 바퀴 구른 그녀의 몸이 부드럽게 땅에 안착했다. 어지간한 사람이 보았다가는 기겁했을 만한 행동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거기에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도 확인했으니 상관없었다.
쪽문을 통해 재빨리 저택을 벗어나고 나서야 편하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레이린은 평소보다 느릿한 걸음으로 루나의 집을 향해 걸었다. 1시간 가까이 집 근처를 서성대던 그녀는 끝내 숨을 크게 들이쉬며 문을 두드렸다.
똑똑.
“루나, 나야.”
레이린은 그 말만 내뱉은 후 답이 돌아오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하지만 지나치게 고요했다.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자 의아해진 그녀가 문을 한 번 더 두드렸다.
“루나? 안에 없어?”
당황한 기색을 미약하게 드러낸 레이린이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루나가 집을 나설 때면 곧잘 남겨 놓는다던 쪽지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낮잠이라도 자나 싶었지만 아예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인위적이다 싶을 정도의 정적.
“......미안, 다음에 보상해 줄게.”
서늘한 중얼거림을 내뱉은 레이린이 그대로 문을 걷어찼다.
쾅-!
소음과 함께 문고리가 부서지며 문이 홱 열렸다. 레이린은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막 여트막한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음에도 집 안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루나!”
불길함을 감지한 레이린이 온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누군가 침입하거나 루나를 끌고 간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혼자서 어딜 간 거지?’
루나가 평소 자주 입던 색 바랜 망토가 보이지 않았다. 레이린은 정신없이 주위를 뒤졌다. 부쩍 따뜻해진 날씨였지만 한기가 목덜미를 스멀스멀 감싸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잠시 외출을 한 것뿐이리라 생각해 보려 해도, 지난 세월 동안 녹스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그 가정을 부정했다.
결국 저도 모르게 이를 간 레이린이 그대로 집을 뛰쳐나갔다. 어지간한 기사들을 상회하는 속도로 한 골목까지 내달린 그녀가 서점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종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가게 안에서 책에 쌓인 먼지를 털던 루드위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휙 돌리며 단검을 꺼내 쥐었다. 직후 후드 아래로 설핏 드러난 얼굴을 알아본 그가 손에 힘을 풀며 더듬거렸다.
“아, 아제트리아 님?”
형형한 살기를 등 뒤에 두른 레이린이 눈을 번득이며 입을 열었다.
“사람 하나 찾아. 지금 당장.”
* * *
늦은 밤, 클로비스령 구석진 곳에 위치한 술집에서 왁자지껄한 소란이 새어 나왔다.
“카르키오 상단의 몰락을 축하하며, 건배!”
“‘에피에온’의 부흥을 위하여!”
“위하여!”
여러 개의 잔이 부딪치며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각기 술을 들이켜던 이들 중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영주를 등에 업었다고 으스댈 때부터 목을 따 버리고 싶었는데, 이거 참 자업자득이로군!”
“맞습니다, 수장님. 그 멍청이들이 사라진 덕에 저희 쪽으로 거래가 물밀듯 밀려오고 있잖습니까.”
그 곁에 앉아 있던 생쥐 같은 외모의 남자가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동의했다. 그 말에 ‘에피에온’의 수장이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켜더니 말을 이었다.
“크으! 역시 하늘은 노력하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니까. 이번에 아주 괜찮은 상품까지 건졌겠다, 우리도 드디어 빛을 보겠군!
“그러게 말이에요. 어젯밤에 제가 딱! 어? 왠지 시장에 가 봐야겠다! 싶어 가 봤더니...... 거기서 그년을 다시 찾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테이블의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으스댔다. 에피에온의 일원들이 낄낄대며 그를 향해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생쥐를 닮은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번에 우연히 발견했다가 놓친 이후로 어디에 그리 꽁꽁 숨어 있나 했더니, 이렇게나 코앞에 두고도 몰랐군요.”
“정말이지 천운이지, 천운. 딱 이 시기에 그게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게 뭘 뜻하는 것 같나?”
수장은 고양된 어조로 말을 이어 가며 테이블 주위로 둘러앉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단원들은 저마다 희열에 차 킬킬대며 수장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윽고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린 수장이 테이블을 탕, 두드렸다.
“그야말로 하늘이 에피에온을 돕고 있다는 소리 아니겠어! 자자, 다들 건배하지!”
수장이 잔에 술을 가득 채워 넣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른 이들 또한 함박웃음을 띤 채 술잔을 손에 들었다. 앞으로 그들의 사업이 승승장구할 것을 생각하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수장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앞으로는 굉장히 바빠질 테니, 오늘은 날이 새도록 마셔 보자고!”
“좋습니다!”
“수장님 만세!”
“에피에온 만세!”
“자, 에피에온의 부흥을......!”
딸랑!
그 순간, 문에 걸려 있던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한껏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훅 가라앉았다.
술잔을 치켜들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입구 쪽을 향했다. 짙은 갈색의 후드를 뒤집어쓴 인영이 술집 내부로 들어왔다. 그 너머로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잠겼다. 작게 딸꾹질을 한 수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엉? 저건 또 뭐야?”
“아니, 아까 장사 끝내면서 분명 문을 잠가 뒀는데......?”
이미 술을 한껏 들이켠 이들은 평소보다 반응이 느렸다.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쥐처럼 생긴 남자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외침이 테이블을 가로질렀다.
“누구냐! 여긴 어떻게-”
“한 번만 묻지.”
후드 아래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서 어렴풋한 살기가 느껴졌다. 생쥐를 닮은 남자는 그 목소리가 여인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이없다는 듯 비소를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술집의 열쇠를 수장 앞으로 휙 내던지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녹색 눈을 지닌 여자. 너희가 데려갔나?”
“다짜고짜 쳐들어와서는 무슨 헛소리.......”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던 남자가 움찔했다. 후드 아래로 설핏 드러난 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형형해서였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마치 사냥 직전의 맹수를 마주한 듯한 기분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 순간 그녀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래.”
“다들 뭐하고 있어! 당장 잡지 않고!”
생쥐처럼 생긴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말에 에피에온의 일원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곧이어 여인이 서늘하게 말을 끝맺었다.
“그게 너희들의 대답이군.”
“잡아!”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제각기 무기를 빼어 든 이들이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그 직후 들려온 것은 비명도, 무기가 맞부딪히는 소리도 아닌, 생이 끊어지는 섬뜩한 소리였다.
우드득.
“뭐.......”
수장은 찰나 굳어졌다. 제 눈이 이상해진 것인가 싶었지만, 코앞에서 힘없이 쓰러지는 몸은 현실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생쥐 같은 남자의 목을 꺾어 버린 레이린이 싸늘하게 시선을 돌렸다. 직후 수장이 본능적으로 검을 꺼내 휘둘렀다.
챙-!
“크윽!”
수장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리는 팔에 힘을 주었다. 술기운이 단박에 날아가 버릴 정도로, 맞닿아 있는 검에 실린 힘이 말 그대로 무시무시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레이린을 노려본 그가 검을 튕겨내며 버럭 외쳤다.
“다들 뭘 굳어 있는 거냐! 당장 잡지 못해!”
직후 수장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멍하니 멈춰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레이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요 한 점 없이 슬쩍 몸을 틀며 검을 휘둘렀다. 날이 선 검이 허공을 가르던 도끼 하나를 거세게 쳐냈다. 깡! 소리와 함께 홱 방향을 튼 도끼가 동료의 목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잘린 목이 바닥을 구르고 피가 솟구쳤다. 경악이 담긴 고성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제프!”
“젠장, 이 미친년이!”
욕지거리를 짓씹어 뱉은 남자가 메이스를 휘둘렀다.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한 얼굴의 레이린이 순식간에 그의 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다음 순간, 주인을 잃은 메이스와 목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지는 상황은 ‘전투’가 아닌 ‘학살’에 가까웠다. 애초에 그들은 전문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배운 것도 아닌, 뒷골목에서 이름을 좀 날린다 싶어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간 멍청이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걸음마를 떼자마자 마물 우리에 내던져져 살아남았던 자의 상대가 되는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탁자가 뒤집히고, 수십 개의 술잔이 산산이 부스러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레이린을 노리다가 서로를 찌른 이들의 시체와 잘린 목들이 피와 파편들로 엉망이 된 바닥을 굴러다녔다. 실내에 자욱한 혈향이 머리를 어지럽힐 정도였다.
“크으, 헉, 흐.......”
마지막에 홀로 남은 수장이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그는 무섭게 치고 들어오는 검을 허둥지둥 막아 내길 반복했다. 피가 튄 얼굴은 어느새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열 명이 넘는 이들을 호흡조차 가빠지지 않은 채 상대하는 레이린을 보고는 기가 질렸다.
‘대체...... 사람이 맞긴 한 건가.’
수장이 이를 으득, 갈았다. 그는 이미 허벅지에 꽤 커다란 상처를 얻은 채였다. 더 길게 상대했다가는 답이 없다.
그리 판단한 그가 레이린의 검을 크게 한 번 튕겨낸 즉시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자그마한 붉은색 주술석이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거칠게 내던져졌다.
쨍그랑!
“......!”
레이린이 일순 미간을 좁히며 멈춰 섰다. 한순간 머리를 아찔하게 하는 통증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수장이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하하하! 살았......!”
하지만 웃는 얼굴로 문을 향해 손을 뻗던 그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림자처럼 들이닥친 검이 그의 목을 그대로 베어냈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수장의 목과 몸이 분리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레이린은 아직도 머리가 욱신거리는 듯해 신음을 삼켰다. 불행 중 다행인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단번에 주저앉았을 만한 통증이었음에도 그녀는 빠르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릴 적, 생물학적 아버지였던 인간에게 받았던 훈련 중에는 소소한 주술에 대한 저항력을 기르기 위한 것들도 있었다. 그녀는 유달리 주술에 대한 저항력이 강했기에 그가 퍽 만족스러워했던 기억이 났다.
‘웃기지도 않아.’
제 능력도 아니면서 뭘 그리 만족스러워하고 자빠졌던 건지. 절로 비소가 튀어나왔다.
눈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대충 닦아 내며 한숨 돌리던 그녀가 움찔, 얼굴을 굳혔다. 창밖에 누군가 있었다. 성큼 발걸음을 옮긴 레이린이 망설임 없이 창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창문이 반으로 갈라지며 안쪽으로 펼쳐졌다. 그녀의 손에 잡힌 창문이 작게 흔들리며 삐걱댔다.
어둑한 거리를 배경으로, 창문을 통해 흘러나간 빛이 의문의 불청객을 비췄다. 붉은 눈이 피투성이의 레이린을 향한 채 부드럽게 휘어졌다.
“안녕하세요, 아제트리아 님.”
클로비스 기사단 소속, 엘빈 키스티엘이 창문틀에 팔을 괸 채 순하게 미소 지었다. 레이린은 살짝 아래쪽에 위치한 그의 얼굴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너.”
“그보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이런 풍경을 바깥에 보이기는...... 조금 곤란할 것 같은데.”
이거 좀 열어 주실래요? 엘빈이 능청스러운 어조로 말을 뱉으며 문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서늘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레이린이 어둑한 거리를 힐긋 일별하고는 창문을 닫아 잠갔다. 이어 문 쪽으로 걸어간 그녀가 잠금쇠를 풀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오, 감사합니다. 덕분에 모양 빠지게 창문을 넘어갈 필요는 없게 됐네요.”
엘빈은 퍽 호들갑을 떨며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레이린은 그러거나 말거나 시체와 핏물로 엉망이 된 술집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벽에 가로막힌 그녀가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엘빈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저기, 저기요? 저한테 궁금한 게 있는 거 아니었어요?”
레이린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한쪽 벽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린 엘빈이 그녀의 뒤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당신은 걱정도 안 돼요? 내가 이런 걸 봐버렸는데? 이게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지 않나? 내가 이걸 주군께 고하면.......”
“안 그럴 거잖아, 너.”
레이린이 그의 말을 툭 끊었다. 그에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던 엘빈이 황당한 얼굴로 재차 말문을 열었다.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클로비스령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이곳까지 내가 어떻게 찾아왔을 것 같아?”
“.......”
이번에야말로 목소리가 뚝 끊겼다. 엘빈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에 잠시간 벽을 뒤지던 것을 멈춘 레이린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목에서 피에 물든 주술석 목걸이가 작게 흔들렸다.
“난 적령을 통해서 이곳까지 왔고, 내 행적을 포함해 나에 대한 모든 정보는 내 앞으로만 귀속되게 손을 써놨어.”
잿빛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가 담담하게 상대를 응시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동화를 읊조리듯 흘러나왔다.
“거래는 깔끔하고 확실하게. 그런 신조를 내걸고 있는 적령이 내 정보를 발설하고 다니진 않았을 테지.”
레이린은 덤덤하게, 하지만 확고함을 담아 말했다. 그녀가 어딘지 얼빠진 얼굴의 엘빈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그 신조를 무시하고 내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엘빈의 표정을 살폈다. 새하얀 은발 아래의 붉은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띤 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호한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레이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길드장, 혹은 그 후계자.”
“.......”
“둘 중 하나일 텐데, 길드장이 클로비스 기사단에 몸소 숨어들었다가는 일 처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지.”
레이린이 설핏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엘빈은 홀린 듯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비릿한 웃음을 띤 그녀가 천천히 말을 맺었다.
“적령의 후계자.”
“.......”
“그게 너였구나.”
혈향 가득한 술집 내부에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를 빤히 응시하는 레이린을 마주하던 엘빈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정말이지.”
순한 분위기를 띠는 얼굴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엘빈이 언뜻 레이린을 품에 가두듯 그녀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었다. 선이 고운 그의 손이 벽에 닿았다. 그가 손가락에 힘을 주자 그 부분이 달칵, 소리와 함께 살짝 들어갔다가 튀어나왔다.
드르르륵.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한쪽 벽에 숨겨져 있던 계단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느릿하게 손을 거둔 그가 숨결이 뒤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생긋 미소 지었다.
“이렇게 흥미로운 것도 참 오랜만인데.”
“.......”
“대체 누구야, 너?”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에 답하듯 레이린의 입에 걸린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하지만 그 입을 타고 흘러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그걸 알아내야 하는 건 너지.”
“......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었다. 엘빈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레이린은 그런 그를 비웃듯 곱게 눈을 휘며 웃었다.
“네가 나에 대해서 에드윈에게 발설하겠다고 했던 건 그저 협박에 불과해. 네가 내 정보를 열람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걸 바깥으로 발설하게 된다면 적령의 신조를 어기게 되는 것이니까.”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그러한 절대적 진리를 설명하는 듯 흔들림 한 점 없는 목소리였다.
레이린은 전에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섬뜩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나라고 가만히 입을 닫고 있을 리가 없잖아. 혼자 죽을 바에는 같이 죽자는 편이라.”
대체 뭐 이런 게 다 있지?
할 말을 잃은 엘빈은 그리 생각하며 레이린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흠 하나 없는 신분부터 지금의 이 모습까지, 밑도 끝도 없는 괴리감과 수많은 모순. 수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사람의 뼛속까지 파악하며 자란 그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미지’의 존재.
엷은 붉은빛이 도는 입술이 보란 듯 휘어진다.
“난 말해 줄 생각이 없지만, 너는 나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하겠지.”
찰나 잔혹하고도 두려운 광기가 레이린의 눈 너머로 스쳐 지나갔다. 사람을 홀려 그 영혼까지 취한다는 마물의 모습이 꼭 이러할까. 당장에라도 뼛조각 하나 남김없이 씹어 먹힐 것 같은 기분에, 엘빈은 전율했다.
레이린은 그 흔들림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원하는 것을 얻고 싶다면 대가를 지불해. 혹시나 네가 꽤 마음에 드는 인간이라면, 내가 기분에 따라 뭔가를 알려 줄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러니 어디 한번 처절하게 노력해 보아라, 날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