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87)

* * *

단출하고 조용한 장례식이 끝난 이후, 클로비스 저택에는 며칠간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암살자는 끝내 찾지 못했으며, 기사단은 동료를 잃었다는 슬픔과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자체적으로 자숙 기간을 가졌다. 저택 전체가 어찌나 침울했던지 아르망마저 입을 다물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슬픔을 추스르고 각자의 일에 전념했다. 드물긴 했지만, 아예 겪어 보지 않은 일도 아니었다. 죽음은 늘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에 마냥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그에 따라 외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쌓여 가니까.

그것을 증명하듯, 오늘도 영주의 집무실에는 새로운 서류들이 무더기로 들어왔다. 미친 듯 깃펜을 놀리던 아르망이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아아아악! 아악!”

“시끄럽다, 아르망.”

“시끄럽습니다, 선배님.”

“아악! 똑같은 사람 둘이 만났어! 저 일 중독자들! 아아아악!”

아르망은 동요 한 점 없는 얼굴로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는 레이린과 에드윈을 번갈아 손가락질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반응이 없었다. 한동안 발광하던 아르망은 결국 제풀에 지쳐 책상에 엎어진 채로 다시 일에 착수했다.

아르망과는 다르게 입을 다물고 일에만 집중했기 때문일까. 레이린은 꽤나 빠르게 제게 할당된 일을 끝마치고 집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간절한 얼굴의 아르망이 그녀를 붙잡았으나, 보란 듯 그에게 한 번 웃어 준 레이린은 미련 없이 집무실을 나와 제 방으로 돌아왔다.

“......윽.”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자마자 레이린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처치가 부실했기 때문인지 상처는 영 아물지를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지난 며칠간 집무실에서 간간이 상처가 쑤실 때마다 신음을 내뱉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모처럼 일도 일찍 끝났으니, 오늘 다녀와야겠네.’

한숨을 삼킨 레이린은 옷장을 뒤져 옷을 갈아입었다.

돈이 든 주머니와 예리하게 날이 선 단검까지 꼼꼼히 품에 챙긴 뒤, 그녀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클로비스 저택의 쪽문을 통해 거리로 나섰다.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는 클로비스 저택과 대비되게 소란스러웠다. 기척을 죽인 레이린이 그림자처럼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 나갔다. 이따금 몇몇 사람이 흠칫해 옆을 돌아보기도 했으나,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후였기에 그들은 애꿎은 뒷덜미만 긁적일 뿐이었다.

레이린은 의뢰를 받아들이고 유스티아로 떠나오기 전, 쓸 만한 정보는 모두 암기해 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암기한 것 중에는 정보 길드 ‘적령’과의 접선 방법 또한 있었다.

레이린은 한 골목 안쪽에 자리한 시끌벅적한 술집을 지나, 간판조차 달리지 않은 자그마한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선명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종이 냄새가 가득한 서점의 안쪽에서 외알 안경을 쓴 노인 하나가 놀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서 오십시오. 이 늙은이가 이젠 귀까지 맛이 갔나 했습니다. 헌데 이런 누추한 곳까진 어쩐 일이신지.......”

“‘붉은 달밤의 레퀴엠’이라는 책을 찾으러 왔는데.”

레이린이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무심히 말을 뱉었다.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몇 번 끔벅인 노인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서점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이곳은 워낙 규모가 작은지라 그런 책은-”

“모른 척도 정도껏 하지. 내 뒤에 사람을 붙여 놓고 그런 변명이 통할 거라 생각하나?”

외알 안경 위로 반사된 주술석의 빛에 노인의 눈이 가려졌다. 레이린은 동요 없이 말을 맺었다.

“난 여러 번 말하는 걸 싫어해. 방금 말한 책을 찾으러 왔다. 팔 건가?”

마지막 질문에는 명백한 경고의 어조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윽고 몇 분간 침묵하던 노인이 불현듯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을 기점으로, 그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이거 참 놀랍습니다.”

그가 책장 사이로 내려와 있는 줄을 한 번 잡아당겼다. 그러자 입구의 천장에서 두터운 커튼이 촤르륵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리며 서점 내로 들어오는 빛을 차단했다. 직후 어두컴컴해진 공간 곳곳에 자리하고 있던 주술석들이 일제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책장 가득히 꽂혀 있던 책들은 어느새 두툼한 서류철들로 바꿔치기 되어 있었다.

노인이 책장을 등지고 앉으며 또렷한 눈으로 레이린을 응시했다.

“클로비스의 수행 비서님께서 어떻게 특별 고객들께만 제공되는 이곳의 정보를 알고 계셨는지, 이 늙은이의 머리로는 감히 짐작할 수가 없군요.”

노인이 짐짓 순진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는 언뜻 보았다면 속아 넘어갈 법할 정도로 선량한 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린은 그 가식을 단박에 꿰뚫어 보고는 입가에 비소를 매달았다.

“명색이 정보를 사고판다는 곳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정보를 얻어가려 하는 건가.”

“허허, 그렇게까지 후안무치하지는 않습니다.”

빙긋이 미소 지은 노인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레이린 아제트리아 님. 적령의 제7지부장을 맡고 있는 루드위그 마리넬리라고 합니다.”

레이린은 말없이 고개를 마주 까딱였다. 루드위그가 사무적인 미소를 띠며 손깍지를 꼈다.

“혹시 이곳을 어떻게 알게 되신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값은 두둑이 쳐 드리지요.”

“내 정보를 그런 헐값에 팔 생각은 없어. 당신은 그저 당신이 맡은 역할대로 ‘고객’을 상대하면 돼.”

단호한 거절이었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루드위그가 미련이 남은 어조로 답했다.

“으음......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어떤 정보를 구매하러 오셨습니까?”

그 물음에, 레이린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뗐다.

“‘레이린 아제트리아’에 대한 정보 전부.”

루드위그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정보의 독점을 원하시는 겁니까?”

“거기에 하나 더. 실력 괜찮고 입 무거운 여자 치료사를 찾고 있어. 범위는 클로비스령 내로.”

“후자는 2골드면 충분합니다만.......”

루드위그는 퍽 난감하다는 듯 입매를 누그러트렸다.

“정보의 독점은 못해도 400골드 이상입니다.”

400골드라면 어지간한 영주 가문의 한 달 수입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가 질릴 법한 금액이었기에, 그는 레이린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맺었다.

그에 픽 웃음을 흘린 그녀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어 내밀었다. 돈으로 움직이는 집단에게 가장 효과적인 것은, 역시 돈이다.

“2배를 주지. 앞으로 내 정보를 사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내게 알리는 조건을 덧붙이는 대신, 100골드 얹어서 900골드야.”

귀를 의심케 할 만한 금액에, 루드위그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와 대조되게 레이린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덧붙였다.

“아, 내 뒤에 붙인 사람도 복귀시키고. 어차피 털어 봤자 아무것도 안 나올 테니까.”

레이린이 내민 주머니를 열어 본 루드위그가 저도 모르게 숨을 흡, 들이켰다. 주머니 안에는 하나당 100골드의 가치를 지닌 금괴가 10개 들어 있었다. 주술석의 불빛을 받은 금괴들이 은은한 황금빛 광채를 내며 반짝였다. 그것은 레이린이 정보원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커다란 시각적 충격이었다. 루드위그가 떨리는 손으로 금괴의 진위를 확인하는 동안 그녀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구매하는 치료사의 정보는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지 않는다는 조건까지 포함해서 총 1000골드. 혹시 모자라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충분합니다.”

루드위그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절했다간 노망났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의 액수였다.

“이제야 말이 통하네.”

어깨를 으쓱한 레이린은 다리를 겹치고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기대었다. 그 모습이 퍽 거만하게 보였다. 하지만 루드위그는 입가에 머금은 잔잔한 미소를 잃지도, 그녀의 태도를 지적하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구태여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도 많은 돈이었으니까.

이내 금괴가 담긴 주머니를 챙겨 넣은 그가 책장에서 꺼내온 계약서와 펜을 내밀었다.

“하단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회갈색 눈동자가 종이 위를 빠르게 훑었다. 계약서에는 양측의 이름, 금액, 거래의 대상, 담보와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장난질 쳐놓은 건 없군.’

레이린은 계약서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덤덤히 서명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눈이 튀어나올 만큼의 액수가 오가는 거래가 순식간에 성사됐다. 오래간만의 횡재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루드위그가 친절히 말을 시작했다.

“아제트리아 님께 꼭 맞는 조건의 치료사가 하나 있습니다.”

* * *

해가 거의 다 저문 어둑한 저녁, 클로비스령 내의 주민 거주 구역 깊숙한 곳. 레이린은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한참 지난 끝에 자그마한 집에 다다랐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문 너머로 경계심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아침 이슬과 무지개’라는 약초를 가지고 계신다기에 찾아왔습니다.”

레이린은 적령을 통해서 전달받은 암호를 담담하게 읊조렸다. 잠시간 침묵하던 문 너머의 여인이 천천히 문가로 다가왔다. 나무문이 안쪽으로 열리며 빛이 쏟아졌다. 이어 한 사람의 모습이 오롯이 드러났다.

“......!”

레이린은 한순간 저도 모르게 입을 작게 벌렸다.

문 너머로 나타난 여인은 가히 기겁할 만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신이 공들여 하나하나 빚어낸 듯한 이목구비. 붉은 생머리가 결 좋게 찰랑대며 어깨 위로 떨어지고, 짙은 녹색의 눈은 나무 그림자처럼 차분했다. 찰나 넋을 놨던 레이린은 여인의 의아함이 담긴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후드를 뒤로 살짝 젖히며 입을 열었다.

“루나 아미크 본인......인가요?”

“네. 들어오세요.”

루나가 주위를 경계하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레이린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그녀는 그 손길을 따라 순순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한 발 내딛자마자 약초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어느새 레이린의 팔을 놓은 루나가 안쪽에 위치한 작은 방으로 앞장서며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레이린은 집 안 곳곳에 널브러진 약초들을 신기한 듯 구경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가자 환자용으로 보이는 침대 하나와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서랍들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린을 침대에 앉히고 그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자리 잡은 루나가 물었다.

“그래서, 어딜 다치신 건데요?”

그 물음에 레이린이 입꼬리를 약간 끌어당겼다. 루나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자 그녀가 제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대답하기 전에, 먼저 두 가지에 대해서 확답을 받았으면 해요. 우선 첫째. 당신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던데, 정말인가요?”

“......참 무례하네요, 당신.”

“만약 내가 가식적으로 굴었다면 당신은 내 두 번째 제안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당신은 그런 사람이잖아요?”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거든. 레이린이 여상한 얼굴로 그리 덧붙였다. 루나는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래서 두 번째는 뭔데요?”

레이린이 제 품에 손을 집어넣자 루나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그것을 눈치챈 레이린이 무해하다고 해명하듯 빠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금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녹안이 경악으로 확장되었다.

“뭐.......”

레이린이 언뜻 오만하게도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밑에서 일해요.”

레이린은 제 손에 들린 금괴를 살짝 흔들며 빙긋 웃었다.

“이건 선금. 앞으로는 매달 10골드씩 지급하죠.”

금괴를 보고 놀라 벌어졌던 루나의 턱이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그에 한순간 웃음을 흘릴 뻔한 레이린이 황급히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대신 나에 관련된 이야기나, 당신이 받은 돈에 대한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하면 안 돼요. 철저하게 ‘나’만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소리예요.”

경계심 짙은 녹색 눈동자가 레이린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레이린은 조급해하지 않고 담담히 그 시선을 받았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상대의 눈은 이미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뒷골목에서, 이런 식으로 치료사 일을 하고 있다면 정식 치료사일 리가 없지.’

그런 면에서는 루드위그가 정말 제대로 추천해 준 셈이다. 루나는 유스티아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은 치료사가 아니었다. 그러니 언제 경비대가 들이닥칠지 몰라 떠돌이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더불어 수입도 꽤 불안정하겠지.

남의 불행을 제 행운이라 여기는 것은 마음에 조금 걸렸지만, 루나는 그야말로 회유하기에 완벽한 상대였다.

‘......뭐, 그걸 제외하고도 돈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녹색 눈동자가 금괴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보고 있자니 조금 웃겼다.

한편, 꽤나 갈등되는지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침묵하던 루나가 도발하듯 말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더 높은 금액을 부르며 같은 제안을 한다면, 제가 그쪽으로 돌아설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나요?”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누가 얼마를 부르든 그 2배를 줄게요.”

“뭐! 미쳤......!”

자리를 벌떡 박차고 일어나던 루나가 아차 하며 제 입을 막았다. 짙은 녹색의 눈이 데구루루 굴러가며 당황을 여실히 드러냈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재차 질문했다.

“그래서, 대답은?”

“......크흠.”

루나가 민망한 얼굴로 목을 가다듬었다. 곧 표정을 정리한 그녀가 꽃이 만개하듯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전 뭐부터 하면 될까요?”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항복이었다.

루나는 레이린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기겁했다.

“어떤 엉터리 돌팔이가 처치를 고작 이따위로 해 놨어!”

그리 외친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녀는 최소한 3일간은 매일매일 찾아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과 함께 상처 위에 약초를 치덕치덕 발라 주었다.

결국 레이린은 약초 냄새로 코가 알싸해질 때가 되어서야 지친 얼굴을 한 채 클로비스 저택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상처를 입는 게 일상인 생활을 했던지라, 응급 처치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엉터리 돌팔이라는 평을 받았다. 조금 우울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레이린은 일을 끝마치고 다시금 루나의 집을 찾아갔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은 지 고작 하루 만에 통증이 싹 가셨기에 걷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엉터리 돌팔이 맞네.’

레이린은 루나의 평가를 담담히 인정하며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의아해하던 그녀는 문 사이에 끼워져 있는 작은 쪽지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꺼내 펼쳤다.

「잠시 약초 시장에 다녀옵니다. 혹시 제가 집에 없다면 그쪽으로 와 주세요. -루나」

“대체 누가 상전인지.”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루나에게는 꽤 의외인 구석이 많았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엎드릴 것 같이 굴면서도 은근히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다 하는 것도 그렇고, 지금처럼 뻔뻔한 것도 그렇고.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역할이 역할이다 보니, 레이린은 클로비스 저택의 사람들 앞에서 끊임없이 미소 지으며 선량한 사람인 척 연기해야 했다. 하지만 루나는 클로비스 가문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앞에서는 나름대로 본래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루나에게는 자신이 영주의 수행 비서라는 표면적인 사실만 일러 주었다. 길드 녹스는 대개 공포와 경멸의 대상이며, 어디까지나 거래 관계로 얽혀 있을 뿐인 그녀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레이린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루나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쌉싸름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약초 시장은 노을이 지고 있는 지금까지도 꽤나 활기찼다.

레이린은 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상인들의 사이를 지나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빛바랜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는 루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 가게의 가판대에 나와 있는 약초를 살펴보다가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아나스타시아’ 질이 좋네. 얼마예요?”

“흐음, 한 다발에 5실버만 주시구려.”

직원이 콧수염을 매만지며 선심 쓰듯 말했다. 그러자 후드 아래로 살짝 드러난 붉은 입술이 비릿하게 휘어졌다.

“이봐, 해 먹어도 적당히 해 먹어야지. 3실버면 되는 걸 어떻게 2배 가까이 부풀려?”

“뭐? 무, 무슨 소리인가! 내가 그런 추잡한 짓을-”

“했지. 당신 주인이 이걸 알면 과연 무슨 소리를 하려나. 지금 당장이라도 들어가서 물어볼까?”

비릿한 웃음을 띤 루나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한 발짝 움직였다. 그에 화들짝 놀란 직원이 재빨리 제 몸으로 입구를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3실버만 주게!”

“그런데, 여기 나와 있는 것들 전부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리고 내 입이 꽤 가벼운 편이라서 말이야. 1실버 어때?”

“이 미친.......”

“싫으면 말고.”

상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레이린은 당장이라도 김을 내뿜을 것 같은 상인의 얼굴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결국 앓는 소리를 흘린 직원이 눈을 번득이며 루나를 노려보았다.

“......젠장. 함부로 입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현명한 선택이야. 걱정 마, 내가 사람 사이의 신의는 안 지켜도 돈에 대한 건 칼같이 지키거든.”

싱긋 미소 지은 루나가 약초 다발을 팔에 걸린 바구니에 집어넣고 은화 하나를 튕겼다. 툴툴대며 그것을 잡아챈 직원이 빨리 꺼지라는 듯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린은 유유히 가판대 앞을 떠나는 루나의 곁으로 다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나스타시아는 독초 아니야?”

“......깜짝이야.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그것보다 이거, 분명 독이라고 알고 있는데.”

레이린은 루나의 바구니 안에 담긴 붉은빛의 풀 더미를 가리켰다.

녹스에 머물 적, 프랭크가 독을 제조할 때 곧잘 사용하던 재료 중 하나가 아나스타시아 꽃이었다. 꽃잎 한 장만으로도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 만들 수 있을 만큼 독성이 강한 축에 속했다.

그 말에 흘긋 바구니를 내려다본 루나가 태연히 답했다.

“꽃은 독이 되지만, 줄기는 진통제의 재료로 쓸 수 있거든요.”

“아, 그래? 신기하네.......”

레이린은 새삼스럽다는 듯 바구니 안을 응시했다. 다시 보니 꽃받침 위로는 말끔하게 잘려져 나간 줄기들이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루나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시아 꽃이 독성을 띤다는 건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아나스타시아는 대개 꽃과 줄기 부분이 분리된 채로 가판대에 올라간다.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은 약초의 효능을 지닌 줄기뿐이기에, 대부분의 사람과 약초사들은 아나스타시아 꽃의 존재에 대해 무지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여 문득 의문이 들었다. 영주의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수행 비서라는 자가, 어째서 ‘독’으로 쓰이는 아나스타시아꽃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그건.”

루나의 물음에 레이린의 어깨가 찰나 움찔했다. 두 사람의 걸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우뚝 멈췄다. 시끌시끌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주변으로만 묵직한 침묵이 감도는 듯했다.

레이린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잿빛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작게 입을 달싹였다.

“그러는 너는.”

“......네?”

“너야말로 약초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건데?”

루나는 순간적으로 레이린의 기에 눌려 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본능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사람일진대, 한순간이나마 이빨을 드러낸 맹수를 앞에 둔 것만 같은 느낌이어서.

당황한 루나가 입을 다물자, 레이린은 상대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쏘아붙였다.

“치료실에 놓여 있던 노트에 적힌 내용. 그건 분명 보통 ‘사람’이 알 수 없는 정보였어. 미세한 향 차이와 줄기의 결만으로 약효의 차이를 정확히 구별해낼 수 있다니, 말도 안 되지.”

“.......”

“그 모든 것들을 누구에게 배웠냐고 묻는다면, 넌 대답할 수 있겠어?”

루나는 반박하지 않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나무 그늘이 지듯 어둑해졌다. 예상했다는 듯, 레이린이 메마른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것 봐.”

“.......”

“그러니까 여기까지야.”

“.......”

“그 이상은 안 돼.”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레이린이 노을 진 거리를 향해 먼저 발을 내디뎠다.

루나는 잠시간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후드에 둘러싸인 여린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녹색의 눈동자에 복잡한 빛이 휘돌았다.

‘그 이상은 안 돼.’

그 말이 어쩐지 경고가 아니라 자기방어처럼 들렸다면, 단지 착각인 걸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