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흐, 제기랄.......”
레이린이 숨을 몰아쉬며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커튼을 모조리 둘러 어둑한 방 안에서 반쯤 찢어진 복면을 내던졌다.
한동안 호흡을 고르는 데 집중하던 그녀가 몸을 숙였다. 허벅지의 상처를 동여매던 복면의 절반이 빠르게 풀어졌다. 피에 절어 상처 부근에 달라붙어 있는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등줄기가 찌릿 울렸다.
“윽!”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다가 황급히 숨을 죽였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루시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린 님, 깨셨어요? 약이 필요하실까 해서 와 봤는데, 방금 신음이....... 혹시 많이 아프신 건가요?”
레이린은 방문이 닫혀 있다는 사실도 잊고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침대 기둥에 머리를 살짝 찧어서 그래요. 가벼운 몸살이라고 했잖아요. 조금만 더 쉬다 보면 나아질 거예요. 약은 괜찮으니 다시 가져가요.”
말을 미친 듯 달리고, 거기에 두 발로 뛰고 구르기까지 하느라 버석해진 목소리는 퍽 자다 깬 것처럼 들렸다. 시무룩하게 알았다고 답한 루시는 한동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방 앞을 서성거리다가 사라졌다.
레이린은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몸을 일으켰다. 피 묻은 옷과 복면을 바깥에 따로 내버리기 위해 밀봉해서 챙겨 두고, 비명을 삼키며 상처를 꼼꼼히 씻어 냈다. 거기에 혹시나 피비린내가 남아 있을까 봐 평소에는 쓰지 않던 향수까지 뿌렸다.
유스티아에 올 때 혹시나 해 가져왔던 가벼운 의약품으로 응급 처치까지 끝마친 레이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다. 응급 처치는 했다지만, 이대로 둔다면 덧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클로비스 가문의 주치의를 찾아가자니 아까 조나단을 구하러 나섰던 것이 자신임을 들키게 될까 봐 여러모로 망설여졌다.
‘괜찮은 치료사 하나를 따로 구해야겠어.’
레이린은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목걸이를 찼다. 그러자 태양의 빛깔과도 같던 머리카락과 눈이 다시금 잿빛이 섞인 평범한 갈색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상처를 조심하며 침대로 파고들었다.
조나단이 꿈에서 보았던 장면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막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껏 그녀가 구해낸 사람들은 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을 맞이했기에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내가 죽는 꿈을 꾼 것도 그렇고, 여기는 원래 있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니.......’
이번에는 제발 다른 결말을 맞을 수 있길. 나 또한.
마른 햇볕 냄새가 풍기는 이불이 포근히 몸을 감쌌다. 간간이 허벅지의 상처가 날카롭게 쑤셨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그녀는 곧 스산한 어둠 속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선잠에 빠졌다.
* * *
에드윈과 클로비스 기사단의 제1조원들은 저녁 늦게 마물들의 시체를 수습해 돌아왔다.
마물의 뿔과 가죽 등은 요긴한 약이나 방어구 등으로 쓰일 수 있기에 꽤나 고가인 것들이었다. 녹스 또한 뒷거래를 제외하고도 주기적으로 마물 사냥을 나가 길드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고는 했다.
어둠이 내려앉고 저택에 고요가 찾아든 시각. 소등 직전의 클로비스 기사단 숙소는 시끌벅적했다.
“주군 보면서 감탄하다가 죽을 뻔한 저 멍청이가 클로비스의 기사라니. 쪽팔리다, 야.”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누군가 내뱉은 말에, 소란하게 떠들던 기사들이 하나둘 추측을 내놓기 시작했다.
“글쎄...... 사람이긴 할까? 황금색 머리카락이랑 눈이라니, 난 들어 본 적도 없다고. 헉, 혹시 마물 아냐?”
“난 뭐더라, 예전에 잠깐 머물렀던 마을에서 금색 인간인가 유령이 있다는 소릴 들어 본 것 같긴 한데.......”
“놓쳐 버렸으니 마물인지 유령인지 알 턱이 있나. 조나단 저건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 넋 놓다가 잡지도 못했지. 어휴, 멍청이.”
“어휴, 멍청이.”
기사들은 ‘멍청이’라는 단어의 억양을 바꾸어 가며 몇 번이고 조나단을 놀렸다. 결국 발끈한 조나단이 입을 비죽였다.
“다들 그만 좀 하시지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불침번 하잖습니까?”
안 그래도 오늘 몇 번이나 얼빠진 모양새를 보인 스스로가 부끄러워 죽을 와중인데 이리저리 부채질을 당하고 있자니 퍽 억울했다.
‘자기들도 같이 넋 놨으면서! 단체로 눈이 풀려 있던데! 그래도 난 입은 안 벌렸, 아, 벌렸구나. 젠장.’
그에 조나단의 숙소에 무단 침입해 널브러져 있던 다른 선배 기사들이 가소롭다는 듯 그의 목에 헤드록을 걸며 짓궂게 그를 놀렸다.
그것을 중재한 것은 방문을 열고 들어온 단장 패트릭이었다.
“자자! 이제 불 끌 테니 다들 입 닫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눕도록.”
기사들을 돌아보던 패트릭은 그 중 조나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핀잔했다.
“조나단, 너는 원래 1개월 근신을 내리려 한 걸 일주일 불침번으로 바꿔 주신 주군께 감사해라.”
목이 졸려 캑캑대던 조나단이 순식간에 눈을 빛내며 차렷 자세를 했다.
“옙! 알겠습니다!”
“얼른 나가자. 원래 내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 네 덕에 면했으니 이 몸이 친히 데려다주지.”
“그것참 영광이지 말입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리오넬이 너스레를 떨며 조나단에게 손짓했다. 조나단은 보란 듯 과장되게 예를 표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
기사단 숙소를 벗어나는 길에 리오넬이 으스스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야, 그런데 그거 아냐? 동쪽 후원에 있는 가제보 말이야. 그쪽은 어지간하면 가지 마라. 거기서 옛날에 사람이 죽었대.”
“그런 걸 믿으십니까? 부단장님 은근 담이 작은 분이셨지 말입니다.”
“아, 좀 들어 봐! 진짜라니까? 오늘같이 달이 어두운 날이면, 바람이 불 때마다 거기서 ‘으흐, 으흐흐흐’ 하면서 이상한 울음소리가.......”
“이상한 건 부단장님 같지 말입니다.”
“야!”
시시덕거리는 사이에 두 사람은 숙소의 입구에 도착했다. 조나단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야, 진짜 농담 아니다? 거긴 가지 마! 난 분명 말해 줬어! 유령 나와!”
“그렇게 따지자면 절 구해 줬던 사람이 더 유령 같았지 말입니다....... 아무튼, 들어가십시오!”
혼잣말하듯 낮게 중얼거린 조나단이 목소리를 높이며 등을 돌렸다. 리오넬이 그 자리에서 무어라 투덜대다가 숙소로 돌아가는 것을 힐긋 곁눈질한 그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은근 정이 많으신 분이라니까.”
덕분에 우울했던 기분은 싹 가셨다. 그는 경쾌한 걸음걸이로 저택을 꼼꼼히 순찰하기 시작했다.
동쪽 별채를 지나 본채의 후원을 지날 무렵, 그는 문득 리오넬이 해 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잠시 발을 멈췄다.
“흠.......”
조나단이 시선을 들었다. 쏴아아,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나무들 사이로 위치한 가제보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가제보를 바라보던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유령이라니, 말도 안 되는.......”
바스락.
“......!”
조나단이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며 몸을 돌렸다.
분명 명백한 인기척이었다. 이 시간에 존재해서는 안 될. 어둑한 후원, 새까만 어둠에 잠겨 있는 나무들 사이를 매섭게 노려보며 그가 입을 달싹였다.
“누구냐.”
대답은 없었다. 나뭇잎들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스산하게 귓가를 울렸다. 하지만 그 직후, 인기척과 살기가 동시에 쏘아졌다.
‘온다.’
서늘하게 눈을 빛낸 조나단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검에 무게가 실렸다.
검은 옷으로 온몸과 얼굴을 휘감은 자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끼긱, 하는 소리와 함께 맞닿아 있는 날붙이가 사납게 미끄러졌다.
클로비스의 기사와 합을 겨룰 만한 자라. 좀도둑 같은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것이 확실했다.
‘유령이 아니라 암살자가 나왔는데요, 부단장님.’
이따가 꼭 얘기해 줘야지. 조나단은 속으로 낮게 투덜거렸다.
그가 그대로 팔에 힘을 주어 암살자의 단검을 튕겨냈다. 이어 두 사람이 어둠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고요한 저택을 깨우듯 울려 퍼졌다.
조나단은 언뜻 여유롭게 보이는 태도로 암살자의 공격을 받아내고 반격하기를 반복했다. 확실히 단번에 상대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법을 연마하는 암살자와, ‘전투’를 목적으로 훈련하는 기사의 차이는 꽤나 컸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의 이야기였고, 현재는 그렇지 않았다.
‘......위험한데.’
낮에 생긴 옆구리의 상처가 자꾸만 욱신거렸다. 조금 전에도 하마터면 검을 쥔 손에 힘을 풀 뻔했을 정도였다. 격한 움직임 탓인지 상처가 터진 듯했다.
‘빨리 끝내야겠어.’
그의 주군인 에드윈이 이 소음을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마 지금쯤 사람들을 깨우고 후원으로 달려오는 중이겠지. 그러니 그사이,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 이 암살자를 확실히 붙들어 놓아야 했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조나단이 한순간 일부러 틈을 드러냈다. 어디 하나 크게 베일 것은 각오한 행동이었다. 어차피 그 정도 상처로는 죽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의 의도대로, 눈을 번득인 암살자가 그의 어깨를 향해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걸렸구나. 조나단이 속으로 안도하며 그대로 암살자의 팔을 잘라 내려던 그 찰나, 옆구리의 상처가 크게 욱신거렸다.
“윽!”
한순간 머리를 아찔하게 할 만큼 거센 통증에 그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검을 쥔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그 망설임은 상대에게 기회를 주었다.
‘아, 젠장.’
방향을 튼 단검이 그대로 그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 * *
사방이 새카만 어둠 속에서, 레이린은 눈을 떴다.
“.......”
멍한 얼굴의 그녀가 두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잠기운으로 혼몽하던 눈동자가 차츰 맑은 빛을 되찾았다. 이윽고 완전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평소보다도 훨씬 깊게 잠들었던 스스로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몇 시지?’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 훌쩍 지나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레이린은 정신없이 잠에 빠졌던 스스로를 질책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조나단은.......’
잠에 빠지기 직전까지 이어졌던 불안감이 다시금 머리를 쳐들었다. 저녁까지 건너뛰고 쭉 자 버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불안하게 쿵쿵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 레이린은 얇은 숄 하나를 걸치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그가 아직 무사함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녀는 후원으로 이어진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저택의 서쪽에 위치한 기사단 숙소로 가려면 이 길이 가장 빨랐다.
초조함을 드러내듯 점차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어느새 얇은 실내용 슬리퍼가 벗겨지고 맨발이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예 뛰어야.......’
결국 약간의 의심을 감수하기로 한 레이린이 본래의 제 능력대로 달리려던 순간, 가제보 쪽에서 인위적인 기척이 들려왔다.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굳어 버린 목을 애써 옆으로 돌리자, 다급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누군가의 그림자와, 그리고.......
“......경?”
레이린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반쯤 넋을 놓은 듯이 보이는 그녀가 가제보 쪽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어둠 속이라 잘못 본 것이 틀림없었다. 제 눈이 어떻게 된 것이 틀림없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발에 닿아 오는 감촉이 어느 순간 달라졌다. 그것을 자각한 그녀가 그대로 멈춰 섰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동시에 그녀의 심장도 발끝까지 떨어졌다.
“......아니야.”
시야는 어둠으로 인해 흐릿했지만, 코끝에 물씬 다가오는 혈향은 선명했다. 레이린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흙바닥이 삼키다 못해 토해 낸 핏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 위로 그녀가 풀썩 주저앉았다. 덜덜 떨리는 손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의 얼굴을 천천히 더듬었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헤이미르 경.......”
목이 졸리는 듯, 신음 같은 말이 새어 나왔다.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레이린은 숨을 몰아쉬며 그의 시체 위로 엎어졌다. 저도 모르게 그러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안 돼.”
또다시, 또 이렇게....... 놓쳐 버렸다.
레이린은 핏물에 젖어 있는 옷 위로 뭉개진 신음을 토해 냈다.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가쁘게 헐떡이는 숨소리가 눅눅하게 흘러나왔다.
조나단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받자 또 다른 기억이 연이어 머리를 잠식했다. 흰 눈밭. 그 위로 흩날리는 피. 칼날.
“그만.......”
지금 기대어 있는 이 시체가 꼭 그녀 자신 같아서.
* * *
늦은 시간까지 집무실에 남아 서류를 처리하던 에드윈이 움찔했다.
깃펜이 멈춰 서며 종이 위로 새까만 잉크가 피 웅덩이처럼 퍼져 나갔지만 그는 가만히 창밖에 귀를 기울였다.
......소음.
다음 순간, 그가 벼락 맞은 것처럼 몸을 벌떡 일으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인트!”
에드윈이 집무실 한쪽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검을 집어 들고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쾅! 소리를 낸 문이 바깥으로 활짝 열려 삐걱댔다. 그 소리에 놀라 일어난 하인트가 제 방 밖으로 달려 나왔다.
“영주님! 무슨......!”
“기사단을 이끌고 동쪽 후원으로 와, 지금 당장.”
얼마나 다급한지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긋듯 꼬박꼬박 쓰던 공대마저 잊어버린 듯 보였다. 에드윈은 그 말만 남기고는 순식간에 본채 바깥으로 사라졌다.
“하녀장! 그레타!”
하인트는 경악을 추스를 새도 없이 하녀장에게 하녀들을 깨우라는 말을 전한 뒤 허둥지둥 기사단 숙소로 달려갔다. 본인은 이미 황혼에 접어든 나이이며, 주술석을 이용하는 편이 백배는 빠르다는 이성적인 생각은 혼비백산함에 쫓겨 진즉 사라진 후였다.
에드윈은 뒷문을 통해 곧장 후원으로 달려 나왔다. 그는 창밖으로 들려오던 인기척의 방향으로 빠르게 발을 옮겼다.
‘암살자인가? 최근 경비 일정을 바꿨는데 어떻게 알고.......’
그가 짧게 이를 갈았다.
오늘 밤의 순찰은 징계 대신 조나단 홀로 맡기로 되어 있었다. 낮에 그가 입은 상처를 기억했다. 평소라면 몰라도, 오늘은 절대로 혼자 맞설 수 없다. 아까까지만 해도 들리던 쇳소리마저 멎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스멀스멀 속을 채웠다. 에드윈은 서늘한 살기를 흩날리며 속도를 높였다.
곧 가제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두서없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의문을 뒤로 미뤄 두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흰 것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새파란 눈이 멈칫했다.
“......레이린 아제트리아?”
낮은 중얼거림이 잇새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부름을 듣지 못한 것인지, 흰 잠옷 차림의 레이린은 바닥에 놓인 무언가의 위로 엎어진 채 미동이 없었다. 무의식중에 그녀가 몸을 기대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에드윈이 그대로 굳어졌다.
“.......”
새파란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그는 형형한 눈으로 바닥에 놓인 조나단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옅디옅은 감정이 찰나 두 눈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기사는 언제든 죽음을 목전에 두는 자들이다. 그는 끝까지 기사로서 죽었다. 여기서 자신이 부상을 입은 그에게 업무를 맡겨서는 안 됐다며 후회라도 한다면, 그에게는 다시 없을 모욕이 되리라. 그리 되뇌며 감정을 대강 갈무리한 그가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아제트리아 양.”
여전히 답은 없었다.
에드윈은 피 웅덩이 위에 주저앉아 있는 레이린의 옆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째서 이곳에 있었는지는 후에 물어도 될 것이다. 우선은 이 장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몸을 낮춘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제 손길을 따라 순순히 일으켜지는 몸에 의아해진 에드윈이 레이린을 부르려 입을 뗐다.
“아제트리.......”
하지만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새파란 눈동자가 일순 흔들리며 목소리가 뚝 끊겼다.
잿빛이 감도는 갈색의 눈동자는 멍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고요하고 텅 빈 듯한 두 눈이 속을 갈피 없이 술렁이게 만들었다.
“.......”
찰나 동요했던 에드윈은 곧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지체 않고 그녀의 어깨와 무릎 밑을 감싸 안으며 몸을 일으켰다.
“레이린.”
나직한 부름이 떨어졌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레이린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엷은 한숨을 삼킨 에드윈이 무어라 입술을 달싹인 순간. 그녀가 벼랑 끝에 매달리는 사람처럼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
예상치 못한 일에 에드윈이 멈칫했다. 불안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코끝에 혈향과 뒤섞인 희미한 치자꽃 향이 닿아 왔다. 피부 위로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 적나라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에 한순간 힘이 들어갔다.
그때, 저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던 소란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영주님!”
“주군, 어디......!”
가장 앞쪽에서 들리던 하인트와 패트릭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이어 그들을 따르던 기사들의 기척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조나단.”
일그러진 얼굴을 한 리오넬이 신음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레이린이 편하도록 자세를 고친 에드윈이 패트릭을 향해 무표정하게 명했다.
“수습해라.”
그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패트릭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헌데 아제트리아 님께서는.......”
“다치지 않고 무사하니 신경 쓰지 말고. 조나단은 암살자와 마주쳤던 것으로 보인다. 수습이 끝나면 저택을 포함한 주변을 수색하고, 경비대에게 검문을 강화하라 전해.”
“명 받들겠습니다.”
에드윈은 답이 들려오자마자 곧장 몸을 돌렸다. 그녀의 옷에 묻어 있던 피가 제 옷까지 물들였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동쪽 별채로 들어섰다.
하녀장에게서 소식을 듣고 1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시가 피에 절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기겁하며 달려왔다.
“레, 레이린 님!”
“가서 욕조에 물을 받고 새 옷을 준비해라.”
“......아! 네, 네!”
에드윈의 명령을 받은 루시가 허둥대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는 아직까지도 제 목에 팔을 감고 있는 레이린을 안고 천천히 위층으로 향했다.
그녀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계단을 오르던 그가 문득 중얼거렸다.
“이상한 사람.”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고, 정말이지 이상한 사람. 사람의 죽음을 이처럼 가까이서 목격한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감은 그것이 아니라는 듯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래, 단지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고 공포에 질린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그보다 몇십 배는 깊은 절망, 좌절, 체념이 깃든....... 마치 본인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확인받기라도 한 것 같은 눈.
‘대체 뭘까.’
상념에 잠긴 사이, 에드윈은 어느새 4층 복도에 다다랐다. 막 레이린의 방문을 열고 나오던 루시가 그를 발견하고는 머뭇대며 보고했다.
“물은 받아 놨습니다. 그런데, 옷장을 뒤지기가 조금.......”
“하녀장에게 말해서 비슷한 것으로 구해 와.”
“알겠습니다.”
허리를 깊숙이 숙인 루시가 다급히 뛰어갔다.
에드윈은 레이린의 방 안으로 들어가 곧장 욕실로 향했다. 욕실의 문을 열자 엷은 불빛과 함께 따뜻한 공기가 훅 끼쳐 왔다.
희뿌연 수증기가 가득 찬 욕실을 가로지른 그가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앞에 멈춰 섰다. 레이린을 욕조에 내려놓으려던 에드윈은 제 목을 감싼 채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팔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뜻밖의 일에 놀라 반쯤 자취를 감췄던 이성이 돌아왔다. 낮은 목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아제트리아 양.”
“.......”
“계속 그렇게 힘을 주고 있다간 근육이 다칠 겁니다.”
답은 없었다. 하지만 목을 감싸던 팔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그것을 눈치챈 에드윈이 말없이 레이린의 팔을 풀어냈다.
그가 느릿하게 팔을 움직여 그녀를 욕조 안으로 내려 주었다. 욕조에 가득 담겼던 물이 흘러넘치며 바지 자락이 젖어 들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쉬시길.”
에드윈은 덤덤히 말을 내뱉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막 욕실 밖으로 한 발 떼려는 순간, 등 뒤로 자그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은.”
“.......”
“......당신은 죽지 마.”
속내를 알 수 없는 말은 곧 꿈인 듯 희미하게 스러졌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멈춰 서 있던 에드윈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당신이야말로.”
곧 죽어 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한 당신이야말로. 차마 온전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그가 발을 뗐다.
방 안을 흐릿하게 가로지르던 빛이 가늘어지더니 이윽고 자취를 감췄다.
쿵.
등 뒤로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