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87)

* * *

달그락.

비에트론의 가주, 레녹스는 끝내 손에 배어나는 식은땀을 참지 못하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응접실을 짓누르고 있던 긴장감이 깨어졌다.

“저어, 영주님. 그래서 이 시간엔 어쩐 일로, 찾아오신 것인지.......”

물론, 한밤중에 불쑥 들이닥치더니 삼십 분간 한마디도 내뱉지 않은 채 침묵하던 상대에게 먼저 말을 꺼내기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레녹스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맞은편에 앉아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에드윈의 눈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어쩐지 평소보다도 더욱 깊게 침잠해 있는 듯한 새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본능적인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비에트론 공.”

“......아아, 예!”

화들짝 정신을 차린 레녹스가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에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는 미미하게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에드윈이 입술을 뗐다.

“카르키오 상단에게 받아낸 금액. 얼마입니까.”

툭.

“......예?”

레녹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힘이 풀린 손에서 찻잔이 미끄러졌다.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찻물이 값비싼 벤투스산 카펫 위를 엉망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한 사람은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고, 한 사람은 신경 쓰지 못했다.

정말로 반문하고자 나온 말이 아니었음에도, 에드윈은 확인 사살하듯 재차 읊조렸다.

“카르키오 상단의 인신매매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얼마를 받았는지 물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또한, 그들이 뇌물로 바쳤던 주민들의 시체는 어디에 숨겼는지도 답해야 할 겁니다.”

레녹스는 저도 모르게 자리를 벌떡 박차고 일어났다. 에드윈은 그와 대조되게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나른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의 입술 위로 맹수와도 같은 비소가 떠올랐다.

“내가 취임식에서 분명 경고하지 않았던가. ‘본분’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무엇을 하든 관여치 않겠다고.”

“.......”

“그리고 그 본분에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되지. 난 사람이 아닌 짐승을 거두는 취미 따위는 없어.”

차가운 조롱이 떨어졌다. 숨조차 쉬기 힘든 위압감이 침묵과 함께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레녹스는 에드윈의 조롱에 분노하지도 못한 채 굳어 버린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아니, 아니야. 아직 제대로 된 증거도 없다. 이 이상 동요해선 안 돼. 무조건 잡아떼야 한다.’

무력으로 덤벼볼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에드윈은 그가 상대할 수 있는 영역의 인간이 아니다. 그 정도의 이성은 있었다.

레녹스는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며 이를 갈았다.

‘하여튼 멍청한 것들이!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했기에......!’

가쁜 숨을 고른 레녹스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만. 전 아무것도.......”

그때, 선명한 노크 소리가 레녹스의 목소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영주님, 아르망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에드윈이 곧장 답했다. 문이 열리고 아르망과 엘빈, 리오넬이 걸어 들어왔다. 아르망의 손에 들린 갈색의 노트를 목격한 레녹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아르망과 함께 비에트론 저택을 뒤지고 돌아온 리오넬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보고했다.

“장부는 비에트론 부인의 방에서 발견된 금고에 들어 있었습니다.”

사무적으로 보고를 내뱉던 리오넬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대체 무슨 짓을 해 놓은 건지, 온몸이 난자된 채로 지하실에 묶여 있던 이들도 사용인들에게 치료하라 명해 놓았습니다.”

“기사단 쪽은.”

“단장님께서 10명을 선별해 출발시키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늦어도 동이 틀 때쯤에는 도착할 겁니다.”

에드윈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 아르망이 불쑥 끼어들었다.

“영주님,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레이린이.......”

흐려지는 목소리에서 걱정이 점점이 묻어났다. 엘빈과 리오넬 또한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에드윈은 어이가 없었다.

‘저 둘은 그렇다 치고, 아르망까지.......’

에드윈은 아르망의 본모습을 안다. 겉으로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그는 자신만큼이나 사람을 재고 파악하는 데 능숙했다. 웃는 얼굴과 혀만으로 사람의 속을 분해하고 가지고 노는 저 재주를 따라올 자가 없을 만큼.

한데 저렇듯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라니. 심지어 자각조차 없다.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레녹스를 힐긋 바라본 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신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는 세 사람을 향해 차갑게 일갈했다.

“나 하나도 과해. 너희 셋은 이곳을 정리하고 경비대에 연락을 넣어라.”

“하지만.......”

“명령이다.”

엘빈의 말을 차갑게 잘라 낸 에드윈은 그대로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며 빛이 스러졌다. 어둠 속에서 더욱 시린 빛을 띠는 새파란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그는 미끼를 자처하며 웃던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 * *

-콰앙!

문이 부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형형한 눈을 한 에드윈이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뒷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단의 수하들을 제압하고 오느라 그의 몸은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손에 들린 은빛 검에서 짙은 붉은빛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피가 튄 얼굴 그대로,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레이린을 직시했다.

“......영주님?”

흐트러진 매무새로 숨을 몰아쉬던 레이린이 그를 알아보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에드윈은 그녀의 볼에 흐르는 피를 발견하고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다쳤습니까.”

“아까 조금 스쳤나 보네요. 괜찮습니다.”

레이린은 제 볼을 슬쩍 건드려 보더니 흐릿하게 웃었다. 에드윈은 태연히 웃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전의 사건에서 느꼈던 의문이 다시금 머리를 잠식한다.

‘왜?’

대체 왜. 당신은 무엇을 위해 그리 필사적인가. 고작 제 ‘믿음’ 하나를 얻기 위해서 저렇듯 몸을 혹사하고, 스스럼없이 위험에 몸을 던지는 것인가? 정말로, 고작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에드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의문을 떨치며 발을 떼었다. 그가 바닥에 엉망으로 널브러진 상단주를 발로 밀어 치우고 그녀의 앞으로 몸을 숙였다. 이내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댄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레이린이 한순간 움찔했다.

“읏.”

굳은살이 박인 손이 그녀의 볼에 새겨진 상처 주변을 느리게 배회했다. 살갗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손가락에 등줄기가 저릿해지며 신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에드윈이 레이린의 볼을 쓸던 손끝을 천천히 떼어 내며 입을 열었다.

“위험한 사람일수록 내 가까이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심스러운 손길과 달리 섬뜩한 경고가 내뱉어진다. 그 말에, 레이린의 시선이 피로 점철된 조각 같은 얼굴로 향했다.

‘의외네.’

후일을 위해 일부러 수상함을 흘리긴 했지만, 이토록 적나라하게 그것을 간파할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그 사실을 제게 보이며 경고하기까지. 생각보다 더 흥미롭고도 위험한 자였다, 이 남자.

“......그렇다면.”

도발해 볼까.

레이린은 충동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가면에 보란 듯 금이 간다. 무구하고 담담했던 얼굴에 묘한 비소가 섞여들었다.

새파란 눈에 찰나 이채가 스치고.

“어디 한번 가까이 둬 보세요.”

이내 나직한 말이 내뱉어진다. 먼저 밑바닥을 드러내게 되는 건 당신일까, 아니면 나일까.

“기꺼이 응해드릴 테니까.”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비에트론 가문이 몰락했다. 에드윈 클로비스가 가문의 지하실에 갇혀 가주 부부의 ‘놀이’에 이용당하던 이들을 구해내고, 비에트론령의 주민들을 납치해 외부 도적단에 팔아넘기던 상단을 뒤엎었다는 소식이 유스티아 전역을 휩쓸었다.

비에트론의 가주가 상단주에게 ‘놀잇감’을 상납받으며 그간의 일들을 묵인해 왔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한동안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영주인 에드윈을 찬양했다. ‘역시 유스티아는 이 땅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라는 말이 헤르기아스 대륙 널리 퍼져 나갔다.

한편, 카르키오 상단주를 제압하다가 볼에 상처를 입은 레이린은 클로비스 가문 주치의의 걱정 어린 치료를 받고 완쾌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흉터도 남지 않을 만큼 옅은 상처였지만, 클로비스 저택의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이가 레이린의 전담 하녀인 루시였다.

“자, 오늘도 다 드셔야 해요!”

본채 2층의 식당. 루시가 레이린의 앞으로 음식을 나르며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에 대한 반응은 레이린의 곁에 앉아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는 아르망에게서 흘러나왔다.

“루시 너도 참 대단하다....... 이거 다 만들겠다고 지난 일주일 내내 새벽 4시엔가 일어나지 않았어? 안 피곤해?”

“당연하죠! 레이린 님을 위한 거니까요!”

루시가 콧김을 훅 뿜으며 테이블 위로 접시들을 올렸다. 엷은 김이 올라오는 클램 차우더, 버터 향이 솔솔 풍기는 크루아상, 레몬을 곁들인 연어 샐러드까지. 여기까지는 평소에 주방장이 곧잘 올리곤 하는 것들이라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로도 음식은 끊임없이 올라왔다. 아침상으로는 조금 과하다 싶은, 루시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만든 육류 요리들이 식탁을 그득그득 메웠다.

“이거! 이거부터 드셔 보세요!”

접시 배치를 끝마친 루시가 노릇하게 구워진 스테이크를 가리키며 눈을 반짝였다.

레이린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도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입맛이 없기는 했지만, 더 먹기에는 무리라고 생각될 정도는 아니었다.

‘맛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맛있는 편이지.’

딱히 힘든 일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그리고 저 맑은 눈에 실망이 깃드는 모습은 딱히 보고 싶지 않았다. 레이린은 어쩐지 낯간지럽다는 생각을 하며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때, 옆에서 크루아상을 잘게 찢어 입 안에 던져 넣던 아르망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너 오늘따라 안색이 별로다? 잠이라도 설쳤어?”

“......아뇨. 조금 피곤한 것뿐이에요.”

순간 멈칫했던 레이린이 흐린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아침잠이 덜 깬 탓인지, 다행히 아르망은 별다른 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입을 우물거리며 빵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별다른 추궁이 없음에 안도한 레이린은 찬물을 들이켜며 한숨을 삼켰다. 평소와 달리, 눈 밑에 보일 듯 말 듯 한 옅은 그늘이 져 있었다. 그녀가 이리 심란해하는 이유는 어젯밤의 꿈 때문이었다.

‘누구지, 그 남자.’

어두운 잿빛 머리칼에 검은 눈을 지닌 청년. 그는 지난밤의 꿈에서 마물의 발톱에 복부를 관통당하고 피를 쏟으며 죽었다. 예지몽에서 얼굴이 확실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이는 어떻게든 레이린 본인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가 클로비스 저택 내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었다.

레이린은 조금 긴장한 상태로 식사를 끝마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평소에 비해 속이 갑갑했다. 혹여 체하기라도 할까 염려스러워 저택을 한 바퀴 산책한 후 집무실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본채의 후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녀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이 저택에서 마물과 그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할 만한 인물이라면.’

기사.

잠시 고민하던 레이린은 곧장 몸을 돌렸다. 그녀는 서쪽 별채를 지나 야외 연무장이 있는 방향으로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소리가 귓가를 둥둥 울렸다.

‘아니면 어쩌지?’

혹시라도 기사단에 그 남자가 없다면, 자신이 손을 뻗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라면 어찌해야 하나. 하지만 몸에 짙게 밴 죄책감이 불안감을 이기고 재차 다리를 움직였다.

레이린은 드물게도 숨을 몰아쉬며 야외 연무장 근처에 다다랐다. 그러자 연무장의 가장자리에서 기사 하나와 대련하고 있던 엘빈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땀에 젖은 은발 아래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졌다.

“아제트리아 님? 이 시간부터 여긴 왜.......”

“뭐? 누구라고?”

엘빈의 맞은편에서 숨을 헐떡이던 기사가 목검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레이린은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잿빛 머리칼에 검은 눈. 한편 그 시선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던 기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조나단 헤이미르라고 합니다.”

조나단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레이린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꿈에서 피범벅이 되어 일그러진 채였던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숨이 턱 막혀서였다.

엘빈이 평소와 달리 조금 흐트러진 레이린의 얼굴을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추스르며 목멘 소리를 냈다.

“......인사가 늦었네요, 헤이미르 경.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 그게.......”

레이린이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는 찰나.

뎅, 뎅, 뎅-!

클로비스 저택 전체에 종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목검을 휘두르던 패트릭이 우뚝 멈춰 서더니 연무장 전체를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1조는 당장 들어가서 무기 챙겨! 2급 이상 마물이다!”

“알겠습니다!”

조나단과 엘빈을 포함한 제1조의 기사들이 곧장 차렷 자세를 취하며 우렁차게 답했다. 제자리에 굳어 있는 레이린을 미안하다는 듯 힐긋 바라본 두 사람이 순식간에 등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잠시간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눈에 담던 레이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이를 악물었다.

‘살려야 해.’

그 빌어먹을 운명 따위에 패배하여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의 끝을 강요당한 지금은 더욱 그러했다.

살아오며 몇 번이고 다짐했고, 몇 번이고 실패하기를 반복해 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마음일지라도.

형형한 눈을 한 그녀가 몸을 휙 돌려 걷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종소리가 아직도 클로비스 저택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 * *

클로비스령 외곽에 위치한 한 숲의 초입.

키이이익!

늑대와 닮은 두 개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지닌 마물이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발을 휘둘렀다. 뒷목의 털이 쭈뼛할 만큼 묵직한 바람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아아악!”

그 앞을 막아서며 창을 휘두르려던 경비병의 몸이 그대로 날아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에 부딪힌 그가 끈 떨어진 인형극의 인형처럼 풀밭 위로 털썩 널브러졌다. 이내 기괴한 자세로 널브러진 경비병의 몸 주위로 붉디붉은 피가 퍼져 나갔다.

키이익! 키익!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숲 안쪽에 갇힌 채 그것을 지켜보던 수십의 마물이 흥분해 날뛰며 방어막을 발로 쾅쾅 내려쳤다. 그러자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숲의 입구를 막고 있던 주홍색의 장벽에 커다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물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비병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주, 주술 방어막이 깨질 것 같습니다!”

“저희로는 역부족입니다! 2급 마물이라면 클로비스 기사단 정도는 되어야 처리할 수 있습니다!”

“주술석! 주술석을 더 가져와!”

“아까 챙겨온 주술석들은 다 소진되었는데......!”

“전부 죽고 싶은 게 아니면 당장 사람 보내서 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던 경비대장이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챙!

온몸에 소름이 돋아남과 동시에 거대한 발톱과 검이 거칠게 맞부딪쳤다. 가가각, 발톱과 검이 긁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마물의 힘에 밀린 검이 점차 경비대장 쪽으로 움직였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낀 그가 작게 신음했다.

“윽......!”

크르르.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닥친 마물의 두 머리에 달린 붉은 눈들이 번들거렸다. 살기로 번뜩이는 두 눈과 그르렁대는 소리가 합쳐지자 그만큼 기괴하고 오싹한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경비대원들은 마물의 크기와 섬뜩한 살기에 압도된 듯, 창을 휘두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 경비대장 또한 자꾸만 굳어지려는 팔에 이를 악물며 힘을 주었다.

쩌적.

검이 불길한 비명을 토했다. 마물의 발톱이 닿아 있는 부분에 금이 가고 있었다. 경비대장이 경악해 눈을 부릅떴다.

직후 퍽, 소리와 함께 거대한 화살이 마물의 눈에 적중했다.

키이이이이익!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마물이 발을 구르는 동시에, 경비대장의 몸이 뒤로 휙 끌어당겨지며 은빛 검이 허공을 갈랐다.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달려들던 마물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자 피가 솟구쳤다. 거센 힘에 뒤로 나자빠진 경비대장은 제 앞을 가로막고 선 이의 등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흑발의 청년은 피를 뒤집어쓴 채로 나머지 머리 하나를 순식간에 베어냈다. 이어 마물의 몸이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한숨을 내쉰 에드윈이 눈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등 뒤의 경비대장을 흘깃, 일별했다.

“대원들을 챙겨 물러나십시오.”

“......아, 예! 예!”

영주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던 경비대장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뒤쪽, 말 위에 앉아 있던 패트릭이 활을 내려놓으며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를 뒤따라 땅을 디딘 기사들이 멍한 얼굴의 경비대원들을 지나쳐 에드윈의 뒤로 다가갔다.

키이이익!

그 순간, 마물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지며 일어난 흔들림으로 인해 주홍빛 방어막이 산산이 조각났다. 동시에 숲 안쪽에서 날뛰던 수십의 마물이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왔다.

에드윈은 동요 없이 검을 한 번 휘둘러 마물의 피를 털어 냈다. 새파란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냈다.

“남김없이 사살해라.”

“예, 주군!”

언뜻 절망스러워 보이는 상황에 맞지 않게 대답은 경쾌했다.

기사들은 여유로운 얼굴로 검을 뽑아 들었다. 곧 쇳소리와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두서없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본디 이 정도 수의 2급 마물은 정식 기사단 하나가 달려들어도 모두 처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클로비스 기사단은 세기의 천재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에드윈을 주인으로 삼고 있는 집단이다. 그들 개개인은 에드윈이라는 벽을 만나기 전까지 한 지역의 천재 혹은 미치광이라 불리던 이들이었기에, 어지간한 기사들과는 격이 달랐다.

키익!

키익, 키이익!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마물의 비명이 쇳소리를 대신했다. 어느덧 남은 마물은 기사들의 숫자와 비슷해졌다.

조나단은 반대편에서 검을 휘둘러 마물의 발을 단번에 잘라 내는 에드윈을 보고 감탄을 흘렸다.

“캬, 내 주군이지만 정말 대단하시군. 어떻게 스무 살밖에 안 되셨는데 저 정도 수준의 성취가 가능하지?”

“그러니까 영주님 아니시겠냐.”

엘빈이 마물의 턱을 발로 차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제게 이를 까득대는 마물을 향해 재차 검을 휘두르며 에드윈을 힐긋 곁눈질했다.

피를 뒤집어쓴 청년의 주위로 눈에 보일 리가 없는 살기가 넘실거리는 듯했다. 마물에 버금가는 위압감을 등에 두른 에드윈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물이 공포에 찬 비명을 질렀다. 가히 괴물을 뛰어넘는 괴물의 모습이었다.

엘빈이 무자비하게 마물을 도륙하는 에드윈을 보며 픽 웃음을 흘릴 때였다. 조나단이 에드윈에게로 시선을 준 그 찰나, 그와 맞서던 마물이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검을 쥔 팔을 노리고 입을 쩍 벌린 채 달려드는 마물의 모습을 한발 늦게 발견한 조나단이 탄식했다.

“이런......!”

마물의 ‘타액’이 사람의 체내에 침투하게 되면 그 사람은 서서히 이지를 잃으며 짐승처럼 변해 간다. ‘마수화’라 불리는 그 현상은 오직 왕족의 신성력으로만 치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바쳐야 하는 것들이 어마어마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마물의 공격보다는 마물에게 물리는 것을 피하는 데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조나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젠장. 허벅지 정도는 내어 줘야 하려나.’

조나단은 속으로 한탄하며 계획한 대로 몸을 틀었다. 그가 마물의 사정거리에서 팔을 빼내려는 찰나, 고개를 뒤로 꺾은 마물의 이빨이 그의 옷소매 끝을 아슬아슬하게 잡아챘다. 그 반동으로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그의 복부를 노리고 달려드는 거대한 발톱.

“안 돼!”

엘빈이 경악 어린 고함을 내지름과 동시에 조나단은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허리에 누군가의 팔이 감겼다.

콰앙!

조나단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간 마물의 발톱이 굉음과 함께 바닥을 찍었다.

얼굴의 절반을 검은 복면으로 가린 여인이 조나단을 끌어안은 채 바닥을 엉망으로 굴렀다. 그들의 몸이 구르기를 멈추자마자 여인이 그를 놓고 빠르게 물러났다.

예상했던 고통 대신, 옆구리에서 미미한 통증만이 느껴졌다. 조나단이 놀라 눈을 번쩍 뜨며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꿇어앉은 채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대던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뭐.......”

한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조나단을 습격하려던 마물을 처리하던 엘빈의 시선도, 말들이 매여 있는 곳 근처에서 마물의 목을 날리던 에드윈의 시선도.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했다.

피비린내 짙은 미풍이 살랑 불어온다. 여인의 온몸을 휘감고 있는 검은 옷과 복면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그녀의 손은 마물의 발톱에 찢겨 피가 나는 허벅지를 세게 짓누르고 있었다. 손 틈새로 피가 뚝뚝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찬란한 황금빛.

조나단은 누구냐고 추궁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충격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으로 숨이 턱 막혀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긴 머리칼이 마치 황금으로 이루어진 폭포인 양 찬연했다. 빛을 등지고 있음에도 황금색의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나며 그를 꿰뚫듯 응시했다.

찰나 조나단을 마주 응시하던 여인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녀가 허벅지에서 흐르는 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숲으로 뛰어들자 뒤늦게 이성을 찾은 이들이 그녀를 쫓으려 했다.

“저, 저......!”

“잡아!”

퍼뜩 정신을 차린 조나단이 넋을 놓았던 스스로를 질책하며 땅을 박차려는 순간.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마물 하나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키이익!

소스라치게 놀란 조나단이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 마물을 막자, 챙! 소리를 내며 발톱이 튕겨 나갔다. 옆구리의 상처가 제 존재를 알리듯 크게 욱신거렸다. 그 통증에, 한발 늦게 의문이 떠올랐다.

‘저게 왜 갑자기......?’

쐐액!

그때,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화살이 살벌하게 허공을 가르며 여인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한순간 확장되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퍼억!

하지만 화살은 목표물을 맞히지 못하고 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나무 뒤로 숨듯이 사라진 여인의 모습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기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 고정되어 있던 활이 그것을 쥔 손과 함께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린 듯한 자세로 화살을 날린 에드윈의 새파란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키이이익!

돌연 마물들이 기이하게 울부짖으며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조나단과 엘빈을 포함한 기사들이 당황을 표했다.

“이, 이놈들이 갑자기 왜 이래?”

“어어......!”

하지만 그들은 곧 빠르게 당황을 갈무리하고 남은 마물들을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간 영주를 호위하던 패트릭 또한 침착함을 되찾고 절도 있게 검을 휘둘렀다.

에드윈은 아무 말 없이 활을 내던지고 검을 쥐었다. 이내 뒤쪽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들던 마물의 목 하나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황금색이라.’

아르망의 것처럼 연한 갈색을 착각했을 수도 있지 않으냐 말하기엔, 지나치게 선명하고 지독하게 찬란했던 황금빛 머리카락과 눈. 사람에게서 나타날 수 없다 여겨지는 그 색.

어쩐지, 그 빛깔이 시야에서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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