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날.
레이린은 아르망, 에드윈과 함께 비에트론 가문의 장부와 서류를 검토하며 오전을 꼬박 흘려보냈다. 그녀는 제 방에서 발견했던 핏자국 탓에 평소의 몇 배는 더 꼼꼼히 서류를 살폈다. 하지만 의외로 털어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괜한 착각인가?’
레이린은 무언가 미심쩍은 기분을 털어 버리려 애썼다. 그들은 중요한 서류들을 추려서 우선적으로 처리한 뒤, 간단한 점심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다.
비에트론령에서 가장 발달한 상업 거리는 두 군데였다. 에드윈은 리오넬과 함께 제1거리를, 아르망과 레이린은 엘빈과 함께 제4거리를 살펴보기로 한 뒤 흩어졌다. 아르망이 엘빈을 돌아보며 물었다.
“키스티엘 경. 거리를 다 둘러본 후에 시간이 남는다면 다녀올 곳이 좀 있는데, 동행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럼요, 괜찮습니다. 그게 제 일이니까요.”
엘빈이 순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곧 사람들의 목소리로 왁자한 제4거리의 입구에 들어섰다.
“쌉니다, 싸요! 벤투스에서 직접 입수해 온 털 망토! 오늘까지만 세일합니다!”
“한번 둘러보고 가세요! 마티아스산 신상 향수입니다!”
“봄나물이 단돈 30 브론즈!”
상인들이 연신 목소리를 높여 물건을 홍보했다. 레이린은 아르망과 함께 제4거리 전체를 둘러보며 상품의 시세, 품질, 사람들의 모습 등을 확인했다. 또한 간간이 상인들에게 손님인 척 말을 걸기도 하며 바삐 움직였다.
그 덕분인지 그들은 예상했던 시간보다 더 일찍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벌써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르망이 후드를 고쳐 쓰며 레이린에게 물었다.
“난 이제부터 클로이가 부탁했던 일을 알아보러 갈 건데, 피곤하면 먼저 들어갈래?”
“아니요, 괜찮아요. 따라갈게요.”
“네가 괜찮다면야.”
아르망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레이린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는 엘빈을 힐긋 돌아보고는 아르망을 뒤쫓았다.
아르망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클로이가 말했던 친구의 집이었다. 작은 나무집 앞에 다다른 세 사람은 주민 몇이 수상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집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탐색을 끝낸 엘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한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집 같은데요. 문도 잠겨 있고.”
“네. 적어도 3주 이상은 비었던 집 같아요.”
레이린이 동의했다. 아르망이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역시, 경비대로 가 봐야.......”
“저기 혹시, 베티랑 아는 분들이신가?”
그때 불쑥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 한 명이 보였다.
‘베티’는 클로이가 가르쳐 준 친구의 이름이었다. 아르망은 언제 얼굴을 굳혔나는 듯 넉살 좋은 미소를 띠며 화답했다.
“하하, 네. 제 여동생과 절친한 친구 사이예요.”
“어머, 그랬구나. 난 뭔가 이상한 사람들인가 하고 한참 봤네. 그럼 혹시, 베티 양이 어디 있는지도 알아요? 어디 여행이라도 갔나, 안 보인 지 한참이 지나서.......”
여인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레이린은 아르망의 여동생인 척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으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말을 받았다.
“오빠랑 여행을 갔다가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베티가 연락도 남겨 놓지 않고 사라져서요. 혹시 베티를 마지막으로 보신 게 언제였나요?”
“마지막으로? 글쎄...... 아, 한 달 전쯤에 시장에서 만났던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어느 시장이요?”
“제1거리 시장에서 봤어. 짧게 안부 인사만 하고 지나갔는데, 무슨 상단에 간다고 했던가? 어휴, 뭔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어야 할 텐데.......”
여인은 걱정과 한탄이 뒤섞인 말을 몇 번 더 늘어놓더니 베티를 찾게 되면 꼭 제게 연락하라 전해달라며 사라졌다. 세 사람은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무해한 미소를 띠고 있다가, 그녀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 했다.
아르망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어떻게 할까? 경비대에도 가 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상단 쪽은.......”
“제가 찾아보고 있을게요. 선배님께서는 키스티엘 경과 경비대에 다녀오세요. 아무래도 옆에 기사 한 명을 두는 편이 일 처리가 용이하겠죠.”
레이린이 덤덤히 답했다. 엘빈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래도 호위 한 명은 필요하실 텐데요.”
“괜찮아요. 눈에 띄게 행동하지도 않을 거고, 키스티엘 경께서 말씀해 주셨다시피.......”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보란 듯 생긋, 미소를 지었다.
“제 호신술 실력이 꽤 뛰어난지라.”
붉은 눈이 한순간 크게 확장되었다. 레이린은 나긋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호위까지는 몰라도 제 한 몸 지키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이 사람 가득한 제1거리이니, 어지간해서는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을 거예요.”
“......하하.”
어쩐지 멍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던 엘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찰나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인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할 말이 없네요, 알겠습니다.”
그 곁에서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 아르망은 최대한 신속히 돌아올 테니 몸조심하라는 당부를 남긴 채 엘빈과 함께 경비대로 향했다.
레이린은 두 사람과 헤어져 제1거리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레이린은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망토에 달린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 썼다. 어느 순간 발을 틀어 어두운 골목 틈으로 들어온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나와.”
어둑한 골목에 레이린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음에도 차갑게 말을 이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적령의 눈에 띌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머저리는 아니겠지. 기껏 만든 기회 날리지 말고 나와.”
말을 마친 레이린이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녀처럼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가 등 뒤에 서 있었다. 놀람 한 조각 없이 무감한 눈을 한 그녀가 말했다.
“소속, 이름.”
“......간부 안톤 케르티아 님의 휘하에 있는 티르소라고 합니다. 제 주인께서 아가씨의 호위를 명하셨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됐어. 어쩐지 떠나기 직전까지 그렇게 걱정을 하시더니.”
레이린은 미간을 찡그린 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안톤도 라그나르에게 옮은 모양이었다. 고작 그녀의 호위를 위해서 수족과 다름없는 이를 보내다니. 쓸데없는 걱정이 지나치다는 생각에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호위는 필요 없어. 그러니 돌아가.”
“아가씨.”
“네 주인께는 내가 따로 편지 드릴 테니 돌아가. 게다가 네가 내 주위를 얼쩡대는 걸 적령이 알기라도 한다면 골치 아파져.”
“하지만 아가씨께서 감당하실 수 없을 만한 일이 생길 수도 있잖습니까.”
“내가 감당 못 할 만한 일이라면 일반 간부들도 감당 못 해. 너는 더 더욱. 그러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꺼져.”
차가운 목소리에 티르소가 멈칫했다. 그는 잠시 갈등하는 듯하더니 곧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골목 안쪽의 어둠으로 사라졌다. 신속하고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다.
레이린은 잠시 주위를 살핀 후 빠르게 골목을 벗어나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그녀는 골목에 들어선 적도 없었던 다는 듯이 본연의 목적을 상기하며 걸음을 옮겼다.
제1거리에는 총 3개의 상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레이린은 그중 2곳에 방문해 직원들에게 말을 붙이며 분위기를 살폈다. 하지만 베티의 실종에 대한 단서는 영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마지막.’
레이린은 ‘카르키오 상단’이라는 팻말이 달린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흘긋 시선을 돌렸다. 문 옆의 벽에 ‘직원 모집’이라는 색 바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기한은 적혀 있지 않았다.
‘저걸 핑계로 하면 되려나.’
그녀는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중인데 결과가 신통치 않아 심란한’ 사람의 얼굴을 가장하며 문을 열었다.
딸랑, 하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소음이 훅 다가왔다. 넓은 내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매대와 상품들,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레이린은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뒤로 젖힌 뒤, 고개를 살짝 움츠린 채 주변을 티 나게 두리번대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직원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손님, 따로 찾는 상품이 있으신가요?”
“아, 아니요. 다른 게 아니라...... 카리키오 상단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혹시 아직 유효한가요?”
레이린이 걱정스럽다는 듯 묻자 직원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안내문을 보고 오신 분이군요. 저를 따라오세요. 단주님께 안내 해드릴게요.”
직원은 친절한 태도로 그녀를 건물 안쪽으로 안내했다. 레이린은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재빨리 건물의 구조를 파악했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한 습관이었다. 건물 안쪽, 한 방 앞에 다다른 직원이 노크를 했다.
“단주님. 면접을 보고 싶다는 분이 계시는데요.”
“아! 들여보내려무나.”
문 너머에서 불분명한 목소리가 답했다. 직원이 생긋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레이린이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안녕하십니까. 안내문을 보고 오셨다고요?”
책상 너머에 앉아 있던 상단주가 화사한 미소를 띠며 몸을 일으켰다. 은테 안경 너머의 눈이 찰나 레이린을 훑고 지나갔다. 그것을 기민하게 눈치챈 그녀는 더욱 해사한 미소로 답했다.
“네. 요즘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데, 카르키오 상단에서 직원을 모집 한다는 안내문을 봐서요.”
“그러셨군요. 하지만.......”
상단주가 난처하다는 듯 눈꼬리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이걸 어쩌죠. 이곳의 직원은 반나절 전 모집이 끝났습니다. 제가 바빠서 직원에게 안내문을 떼라고 지시하는 것을 깜박했군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어조의 말이었다. 측은한 눈빛으로 레이린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와 주셨으니 적어도 얼굴을 뵙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그런가요.......”
그의 말과, 이곳까지 그녀를 안내한 직원의 태도에서 묘한 모순이 느껴졌지만 레이린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며 속상한 듯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모습에 남몰래 미소를 지은 상단주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런. 일자리가 많이 급하신 것 같군요.”
“......네. 아무래도 곧 월말이니까요.”
레이린이 힘없이 웃었다. 그러자 미간을 찡그리며 무언가를 고심하는 듯하던 상단주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였다.
“그렇다면...... 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베티’라고 해요.”
그 말에 상단주가 찰나 멈칫했다. 레이린은 무구한 눈으로 그를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베티 양까지 면접을 볼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상단주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 말에 레이린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상단주를 바라보았다. 크게 떠진 두 눈에 찰나 서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저, 정말이신가요?”
“예. 다만, 이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불공평하다 생각할 수도 있으니 오늘 밤, 아무도 모르게 이 곳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저야 좋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건지.......”
레이린이 망설이며 말끝을 흐리자 상단주가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
“안내문을 떼어내라고 지시하는 것을 잊어버린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직접 발걸음까지 해 주셨잖습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레이린은 그제야 활짝 웃음 지었다. 밝은 얼굴의 그녀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였다. 상단주는 큰 은혜를 베푼 사람처럼 흐뭇한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강조하듯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제가 퍽 곤란해집니다. 그러니 제 당부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베티 양.”
“그럼요, 당연하죠. 정말 감사합니다.”
레이린이 순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구도 보지 못할 만큼 짤막한 비소가 그녀의 입가를 스쳤다. 그것은 그녀의 본질과 가장 닮아 있는 웃음이었다.
‘찾았다.’
이번 일의 실마리.
레이린은 아르망, 엘빈과 만나 각자 모은 정보를 교환한 뒤 비에트론 저택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이미 한밤에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에드윈이라면 아직까지 서류를 들춰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영주님, 복귀했습니다.”
“들어와.”
낮은 허락이 들려왔다. 아르망과 레이린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서류를 훑던 에드윈이 고개를 돌렸다. 짙푸른 눈동자가 아르망을 직시했다.
“시찰 결과는 내일 서류로 정리해 제출하고. 늦게 복귀한 것에 대한 이유부터.”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에드윈이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깊이 들이쉰 아르망이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카르키오 상단이라는 곳과 비에트론 공의 유착 관계가 의심됩니다.”
“......근거는?”
무감한 얼굴의 에드윈이 물었다. 레이린은 며칠 전 클로이가 찾아왔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그래서 오늘 시찰을 끝마친 후에 선배님과 키스티엘 경께서는 경비대로, 저는 주민의 목격담을 토대로 제1거리 상단을 조사하러 갔습니다.”
나직하게 보고를 이어 가던 레이린이 살짝 눈짓하자 아르망이 말을 받았다.
“경비대의 기록을 살펴보니 이와 비슷한 실종 사건이 이번 달 내에만 벌써 네 건이었습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새싹 같던 연녹색 눈동자에는 가라앉은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와 달리 표정을 지운 아르망이 이어 말했다.
“헌데 경비대는 상부에 제대로 된 보고는커녕 기초적인 수사조차 하지 않았고, 비에트론 공께서는 이를 묵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종자들은 모두 실종 직전, 카르키오 상단에 채용 면접을 목적으로 방문한 적이 있다는 증언들을 확복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레이린은 말끝을 흐리며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꿰뚫듯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찬찬히 말을 이었다.
“제가 구직이 간절한 척 말을 붙였더니,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서 오늘 밤에 상단을 찾아와달라군요. 특별히 면접을 볼 기회를 주겠다면서요.”
“......가려는 겁니까?”
“네.”
레이린은 담담히 대꾸했다. 알 수 없는 눈을 한 에드윈이 물끄러미 시선을 맞춰왔다. 그녀 또한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시선이 조용히, 허나 진득하게 얽힌다.
오싹할 만큼 선명한 색채를 띠는 새파란 눈동자는 무심했다. 짙은 침묵으로 점철된 심해처럼 깊고 깊다. 보는 것만으로도 잠겨 죽을 것 같은 저 푸른 눈.
문득, 저 고요한 수면에 파란을 일으키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머리를 쳐들었다.
‘.......’
찰나 동요했던 레이린은 이내 이유 모를 충동을 차분히 갈무리하며 머리를 굴렸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됐나.’
유스티아에 자리 잡은 것도 어언 한 달. 해가 갈수록 추락의 계절이 닥치는 시기가 빨라지고 있었으니, 아마 올해의 첫눈이 내리기까지 남은 기간은 약 6개월
‘조시와 란테를 이용해서 저택 내부의 분위기를 뒤집었으니.......’
레이린은 생각과 함께 눈을 사르르 접어 웃었다. 새파란 시선이 그 미소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는 잔잔한 수면 위로 조약돌을 던지듯 말했다.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이제는 당신을 흔들 차례다. 나를 던져서.
* * *
그날 밤.
카르키오 상단의 상단주는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책상 위, 반짝이는 자그마한 주술석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슬슬 옮기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까 말씀하신 그 여자는 그냥 버리죠.]
“안 돼. 그만한 상등품을 또 찾기가 쉬운 줄 알아? 에르멧이 하도 감시를 엄격하게 해서 자주 거래할 수도 없는데 한 번에 확실히 벌어놔야 할 거 아니야.”
미간을 한껏 구긴 그가 신경질적으로 뇌까렸다.
“어차피 윗분들께 바쳐야 할 걸 생각하면 얼마 남지도 않는다고.”
상단주가 짜증스레 제 머리칼을 헝클었다. 그는 초조함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아까 찾아왔던, ‘베티’라는 이름의 상등품.
눈에 확 띄는 느낌은 아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만한 물건이 또 없었다. 희미하게 붉은 기가 도는 눈가. 어쩐지 등줄기가 저릿해지는, 묘한 느낌을 주는 눈동자. 결 좋게 찰랑거리는 머리칼. 선이 고운 이목구비까지.
‘그거라면 20골드도 받을 수 있어.’
저번에 잡아놓았던 것과 이름이 같아 순간 흠칫했지만, 어차피 세상에 동명이인은 널렸다.
‘우연이겠지.’
게다가, 어차피 그녀는 곧 이름이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상품’의 이름은 주인이 정하는 것이니까.
그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괜히 허튼짓하지 말고, 내가 움직이라고 할 때까지 대기하고 있.......”
“상단주님, 안에 계시나요? 아까 찾아왔던 베티입니다.”
상단주가 다급함과 짜증이 담긴 눈으로 시계를 흘깃하는 순간, 작지만 선명한 노크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단주는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가 급박하게 속삭였다.
“지금! 30분 안으로 갈 테니까 지금부터 옮겨.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상단주는 그 말을 마치자마자 주술석을 내던지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자연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 그가 걸음을 옮겨 문을 활짝 열었다.
“오셨군요! 기다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람들 눈을 피하느라.......”
‘베티’가 깊숙이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히며 민망한 듯 웃었다. 상단주는 자애롭기 그지없는 미소를 흘리며 그녀를 사무실 안으로 들였다. 이후 은근슬쩍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그가 몸을 돌리며 물었다.
“바깥이 꽤 쌀쌀했을 텐데,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누시죠.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에르치니아에서 들여온 귀한 찻잎이 있으니, 그것으로 드리겠습니다.”
상단주는 익숙한 듯 빠른 손길로 차를 우려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연녹색의 찻물이 담긴 찻잔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가 선량한 웃음과 함께 찻잔을 그녀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드세요. 약재로도 쓰이는 찻잎인지라 조금 씁쓸하지만, 몸에는 굉장히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싱긋 웃어 보인 ‘베티’가 찻잔을 들어 차를 들이켰다. 그녀가 확실하게 차를 삼키는 것을 확인한 상단주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약효가 돌 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해 아무렇게나 말을 늘어놓았다.
“우선 서류부터 확인할까요? 제가 말씀드렸던 것들은 챙겨오셨습니까?”
“아, 네. 여기 있습니다.”
베티가 품 안에서 갈색 봉투를 꺼내 건넸다. 상단주는 또다시 찻잔을 기울이는 그녀를 흘긋흘긋 곁눈질하며 성의 없는 손길로 종이를 꺼냈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나이가......”
하지만 글자를 읽기 위해 시선을 내리는 순간. 상단주는 웃는 얼굴 그대로 경직 되었다.
“......백지?”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 건너편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넘긴 베티는 눈을 비스듬히 내리깐 채 연녹색 찻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몽한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눈.
“무슨......!”
상단주가 한 박자 늦게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잿빛이 감도는 갈색의 눈동자가 그를 따라 느릿하게 올라왔다. 그것이 어쩐지 숨을 죽이고 먹잇감을 응시하는 맹수의 것과도 같이 느껴졌다면 터무니없는 과장일까.
베티 행세를 집어치운 레이린의 기세가 돌변했다.
“꽤 저급한 독을 썼네, 당신.”
적나라한 비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자리 잡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악문 상단주가 품에서 잘 벼려진 단검을 꺼내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 너 뭐야!”
“하지만 안됐군. ‘타나토스’ 정도의 독이 아니면 나한테는 안 통해.”
그러거나 말거나, 여유롭게 찻잔을 내려놓은 레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사무실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순간 황당해진 그가 단검을 고쳐쥐며 재차 소리쳤다.
“너 이 새끼, 대체 정체가 뭐......!”
“책상에는 없고. 책상이 아니면 여긴 달리 숨길 만한 곳이 없는...... 아, 책장이 있었네.”
레이린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책장을 더듬었다.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상단주가 악을 쓰며 달려가 그녀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지금 뭐하는 거야! 멈춰!”
칼날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달칵.
“......찾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레이린이 책 한 권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볼을 스쳐 지나가며 붉은 선을 새겼다. 직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몸을 돌린 레이린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아악!”
한순간 머리를 새하얗게 물들일 만큼 강한 악력에 상단주가 비명을 질렀다. 반사적으로 힘이 풀린 손에서 떨어져 내린 단검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레이린이 그대로 복부를 퍽, 소리 나게 걷어찼다.
“커헉!”
상단주의 몸이 굉음과 함께 테이블에 부딪혔다. 그 반동으로 테이블이 뒤집히며 찻잔이 바닥을 굴렀다. 마비 독 ‘파르아이시’가 들어 있는 연녹색 찻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드르륵.
레이린의 등 뒤에서 책장이 벌어지며 그 너머에 있던 계단이 드러났다. 계단을 힐긋 일별한 그녀는 바닥에 웅크려 숨을 쉬기 위해 애쓰는 상단주에게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흰 볼에 난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희고 여린 손이 그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휙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녀가 반대쪽 손으로 무언가를 그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컥...... 커흡! 으읍!”
상단주는 제 입 안으로 들어온 것을 반사적으로 토해내려 했다. 하지만 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은 채 움직이지 않은 레이린 탓에, 그는 결국 분노로 눈이 뒤집히는 심정으로 제 입 안으로 들어온 것을 삼켰다.
“대체 이게, 쿨럭, 뭐야! 대체 뭐냔 말이야!”
입을 막고 있던 레이린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그가 발악했다. 그녀는 엷은 비소와 함꼐 그의 머리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내 몸을 숙여 상단주와 시선을 맞춘 레이린이 은근한 어조로 속살거렸다.
“잘 들어. 당신은 차를 마시고 정신을 잃은 나를 다른 이들과 함께 팔아넘기기 위해 비밀 통로의 문을 연 거야.”
마치 뱀 같은 목소리에 상단주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연히’ 깨어난 내가 반항했고, 볼에 상처를 얻은 대가로 ‘운 좋게’ 당신을 제압하는데 성공한 거지.”
“그게 무슨 개소.......”
자연스럽게 욕지거리를 내뱉던 상단주의 목소리가 돌연 뚝 멎었다. 사무실 문 너머로부터 들려온 소란이 뒤늦게 귓가를 파고든 것이다. 레이린은 그의 눈이 순식간에 흐릿해지는 것을 들여다보며 재차 물었다.
“내가 뭐라고 했지?”
“내가, 책장을 열고, 당신이 우연히.......”
“맞아, 그런 거야. 잘 기억해 뒀다가 증언해.”
레이린은 프랭크에게서 받아온 약의 효과를 확인하고는 재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뒷목을 가격당한 상단주가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풀썩 엎어졌다.
곧장 상단주를 내팽개친 레이린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제 매무새를 적당히 흐트러트린 뒤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사무실의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