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노을이 뉘엿뉘엿 내려앉은 저녁. 레이린은 가벼운 저녁 식사 후 여유롭게 정원을 돌았다. 그녀는 이곳에 도착한 날부터 꾸준히 클로비스 저택을 돌아다니곤 했다. 물론 목적이 단순한 산책만은 아니었다. 건물의 전체적인 구조 파악은 필수고, 그걸 하기 위해 산책만큼 좋은 핑계는 없으니까.
‘오늘은 저쪽으로 가 볼까.’
지금까지는 저택의 동쪽을 위주로 탐색했으니 오늘은 서쪽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레이린은 잘 가꿔진 길을 따라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막 울창한 수풀을 돌아 발을 떼는 찰나.
빠각!
둔탁한 소음과 더불어 쐐액, 하고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다.
“위험......!”
경악 어린 외침을 미처 끝맺기도 전,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미처 자각하지 못했을 만큼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엄지손톱만 한, 뾰족한 나무 조각이 간발의 차로 그녀의 얼굴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겁하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야 이 미친놈아! 다치기라도 하셨으면 어떡할 거야!”
“죄, 죄, 죄송합니다!”
“세상에, 괜찮으십니까? 다치...... 수행 비서님?”
누군가 헐레벌떡 그녀의 곁으로 뛰어오다가 멈칫했다. 레이린은 눈을 한 번 깜박이고 제 앞에 멈춰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흰빛을 띠는 곱슬곱슬한 은발에, 순한 눈매. 루비색의 눈동자. 어쩐지.......
‘강아지 같네.’
강아지상의 기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마도 최근 클로비스 저택 내에서 화제의 인물이나 다름없는 레이린을 알아보고는 놀란 모양이었다. 그가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리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죄송합니다. 훈련을 하던 중이었는데, 하필 목검이 부러지는 바람에.......”
“전 괜찮아요. 어릴 적에 호신술을 조금 배워 둔 게 도움이 됐네요.”
“......호신술이요?”
“네.”
레이린은 태연히 답했다. 당황이 가시고 난 뒤 생각해 보니 조금 전 제 반응 속도는 아무래도 일반인의 것이라 보긴 힘들었다. 그녀는 전에 계획했던 ‘신체 능력이 조금 뛰어난 일반인’이라는 이미지에 ‘호신술’을 추가했다.
“.......”
기사가 묘한 기색으로 그녀를 관찰하더니 이내 웃었다. 붉은 눈이 사르르 접히며 순한 미소를 만들어 낸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클로비스 기사단 소속 엘빈 키스티엘입니다.”
엘빈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린은 손등에 입을 맞추려는 듯 손바닥이 위로 향해 있는 그의 손을 고쳐 잡으며 가볍게 흔들고 놓았다.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붉은 눈에 한순간 이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표정을 갈무리하며 웃은 엘빈의 뒤로 두 사람이 더 다가왔다. 둘 중 덩치가 더 작은 쪽이 몸을 반으로 접다시피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제가 힘 조절을 잘 못해서....... 다치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가 울상을 지으며 몸을 폈다. 그 곁에 서 있던 덩치 큰 기사가 그의 등을 짝, 소리나게 때렸다.
“하여튼 부단장씩이나 되어 놓고 힘 조절 하나 못해서야 되겠나! 당분간 야간 순찰 당번은 리오넬, 네가 해라.”
“옙.......”
작게 흐느낌을 삼키는 기사에게서 레이린에게로 시선을 옮긴 남자가 방긋 웃으며 정중히 목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린 님. 저는 클로비스 기사단의 단장인 페트릭 웬델이라고 합니다. 이 못난 놈은.......”
“리오넬 제스리입니다. 방금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리오넬이 풀이 죽은 얼굴로 다시금 꾸벅 고개를 숙였다. 레이린은 형식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괜찮습니다. 다친 곳도 없는걸요.”
“맞아요. 호신술 솜씨가 아주 수준급이시던데요.”
그때 엘빈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엿다. 리오넬과 패트릭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두 사람이 레이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호신술이요?”
“무슨......?”
그에 레이린은 은글슬쩍 눈을 접어 웃으며 엘빈을 응시했다.
“말 그대로 간단한 호신용이라,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에요. 그저 반사신경이 조금 좋을 뿐인데...... 키스티엘 경께서 너무 추켜세워 주시네요.”
“겸손하시군요. 하지만 전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정말이신가요?”
“그럼요.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한지라.”
엘빈이 순한 미소를 지었다. 곁에서 어느새 활기를 되찾은 리오넬과 페트릭이 ‘쟤가 칭찬할 정도면 꽤 뛰어난 것 아니냐’며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레이린은 여상한 웃음을 띤 채 그들과 대화하며 간간이 엘빈과 시선을 마주했다. 벌레 하나 쉽사리 죽이지 못할 것처럼 선한 외양. 하지만.
‘뭔가 있어.’
그리고, 저쪽에서도 그녀를 눈치챘다.
* * *
물밑에서 서로의 생각이 어떠하든, 시간은 끊임없이 흘렀다. 어느덧 추위가 완전히 가셨을 때. 클로비스 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이네, 아르망.”
희끗희끗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남자가 마차에서 내려 성큼 다가왔다. 주름이 자리 잡기 시작한 딱딱한 얼굴에서는 사람을 절로 주눅 들게 하는 완고함과 위압감이 느껴졌다. 물론, 본채의 입구에 서 있던 아르망은 전혀 위축되지 않은 얼굴로 서글서굴하게 미소 지었다.
“오셨습니까, 안토니아 공.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르망이 클로비스 가신 가문 중 하나인 안토니아의 가주, 게오르크 안토니아를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게오르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 그간 잘 지냈는가. 이번 추락의 계절은 유난히 추웠는데.”
“저야 늘 생기 넘치는 게 장점 아니겠습니까.”
“그 넉살은 여전하군. 그리고 이쪽이.......”
그의 시선이 아르망의 곁에 나란히 서 있던 레이린에게로 돌아갔다. 사람을 꿰뚫듯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레이린은 설핏 웃으며 가볍게 예를 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토니아 공.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게오르크 안토니아일세. 이번 일에 대한 얘기는 들었네. 클로비스를 섬기는 자로서 나 또한 그대의 용기에 감사를 표하네.”
게오르크는 완고해 보이는 첫인상과 다르게 레이린을 향해 정중히 목례했다. 그녀는 의외다 싶어 눈을 한 번 깜박이고는 습관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말씀을. 당연한 일인 것을요.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만 들어가시죠.”
게오르크는 아르망과 레이린의 안내를 받아 1층 안쪽의 응접실로 사라졌다. 아르망은 문이 닫히자 쭈욱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으아, 날이 따뜻해져서 그런가? 괜히 졸리네. 두 분이 눈싸움하실 동안 우리는 올라가서 일이나 하자.”
그 말에 레이린이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
“두 분 사이가 안 좋으신가요?”
“뭐...... 이제는 없어진 거나 다름없는, 추락의 계절 후 영주님께 안부를 물으러 방문하는 허례허식까지 꼬박꼬박 챙기시기는 하지만.......”
아르망이 묘하게 말끝을 흐렸다. 레이린을 흘긋 쳐다본 그가 개구지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는 영주님 같은 천재가 아니라서 잠깐 땡땡이치는 것도 버겁잖아? 일이나 하러 가자!”
아르망이 잔뜩 수선을 피우며 레이린을 위층으로 떠밀었다. 그녀는 순순히 계단을 밟으며 응접실의 문을 힐긋 돌아보았다.
‘......틈을 찾을 수 있을지도.’
묘한 직감이 들었다. 레이린은 또다시 저를 부르는 아르망을 따라 위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 조금 느릿한 걸음이었다.
* * *
달그락.
찻잔이 달각거리며 자그마한 소음이 일었다. 응접실에 들어와 앉은 뒤로 한참이나 말없이 차를 음미하던 게오로크는 찻잔을 내려놓고 시선을 들었다. 그가 제 맞은편에 고요히 앉아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짙은 흑색의 머리카락이 그림처럼 반듯한 이마 위로 적절히 내려앉아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는 반쯤 내리깔려 찻잔을 향한 채였다. 맹수가 먹잇감을 탐색하는 듯, 느른하지만 위협적인 눈. 그 ‘완벽한’ 모습을 응시하던 게오르크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효시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과하셨습니다.”
그 말에, 반쯤 아래를 향하고 있던 새파란 눈동자가 게오르크를 향해 움직였다.
“......주인에게 훈계하는 가신이라.”
에드윈이 의자에 팔을 괴며 무심히 말을 이었다. 고요한 시선이 게오르크를 응시했다.
“자꾸만 망각하는 것 같은데. 그대가 마주하고 있는 건 돌봐야 할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안토니아 공.”
“아니요. 영주님께서는 5년 전부터 지금까지 전혀 발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영주님께서 변하지 않으신다면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영주님께서는 ‘동업자’가 아닌, 이 땅의 ‘군주’이십니다.”
게오르크는 에드윈의 살벌한 경고에도 굴하지 않고 딱딱하게 말을 맺었다. 뭇 사람이라면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대에게 이미 수차례 이야기했지만.......”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에드윈이 한쪽 입꼬리를 미미하게 끌어당겼다.
“난 당신들이 말하는 충성과 존경을 믿지 않습니다.”
“.......”
“그러니 주제 넘게 굴지 말고 본분에 충실하십시오. 서로 본분에만 충실해 준다면 목이 떨어질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에드윈은 게오르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일으키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곧 각 가문의 순회 시찰이 시작되어 일이 많습니다. 최소한의 목적은 충족한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지요. 살펴 가십시오.”
가볍게 고개를 까딱한 에드윈이 등을 돌려 응접실을 나섰다. 게오르크는 그 뒷모습을 날카롭게 응시하다가 문이 닫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서 힘이 빠지며 가면이 허물어졌다. 순식간에 지친 얼굴을 한 게오르크의 잇새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언제까지 그때의 일에 매어 계실는지.”
홀로 남은 그는 테이블 위에 내려 놓은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들이켰다. 혀 끝이 씁쓸했다.
* * *
유스티아는 현재 영주 가문인 클로비스 가와 13개의 가신 가문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추락의 계절이 지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각 가문의 순회 시찰이 이루어진다. 덕분에 레이린은 아르망, 에드윈과 더불에 며칠 내내 서류에 파묻혀 지내고 있었다.
“......누가 왔다고?”
“클로이 드류 양이 아드님과 함께 방문하셨습니다.”
업무 후 녹초가 되어 저녁 식사를 하던 아르망이 해괴한 얼굴을 했다. 그 곁에서 일찍이 식사를 마치고 물로 입을 헹구던 레이린이 무언가를 가늠해 보더니 넌지시 물었다.
“동생분이에요?”
“어? 어, 응. 여동생이야. 그런데 얘가 나를 먼저 찾는다고? 무슨 일이지?”
아르망이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문득 레이린을 돌아보았다.
“식사 다했으면 같이 내려갈래? 이 김에 소개해 줄게.”
“드류 양께서 당황하지는 않으실까요?”
“괜찮아. 걔가 나만큼 친화력이 좋거든. 사람도 좋아하고. 아마 너 만나면 내 욕부터 할 거다.”
레이린은 잠시 머뭇대다가 아르망의 재촉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설이는 척했지만 속내는 반대였다. 얼핏 가벼운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태도로 상대의 경계를 낮추어 속을 살살 캐내곤 하는 아르망에 대해 더 알아볼 기회가 아닌가.
‘이 인간 앞에서는 은근히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레이린은 앞서 계단을 내려가는 아르망의 뒤통수를 짐짓 흘겨보았다. 그들은 곧 동쪽 별채의 응접실에 다다랐다. 아르망이 노크를 하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자그마한 무언가가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외삼촌! 나 왔어요!”
자그마한 소년 하나가 아르망의 품에 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아르망이 키득대며 소년의 머리를 장난스레 헝클었다.
“제리, 이 녀석. 너희 집처럼 문이 바깥으로 열렸으면 삼촌 또 쌍코피 났을 텐데, 이번엔 안으로 열렸으니 봐준다.”
그때 응접실 안쪽 소파에 앉아 있던 여인이 몸을 일으키며 밝게 웃었다. 연갈색의 머리칼과 맑은 연녹색 눈동자가 아르망과 똑 닮아 있었다.
“아쉽네 여기가 우리 집이 아니어서.”
“뭐? 너 그게 오빠한테 할 소리야, 클로이?”
“오빠는 무슨...... 어머.”
아르망의 투덜거림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치던 여인이 레이린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년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던 아르망이 아, 하며 둘을 돌아보았다.
“레이린, 이쪽은 내 동생인 클로이 드류. 클로이, 이쪽은 나랑 같이 일하는 레이린 아제트리아 양.”
“반갑습니다, 아제트리아 양. 소문은 들었어요. 아주 멋진 분이시던데요? 저희 오라버니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클로이가 나긋하게 인사하며 웃었다. 그에 아르망이 레이린을 힐긋 돌아보며 ‘거 봐, 내가 말했지?’하는 눈빛을 보냈다. 레이린은 아르망의 억울해하는 눈빛을 무시하고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드류 양.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반가워요.”
“그리고 얘는 제리.”
아르망이 어느새 그의 뒤에 반쯤 몸을 숨긴 소년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레이린은 절반만 드러난 얼굴에 호기심을 가득 드러내는 소년을 향해 조그맣게 웃어 주었다. 그에 눈을 몇 번 깜박이던 소년이 얼굴을 숨겼다.
“어머. 제리가 웬일로 부끄러움을 다 타네. 누나가 그렇게 예뻐?”
놀란 듯 미소 짓던 클로이가 이내 아, 하며 말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그래, 나도 네가 한가하게 놀자고 찾아올 리가 없다는 건 알아.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무슨 일이야?”
아르망이 제리를 무릎에 앉히고, 레이린과 클로이 또한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전과 달리 묘하게 침잠한 낯을 한 클로이가 입을 열었다.
“별다른 건 아닌데...... 비에트론령에 사는 친구가 연락이 되질 않아서.”
아르망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잠시 연락을 못 받는 건 아니야?”
“아니야. 이미 연락이 끊어진 지 한 달은 됐다고.”
클로이가 단호히 반박했다. 그녀는 제 손끝을 연신 만지작대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남편에게 이번에 일을 다녀오는 길에 친구를 찾아가 봐달라고 부탁했는데, 집도 오래 비어 있었던 것 같대. 세간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말이야.”
말이 이어질수록 클로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긴 아르망의 옆쪽에 앉아 있던 레이린이 물었다.
“비에트론령의 경비대에는 신고하셨나요?”
“네. 그런데 말만 알았다고 하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2주가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별다른 조사조차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정말.......”
클로이가 갑갑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손안에서 옷자락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친우에 대한 걱정으로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레이린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내쉬는 클로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사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르망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알겠어. 마침 올해 첫 번째 시찰지가 비에트론령이니까, 이번에 가서 시간 나는 대로 한번 확인해 볼게.”
“......응. 정말 고마워, 오빠.”
클로이가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곧이어 아르망은 분위기를 쇄신시키기 위해 평소처럼 장난을 쳐댔고, 클로이는 익숙하게 그의 말을 받아 치며 웃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레이린은 문득 라그나르와 키안의 얼굴이 떠올라 설핏 미소 지었다. 낯설기 그지없는 이곳에 홀로 머물게 된 지도 벌써 2주가 훌쩍 넘어가고 있는 지금.
어쩐지, 그들이 조금 그리웠다.
* *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윈과 두 수행 비서를 비롯한 클로비스 일행은 비에트론령으로 출발했다. 클로비스 기사단의 단장인 페트릭은 저택에 남고, 부단장인 리오넬과 기사 엘빈이 각각 영주와 수행 비서들의 호위로 따라붙었다.
하루간의 이동 끝에, 일행은 비에트론 저택의 정문에 다다랐다. 소식을 듣고 미리 정문 앞에 나와 있던 비에트론 가의 가주와 그 부인이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냈습니까. 건강해 보여 다행입니다.”
에드윈이 진심이라곤 한 점 없는 어조로 무심히 대꾸했다. 그에 가주, 레녹스는 익숙한 듯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며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본격적인 업무는 내일부터였기에 그들은 각자에게 배정된 방으로 흩어졌다.
레이린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방을 배정받고는 간단히 짐을 푼 뒤 몸을 씻었다. 물기를 닦아낸 그녀는 습관적으로 방 안을 샅샅이 살폈다.
이는 녹스에 머무를 때부터 뿌리 깊게 박힌 본능이었다. 낯선 장소에 도착하게 되면 무조건 주위에 해가 될 만한 것이 없는지부터 살피는 것.
온 방을 훑어본 뒤 마지막으로 침대 옆 협탁을 살필 때였다. 협탁을 들어 올려 아래를 살피던 중, 무심코 협탁의 발 부분에 시선이 닿았다. 직후 그녀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커졌다.
‘......핏자국?’
협탁의 발이 바닥과 맞닿는 곳에서 조금 벗어난 곳. 교묘하게 시선이 닿지 않을 만한 곳에 어둑한 얼룩이 자리하고 있었다. 분명 핏자국이었다.
‘왜 이런 곳에.......’
레이린이 의아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손가락으로 자국을 문지르자 이미 말라 버렸는지 묻어나오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갈수록 의문이 깊어졌다.
‘......범상치는 않네, 여기.’
잿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어쩐지 스산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