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본채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끝마친 후. 레이린은 다른 이들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식사 내내 그녀의 곁에서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던 아르망이 손을 흔들며 영주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영주의 업무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수행 비서들은 대개 영주의 집무실에서 함께 일했다. 저택의 물품을 관리하는 비서장들은 집무실이 따로 있었다. 비서장 조시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레이린을 이끌었다.
“조금 정신없으셨죠? 아르망 선배님이 원래 워낙 시끄, 아니, 밝은 분이셔서. 하하.”
그는 재빨리 말을 바꾸며 웃었다. 그 웃음 아래에는 민망함과 체념이 깔려 있었다.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아르망의 모습을 떠올린 레이린은 어쩐지 그를 이해할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따라 걸었다.
곧 그들은 비서장들의 집무실에 다다라 안으로 들어갔다. 어지간한 마물을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평정심의 소유자인 레이린은, 문이 열리는 순간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이게 무슨.......’
이곳도 어제 언뜻 훑어본 영주의 집무실과 마찬가지로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감정 표현이 그다지 큰 편이 아닌 그녀가 질겁할 정도로 종이, 종이, 종이뿐이었다. 조시는 레이린의 얼굴이 한순간 미미하게 질리는 것을 보았는지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조금 많죠? 요즘에는 저 혼자 하고 있어서 정신이 영 없어요.”
“그럴 만한 양이네요. 아직 미흡하긴 하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도와드릴 테니까 마음 놓으세요.”
틀에 박힌 듯한 대답에, 조시의 안색이 찰나 어두워졌다. 레이린의 눈이 기민하게 그것을 담아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조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표정을 지웠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첫 날이니까, 창고에 내려가서 서류와 물품을 대조하는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레이린 님께서는 확인 후 넘겨드려야 하는 서류를 검토해 주시겠어요?”
“......네. 그러죠. 배려 감사드립니다.”
“배려라니, 당연한 일인걸요.”
레이린이 의문 한 점 없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조시는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모르고 넘길 만큼 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내 조시는 일을 시작해야겠다며 부산스럽게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레이린의 무감한 시선이 그의 등 뒤에 잠시 머무르다가 떨어졌다.
* * *
그날 밤. 수행 비서인 란테 페렛은 사용인들까지 모두 잠들었을 무렵 몰래 방을 빠져나왔다. 숨까지 죽여 가며 바깥으로 나온 그가 향한 곳은 후원 한구석의 가제보였다. 란테는 가제보에 조심조심 다가가며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조시.”
“.......”
“조시!”
“여깁니다.”
가제보 뒤의 그림자에서 조시가 튀어나왔다. 란테는 그를 성의 없이 끌어당기며 커다란 나무 뒤로 곧장 몸을 숨겼다. 나뭇잎이 가볍게 흔들렸다. 조시가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란테는 불안한 듯 사방을 두리번 거리다가 조급하게 속삭였다.
“들켰나?”
“뭘요.”
“그 여자에게 물품의 수가 맞지 않는 것을 들켰느냔 말이야!”
란테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다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조시는 제 옷깃을 잡고 있는 란테의 손을 뿌리치며 혀를 끌끌 찼다.
“절 뭐로 보시는 겁니까. 제가 오늘 처음으로 업무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그런 걸 들킬 만큼 허술해 보이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걸세.”
“걱정 마십시오. 오히려 배려에 감사드린다고 하더군요. 눈치챈 낌새는 전혀 없습니다.”
조시가 타이르듯 조곤조곤 말했다. 하지만 란테는 여전히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낮 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것이 터진 듯했다. 조시는 이마를 짚었다. 하여튼 쓸데없이 걱정과 욕심만 많아서는. 이 정도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게 있을 줄 알았나?
“그러니까 괜히 불안하다고 허튼짓하지 마시고 평소대로 하세요, 평소대로. 어차피 며칠 안이면 뒤처리도 다 끝나는데. 일 그르치면 그쪽이나 나나 바로 모가지 입니다.”
“......그래. 알았네.”
귀찮다는 듯한 협박에 란테는 멈칫했다. 결국 그는 불안함 마음을 감추며 동쪽 별채로 돌아갔다. 조시는 그와 조금 차이를 두고 다른 길을 통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온전히 사라진 뒤, 적막만이 찾아든 후원. 그들이 몸을 숨겼던 나무 위에 자리 잡고 있던 레이린은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흠.”
무심한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어쩐지 저녁때까지도 계속 불안해 보이는 란테를 관찰하다 보니 의외의 소득을 얻었다. 레이린의 머리가 차분히 굴러갔다. 그녀가 받은 의뢰는 유스티아 영주의 신임을 얻어, 가능한 오랫동안 이 자리에 머무르며 꾸준히 정보를 넘기는 것이다.
레이린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에 꽤나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저 ‘아가씨’ 라는 허울 좋은 지위와 무력에만 기대어 녹스 안에서 간부의 자리를 점하고 있지는 못했으리라. 아무리 약육강식이 미덕인 윈프리드라지만, 결국 그들 또한 사람이었다. 무턱대고 힘으로 찍어 누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레이린은 찍어 누르는 것과 회유하는 것의 적정선을 지키는 능력을 타고났다. 길드 내에서는 나름대로 그녀를 존경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때문에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일 또한 쉽게 여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 생각이었지. 그게 어딜 봐서 쉬워.’
에드윈 클로비스를 처음 마주한 순간 본능처럼 깨달았다. 저 사람은 보통의 범주에 들지 않는 이라고.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 피식자가 아니라 포식자.
그는 척 보아도 최상위층의 맹수였다.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잡아 먹힐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정중한 척하면서도 선이 너무나 명확했다. 반갑다는 말에서 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자신을 바래다주라고 명령한 것은 그저 습관에 기인한 것일 뿐.
그의 눈에는 사람에 대한 흥미나 관심이 없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처음 본 사람에게 곧장 친절하게 구는 것은 축복받은 자들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얄팍한 믿음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길 뻔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나 허락된 것.
그런 면에서는 에드윈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의뢰의 내용을 생각하면 달갑지 않았다. 허술한 구석이 하나라도 있어야 그것을 파고들기가 쉬운데, 틈이라고는 보이질 않았으니. 다시 생각해 보아도 사서 고생한다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는 성격이니 그만둘 생각은 없었지만.
“어떻게 할까.......”
레이린은 잠잠히 에드윈의 믿음을 얻을 방법을 고민했다. 나뭇가지 아래로 늘어진 다리가 가볍게 까딱였다. 조금 낙낙한 바지자락이 흰 종아리를 살살 간질였다. 순간, 바람이 살랑 불어와 그녀의 모습을 가리고 있는 나뭇잎을 흐트려트렸다.
문득, 나뭇잎이 저들끼리 몸을 부딪치는 소리 사이로 이질적인 소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어둠 속에서 심해처럼 짙어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물끄러미 시선을 맞춰왔다. 끝이 조금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린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춤을 추듯 고요한 탐색이 오간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드윈이었다.
“밤 산책치고는 독특하군요.”
레이린은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전 원래 높은 곳을 좋아하거든요. 어렸을 적부터 나무는 곧잘 탔어요. 여기는 바람도 잘 불고, 다른 사람 시선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니까.”
태연한 대답에 에드윈의 눈에 찰나 이채가 스쳐갔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한다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흥미, 또는 이질감이었다. 때문에 그의 속은 여전히 잔잔했다. 레이린은 그 눈을 마주하며 속으로 읊조렸다.
‘거짓과 진실이 섞인 말이 가장 구분하기 어려운 법이다.’
어차피 그녀의 반응 속도, 몸놀림등은 일반적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신체 능력이 뛰어난 일반인인 것처럼 구는 편이 안전했다. 아예 숨겼다가 들켰을 때보다는 의심이 덜할 테니.
‘일이 벌어졌을 때, 순간적인 기지라고 둘러대기도 한결 편하고.’
레이린은 곧 자연스럽게 나뭇가지를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말마따나 능숙한 몸짓에 에드윈은 그녀가 제 앞에 내려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사히 땅으로 내려온 레이린은 툭툭 옷을 털었다. 이내 그녀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쯤은 큰 에드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는 영주님께서는 이 밤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레이린은 무구한 얼굴을 가장하며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부드럽게 휘어진 그녀의 입매 위로 새파란 시선이 찌르듯 내리꽂혔다. 맹수가 먹잇감을 살피는 것처럼 레이린을 응시하던 에드윈이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산책하는 중이었습니다.”
“우연이네요. 도둑고양이가 울기라도 했나.”
뒷말은 혼잣말과도 같이, 언뜻 착각으로 치부할 정도로 작게 흘러나왔다. 레이린은 에드윈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영주님께서도 부디 평안한 밤 되시기를.”
“......주무십시오.”
그는 예의상의 대답을 하며 마주 고개를 까닥였다. 레이린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동쪽 별채로 향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평소보다 반 박자 정도 느릿했다. 등 뒤로 와 닿는 시선에 그녀는 가만히 생각했다.
첩자가 해야 할 일은 의심받지 않으며, 믿을 만한 사람의 모습으로서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 대게 사람들은 제 곁에 오래도록 머문 사람이라면 알게 모르게 경계를 조금씩이나마 풀기 마련이다. 하지만 에드윈처럼 끊임없이 주위를 경계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계기를 만드는 수밖에.
‘원래 자그마한 의심이 뒤집혔을 때가 가장 믿음을 주기 쉽지.’
레이린은 조금 전 일부러 기척을 숨기지 않고 에드윈이 제게 오도록 유도했다. 아무렇지 않게 높다란 나무를 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본능적으로 마음 한구석에 의심의 씨앗을 심도록. 그리고 그것은, 며칠 후에는 그가 그녀를 믿게 되는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자신이 의심했던, 믿지 못했던 사람이 있다.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면. 자신을 위하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냉혈한이라도 무의식중에 부채감 하나 정도는 쌓아 두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일이 반복되다 보면 점차 부채감은 미안함으로 바뀔 것이고, 종내에는 신뢰를 단단하게 굳히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상관없었다. 마음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닐뿐더러, 본디 오랜 기간 동안 조금씩 쌓아 올린 마음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 생각에 잠긴 채 복도를 걷던 레이린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가 창가로 다가섰다. 창문을 짚고 바깥을 내다보았으나, 검은 인영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문득 목덜미로 불안감이 스쳤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 *
며칠 동안 조시는 레이린에게 차근차근 업무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서류의 검토만을 맡겼다. 레이린은 일부러 무해한 웃음을 띠며 그가 바라는 대로 해 주었다. 마치 한가한 업무에 기뻐하는 것처럼.
그러자 조시는 완전히 마음을 놓은 듯 편안한 얼굴로 제 일에 집중했다. 레이린은 그런 그의 모습에 엷은 비소를 짓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면 말갛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밤이었다. 레이린은 업무가 끝나고 방에 돌아와 조용히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달빛마저 제빛을 잃을 만큼 짙은 어둠 속. 다리를 겹친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레이린의 모습은 마치 그림자에 몸을 숨긴 포식자와 같이 보였다. 그녀는 마침내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덮었을 때 몸을 일으켰다.
미리 틈을 만들어 둔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계단에 가까워지자, 아래층 복도에 위치한 방의 문이 살짝 열리는 소음이 예민해진 청각에 잡혔다. 레이린은 검은 그림자를 따라 조심히 계단을 내려갔다. 란테인 듯 보이는 그림자는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움직였다.
그 속도가 워낙 느려 레이린 또한 한 발 한 발 경계하듯 그림자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란테가 본채 1층 구석에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따르던 레이린이 숨소리조차 죽이며 문에 귀를 대었을 때였다.
‘왔다.’
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피어남과 동시에, 커다란 손이 거칠게 레이린의 입을 틀어막았다. 억센 손길이 그녀의 손목을 뒤로 꺾어 붙들며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순식간이었다. 움직임은 모두 창고 안으로 사라지고, 문이 닫히는 작은 소리만이 홀을 공허하게 울렸다. 두꺼운 문은 소음을 제 안으로 탐욕스레 집어삼켰다.
레이린은 몸을 비틀었지만 입을 막고 있는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바람에 흰 볼에 손톱에 쓸린 상처가 엷게 생겼다. 창고 안에서 어둠에 잠겨 있던 란테가 움찔하며 뒤를 돌았다. 그가 주술석으로 만든 전등을 켜자 창고안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놀란 얼굴을 한 그가 레이린과,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조시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제가 꼬리를 밟히지 않게 조심하라고 그토록 말씀드렸는데. 조심성이 참 없으시군요.”
조시가 이를 으득, 갈며 말했다. 란테는 그 차디찬 시선에 쩔쩔매다가 물었다.
“그,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오늘만 옮기면 목표로 한 금액만큼 다 옮기는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언질 조차 하지 않고 여기까지 쫓아온 것을 보아 회유도 안 통할 것 같으니, 죽이는 수밖에. 죽인 후에 물건들이랑 같이 바깥으로 옮기죠.”
서늘한 말에 란테가 침을 꿀꺽 삼켰다. 조시가 눈짓하자 란테가 주변에서 천을 찾아내 레이린의 입을 막고 손목을 등 뒤로 묶었다. 조시가 그녀의 목에 제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생활에 만족했으면 좋았을 것을. 유감입니다.”
그가 손에 힘을 주려던 순간, 가만히 눈치를 보던 레이린이 불현듯 발꿈치로 조시의 발등을 콱 찍었다. 조시가 신음을 흘리며 그녀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윽......! 이 년이!”
레이린은 달아나려는 것처럼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조시는 고통 섞인 신음을 흘리면서도 반사적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던졌다.
“읍......!”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여린 몸이 바닥을 맥없이 굴렀다. 엷은 신음이 입을 막은 천 사이로 흘러나왔다. 분노로 반쯤 이성을 놓은 조시가 옆에 놓여 있던 단검을 덥석 집어 들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여태껏 무슨 고생을 해 가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딴 자그마한 계집 하나 때문에......!”
조시는 악에 받쳐 이를 악물었다. 고작 스물밖에 되지 않은 주제에 혈통의 정당성을 빌미로 영주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에드윈이나, 틈만 나면 웃는 얼굴로 사람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아르망이나.
그는 이곳의 모든 것들이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밑바닥부터 처절하게 기어 올라와 가까스로 맞닥뜨린 것. 그것은 고작 출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것을 손에 쥔 자들이었다. 그때의 허망함과 분노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은 살을 깎아내는 고통을 참아내며 손에 쥐었던 것을, 누군가는 숨을 쉬는 것 만으로도 한 아름 얻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여 조시는 스스로 제 것을 되찾기로 했다.
본래 자신이 ‘가졌어야’ 할 것들이라는 생각으로 클로비스의 물건들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한 번은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세 번이 되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나마 제 존재를 주장하던 두려움은 어느새 욕심에 막혀 사라졌다.
이제야 겨우 그 결실이 보이는 참인데, 이런 온실 속 화초 같은 여자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칠 수는 없었다. 턱에 힘을 준 조시는 단검을 쥔 손을 들어 올리다가 말고 멈칫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손이 묶인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레이린은 집요하게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도움을 구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 모습에, 조시는 저도 모르게 대놓고 비웃음 흘렸다.
“안타깝지만 도와줄 사람은-.”
-쾅!
바로 그때, 굉음과 함께 문이 박살 났다.
세 사람의 고개가 본능처럼 문간으로 돌아갔다. 레이린의 눈이 놀라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깜박였다. 어둠을 등지고 선 사람의 주위는 고요했다. 바닥에 나무 조각이 흩어져 있지만 않았어도 조금 전의 일이 꿈이라 여겼을 법했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찢어발길 것 같은 날카로운 공기가 에드윈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검을 뽑지도 않았건만, 암살자의 칼날이 목덜미를 스치는 것 같은 느낌에 조시와 란테가 몸을 떨었다.
조용하고도 서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잠잠히 울렸다.
“뭐하는 짓입니까.”
차디찬 분노가 기저에 깔린 말, 형형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 오싹한 감각에 란테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그보다는 빨리 정신을 차린 조시가 레이린 쪽으로 내달렸다.
이 순간, 그의 자랑이던 비상한 머리로 할 수 있는 것은 인질을 잡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몸을 통제했다. 그가 바닥에 널브러진 레이린에게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원하던 것을 쥘 수 없었다.
“커헉!”
그는 양손을 한데 모아 움켜쥐며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단검이 바닥으로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검집으로 그의 손을 정확히 가격한 에드윈이 그의 복부를 레이린의 반대 방향으로 퍽, 걷어찼다.
“안타깝게 되었군요.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얌전히 목만 잘렸을 텐데.”
“이 미친, 컥!”
“미쳐서 주인도 못 알아보는 개가 말은 참 많군.”
에드윈이 비웃음 머금은 채 조시를 제압하는 사이,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던 란테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에드윈이 조시의 손목을 우드득, 꺾는 것을 보며 비명을 삼키고 슬금슬금 몸을 움직였다.
란테는 기다시피 해서 문가에 다다랐다. 아직 1층 홀에는 사람이 몇 없었다. 그가 충분히 힘으로 뿌리칠 수 있을 만한 하녀 몇몇만이 당황하며 제 동료를 깨우고 있었다.
‘살았다!’
그가 환희하며 땅을 박차려 했을 때, 조그맣게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한쪽에서 날아온 날카로운 나뭇조각이 그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무, 무, 무슨.......”
란테는 제 볼을 더듬거렸다. 피가 묻어나오는 것을 확인한 그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는 멍하니 나무 조각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진 레이린뿐이었다.
란테는 에드윈이 조시를 상대하는 와중에 자신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나무 조각을 던진 것으로 생각해 전의를 상실했다. 그의 무력은 익히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자신은 감히 누구를 속이려 들었던 것인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한편,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에서도 은밀하게 발을 움직여 나무 조각을 차낸 레이린의 눈이 무심히 그것을 일별했다. 그녀는 속으로 태연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일부러 며칠간 여유롭게 서류를 팔락이며 조시의 경계를 풀었다. 그리고 그들이 밤마다 1층의 창고에서 무언가를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조금 전에도, 조시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 란테에게 정신이 팔린 척했다. 조시에게서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행동한 것은, 에드윈이 이곳을 찾아올 것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에드윈은 어린 나이에도 유스티아의 황금기를 이끌고 있을 만큼 영민했다. 그런 그라면 자신이 중얼거렸던 ‘도둑고양이’ 라는 말에 담긴 뜻을 눈치챘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그 전부터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저 태도를 보아하니 알고 있었던 게 확실해 보이기는 하군.’
그녀의 시선이 조시를 기절시키고 란테에게로 몸을 돌리는 에드윈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잿빛이 섞인 갈색 눈동자가 느긋하게 내리뜨였다.
사실 에드윈이 이들의 배신을 알고 있었건 몰랐건, 레이린은 상관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겉보기에는 이들을 막으려다가 다치기까지 한 ‘결백하고 충직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었다.
에드윈은 신중하다. 이번 일 하나만으로 그녀에 대한 의심을 풀리는 없지만, 적어도 저택 사람들의 경계는 해소할 수 있을 터. 그것만으로도 앞으로 이러저러하게 움직이기에 꽤나 편해질 것이다. 우연히 발견한 일치고 소득은 충분했다.
이 일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는 앞으로도 이런 상황을 여러 번 만들 생각이었다. 필요하다면 이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조금씩, 그가 스스로 잠식당하고 있는 줄도 모를 만큼 천천히, 그녀에게 제 목줄을 쥐여 주도록.
* * *
한 밤의 소란과 함께, 수행 비서인 란테와 비서장 조시가 가문의 물품들을 빼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용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더군다나 그들의 낌새를 눈치챈 새로운 비서장이 그 일에 휩쓸려 죽임당할 뻔한 것을 알고 난 뒤로는 더욱 그러했다. 알게 모르게 레이린을 경계하던 이들마저도 한결 풀어진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를 안타까워하며 마음을 썼다.
저택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조시와 란테는 참수당했으며 그들의 목은 효시되었다. 주인을 배신하고 제 이익을 꾀하려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였다. 며칠 뒤 사건의 뒤처리가 얼추 마무리되고, 레이린은 업무를 위해 집무실로 향했다. 그녀보다 몇 발 앞서 계단을 오르던 아르망이 그녀를 발견하고 쪼르르 다가왔다.
“여어! 우리의 청렴한 비서장님! 아니, 이제는 수행 비서님이신가?”
“......로저 님, 환대는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은데요. 게다가 저는 말을 편하게 하셔도 된다고 한 기억이 없습니다만.”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연녹색 눈은 쉴 새 없이 그녀를 탐색하고 있었다. 레이린은 그것을 모를 만큼 아둔하진 않았다. 때문에 일부러 덤덤함을 유지하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르망은 친해지고 싶다는 자신을 거절하는 것이냐며 짐짓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조금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영악함과는 별개로 저놈의 소란스러움은 영 적응이 되질 않는다. 그녀는 아르망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며칠간의 일을 되짚었다.
상벌은 확실할수록 좋다.
에드윈은 참수당한 란테 페렛 대신 레이린을 수행 비서 자리에 올려 놓으면서 그 명제를 몸소 실천했다. 이번 사건으로 수행 비서인 란테와 비서장인 조시의 자리가 비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비서장 자리를 아예 공석으로 두기로 결정하고, 그 업무를 자신과 아르망, 레이린이 함께 담당할 것이라 공표했다. 사실상 이번 일로 저택의 물품과 귀중품을 다루는 비서장에 대한 신뢰가 깨져 버렸다.
그렇기에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새 인력을 구하는 것보다는 이편이 안전하고 효율적이었다. 대다수는 옳은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레이린은 기쁘지많은 않았다. 그녀를 비서 자리에 앉힌 것이 겉보기에는 치하와 신뢰의 의미로 보일 만하나, 그녀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디 또다시 새 사람을 찾게 되는 일은 없길.’
그녀를 수행 비서로 임명한다 말 했던 날.
건조한 눈을 한 에드윈의 노골적인 발언에 레이린은 헛웃음을 지었다. 말을 하는 순간 그의 시선이 보란 듯 제 목을 향했던 것에 일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것은 그의 시험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인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감시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면 지금 효시당한 이들처럼 될 것이라는 경고. 레이린은 백전노장도 울고 갈 신중함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역시 이 정도로는 그의 견고한 벽에 실금조차 내지 못했나.
‘뭐, 어차피 그것도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레이린은 절로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 뒤로 아르망이 투덜대며 따라 들어왔다.
“호칭이라도 편하게 해 주든가. 앞으로 하루에 못해도 반나절은 붙어 있어야 할 텐데 ‘로저 님’이 뭡니까, ‘로저 님’이. 딱딱하게.”
“전에 있던 분들과도 그리 친근해 보이지는 않으셨는데요.”
“그 사람들은 애초부터 대놓고 뒤가 구린 느낌이 들었으니 그렇죠. 그런 멍청이들과 아제트리아 양을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레이린은 아르망의 자리 맞은편에 놓인 제 자리에 앉으며 아르망에 대한 생각을 정정했다. 이처럼 깐족대는 어조로 하는 공대라니. 꽤나 사람의 속을 뒤집어놓는 재주였다. 그녀는 반쯤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저보다 나이도 많으시니 그냥 말 편하게 하세요, 선배님. ‘양’이라는 호칭도 빼시고요.”
지치지도 않고 입을 비죽대던 아르망이 멈칫했다. 레이린의 말투에서 순식간에 거리감이 줄어들어서였다.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제 머리를 헝클더니 물었다.
“......어? 이렇게 갑자기요? 아니, 갑자기? 놀라라.”
“놀랐다면서 말은 왜 놓으세요?”
“놀라는 척 좀 해 본 거지. 좋아, 레이린. 앞으로 이 선배님이 잘 챙겨 줄.......”
“시끄럽다, 아르망. 일이나 해.”
그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에드윈이 아르망을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시선을 흘끗 던지더니 제 책상으로 다가가 앉았다. 아르망이 억울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왜 맨날 저만 가지고 그러십니까! 저는 매일 영주님께 생으로 갈리고 있는데!”
에드윈은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곧장 책상에 쌓인 서류를 끌어와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르망은 한동안 작게 꿍얼대더니 금세 일에 열중했다. 이내 집무실의 공기가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레이린 또한 그런 아르망에게서 간간이 조언을 받으며 서류를 처리해나갔다. 라그나르를 도울 때에 비해서 일이 몇 배로 늘어난 것 같긴 하지만, 나름대로 할 만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레이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영주님.”
직후 푸른 시선이 닿아왔다. 그녀는 입 안으로 말을 고른 뒤 이어 말했다.
“왜 제게 하대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지난 며칠간 에드윈을 관찰하다가 알게 된 사실. 에드윈은 그가 휘하에 있는 클로비스 기사단과 아르망을 제외하고는 사용인들에게조차 하대를 하지 않았다.
물론 에드윈의 공대는 존중의 의미라기보다는 거리감을 확실히 못 박는 듯한 느낌이었다. 당신과 나는 남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 같은 어조.
하지만 수많은 이들을 발밑에 둔 영주라면 공대가 아닌 하대가 익숙해야 옳았다. 그 사실이 못내 의아했는데, 최근에는 영 물어볼 만한 기회가 나질 않아 반쯤 잊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난 김에 답을 듣겠다는 마음으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에드윈은 잠시 레이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답 없이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뭐지? 그녀가 의아해하며 눈을 깜박이자 아르망이 끼어들었다.
“원래 영주님은 클로비스 기사단을 제외하고는 하대 안 하셔. 전 영주님께서 굉장히 예의를 중시하는 분이셨거든.”
“선배님께서는 하시잖아요.”
“나야 당연히 특별하니까 그렇지. 친근함의 대명사잖아.”
레이린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아르망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에요. 일 보세요.”
레이린은 여상한 미소를 한 번 지어 준 후 시선을 내렸다. 아르망은 “욕하는 얼굴이었는데.......”하고 중얼대다가 조용해졌다. 그녀는 내심 에드윈이 저와 같은 과정을 거쳐 아르망을 하대하게 되었으리라 추측하며 서류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