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면과 이면
말발굽이 일정하게 다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레이린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잿빛과 갈색이 묘하게 어우러진 눈동자가 느른히 마차와 창밖을 훑었다. 그녀의 목에서 얇은 목걸이가 달랑거렸다.
윈프리드와 수도인 호노라투스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는, 영주 가문을 포함한 여러 가문이 나누어 다스린다.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윈프리드와 달리 유스티아는 이 땅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그만큼 체계와 질서가 제대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 레이린이 타고 있는 마차는 유스티아의 내부, 영주의 직할령인 클로비스령(領)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거리에 사람 하나 없던 윈프리드와 달리 이곳은 활기가 넘쳤다. 상점과 노점이 즐비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가 조금 어색했다.
마차는 어느덧 왁자했던 거리를 지나 조용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마차의 창밖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자 잘 정돈된 나무가 죽 늘어진 길의 끝, 언뜻 성처럼 보이는 클로비스 저택에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레이린의 긴 머리카락이 서늘한 바람에 팔랑거리며 흩날렸다.
얼마 가지 않아 마차가 멈추었다. 레이린은 거대한 저택의 정문 앞에 제 짐을 내려 주는 마부에게 금화를 하나 건넸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마부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는 모자를 벗으며 굽실대다가 사라졌다. 가벼이 숨을 후, 뱉은 레이린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짙푸른 색과 흰비이 어우러진 클로비스 저택은 거대했지만 결코 투박하지 않았다. 우아한 곡선을 이루는 저택은 예술품에 가까웠다.
레이린은 저택의 커다란 아치형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의 옆쪽에 통신용인 듯 보이는 주술석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꾹 눌렀다.
푸른색의 주술석이 자그맣게 빛을 내더니 이내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나이가 많은 사람인 듯했다.
[누구십니까?]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아, 새로 오시기로 한 비서장님이십니까? 서면으로 말씀해 주신 예정 시간보다 빨리 도착하셨군요. 바로 나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제가 일찍 도착한 것이니 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
그 말을 내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술석의 불빛이 사라졌다. 레이린은 조금 전 내뱉은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아제트리아.
그것은 그녀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사용해야 할 성이었다. ‘레이린’이라는 이름 하나를 제외하고는 출생, 가족 관계, 출신지 등 진실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신분을 가진 사람이 지금의 그녀였다.
하지만 동시에, 위화감조차 없을 만큼 평범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진 신분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실수하지 말자.’
마음을 다잡으며 목걸이에 걸린 주술석을 잠시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곧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내 정문이 소음 없이 느릿하게 열렸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말끔한 차림의 노인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클로비스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레이린님.”
레이린은 제 눈앞에 선 사람을 티나지 않게 관찰했다.
손자국 하나 없이 반질반질한 안경, 일말의 흐트러짐조차 찾아볼 수 없는 크라바트 등이 그의 성격을 어렴풋이 나타내는 듯했다.
“저는 클로비스 저택의 집사이자 하인들의 관리를 맡고 있는 하인트 알베릭이라고 합니다. 짐은 제가 들테니 안으로 들어오시죠.”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이린은 예의상 살풋 미소 지운 후 정문을 넘었다. 하인트는 그녀의 짐을 챙겨 들더니 문을 닫고 길을 가로질렀다.
널따란 정원은 과하게 꾸미지 않아 산뜻하고 단정했다. 저택의 분위기를 닮은 듯도 했다. 그녀의 시선이 정원에 한가득 피어난 각양각색의 꽃들로 향했다.
‘......역시 유스티아라 그런가, 꽃이 많네.’
이 땅, 헤르기아스는 1년 내내 약간 서늘한 날씨를 유지했다. 1년의 끄트머리에는 물이 얼고 눈발이 흩날릴 정도로 온도가 내려가는데, 그때를 ‘추락의 계절’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추락의 계절이 지나 날씨가 풀려 가는 참인지라 나름 따뜻한 때였다. 게다가 헤르기아스 내에서 가장 온화한 기후를 가진 유스티아의 영역이니 더욱 그러했다.
레이린은 얇은 카디건을 여미며 하인트를 따라 정면에 보이는 본채의 오른쪽에 위치한 건물로 발을 들였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단정한 홀. 옆쪽에는 위층과 연결되어 있는 계단이 있었다.
하인트는 그녀를 이끌고 위로 올라가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사무관님들이 쓰시는 숙소로 주로 사용되는 동쪽 별채입니다. 레이린 님의 방은 맨 위층인 4층이고요.”
레이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살폈다.
널따란 홀의 위쪽에서는 햇빛에 찬란한 빛을 반사하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본채와 각 별채의 1층에는 하녀들의 숙소가 있으니, 혹 급히 부르실 일이 생긴다면 각 방에 비치된 주술석을 통해 부르시면 됩니다.”
저택의 내부를 샅샅이 둘러보던 레이린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술석은 유용하지만, 실생활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신력’이라는 특별한 힘을 타고난 주술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극히 한정적이었고, 그만큼 주술은 귀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하인트의 말로 미루어 보아, 저택의 방마다 주술석을 놓아둔 듯했다.
레아린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하나하나가 굉장히 고가인 주술석을 방마다 채워 두다니. 클로비스 가문의 재력이 가히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인트는 깨끗하게 닦인 4층의 복도를 가로지르며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식당은 본채의 2층이니, 담당 하녀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알리면 오셔서 식사하시면 됩니다. 영주님의 집무실은 본채의 5층에 있고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아, 피아노 연주실도 있으니 혹 흥미가 생기신다면 얼마든지 가 보십시오.”
설명이 끝나갈 때 즈음 복도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하인트는 복도 끝에 위치한 방 앞에 레이린의 짐을 내려놓더니 열쇠를 꺼내 방문을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레이린 님께서 머무실 곳은 이곳 입니다.”
레이린은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미리 정리해 둔 듯 깨끗한 방 한쪽, 벽난로 안에서 주홍색 불길이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넓고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그녀는 짐짓 감탄하며 하인트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언제쯤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아, 아마 본격적인 업무는 내일부터일 겁니다. 오늘은 서로 인사만 나누실 테니, 짐을 다 푸실 때쯤 모시러 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열쇠를 레이린에게 건넨 뒤 공손히 물러났다. 레이린은 문을 단단히 닫아 잠근 뒤 곧장 방을 살폈다.
혹시나 방에 무슨 장치 같은 것이 있지는 않은지 샅샅이 살핀 후에야 앉을 여유가 생겼다. 등 뒤로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푹신하고 보송보송한 이불의 감촉이 몸을 감쌌다. 그녀는 침대에 반쯤 널브러진 채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로 다른 곳이네.......’
레이린은 새삼스럽게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당황스러울 만큼 낯선 호의 탓인지. 유스티아에서 들이쉬는 숨 하나하나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는 여태껏 녹스에서 벗어나 본 적이 몇 없었다. 극히 드물게도 마물 토벌에 참여한다 한들 윈프리드의 영토 근처에서만 움직였으니까.
아버지라는 작자는 그녀를 비장의 한 수 비슷한 것으로 취급했고, 라그나르는 그녀를 걱정하느라 꽁꽁 숨겨 두려 했다.
레이린은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그 빌어먹을 꿈 때문에 이번 추락의 계절을 넘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적어도 갈 수 있는 곳은 다 돌아볼 걸 그랬나.
‘그래 봤자 갈 수 있는 곳이 몇군데나 될까 싶기는 하네.’
지금껏 예지몽이 현실이 되는 기간은 아무리 길어봤자 2주를 넘기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의 예지몽이 뜻하는 것은, 아마도 올해의 추락의 계절.
그러니까, 레이린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예지몽이 실현될 배경이 마련되기까지 남은 시간이 6개월 정도라는 소리였다.
‘......웃기지도 않아.’
참 빌어먹을 인생이 아닌가.
얼마 되지 않은 삶은 핏물 속에서 뒹굴고, 어느 날 갑자기 끝을 선고당한 지금, 남아 있는 시간마저 이리도 짧다니. 비소를 입에 건 채로 몸을 옆으로 굴리자 푹신한 이불이 얼굴에 닿아왔다. 비릿한 웃음을 짓던 그녀의 얼굴이 차츰 깊게 침잠했다.
평화롭고, 안락하다. 지나칠 정도로.
하지만 몸은 평온할지언정 마음은 늘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누가 언제 어디서 나타나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르는 곳에서 살아온 자의 본능이었다.
레이린은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좌절하고 있을 시간조차 아깝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정식 임무다. 라그나르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으니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의뢰는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오랜만에 일어난 변화에 잠시 감상에 젖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다시금 냉정을 되찾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는 물건들과 몇 권의 서적, 프랭크가 수선을 피우며 챙겨 주었던 약병 몇 개 등등이 차례로 자리를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흰색 원피스 형태의 잠옷을 반듯이 개어 막 집어 드는 순간. 그녀의 손이 움찔했다. 예민한 청각에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딱, 따닥.
레이린은 곧장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창틀 사이에 흰색 편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코끝에 미미하게 달큰한 향기가 다가왔다. 그녀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품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편지를 끄집어냈다. 조금 전부터 거슬리던 미약한 향. 아니나 다를까, 편지 봉투에 몸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독이 묻어 있었다.
‘......재밌지도 않은 장난질을.’
그녀는 시리게 웃으며 손수건과 편지 봉투를 불길에 집어 던졌다. 조용히 타오르는 불길이 제 몸에 들어온 이물질을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레이린은 조금 불쾌한 기분으로 편지지를 펼쳤다. 부드럽고도 뱀처럼 유려한 글씨가 편지지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받는 사람은 적혀 있지 않았다.
「잘 도착하셨는지요. 작은 불안감에 그대를 시험해 본 점,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립니다. 앞으로 늘 무탈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좋은 밤 보내시길. ―I.P」
깍듯이 예의를 지켜 더욱 기분이 더러운 편지의 끄트머리에는 기울어진 알파벳 두 개가 적혀 있었다.
‘이드리스 프리조프.......’
이 발칙한 의뢰의 장본인. 그리고 감히 편지 겉봉투에 독을 발라 그녀를 시험한 사람. 레이린은 조용히 편지를 찢어 불길 속에 밀어 넣고 부지깽이로 그것을 착실히 뒤적거렸다. 이내 편지는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가루로 스러졌다. 그제야 조금 속이 풀렸다.
‘그나저나 심부름은 누구를 이용한 거지? 거리도 거리고, 성격상 제 심복을 고작 이런 일에 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고민하던 중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적령인가?’
적령(赤靈)은 대륙에서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몸집이 큰, 헤르기아스의 곳곳에 손을 뻗치고 있는 정보 길드다. 본부의 위치를 비롯한 많은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정보력 하나만큼은 믿을 만한 곳이었다. 돈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 정보를 지불한다. 대가만 충분하다면 간혹 잔심부름도 한다.
거래는 깔끔하고 확실하게. 그것이 적령의 신조였다. 적령은 녹스에서도 곧잘 이용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적령은 녹스의 정보를 캐지 않은다. 정확히는 캘 수 없다.
음지의 지배자라고도 할 수 있는 녹스의 뒤를 캐는 것은 녹스를 적대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때문에 그들은 레이린의 진짜 정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한데 클로비스 가문에 새로 들어온 비서장이, 첫날부터 신원을 밝히지 않은 이의 편지를 비밀리에 전달 받았다, 라. 지나치게 호기심을 끌 만한 일이 아닌가. 레이린은 조금 귀찮아졌다는 생각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입막음을 한 번 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방을 마저 정리했다.
똑똑.
단출한 짐 정리가 끝나갈 무렵,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나가 보니 하인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죠.”
하인트를 따라 본채의 계단에 발을 디디며 레이린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방을 나서기 전 새로이 걸친 옷은 검은색의 스커트, 와인색의 리본이 매여 있는 흰 블라우스로 과하지 않게 적당히 단정했다.
떠나기 직전, 라그나르가 러플과 프릴이 잔뜩 달린 옷들을 챙겨 주려 해서 기겁하며 말린 일이 기억났다. 다시 생각해도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의 불퉁한 얼굴을 생각하자 한숨과 웃음이 뒤섞여 나왔다. 앞서 걷던 하인트는 그녀가 긴장한 것이라고 여긴 것인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주님께서는 좋은 주인이십니다. 보좌관분들도 다들 굉장히 살가우시고요. 레이린 님께서도 금세 익숙해지실 수 있을 겁니다.”
호의가 가득한 말. 마치 손녀에게 옛이야기를 해 주는 듯한 목소리였던지라 레이린은 미묘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들은 5층에 다다랐다. 마호가니 색 문 앞에 서자 하인트가 한 발 옆으로 물러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등 뒤로 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넓은 집무실 가운데에는 네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호기심 어린 얼굴을, 누군가는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을, 또 누군가는 미소가 만연한 얼굴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에 들어오는 건, 단 한 사람.
“반갑습니다.”
순간 목덜미가 오싹해질 정도로 사람의 오감을 잡아끄는 목소리. 말과 달리 아무런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금방이라도 얼어 버릴 것처럼 시린 새파란 눈동자. 심연만큼 새까만 머리카락.
간편한 셔츠 아래 가려진 날렵한 몸은 마치 늘씬한 흑표범과 같았다. 균형잡힌 신체가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아름다웠다. 꾸준히 단련한 몸이라는 것을 곧장 알 수 있었다. 신이 정성 들여 빚어낸 것 같은 얼굴에서, 느릿하게 깜박이는 푸른 눈만이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듯했다.
상대의 마음 깊은 곳까지 단숨에 파헤쳐 삼키듯 짙고도 텅 빈 눈. 레이린은 홀린 듯 그 눈을 바라보았다. 귓가로 무심한 목소리가 파고든다.
“에드윈 클로비스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레이린은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어쩐지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유스티아의 주인이자 타고난 분위기가 맹수 같은 남자를 앞에 두고, 그녀는 문득 얼마 전의 꿈을 떠올렸다. 흰 눈밭 위. 자신의 복부를 가로 지르던 칼날. 흰 눈 위로 점점이 퍼지던 붉은 자국.
‘아.’
문득, 어떠한 직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혹시 저 남자일까.’
나를 죽일 사람.
* * *
레이린은 에드윈에게 인사를 건넨 뒤 나머지 세 사람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에드윈의 오른편에 서 있던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연갈색의 머리카락에 연녹색 눈동자가 퍽 생기발랄했다.
“영주님의 수행비서인 아르망 로저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수행 비서인 란테 페렛입니다.”
아르망의 곁에 서 있던 남자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까딱했다. 그의 눈에는 탐탁잖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레이린은 그것을 곧장 알아차렸으나 잠잠히 표정을 관리했다. 저런 같잖은 이에게까지 굳이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에드윈의 왼편에 서 있던 이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비서장인 조시 길로트입니다.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되겠네요. 잘 부탁드려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린은 예의상 살짝 미소를 띠며 그를 마주 보았다. 언뜻 푸른 시선이 얼굴에 닿아오는 것도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에드윈이 무심히 내뱉었다.
“오늘은 여독을 푸시고 내일부터 업무를 시작하시면 됩니다. 자세한 것은 조시가 알려드릴 겁니다. 아르망.”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르망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 해사한 웃음이 피어났다.
“자, 이만 쉬러 가시죠. 제가 방까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저님.”
레이린은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손을 올렸다. 나가기 전 에드윈에게 가볍게 눈 인사만을 건넨 뒤 미련 없이 집무실을 나섰다. 아르망은 그녀의 방까지 가는 내내 밝은 얼굴로 재잘댔다.
“아제트리아 양께서는 벤투스 출신이라고 하셨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벤투스산 공예품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질이 좋다던데. 전에 근무하셨다던 상단에서도 공예품을 주로 다루셨나요?”
“아뇨.링우드 상단에서는 유스티아의 보석들을 수업하는 일을 주로 맡았습니다. 벤투스산 공예품을 다루는 상단은 따로 있었고요.”
“그렇군요. 그럼 그 상단 좀 소개해 줄 수 있어요?”
대부분이 영양가 없는 말뿐이었지만, 레이린은 간간이 그가 자신을 떠보는 듯한 말을 건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물론 티 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물 흐르듯 그의 질문을 넘기며 화제를 돌렸다.
“로저 님께서는 이곳 출신이라고 하셨죠? 예전에는 어디서 근무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자 아르망은 조금 얼떨떨한 목소리로 그녀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령에 홀린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방까지 데려다준 후 집무실로 돌아갔다. 레이린은 제 방의 소파에 기대어 방금 전에 만난 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란테 페렛이라고 했던가.’
그들 중에서도 유독 저에 대한 경계심을 숨기지 못하던 남자. 무언가 걸렸다. 지금껏 살아오며 발달한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레이린은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고민했다. 현재 그녀에게는 딱히 거슬릴 만한 구석이 없었다.
본래 성격대로 첫 만남부터 대뜸 반말을 건넨 것도 아니며, 오늘 처음 만난 이답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그를 대했다. 만들어진 신분에는 일전에 다른 상인 밑에서 일했던 경력이 쓰여 있었다. 게다가 실제로도 라그나르를 도운 적이 많아 업무 능력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경계할 만큼의 실력도 아니다.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나이나 성별 때문은 아닌 것 같았지.’
그녀는 란테의 표정을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경계심 너머로 감추어져 있던 것. 아주 얇게, 어쩌면 알아보지도 못했을 만큼 미묘하게 떠올랐던 감정.
‘......불안감?’
레이린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약간의 흥미, 그리고 기꺼움으로 반짝였다.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그것과도 같은 미소였다.
* * *
다음날.
레이린은 여전히 반쯤 밤을 새운 상태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은 일상이었기에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침구는 흠잡을 곳 없이 푹신했지만, 낯선 곳에서 신경이 곤두선 탓에 특히나 눈이 감기지 않았다. 가시지 않은 피곤이 점점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기분이랄까.
똑똑.
멍하니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말을 건네자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앳된 얼굴을 한 소녀가 고개를 쏙 들이밀었다.
“안녕하세요, 아제트리아 님! 저는 오늘부터 아제트리아 님을 담당하게 된 루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편하게 레이린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레이린이 예의상의 미소를 입가에 걸고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인 루시가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곧 있으면 식사 시간이라서 알려 드리려고 왔는데, 벌써 깨어계셨네요. 혹시 불편하시면 조금 더 늦게 찾아올까요?”
“아뇨. 저는 일찍 일어나는 편이니까 편할 때 찾아와도 상관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레이린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루시는 불편하지 않다는 말에 작게 안도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호의가 가득했다.
‘어색하네.’
저렇듯 순수한 호의는 레이린에게 영 어색했다. 레이린은 슬그머니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루시가 커튼을 걷어내며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
“네. 침대가 워낙 좋더라고요.”
“헤헤, 레이린 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열심히 관리해 놓았거든요. 편안하셨다니 다행이네요!”
“고마워요.”
짤막한 감사 인사였다. 레이린 본인은 별생각 없이 뱉은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루시는 놀란 듯 손을 우뚝 멈추며 눈을 크게 떴다.
‘......고맙다고?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는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이었다. 클로비스 저택에 들어온 이후, 그녀는 숨을 죽인 채 일만 했다. 이곳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엄숙한 분위기에 함부로 재잘댈 수가 없었다.
소녀는 점점 슬퍼졌다. 아무리 열심히 시트를 갈고 찻잔을 닦아도, 저택에 머무는 분들은 늘 일에 치여 살기에만 바빴다. 자신이 어디에서 잠을 자고 무엇을 먹고 마시는조차 모르는 듯했다. 바깥으로 나다니며 일을 할 때가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새 비서장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덧 기대를 잃어버린 소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성스레 방을 정돈했다. 그리고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토록 바랐던 고맙다는 인사가 들려왔다. 그저 겉치레라고 할 수도 있는 짧은 말이었지만 마음을 울리기에는 충분했다. 심장이 동당거리며 뛰었다.
이 모든 사정을 모르는 레이린은 의아하게 눈만 깜박였다. 루시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며 커튼을 걷어내고 욕실의 문을 열었다. 소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 여기가 욕실이고요. 선반에 놓여 있는 목욕 용품 같은 것들은 마음대로 사용하셔도 돼요!”
루시는 선반 가득 놓여 있는 목욕 용품들을 열정적으로 손짓하다가 실수로 병 하나를 건드렸다. 영롱한 색의 유리병에 불길하게 기울었다.
“조심......!”
레이린이 놀라 소리쳤다. 다행히 루시는 허둥지둥 병을 붙잡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소녀는 십년감수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혹시 따로 사용하고 싶으신 물품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반드시 구해드리겠습니다!”
흡사 마물의 심장을 가져오겠다는 듯 비장한 말이었다. 레이린은 드물게도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맡겨 주세요! 그게 무엇이든 꼭 구해 오겠습니다!”
말을 들을 상태가 아니군.
판단은 빨랐다. 레이린은 그저 가식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예상대로, 소녀는 홀로 열정적인 설명을 줄줄이 토해내더니 의욕에 가득 차 방을 나섰다.
‘......왠지 피곤할 것 같은데.’
귀엽기는 하지만, 앞으로의 생활이 썩 조용하게 흐르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레이린은 한숨을 삼키며 욕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