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87)

1. 악몽, 혹은 예언

우리는 날개가 없다네.

날개를 버리고 너희 곁으로 왔다네.

이 땅의 불행한 자 그 누구인가.

날개 없는 신이 너희를 위해 왔다네.

-민요 ‘날개 없는 신’, 작자 미상.

* * *

“윽!”

챙-!

밤과 새벽의 사이 즈음. 쇠가 무언가에 부딪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단검 한 자루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연무장 바닥에 팍, 하고 박혔다. 비명을 지른 남자의 앞에는, 그와 같은 단검을 손에 쥐고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프랭크, 넌 속도는 괜찮은데 아직도 악력이 너무 약해. 단련은 하고 있는 거야?”

여자는 남자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었다. 그녀가 검을 쥔 반대쪽 손을 위로 올렸다. 곧 하나로 묶여 있던 엷은 회갈색 머리칼이 풀어 헤쳐졌다. 긴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져 내리며 가벼운 물결을 그렸다. 머리카락과 같은 빛깔의 무심한 눈동자가 깜박이며 그 앞의 남자, 프랭크를 응시했다.

프랭크는 잿빛 머리칼을 벅벅 헤집더니 땅바닥에 벌러덩 널브러지며 투덜댔다.

“누누이 말했지만, 나 같은 세심하고 연약한 천재는 보호해야 한다고. 레이린 너나 수장님이 하는 그 미친 체력 단련을 했다가는 내 섬세한 손이 상한다니까?”

“......그냥 힘들어서 귀찮은 거잖아.”

“정답.”

프랭크가 개구지게 씨익 웃으며 누운 채로 손을 뻗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던 여자, 레이린이 그 손을 붙잡아 그를 가볍게 휙 일으켜 세워 주었다.

땅바닥을 딛고 선 프랭크가 아이고, 하는 소리와 함께 찌뿌둥한 몸을 늘이다가 툭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건데? 요즘 너 때문에 따로 챙겨 놨던 수면제가 동날 판이다.”

“.......”

걱정 어린 물음에도 레이린은 침묵했다. 그녀의 입가가 알게 모르게 굳어졌다.

프랭크는 그런 레이린의 얼굴을 가만히 관찰했다.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보다, 눈 밑에 옅게 자리 잡은 그늘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레이린은 평소에도 불면증이 있었다. 그녀는 늘 프랭크를 닦달해 특별히 제조한 수면제를 가져갔다. 그러다가 가끔은 이렇게 그를 붙들어 대련을 빙자한 폭력을 행사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때문에 프랭크는 지금의 그녀가 상당히 곤두서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려나.’

그때, 두 사람이 있던 연무장에 남자 한 명이 불쑥 뛰어 들어왔다. 연녹색 머리칼의 남자가 다급하게 레이린을 불렀다.

“아가씨!”

“키안? 무슨 일.......”

애써 표정을 풀며 고개를 돌리던 레이린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마치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레이린의 곁으로 다가온 키안은, 그녀의 예상이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톰이 죽었습니다.”

“......언제?”

“조금 전에 자기 방에서...... 아가씨!”

레이린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검을 내던지더니 연무장을 박차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뎅그러니 남겨진 키안과 프랭크는 문 쪽을 바라보다가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프랭크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키안에게 물었다.

“톰이라면, 어제 린이 가시나무숲 마물 토벌에서 빼준 새끼 아니었어요?”

“그래. 그리고 톰더러 온종일 방에만 처박혀서 쉬라고 하셨지.”

키안은 저도 모르게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린은 대체로 상냥하고 차분한 모습이었지만,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을 부리고는 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제 아침의 일이었다.

‘키안.’

‘아가씨?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왜.......’

‘혹시 오늘 가시나무숲으로 마물 토벌을 가는 인원 중에, 주황색 머리칼에 푸른 눈을 한 남자가 있어? 체구는 작은 편이고, 나이는 나보다 좀 어린 것 같던데.’

‘음...... 아, 있습니다. 톰이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군요. 왜 그러세요?’

‘빼.’

‘예?’

‘명단에서 빼고, 오늘 온종일 방에서 쉬기만 하라고 해. 무기 같은 거에도 웬만하면 손 못 대게 하고.’

키안은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레이린의 모습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톰’은 말단 길드원으로, 평소에는 본채가 아닌 별채에 머무르는, 레이린과 스쳐 지나간 적조차 거의 없던 이였다. 한마디로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자. 하지만 그녀는 꿋꿋이 그를 명단에서 제하고 방에 처넣으라고 (키안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지시했다.

의문이 절로 들었지만, 무려 레이린의 부탁이었다. 평소에는 무언가를 해 주려고 해도 부담스럽다며 거부하는 그의 천사 같은 아가씨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그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것이다!

키안은 스스로가 팔불출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저 레이린이 자신에게 부탁을 했다는 사실에 감격한 그는 톰을 손수 방에 처넣고 안전하게 ‘보관’해 주었다.

한편, 마물 토벌을 나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여타의 길드원들은 그런 톰의 방을 향해 침을 뱉고 욕을 지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물 토벌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힘든 일에서 혼자서만 쏙 빠져나간 톰이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죽었단다. 급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어이가 없어진 프랭크가 물었다.

“그 새끼는 뭔 팔자가 그 모양이야? 왜 죽은 건데요?”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저울이 망가져 있어서, 내성을 기르는 용도로 마련해 두었던 독을 치사량만큼 섭취했다고 하더군.”

“허.......”

프랭크가 헛웃음을 지었다. 키안 또한 황당한 심정이었다. 이 무슨 박복한 팔자란 말인가?

그사이 레이린은 미친 듯이 달려 톰의 방으로 향했다. 열린 방문 앞에는, 평소에 그와 나름 친하게 지내던 길드원 한 명뿐이었다.

사실 한 사람이라도 그의 부고에 발걸음을 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길드원 사이에 신의나 친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므로.

“어라? 아가씨?”

그가 의아하게 그녀를 불렀으나 레이린은 그를 지나쳐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바닥에는 피가 진득하게 고여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이보다 더한 꼴도 많이 보았다. 이 정도는 역겨울 정도도 못 되었다.

레이린은 핏물 사이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곧 그녀의 무릎이 피로 젖어 들었다. 하얗고 여린 손이 안타까울 정도로 덜덜 떨렸다.

그녀는 가까스로 남자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왜.......”

레이린은 얼굴에 피가 묻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빨갛게 물든 옷 위로 엎드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긴 머리카락이 피 웅덩이에 잠기며 그녀의 등을 뒤덮었다. 손이 파르르 떨려오고 숨이 턱 막혔다.

“대체 왜......!”

그녀는 새어 나오는 비명을 억누르려 이를 악물었다. 싸늘하게 식어 버린 이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손마디가 새하얬다.

이게 대체 몇 번째일까.

죽을 운명인 사람을 구하고, 그리고.

‘운명’이 자신을 비웃듯 그 사람을 죽여 버리는 일이.

* * *

이곳, 신의 저주를 받은 땅 ‘헤르기아스’에는 다섯 개의 도시가 존재한다.

에르치니아, 벤투스, 마티아스, 유스티아, 그리고 윈프리드.

사람들은 나날이 기괴해져 가는 마물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뭉쳤고, 그 결과 다섯 개의 도시가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레이린 브리어스가 속한 윈프리드는 범죄자들의 도시로 악명이 높았다.

다른 네 개의 도시는 수십의 가문들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지만, 윈프리드에는 가문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혈연이나 신의 등에 가치를 두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으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대신에 생겨난 것이 ‘길드’였다. 신의나 친분이 아닌, 오로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모이기 시작한 이들로부터 생겨난 구조.

혼자서 멋모르고 나다니다가는 바로 목이 떨어지기에 십상이었고, 때문에 윈프리드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제각기 길드에 속해 있었다.

윈프리드의 응달에 자리 잡은 수많은 길드 중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한 것은 길드 ‘녹스’. 그리고 레이린은 녹스 수장의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아, 머리야.......”

레이린은 제 방 창틀에 걸터앉은 채로 머리를 짚었다.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녀는 미간을 설핏 찌푸린 채 새까만 어둠에 잠긴 정원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이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에도 쉬이 잠이 들지 못했다. 무언가 시끄럽고 흐릿한 잔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때문이었다. 희미한 비명, 소음, 어지러운 색채, 그 모든 것들이 뒤섞인 무언가가.

“.......”

레이린은 감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인기척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감각은 길드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난 편이었으니 누군가가 보고 있을 염려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레이린은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어 내렸다. 투명한 수정이 달린 목걸이 줄이 손목에 휘감겼다.

그와 동시에 엷은 회갈색을 띠던 머리카락이 천천히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머리 색과 같았던 눈동자의 색 또한 해가 떠오르듯 선명한 금색으로 바뀌었다.

언뜻 목줄처럼 느껴지던 이물감이 사라지니 편했다. 그녀는 원래대로 돌아온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린은 지금까지 이런 선명한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이 땅에서 황금빛 머리칼이나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보았다는 이는 없다. 말 그대로 유일무이한 것.

역시 지나치게 눈에 띈다. 물론 아름답지만, 아름다움과 목숨을 맞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도의 따위는 진즉 짓씹어 삼킨 이들이 득시글대는 이곳에서 눈에 띈다는 것은 곧 수명이 단축된다는 뜻이었으니.

‘쓸모없다면 살아 있을 가치조차 없다.’

이 말의 주인은 그녀의 생물학적 아버지였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레이린의 ‘가치’를 평했다. 우리 같은 이들이 눈에 띄는 것은 곧 죽음이라며 주술사가 제작한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또한 막 손을 움직일 수 있게 된 딸에게 검을 던져 주고, 마물 사이에 내던지고, 독을 먹이고, 생명을 죽이는 법을 가르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쯤은 고마운 것 같기도 했다. 그 덕에 그녀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으니.

‘......결국 오라버니 손에 죽었지만.’

레이린은 다소 무감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그에게 가족의 정이라고 할 만한 것을 느껴본 적도 없었기에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상념을 갈무리한 레이린이 이내 익숙한 동작으로 목걸이를 찼다. 조금 불편해도 눈에 띄는 것보다는 불편한 것이 나았다. 태양의 찬란함을 머금었던 색감이 다시금 소리 없이 스러졌다.

“.......”

죽음.

그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어제 죽었던 ‘톰’이 떠올랐다. 절로 숨이 무거워져 레이린은 눈을 감았다.

그녀, 레이린 브리어스는 제 주변에서 곧 죽을 사람을 예지하는 꿈을 꾸곤 했다. 평소에는 그저 희미한 소음과 비명뿐인 악몽은 가끔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꿈에서 확실하게 얼굴이 보인 이는, 반드시 죽음을 맞았다. 역겨울 정도로 예외 없이.

레이린은 며칠 전 ‘톰’의 얼굴을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마물의 발톱에 배가 찢겨 처참한 모습이었다. 피, 피, 새빨간 피의 향연뿐인 꿈.

그녀는 헉,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키안을 찾아갔다. 시계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그저 또 한 사람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에게는 톰을 살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다. 대화는커녕 얼굴 몇 번조차 마주한 적 없던 이다. 지금껏 그녀의 꿈에 나온 대다수의 이가 그랬듯이.

사람의 죽음에는 익숙하다 못해 무감해져 있었다. 날 때부터 손에 검을 쥐었으며, 살을 찢고 피를 묻혔다. 이미 그녀의 내면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 재조차 남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나.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 살인에 익숙해졌다고 해서 누군가 죽는 것을 지켜보는 게 즐겁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는데, 마냥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인간성일지도.

사실 이유는 상관없었다. 그저 알량한 죄책감에 불과했다. 한때는 모른 척하려 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끝끝내, 알고 있었음에도 방관했다는 그 사실이 끊임없이 목을 옥죄었다.

레이린은 늘 죄책감에 허덕이며 제 꿈에 나온 사람들을 살리려 애썼다. 그리고 살렸다.

그러나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것을 비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새겨 주려는 양, 그녀가 기를 쓰고 살린 사람들은 그 후로 반드시 죽음을 맞이했다.

사인은 다양했다. 지나가다가 시비가 붙어서, 그저 사소한 다툼으로, 하다못해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미끄러지거나. 그녀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내내 곁에 붙어 있다면 급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하지만 그로 인해 끊임없이 좌절하면서도 아예 모른 척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 죽을 운명인 사람을 살리고, 그 사람이 ‘운명’에 의해 다시금 죽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렇게.

* * *

이른 새벽. 레이린은 일전에 프랭크가 약 제작에 필요하다 말했던 재료를 구하기 위해 본채로 향하는 중이었다.

레이린은 녹스 길드 건물의 본채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보통 제 혈육이 마련해 준 별채에 머물렀다. 하지만 프랭크가 원하는 재료를 얻기 위해서는 마물이 필요했고, 마물 사육장은 본채의 지하에 있었다.

“......?”

레이린은 발걸음을 재촉하다 말고 멈칫했다. 이 시간 즈음이면 아직 조용할 때이건만, 어쩐지 본채의 분위기가 부산스러웠다. 그녀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불쑥 인기척이 느껴졌다. 본채에서 나와 별채 쪽으로 걸어오던 중년의 남자가 그녀를 발견하더니 반색했다.

“레이린.”

“안톤 아저씨.”

두 사람은 꽤나 스스럼없이 상대방을 불렀다.

레이린과 마주친 이는 그녀의 혈육이 어렸을 적부터 간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톤이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길드 내에서 그녀에게 꽤나 다정한 편이었기에 레이린은 그를 나름 기꺼이 여겼다.

그들은 곧 길 한복판에서 마주 섰다. 레이린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별채에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지금 수장님께서 간부들을 소집하고 계셔서 말이야. 간부 중 하나인 너도 마땅히 참석해야 하잖느냐. 키안은 다른 이들을 부르느라 바빠 보여서 내가 오겠다고 했다.”

“아아.”

이 시간부터 간부들까지 소집한 회의라니, 그래서 이리 수선스러웠던 거였나.

꽤나 갑작스러웠지만 레이린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안톤과 함께 본채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안에서는 벌써부터 간간이 고함이 들려왔다. 레이린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글쎄, 들어가 보면 알게 되겠지.”

안톤이 작게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란 테이블 주변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로는 김이 올라오는 찻잔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몇몇은 흥분한 채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으며, 몇몇은 안톤과 레이린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묵례를 했다.

레이린은 마주 고개를 까딱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문의 맞은편,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나른하게 기대어 앉아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눈썹 살짝 아래로 내려오는, 흐린 날의 하늘 같은 연한 회청색 머리카락. 야살스러운 눈매 아래로 드러난, 무심해 보이는 남빛 눈동자. 그는 레이린의 하나뿐인 혈육이자, 길드 녹스의 수장인 라그나르 브리어스였다.

“뭐 이런 건방진 요구가 다 있답니까!”

“감히 간부급 길드원 중 하나가 직접 움직이라 ‘지시’하다니요! 이건 길드 전체의 위신 문제입니다!”

“영주고 뭐고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잔뜩 흥분한 간부 몇이 두서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지독히도 싸늘한 표정을 한 채 그들이 짖는 양을 바라보던 라그나르는, 레이린과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봄날과도 같이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린, 왔어?”

조금 전에 내보이던 얼굴이 꿈이었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태세 전환이었다. 간부들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문간을 바라보았다.

라그나르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서 있었다.

익히 보아오던 모습이다. 엷은 회갈색의 긴 머리카락, 흰 피부, 검이라고는 들지도 못할 것처럼 보이는 여린 외양. 음습한 뒷골목보다는 풍성한 꽃들이 가득한 들판이 어울릴 것 같이 보이는 사람.

하지만 이곳에 모인 간부 중, 그녀가 명실상부한 괴물인 라그나르의 동생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괴물의 피는 역시 타고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함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린은 태연한 낯으로 라그나르에게 다가갔다. 라그나르는 철없는 소년처럼 웃으며 그녀가 제 옆자리에 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역시 내 동생, 오늘도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

“제발, 오라버니. 회의 중일 땐 자제하려는 노력 정도라도 좀 해 봐.”

레이린은 황급히 속삭이며 그의 입을 막았다. 라그나르가 시무룩하게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그의 뒤쪽에 서 있던 키안은 내심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애잔한 얼굴로 ‘어휴 저 등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레이린은 라그나르가 입을 다물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칭찬하듯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 손길 한 번이 뭐라고, 그는 금세 물 먹은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라그나르의 속에 어떤 괴물이 들어 있는지 아는 간부들마저 한순간 눈길을 빼앗길 정도였다.

그의 미모는 유명했다. 그 화사한 얼굴로 웃으며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이 더욱 섬뜩해서 그런 것일 테지만.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차린 간부 중 한 명이 슬그머니 입을 뗐다.

“......저, 그래서 이 건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받아들이실 겁니까?”

레이린의 손길에 헤벌쭉 웃던 라그나르가 삽시간에 표정을 달리했다. 절로 오금이 저릴 만큼 차디찬 얼굴. 서늘한 웃음을 지은 그가 말했다.

“어쩌겠어. 그렇게 제 목숨 소중하다고 발악하면서 안 된다고 지랄들인데, 내가 가야지 뭐.”

“......!”

간부들이 입을 뻐끔거렸다. 수장이 직접 움직인다니. 오히려 간부가 움직이는 것보다 더한 문제가 아닌가. 하지만 그가 신랄하게 쏘아붙인 말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는지, 간부들은 저들끼리 바쁘게 눈빛을 교환했다. 라그나르를 위해서가 아닌, 각자의 이익을 불릴 수 있을지를 따져보는 눈빛이었다.

레이린은 슬그머니 키안에게 눈짓했다. 그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했다.

“마티아스의 영주에게서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거기 영주 이름이 이드리스 프리조프였나?”

“예. 그 작자...... 실례. 아무튼, 그 인간이 유스티아의 영주 곁에 첩자를 심어달라더군요. 다만, 조건이 붙었습니다.”

레이린의 눈썹이 꿈틀했다. 조건이라니.

‘녹스’는 명실상부한 윈프리드 제일의 길드다. 어지간한 의뢰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최상위층의 길드. 어중이떠중이들의 의뢰는 애초에 받지도 않으며, 기본적인 의뢰비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싸다. 그 대신 일 처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확실하다. 그것이 녹스였다.

그런데, 조건을 달았다고.

‘영주라고 뭔가 다를 줄 아는 건가. 어차피 죽으면 똑같은 시체 중 하나일 뿐인데.’

서늘히 미소 지은 그녀가 물었다.

“뭔데?”

“간부급 이상의 인사 중 하나를 원합니다.”

“아하.”

레이린은 그제야 이 상황이 이해가 갔다. 간부들이 시뻘건 얼굴로 소리를 내지르던 이유도.

녹스에는 수장인 라그나르 브리어스와 그의 비서인 키안 에레즈를 제외한 간부가 열 명, 그 아래로 일반 길드원들이 존재한다.

간부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심복을 부릴 수도 있고, 여러모로 이득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뇌물을 받는 이가 많고, 제 몸을 사리는 이들은 더 많다는 뜻이었다. 제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고 아득바득 으르렁대는 자들이니 이번 의뢰에 자원할 리가 없었다.

윈프리드가 범죄자들의 둥지라면, 유스티아는 신에게 버림받은 이 땅에서 ‘깨끗함’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곳. 윈프리드의 범죄자들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영주’의 의뢰이니 차마 거절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본인이 이 안락함을 포기하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첩자 노릇을 하기는 싫으니 공연히 목소리만 높이는 것이다.

‘귀찮아라.’

레이린은 가소로운 눈빛으로 간부들을 훑어보았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그 눈과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그렇게 몇몇의 입을 닥치게 한 뒤 느른히 턱을 괴었다.

‘하지만 또 귀찮다고 무작정 지르밟을 수는 없으니.......’

정말이지 성가셨다. 레이린은 작게 혀를 차며 고민했다.

라그나르나 레이린이 아무리 인간이 아닌 괴물이라 불릴지언정, 그들은 남들과 똑같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당연히 무력과 체력에도 한계가 있다.

라그나르는 적도 많고 그에게 원한을 품은 자도 많다. 당연히 살해 시도는 숨 쉬듯 일어난다.

물론 그것이 라그나르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그도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기백의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목숨을 쉽사리 장담할 수 없다.

사실 그가 혼자였다면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죽거나 살거나 하는 것은 이미 그의 안에서 의미를 갖지 못했으니.

하지만 그에게는 제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혈육, 레이린이 있었다. 때문에 라그나르는 귀찮고 짜증 나는 일들, 요컨대 간부들의 징징거림이나 의뢰인들의 패악질을 감수하며 길드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것이 단신으로 레이린을 지켜야 하는 것보다는 안전하니까.

레이린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자신에게 까부는 것들이 적을수록 라그나르의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안 그래도 자신 때문에 이러저러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그에게 이 이상의 부담을 갖게 하기는 싫었다.

당장 겉보기에는 간부들이 쩔쩔매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공생 관계였다. 레이린과 라그나르 또한 그들이 없다면 꽤나 귀찮아진다. 기왕이면 간부들이 불만을 가지지 않을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생각을 정리한 레이린은 태연하게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우아한 손짓으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왁왁대기 시작한 간부 두 사람의 사이로 집어 던졌다.

쨍!

정확히 간부들의 얼굴 사이를 가로지른 찻잔이 벽에 부딪히며 산산이 조각났다.

이내 붉디붉은 찻물이 튀어 간부들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 같은 찻물 자국이 바닥에 점점이 생겨났다.

소란이 뚝 끊겼다. 부지불식간에 코앞을 스쳐 간 찻잔에, 서로에게 침을 튀겨 가며 열변하던 두 간부가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이들의 시선 또한 한곳을 향했다.

그 시선의 끝에서 레이린은 아름답게 미소했다.

“제가 가죠, 이번 의뢰.”

* * *

“안 돼.”

내 이럴 줄 알았지.

레이린은 평소완 달리 무섭도록 굳은 낯을 하고 있는 라그나르를 앞에 두고 이마를 짚었다. 한숨을 삼킨 그녀가 서리가 낀 듯 얼어 있는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

“오빠.”

“......왜.”

라그나르는 마지못해 퉁명스레 내뱉었다. 레이린은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꾹 내리눌렀다. 평소에는 잘 웃지 않는 그녀였지만, 이렇듯 제 부름 하나에 곧장 반응하는 라그나르를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오려 했다.

결국 레이린은 엷은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오빠가 뭘 걱정하는지 충분히 알아.”

“.......”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오빠 혼자서 다 떠맡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면 내가 쓸모없는 거야?”

“절대 아니......!”

라그나르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더니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잔뜩 심통 난 얼굴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레이린이 풋, 웃음을 흘리며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것 봐. 그러니까 이번 의뢰는 내가 갈게. 응?”

그녀는 일부러 조곤조곤 말하며 눈을 휘었다.

라그나르는 그 미소를 힐긋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내 투정과 체념이 어린 중얼거림이 그의 잇새로 튀어나왔다.

“......내가 너를 어떻게 말리겠어.”

그래, 내가 어떻게 너를 말리겠나. 너는 나의 전부이자 삶이며 의지인데.

라그나르는 채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화사하게 웃음 지었다. 레이린과 꼭 닮은 웃음이었다.

* * *

흰 눈이 나풀나풀 흩날린다. 소복이 쌓인 흰 눈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하나, 둘. 그 위로 번져 가는 붉은 꽃잎 셋, 넷. 눈밭을 밟고 휘청거리는 여인의 몸에서 새빨간 꽃잎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팔랑이는 머리카락의 색은.......

“......!”

레이린은 튕기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었고, 손이 벌벌 떨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팔로 자신의 상체를 감싸 안았다.

“뭐, 뭐야.......”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조금 전의 꿈을 더듬었다.

하얗게 흩날리는 눈발, 그 위로 점점이 떨어지던 핏방울, 끈 떨어진 인형처럼 휘청거리는 여린 몸. 죽어 감이 틀림없는 창백한 낯빛을 한 얼굴에 빌어먹게도 선명했던 이목구비까지.

그래, 분명 그것은.

“뭐야, 이거......?”

레이린 브리어스, 자신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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