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아카데미의 가짜연인 (3)
그 날 이후로 스텔라는 교수님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아카데미 내부는 넓은 듯 좁은 세계라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 때마다 스텔라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여름 방학에는 아카데미에 남아있지 않았다.
다행히 루이스가 이번에도 스위니 온실에 초대해 주어서 수도에서 즐겁게 보냈다.
가을부터는 본격적으로 마지막 시험을 대비했다.
마지막까지 2등을 해서, ‘만년 차석’이라는 불명예를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생물학 관련 수업은 수강하지 않았다.
호기심이 있음에도 수업을 듣지 않는 것을 보면, 여전히 교수님에 대해 미련이 남은 모양이다.
스텔라는 제 마음이 이렇게 대단한 끈기를 가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졸업을 하면 조금 나아지려나.’
그리 생각하는데, 마침 생물 연구의 듀란 교수님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라피스 양. 방학은 잘 보냈나?”
“네. 스위니 온실에서 보냈어요.”
“오, 그건 재미있었겠군.”
“재미있었어요. 스위니 양이 연구실까지 소개해 주었거든요.”
“그런데, 라피스 양.”
교수님은 마침 들고 있던 출석부를 흔들며 의아한 듯 이야기를 건넸다.
“내 수업을 신청하지 않았던데, 혹시 다른 필수 수업과 시간이 겹친건가?”
“아, 아뇨! 그런건 아니예요.”
“라피스 양이 지난 학기에 적어낸 답안이 좋았기 때문에, 이번 학기에도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만.”
“그건…….”
스텔라는 차마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생물학에서 등을 돌리게 된 것은 너무나도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니까.
“곤란하게 하려는 건 아니네. 그냥 좋은 제자를 놓친게 아쉬운거지.”
듀란 교수님은 자애롭게 웃으신 후, 잠시 주변을 두리번 거리셨다.
“혼자서라도 좋으니 공부해 보고, 어려운 건 언제든지……. 아아, 그렇군. 올해는 나도 실적발표를 해야 하니까…….”
교수님은 잠시 곤란하게 이마를 감싸 쥐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한 가지 제안을 해 주셨다.
“웨인 힐 교수에게 물어보게나! 큰 도움이 될거야.”
스텔라는 황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듀란 교수님이 좋아요!”
“이 늙은이 교수가 뭐가 좋다는게야. 머리가 말랑말랑한 웨인 힐 교수가 훨씬 더 잘 가르치는데.”
스텔라는 몇 번이나 사양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힐 교수님께 잘 이야기 해 둘테니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다.’ 라든가.
‘힐 교수가 귀찮아서 소리를 지를 정도로 자주 찾아가도 된다.’라든가.
‘힐 교수가 제대로 가르침을 주지 않으면 내가 가서 그 놈 엉덩이를 두들겨 주지.’라는 이야기만 하셨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거절할 수도 없었다.
“자습 중에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웨인 힐 교수님의 도움을 받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대답하자, 교수님은 아주 밝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바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는 곧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보게, 힐 교수! 잠시 여기로 좀……. 아이쿠, 또 떨어뜨리네.”
고개를 돌려보니, 바구니를 몇 개나 겹쳐 든 교수님이 깜짝 놀라며 전부 떨어뜨리고 말았다.
* * *
바구니를 함께 주워주신 듀란 교수님은 학장님과 약속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떠나셨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스텔라와 나눈 이야기를 웨인 힐 교수에게 모두 전달했고, 소중한 제자를 잘 가르쳐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럼 바구니를 옮기는 일은 라피스 양에게 좀 부탁하겠네. 힐 교수를 도와주게.”
듀란 교수님은 사람 속도 모르고, 무시무시한 부탁만 남긴 채 허둥지둥 사라졌다.
스텔라는 짧은 고민 끝에, 힐 교수를 돕기로 했다.
“온실……로 가져가시는 거죠?”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인데, 차마 시선은 맞추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도움을 거절하는 말에 왠지 오기가 솟아서, 스텔라는 멋대로 바구니의 절반을 번쩍 들었다.
웨인 힐은 온실로 향하는 스텔라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온실에 도착한 스텔라는 바구니를 척척 정리해 둔 후, 힐 교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고맙습니다. 라피스 양.”
그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스텔라는 바로 몸을 돌렸다. 도망치는 것 처럼.
아니, 도망치는 것이다. 두려웠다. 끈질긴 마음에 괜히 양분이라도 더해질까봐.
“라피스 양.”
그런데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듣지 못한 척을 한다고 해도 무례해 보이지 않을 만큼.
하지만 스텔라는 결국 멈추어서고 말았다. 미련하게도 말이다.
“궁금한게 있을 때는 언제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아마 아시겠지만, 저는 이곳 아니면 연구실에 있으니까요.”
“괜찮아요.”
스텔라는 비로소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교수님께 궁금한 거 없어요.”
“그래도 듀란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다시피, 혼자 공부하시다 보면…….”
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스텔라가 그에게 묻고 싶다고 말했던 지난 봄에는 그렇게 밀어내더니. 이제와서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물론 이런 생각은 비합리적이다. 스텔라도 안다. 교수님들의 관계는 수직적이고, 힐 교수님은 듀란 교수님의 명령을 어길 수 없을테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정말로 전부 알려 주실 거예요?”
“예. 제가 아는 범위라면 바로 대답해 드리고, 모르는 거라면 연구를 조금 해봐야 겠지만.”
“그럼 질문할게요. 웨인 힐 교수님.”
스텔라는 이제야 웨인 힐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그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미련 할 정도로 두꺼운 안경테나, 구겨진 가운이나, 흙이 묻은 손끝……. 얄미울 정도로 그대로다. 스텔라는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렸는데.
그 날, 이후로는 특히나.
“지난 겨울에.”
스텔라는 이젠 꿈으로 여겨지는 어느 기억을 언급했다.
“교수님이 아프셨을 때, 제게 왜…….”
교수님은 열렬하게 손목을 붙잡았고, 스텔라를 ‘당신’이라 부르며 예쁘게 웃어주셨다.
스텔라는 그가 그리 웃는 것을 그날 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니 아무에게나 지어주는 표정은 아니니라 생각했었다. 물론 멋대로 망상한 것 뿐이지만.
“왜……그러셨어요?”
질문이 끝나자, 그가 눈을 깜빡이며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 확신했다.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흐릿한 잔상마저도.
“……죄송해요.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잠시만요!”
힐 교수가 당황하여 그녀를 불러 세웠다. 하지만 스텔라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긴 다리로 스텔라를 저벅저벅 따라갔다. 차마 그녀를 붙들지는 못했다.
“자, 잠깐만요. 무엇이든 대답하겠다고 했으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잠깐만…….”
“어차피 기억하지 못하시잖아요.”
원망스레 그를 돌아보는 새카만 눈동자에는 투명한 눈물이 맺혀있어서, 웨인 힐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 그, 그게, 그러니까.”
그는 제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다가, 일단 제 가운 끝을 꾸욱 말아 뒤었다.
“꿈인줄 알아서…….”
우물거리며 시작된 이야기는 끊어질 듯 계속 이어졌다.
“그 날은 꽤 아팠기 때문에, 분명히 헛것을 보았거나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저는 꿈을 꽤 자주 꾸는 편이라.”
“제 꿈이요?”
“설마요!”
그는 당치 않다는 듯 펄쩍 뛰었다.
“그, 그냥 아쉬운 것들이 나옵니다. 실패했던 실험이 꿈에서는 성공하기도 하고. 수강 인원이 너무 많아서 강의실이 꽉 차기도 하고 그냥, 그런……!”
그가 쓸모도 없는 꿈 설명을 하는 사이에 스텔라의 까만 눈동자에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웨인 힐은 제가 완벽하게 헛소리를 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네?”
울지 말라는 말은 역효과를 가져왔다. 소매로 제 얼굴을 닦던 스텔라가 아예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만것이다. 서럽게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그게 라피스 양에 관한 꿈도 아주 안 꾸는 건……아니라서……. 그래서 으례 꿈이려니 하고 착각한 겁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아으…….”
그의 두 손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다시 허우적 거리기 시작했다.
“기억해요. 당연히 기억합니다. 안경을 벗겨 주셨죠? 네? 그리고 또…….”
그는 스텔라 주변을 이리저리 맴돌며 그날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 반가워서 웃어버린 겁니다. 아팠으니까. 진짜로요! 그러니까 울지 마요. 아으으.”
히끅이던 스텔라가 고개를 빼꼼히 들었다. 붉어진 눈동자로 교수님을 빤히 바라보니, 정말로 당황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 처럼 보였다.
“제가 왜 교수님의 꿈에 나와요?”
“……그, 그건.”
웨인 힐은 제 회색 머리카락을 맞지작 거리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해 드릴 수……없습니다.”
“어째서요?”
“어, 음.”
그는은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말을 찾고 싶었다. 가능하면, 그의 저열한 생각을 전부 가릴 수 있는 것으로.
하지만 그렇게 하게 되면.
……또 울리게 될까.
그는 스텔라 라피스가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피해자니까.
웨인 힐이 조금만 더 빨리 용기를 내었다면, 힘든일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진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 놓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교수니까요. 제가.”
스텔라는 가늘게 뜬 눈으로 힐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명석한 머리로 그가 했던 말을 하나씩 되짚었다. 그러자 어렵지 않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교수님, 혹시 절 좋아하세요?”
“무, 무, 무슨 말도 안되는 말씀을! 저, 저는 교수입니다. 어, 어, 어, 어떻게 학생을 상대로 그런!”
그가 너무 펄쩍 뛰며 부정하기에, 스텔라는 시무룩해졌다.
“아니었네요…….”
그녀가 양쪽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웨인 힐은 제 심장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닌건 아닌데…….교수는 학생을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하는건…….”
“금지되어 있나요?”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얼마 전에보니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아니, 아닙니다.”
“전례까지 찾아보셨어요?”
“아닙니다! 우연히 들은겁니다.”
“……찾아보신 건 아니네요.”
스텔라가 다시 기운 빠지게 대답하자, 웨인 힐은 홀린 듯이 진실을 고했다.
“찾아……봤습니다.”
“…….”
“하지만 그런것이 용인된다고 하여, 제 자신에게 면죄부를 발부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어째……서요?”
“우리는.”
웨인 힐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우리’라는 말을 정정했다.
“저와 라피스 양은, 객관성을 잃은 교수를 알고 있으니까요.”
“…….”
“같은 경험을 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스텔라 라피스는 이대로 평화롭고 공정한 아카데미 생활을 마무리 하길 바랐다.
그녀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미래에 대해 철저한 준비를 해야했으니까.
“그러니까, 라피스 양.”
“……알았어요.”
고집을 부릴 줄 알았던 스텔라는 생각보다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정중한 대답에 스텔라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잡으며 웃었다.
“감사하긴요. 저도 교수님을 좋아하는걸요.”
“아, 그러시구……네?!”
“좋아하고 있다고요.”
스텔라는 뻔뻔한 얼굴로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그가 서둘러서 뒷걸음질 쳤지만, 스텔라는 끝끝내 간격을 좁혔다.
“그, 그러니까 그런 게 곤란하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알아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교수님의 마음을 잘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저도 말씀드리는게 공평하잖아요.”
“마, 말씀하지 마세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 하면 안되는 거네요.”
스텔라가 기운 빠지게 대답하자, 웨인 힐은 또 심장이 쓰리도록 아파지고 말았다.
“정 그러시면 조, 조금만 듣겠습니다.”
스텔라는 왠지 교수님을 다루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다.
“좋아해요. 교수님.”
“…….”
“정말로요. 꽤 오래 좋아했는데, 혹시 모르셨어요?”
“그건 몰랐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저기, 언제부터인지……?”
“교수님이 절 언제부터 좋아하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저도 말씀 드릴게요.”
“그건, 마, 말씀 못드립니다…….”
저는 교수니까요.
그는 우물거리며 점점 효용성을 잃는 변명을 덧붙였다.
“……듣고 싶었는데.”
스텔라는 양쪽 어깨를 늘어 뜨리며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필연적으로 웨인 힐은 이번에도 사실을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가을입니다. 작년 가을에 꽃을 찾았던 날……. 제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걸까요?”
“교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중심을 잡았어야 했는데……. 이런 일은…….”
그는 잠시 미간을 손 끝으로 꾹꾹 누르고는 다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이런 대화는 졸업식 전 까지는 전면 금지입니다.”
“전면……금지요?”
“그렇게 예쁘게 말씀하셔도 안 넘어갑니다! 저, 저는 교수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좋아하는데요. 교수님은 제가 싫으세요?”
“물론 저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졸업식 전까지는……아니, 그러니까!”
웨인 힐은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런 초보적인 유도심문에 넘어가다니 그의 머리도 이제 제 기능을 잃은 것이 틀림 없었다.
게다가 멍청한 입술 끝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도무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하지만 웨인 힐 교수는 천재였다.
그는 시도때도 없이 훅 들어오는 스텔라의 고백에 완벽하게 대비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의 입에서 ‘그, 그야 물론 저도 좋아하지만.’이라는 말이 나오는 법은 없었다.
스텔라는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사실 그의 사정은 이해했다.
그 자신이 공정성을 잃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리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는 기간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차마 정의내릴 수 없는 관계로 가을과 겨울을 보내야 했다.
마지막 시험까지 ‘완벽한 차석’을 차지하여 분한 것만 빼면, 스텔라는 그럭저럭 훌륭하게 아카데미 생활을 마무리 했다.
졸업과 동시에 스위니 가문에서 일하게 된 것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다만 라피스 가문의 환원은 아직 멀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환원 요청을 넣고 싶었지만, 그녀는 완벽하게 준비를 갖춘 후에 그리 하고 싶었다.
다시는 제 이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리고.’
졸업식을 마친 스텔라는 교수실 앞에서 머뭇거렸다.
두 사람이 했던 약속에 의하면, 졸업식이 끝나면 어떤 말이든 해도 좋다고 했다.
좋아한다는 말이나, 뭐 그런 것들.
참 이상한 일이다.
어제도 제게 시큰둥하게 굴었던 교수님의 태도가 오늘이라고 해서 바뀔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스텔라는 교수실의 문을 노크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계시지 않는건가? 온실에도 없었는데.
스텔라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당겨보았다. 조교 선생님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안심하고 들어가자, 힐 교수님이 보였다. 그는 집무용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등을 기댄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교수님?”
작은 소리로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설마, 주무시나?
온갖 책이 늘어진 그의 책상을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섭섭하네.
분명히 오늘을 기다려 주실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평소와 같은 모습이다.
스텔라는 살금살금 다가가,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문득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안경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쿡쿡하고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녀는 그의 안경을 살살 벗겨냈다.
‘역시 치사할 정도로 잘생겼다니까…….’
날카로운 턱선은 물론이고, 높은 콧대나 여름날의 나무를 닮은 초록색 눈동자에 이르기 까지.
‘……눈동자?’
스텔라는 생각을 멈추고, 어느새 드러난 교수님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또 깨운 모양이다. 그녀는 안경을 든 채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얼떨결에 나온 인사에 그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도리어 삐딱하게 웃더니, 스텔라의 허리를 번쩍 들어 제 허벅지 위로 앉혀두었다.
스텔라는 얼떨결에 그의 가슴께에 머리를 푹 기대게 되었다.
“교, 교수님?!”
스텔라를 끌어안은 그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당신일 줄 알았습니다.”
스텔라는 학습능력이 좋은 학생이니, 만약을 대비해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설마 지금도 꿈이라고 생각하시는건 아니죠?”
“…….”
“죄송해요. 제가 당한 게 있다보니.”
“그건 죄송하게 되었군요.”
그는 스텔라의 머리카락 사이로 입술을 묻은 채 사과했다.
뭔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스텔라는 얼른 그에게 기댄 상체를 들어 올렸다.
물론 여전히 허벅지 위에 앉아있는 부끄러운 자세임은 변함 없었다.
“저어, 태도가 너무 변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약속이었으니까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아.”
스텔라는 비로소 제 손을 내려다 보았다. 교수님께 안기면서 그만 안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스텔라가 무엇을 찾는지 바로 알아차린 웨인 힐은 웃으며 그녀의 턱을 다시 제게로 당겼다.
“그런 건 당신이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불편하시 잖아요!”
“불편하지 않습니다. 잘 보이니까요.”
“하지만 멀리 있으면 제스처가 안 보인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당신을 눈 앞으로 데려 왔죠.”
“……교수님 원래 이렇게 뻔뻔한 성격이셨어요?”
“안 되나요?”
“아, 아뇨. 안 되는 건…….”
“좋아합니다. 스텔라 라피스.”
“네?”
“좋아한다고요.”
“아, 그야 물론 저도 좋아하지만…….”
예전에는 웨인 힐 교수가 할 법한 대답이 스텔라의 입에서 흘러 나오고 말았다.
그는 무척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스텔라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제게 이렇게 대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는 당연하지 않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학생을 대하는 것과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게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 그래도 너무 술술 말씀하시니까 이상해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건 제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실테죠.”
“하지만 당신이 싫다면, 다시 참아볼까요?”
“참아요?”
그는 대답 대신에 웃었다. 조금 날카로웠던 눈매가 꽤 부드러워 보일 때까지.
“참는 것도 제가 잘 하는 것 중 하나니까요.”
스텔라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라센 교수님의 밑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참아야 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참지 않으셔도……괜찮을 것 같아요.”
“정말인가요?”
그가 묻기에 스텔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두 사람 모두,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뿐이다.
무언가를 애써 증명하거나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스텔라 라피스가 생각한 대로.
“있죠, 교수님.”
스텔라는 그의 옷깃을 쥐며 속삭였다.
“저도 좋아하고 있어요.”
“그건……감사한 일이네요.”
그가 머리카락에 키스해주며 작게 속삭이기에, 스텔라는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진실로 웃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