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아카데미의 가짜연인 (2)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흐린 시야를 분명하게 하려는 것 처럼.
스텔라는 완전히 굳고 말았다. 오직 심장만이 살아서 귓 속을 쿵쿵 울렸다.
“교…….”
가까스로 그를 부르려던 순간. 그가 웃었다. 굉장히 상냥하게, 아니 어쩌면 달콤할 정도로 부드럽게.
미소를 그리던 입술이 벌어졌고, 깊이 안도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당신이었네요.”
“……네?”
스텔라는 얼이빠진 대답밖에 하지 못했다. 곧 그녀를 쥐었던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나갔다.
다시 바라본 교수님는 완전하게 잠이 들어있었다. 아주 행복하게 말이다.
스텔라는 안경을 든 채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안경을 무사히 내려 놓은 후, 그녀는 그가 붙잡았던 손목을 쥐어 보았다. 따듯했다.
「당신이었네요.」
낯선 호칭과 그 미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 *
남은 방학동안 스텔라는 힐 교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몇 번인가 온실에 찾아가기도 했지만,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없던 용기까지 끌어 모아서 교수실에 찾아갔을 때 였다.
“교수님은 학장님의 허가를 받고, 책을 구하러 출장을 갔는데요.”
아카데미에 계시지 않았던 거다. 스텔라는 실망감을 끌어안은 채 겨울 방학을 보냈다.
봄이 되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스텔라는 고민 끝에 생물학 관련 수업을 수강했다.
힐 교수님은 수업을 맡지 않으시지만, 가끔 궁금한게 생기면 질문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순수한 수업을 이런 식으로 이용한다는 걸 아시면 날 경멸하시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딱히 이야기를 나눌 구실이 없었다.
애초에 ‘그 날 왜 제 손목을 잡고 웃어주셨어요?’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물론 몹시 궁금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학기가 시작된 것은 좋았다. 운이 좋으면 일주일에 몇 번이나 힐 교수님과 마주칠 수 있었다.
“힐 교수님 안녕하세요!”
언제나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건 스텔라였다.
아무리 그가 먼 발치에 서 있다고 해도, 그녀는 조르르 달려가 그에게 인사했다.
“아……, 라피스 양. 안녕하세요.”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여느 학생에게나 들려주는 똑같은 인사뿐이었다.
의료실에서 보여주었던 미소나 목소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요?”
스텔라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교수님이 그리 물어 오셨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교수님. 그 보다 저, 이번에 생명 연구를 수강했어요.”
“그건 잘 되었군요. 듀란 교수님의 수업이지요?”
“네.”
“제 은사님이기도 합니다. 정말 좋은 수업이죠.”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잘 할겁니다. 라피스 양은 정말로 우수한 학생이니까요.”
“…….”
“라피스 양?”
“그…….”
스텔라는 제 발끝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꺼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교수님께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에 스텔라의 얼굴이 단 번에 밝아졌다.
“듀란 교수님은 학생들의 질문을 언제나 진지하게 받아주시거든요.”
“아, 아뇨 그게 아니…….”
“수업시간 뿐 아니라, 교수실에 찾아가도 환영해 주실거예요. 제게도 그러셨습니다. 그런 교수님께 배울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죠.”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여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 * *
교수님과 헤어진 스텔라가 도서관에 갔을 때, 사서 선생님은 무언가를 필사하고 있었다.
훼손 도서의 손실 부분을 채워넣는 작업으로,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동일 도서와 나란히 비교하며 꼼꼼하게 진행하는 일이었다.
“귀한 책인가봐요.”
“네. 이번 방학에 웨인 힐 교수님이 국경까지 가서 구해오신 책이죠. 한 권은 괜찮은데, 다른 한 권이 좀.”
“많이 낡았나요?.”
사서 선생님은 낡은 쪽의 표지를 보여주셨다. 금박으로 식물 전집이라 적혀 있었는데,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서 좀 너덜너덜했다. 여기저기 찢긴 자국도 있었다.
“힐 교수님께서 필사까지 해 주신다고 하셨지만……. 그렇게까지 해 주시면 너무 죄송하니까요.”
필사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업 필기 처럼 적당히 휘릭휘릭 적어 놓으면 글씨를 읽지 못하는 사람도 생길 테니까.
정성스레 적어야 하니, 자연스레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높은 집중력을 요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스텔라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선생님, 혹시 제가 필사해도 좋을까요?”
“이걸 혼자서?”
“네. 실은 이번에 생명 연구를 수강했거든요. 공부도 될 것 같고요.”
“그야 공부가 되긴 하겠지요. 게다가 스텔라의 글씨는 가지런하니…….”
“그럼 제게 맡겨 주세요. 그리고.”
스텔라는 괜스레 시선을 돌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다.
“다 쓰고나면, 둘 중 한 권은 웨인 힐 교수님께 돌려드리는 거죠?”
“네. 그렇게까지 해주면 고맙죠.”
“언제까지 해야하나요?”
“기한은 없어요.”
“최대한 빨리 할게요!”
“그렇게까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뇨. 제가 빨리 하고 싶어서 그래요!”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을 필사하면서 생기는 궁금증은 힐 교수님께 여쭈어 봐도 될 것이다. 그가 이 책의 주인이라고 했으니까.
스텔라는 얼른 자리에 앉아서, 의욕있게 펜을 들었다. 책이 다소 두껍다는 것 따위는 조금도 문제되지 않았다.
* * *
필사를 마치는데는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스텔라는 수업과 도서관 업무 그리고 각종 과제를 하면서도, 잠을 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필사에 매달렸다.
교수님에 대한 흑심으로 시작했지만, 막상 이렇게 한 장씩 읽어보니 꽤 재미있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필사가 끝난 주말, 스텔라는 교수님께 돌려드릴 책을 끌어안고 온실로 향했다.
멀리 힐 교수님이 보였다. 그는 새하얀 가운을 입고서 온실 주변의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있었다.
촤아아악!
작은 물그릇이 시원한 물을 뿌려댈 때마다 교수님은 즐거운 듯 웃고 계셨다. 재미있으신 모양이다.
스텔라는 얼른 근처로 다가갔다.
“힐 교……, 꺅!”
촤아아악!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던 힐 교수가 무심결에 물을 흩뿌린 것이다. 스텔라를 향해서.
스텔라는 본능적으로 책을 높이 들어올렸다. 이건 힐 교수님이 국경까지 가서 구해 온 귀한 책이라고 했으니까.
“라, 라피스 양!”
힐 교수가 당황하여 물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스텔라는 얼른 팔을 내려 책을 살폈다.
“괜찮아요. 책은 하나도 젖지 않았으니까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대답했으나, 교수님은 여전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게 물을 뿌리면서 뒤를 돌아본다는게 그만…….”
그는 품을 뒤져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번에도 깔끔하게 다림질이 되어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손수건을 들고 얼굴만 붉힌 채,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스텔라는 그제야 제 꼴을 바라보았다.
엉망이었다. 상의는 흠뻑 젖었고, 그 아래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신발 안쪽까지 물이 차서 묵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일단 무사한 책을 교수님께 건네 주었다.
“그럼……저는 옷을 갈아입으러 가야겠네요.”
애써 웃으며 돌아 서는데,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물론 필사를 하는건 스텔라의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필사는 어디까지나 교수님과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시작했던 건데.
하지만 이런 꼴로 대화를 하는 것도 우습고. 또…….
“잠깐만요. 라피스 양.”
곧 그녀의 어깨 위로 하얀 가운이 덮어졌다. 그가 언제나 제 몸처럼 입고 다니는 그 가운 말이다.
“교수님?”
“그, 그 저기……. 입고 가세요.”
그의 가운은 스텔라에게는 너무 커서 펄럭거리기만 했다.
“괜찮아요. 기숙사는 금방이잖아요. 물이 좀 떨어진다고 해서 딱히 창피하지도 않아요.”
“아니, 저 그래도 입고 가세요. 제발! 저, 저 같은 게 입던 거라 조금 더럽지만 그래도…….”
이제 그의 귀까지 빨갛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스텔라는 가운을 끌어 내리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입으세요! 제발요!”
하지만 교수님이 황급하게 가운을 여며주며 빌기 시작했다.
“정말로 괜찮대도요.”
“괜찮지 않습니다! 괜찮지 않아요. 아, 안 됩니다!”
“그냥 젖은 것 뿐인데요, 뭐.”
“하지만 그! 그게 비, 비쳐서…….”
스텔라는 그제야 어째서 교수님이 헐레벌떡 달려와 옷을 주셨는지 깨달았다.
왜 가운을 입으라고 애원할 정도였는지도.
괜스레 빚어진 어색한 분위기에 서로 시선이 어긋나고 말았다.
“……그.”
힐 교수가 먼저 입을 떼었다. 여전히 시선은 바닥에 둔 채로.
“가운은 아무때나 주셔도 됩니다.”
“바,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말려서 드려야 할텐데…….”
“괜찮습니다. 제가 잘못한 거니까요. 그냥 가져다 주셔도 괜찮습니다.”
스텔라는 ‘그럼 바로 다시 올게요.’라는 말만 남기고 얼른 기숙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젖어버린 가죽 구두에서는 괴상한 소리가 나고, 때때로 학생들의 묘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스텔라의 기분은 최고로 좋았다.
* * *
가운을 돌려드리자, 교수님은 스텔라에게 사과의 뜻이라며 딸기를 주셨다.
관리 부인의 딸기 밭에서 따왔다고 하셨다. 실은 어제 루이스가 나누어 준 것을 잔뜩 먹었지만, 모른 척 하고 ‘정말 맛있어요!’라며 열심히 먹었다.
“맛있다면 다행입니다. 그보다 책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야, 저도 도서관에서 일하게 된 지 일 년이 넘어가니까요.”
책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서 선생님의 사상에 물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건 그렇군요.”
힐 교수는 괜히 식물전집의 표지를 쓸어내렸다.
“필사 하면서 많이 어려웠을 텐데……. 그, 궁금한 건 없었습니까?”
물론 궁금한 것은 무척 많이 있었으니, 두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둠이 내릴 때 까지 말이다.
“늦었군요.”
먼저 시간을 자각한 것은 힐 교수였다.
“슬슬 기숙사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내일은 수업이 있으시죠?”
“네…….”
힐 교수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스텔라를 바라보다가 곤란하게 웃었다.
스텔라 라피스는 어려운 학생이다. 참 기특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교수가 되어서 그런 것을 솔직하게 표현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교수로서 그런 것들은 표현해야 하지만…….’
그 무뚝뚝한 휴이트 교수님도 이따금 학생에게 ‘잘했다.’며 칭찬을 건네곤 했다.
깨달음을 얻은 기특한 학생을 격려하는 것은 교수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이니까.
그런데도 스텔라에게는 그런 감정을 내비치기가 쉽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 저기. 음.”
자리에서 일어 선 힐 교수는 스텔라에게 다가갔다.
저를 빼꼼히 올려다 보는 시선과 마주치자 조금 창피했지만, 그는 ‘교수의 의무’를 되새기며 용기를 내기로 했다.
“어……어려운 책을 필사하고, 또 열심히 의문을 가진 것은 아주 후, 훌륭한 일입니다.”
조금 가식적인 말이 되었지만, 그에게는 이게 최선이었다. 더듬지 않는게 기적이었다.
“아주 잘했습니다.”
그리 말하는 순간에 어째서인지, 이안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모습말이다.
딱히 그 모습에 감명을 받은 것은 아니었건만, 힐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스텔라의 머리에 툭, 손을 얹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손바닥 아래로 놀란 얼굴이 보였다. 힐 교수는 저도 모르게 ‘아 실수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엇을 실수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며 성급하게 제 손을 떼어 냈다.
“죄, 죄송합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사과까지 하고 말핬다.
“네?”
놀라며 묻는 말에는 대답할 것이 없어서, 그는 고개만 숙이고 말았다.
그도 답을 알 수 없었다. 대체 그녀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며, 어떤 것이 미안했던건지.
어쨌든 확실한 건 지금은 늦은 시간이고, 스텔라가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닙니다. 이젠 정말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렇네요.”
그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스텔라는 더 캐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려가 고마웠다.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감사했어요.”
“저야말로 즐거웠……아니, 그러니까. 오랜만에 수업을 한 것 같아서 즐거웠습니다.”
“……네.”
온실을 나서려던 스텔라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교수님.”
“예?”
“혹시 궁금한게 있을 때는 또 가르쳐 주실건가요?”
“그야, 물론…….”
힐 교수는 대답을 멈추고 스텔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노트를 끌어안은 곧은 자세나, 지식을 사랑하는 저 새카만 눈동자에 이르기 까지.
언젠가 햇살 아래에 선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달빛 아래라고 해서 그 감상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스텔라 라피스는 언제고 아름답다. 아마 빛이 닿지 못하는 어둠 속이라도 그럴 것이다.
‘정신이 나갔구나. 아주.’
힐 교수는 멋대로 어둠 속 그녀를 떠올린 자신을 질책했다. 어떤 교수도 제 학생을 향해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그의 명석한 머리는 이미 오래전에 내려 놓은 결론에서 또 다시 눈을 돌렸다.
“듀란 교수님께 물어보는게 더 정확할 겁니다. 라피스양의 수업을 맡고 계시니까요.”
“하지만 제가 궁금한 건, 교수님이 구해오신 책을 읽다가…….”
“생명 연구 수업과도 관련되어 있으니 괜찮습니다.”
스텔라는 힐 교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놀란 것이다.
그가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허리를 자르며 끼어 드는 것은 처음 보았으니까.
‘……하긴.’
스텔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옆에 있으면, 좋지 않은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으실테니까.’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건 물을 뿌린 것에 대한 사죄였을 뿐이다.
“죄송해요. 교수님.”
스텔라는 사과하기로 했다.
“저는 교수님이……그러니까 수, 수업이 좋거든요.”
“저도 라피스 양에게 수업하는 것을 좋아 합니다. 다만, 담당 교수님이 있는 과목을 제가 멋대로 하는 것이 좀.”
“알아요.”
얼른 대답한 그녀는 억지로 양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런데도 오늘은 이것저것 대답해 주신거잖아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그녀가 다시 몸을 돌렸다.
“라피스 양.”
힐 교수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멈추고 싶지 않았는데, 미련한 발이 그대로 굳고 말았다.
“정말입니다. 대단히 기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텔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다정한 말에 또 감정이 멋대로 휘둘리고 만다. 정말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째서. 정말 왜 하필이면 이런 마음이 생긴걸까? 외면할 수도 없이 선명하도록…….
“어린 나이에 그런 지적 호기심을 따라갈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저, 어리지 않아요!”
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울컥하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올해 생일도 지났으니까, 이제…….”
성인이다. 비록 웨인 힐과는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고, 아직 학생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라피스 양을 어린 아이 취급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게.”
그가 제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며 여러가지 변명의 말을 찾았지만, 스텔라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아마 지난 가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속앓이를 견딜 수 없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게 불공평하지 않은가.
스텔라는 그의 말 한마디에, 행동 하나에 신경을 쓰는데. 그는…….
“힐 교수님.”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게 제 마음을 이야기 하는 순간에.
이런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는.
하긴 상관 없없다. 이건 예쁘고 아름다운 고백과는 다르다. 그저 아프기만 한 썩은 이를 툭 떨구어 내는 것 같은 일일뿐이다.
“사실, 저 교수님을.”
그리고 바라본 그의 얼굴에 묘한 공포감이 서려있었다. 표정만 봐도 알것 같았다. 이 마음의 끝이 어떻게 될지.
“아니……신경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냥, 저 혼자 괜히 조금.”
좋아했어요.
중요한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한껏 벌어졌던 입도 결국에는 솔직함을 포기하고 다물어졌다.
정말이지, 스텔라 라피스.
고백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일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거짓말은 그렇게 뻔뻔하게 잘 했으면서.
그녀는 도망이라도 치는 것 처럼 뒤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무어라 들려오는 말이 있었지만, 듣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아마 어떤 말이든, 그녀의 마음을 멋대로 휘저어서 결국에는 아프게 만들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