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88화 (88/92)

?88. 이 모든 것을 영원아래에

루이스가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아니, 어쩌면 달이 한 가운데를 지나는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선명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꿈…….

그녀는 작게 그 단어를 되뇌였다. 그 안에서 루이스는 아카데미의 학생회실에 있었다.

학생회실에 대해서는 지금도 벽에 남은 작은 흠집 하나까지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선명하다. 그러니 자연스레 조금 전의 꿈은 꽤 사실적이었다.

루이스는 그 안에서도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잉크의 재고를 확인하고, 이안에게 식단표를 전달하고 또……. 어쨌든 평범한 학생회의 일을 했다.

꿈에서마저 일을 하다니.

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웃음이 났다. 현실에서 일에 진절머리가 났다고 몇 번인가 말 했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일을 하는 꿈을 꾸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은것을 보면 말이다.

눈을 깜빡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여전히 낯선 방의 장식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옆에서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도.

루이스는 완벽하게 무방비한 상태로 잠든 이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정이나 표정이 담기지 않은 고요한 그의 모습은 차라리 그림에 가까웠다. 누구라도 푹 빠져들게 만드는, 그런 그림 말이다.

루이스는 조금 몸을 움직였다.

몸이 가까이 붙어 있던 탓에 그의 눈가가 잠시 움찔거렸다.

깨우고 싶지 않은데.

루이스는 조금 더 가만히 머물렀다가, 그가 다시 깊은 잠에 빠진 후에야 침대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로 바닥을 디뎠다. 약간 차가웠는데, 이불 속이 더웠기 때문인지 되려 기분이 좋았다.

루이스는 침대 근처에 적당히 떨어져 굴러다니는 얇은 숄을 주워들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옷을 던져두는 일은 없는데, 어제는 좀.

좀, 분위기가 그랬다.

어쩌면 결혼식을 바로 앞두고 있었기에 두 사람 모두 들떠버린 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에 부드러운 숄을 둘렀다.

루이스는 창가에 기대 선 채 창문을 밀었다.

끼익, 소리가 나고 말았다. 조심스레 열기 위해 느리게 밀었던게 되려 역효과였을까.

루이스는 침대를 돌아보았다. 그는 잠들어있다.

안도의 숨을 쉴때, 얼굴에 따듯한 봄바람이 닿았다. 루이스는 다시 창 밖을 보았다.

참 밝다.

이안은 자신이 언제나 빛과 함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카데미의 옥상에서 말이다.

어디에 있어도 보안상의 이유로 그의 곁에는 빛이 있다 했었다. 그러니 별이 내리는 작은 빛을 만나기는 무척 어려웠다고.

루이스는 새삼 그 말을 실감했다.

궁에는 빛이 많았다. 고개를 삐죽 내밀어 보니, 몇 명의 병사들이 조용히 순찰을 도는 것도 보였다.

잠들지 않는 곳이로구나. 여긴.

식물들에게 좋은 환경은 아니다. 나무와 꽃을 키워내는데 어둠도 대단한 역할을 하니까.

사실 인간도 어둠이 필요하다. 특히 언제나 빛 아래에서 버텨야 하는 이안에게는.

루이스는 어젯밤 만찬에서 들은 황제의 말씀을 떠올렸다.

이안의 그늘이 되어달라 하셨다. 늘어져서 기분좋게 지친 눈을 감을 수 있는 그런 자연스러운 장소 말이다.

아마 이안에게 어둠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루이스는 조금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 내렸다. 다시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우리가 결혼할 계절을 그대가 골라주었으면 좋겠어.」

언젠가 이안은 그리 말했다.

그리고 루이스는 그 ‘언젠가’를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만다.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

그 날은 투명한 보석이 달린 반지를 받았다. 그는 치즈가 많이 들어간 식사와 디저트까지 만들어 주었다. 맛있었다.

‘조금만 먹었어야 했는데.’

혹시 과거로 편지를 보낼 수 있다면,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사근사근한 분위기에 함께 녹아들었고, 자연스레 조금 더 깊은 관계를 허락하게 된 것이 그 날이었으니까.

그날 밤에 그는 몇 번이라도 고백하는 말을 들려 주었다. 속삭이는 소리로 혹은 신음에 가까운 소리로. 물론 어느 쪽도 듣기 좋았다.

서로 노곤해진 분위기에서 마주보게 되었을 때, 그는 결혼식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루이스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걸고 풀어내며 장난을 치다가, 이렇게 대답했었다.

「봄. 봄이 좋아요.」

그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루이스의 생각을 멋대로 추측했는데, 분하게도 정답이었다.

「오직 봄 만이 기념일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대는 계절에게도 공평하니까. 여름은 나, 가을엔 시몬, 겨울엔 그대의 생일이 있어. 하지만 봄은 텅 비어있지.」

설명을 마친 그는 루이스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래, 그럼 봄에 하는 거로 하자.’라는 말을 속삭였고, 자연스레 등을 토닥여 재워주었다.

그 후로 이안과 루이스는 차근차근 결혼식을 준비했다.

황가의 결혼식이란 언제나 전통적인 절차를 소중히 여기는 법이니,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다. 선례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더하는 것도 빼는 것도 없이.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스텔라 라피스가 루이스를 위해 많이 일 해 주었다. 온실과 루이스 사이를 오가며, 루이스가 온실 사업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조율해 주면서.

헤셰 경은 루이스가 지칠 때마다 언제나 찾아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오래 지나지 않아 이안에게 불려 나갔지만 말이다.

클레어는 이안의 보좌관으로서 그리고 루이스의 친구로서 두 사람을 도와주었다.

웨딩 드레스는 물론, 초야에 입을 속옷을 고르는 일 까지 모두 클레어의 도움을 받았다.

음, 클레어의 속옷 취향은 생각보다 대담했다. 덕분에 루이스는 수위를 낮추느라 몹시 고생했다. 결론적으로는 실용성이 아주 떨어지는 속옷을 사게 되었다.

클레어는 이미 딘 크리시스와 무사히 결혼하여, 크리시스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안은 가끔 그녀를 ‘클리어 이리스!’라고 부르며, 딘이 화를 내도록 만들었다. 아마 놀리는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루이스 스위니.”

문득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서, 루이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잠에서 깨어난 이안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오드모니얼 씨.”

루이스는 얼른 창문을 닫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뒤에서 뻗어온 그에게 손을 붙들렸다.

곧 어깨 너머로 손이 끌려갔고, 건조한 입술이 손등 위를 지긋하게 눌러왔다. 창문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불어들었다.

“그냥 둬도 괜찮아.”

한참 만에 그가 입술을 떼어 내며 그리 말했다. 아마 창문을 열어 두자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어깨 근처에 닿은 그의 몸이 뜨거웠다.

“이불이 조금 두꺼웠던 것 같죠?”

“음, 약간.”

봄이라고는 해도 때때로 추울 때가 있으니, 이안의 이불은 조금 두꺼운 편이었다.

“제가 깨웠나요?”

“아니.”

그는 바로 부정했다. 하지만 뒤에서 루이스를 끌어 안은 후에는 그 말을 번복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어. 허전한 기분에 눈을 떴으니까.”

“제가 항상 여기에서 자는게 아닌데, 허전한 기분이 드셨다고요?”

루이스는 제 목 근처를 감싸는 단단한 팔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앞으로는 그렇게 될 거고, 난 항상 적응이 빠르거든.”

“저도 제 방이 있어요.”

“그럼 그 방에서 같이 잘까?”

“……각자 잔다는 선택지는 없었던 거네요.”

“음. 없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가 어깨 위로 턱을 기대며 조르듯 속삭였다. 그렇게 말하면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끔 새벽에 눈을 뜰 때.”

루이스가 알았다는 대답을 하려는데, 그가 다른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곁에서 숨 소리가 들리는게 좋아.”

안심이 되거든. 이라며, 그는 낮게 웃었다.

“처음부터 몰랐다면 괜찮았을 텐데 말이야.”

“제가 오드모니얼 씨의 자립심을 흔들었나요?”

“완전히.”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너그러우신 내 약혼녀.”

그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조금 헝클어진 루이스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아……. 맞다. 있죠.”

“음?”

“우리 결혼식 말이예요. 자리 조정이 필요해요. 설리반 남작부인과 탈리 교수님의 자리를 떨어뜨려야 할 것 같아요.”

“협상이 결렬된 모양이군. 어떻게 알았지?”

“온실에서 남작부인의 파티에 출장을 다녀왔거든요. 탈리 교수님은 마지막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죠.”

“저런. 자리에 대해서는 말해 두도록 하지.”

“고마워요.”

“그리고 또 내가 도울 일은 없나?”

“제발 내일은 클레어를 제대로 불러주세요.”

“크리시스 부인이라고?”

“그게 싫으시면, 그냥 이름을 부르셔도 되고요.”

“딱히 싫은 건 아니야. 다만 발칙한 딘 크리시스가 바짝바짝 열이 오른 얼굴이 귀여울 뿐이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드모니얼 씨는 예전부터 은근히 딘을 참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학생회에서도 그랬다. 딘이 먹고싶다고 말한 것을 정성스레 만들어 주고, 혹여 불평을 해도 너그러이 들어주곤 했다.

“그야, 좋은 녀석이니까.”

“그건 찬성할 수 없네요.”

“딘 크리시스와 있으면 다시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딘은 졸업 후에도 이안에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요즘도 ‘회장님 미쳤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질 정도로 말이다.

아마 이안은 딘의 그런 점을 좋아하는 걸 거다.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결같은 버릇없음을.

“학생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은 공감되요.”

“게다가 그대와는 여전히 좋은 체스 파트너고.”

졸업 후, 네 사람은 여름마다 한 번씩 작은 체스 대회를 여는 전통을 만들었다.

개인전에서는 이안이나 클레어가 우승을 차지하지만, 팀으로 진행하는 침묵 체스에서는 언제나 루이스와 딘이 이기곤 했다.

“올해 부터는 유학에서 돌아온 공자님도 체스대회에 참가하시겠네요.”

“그건 그다지 걱정되지 않아. 나는 시몬에게 체스로 져 본적이 없거든.”

“하지만 그건 졸업 전 이야기잖아요.”

시몬이 승리를 붙잡을 수 없었던 잔인한 시절 말이다.

“그러니, 이젠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그건 기대되는데.”

“어쨌든 내일은 클레어를 제대로 불러 주세요.”

“그리하지. 그대가 날 제대로 불러준다면 말이야.”

그가 조건을 붙이자, 루이스는 곤란하게 웃었다.

얼마전에 그와 약속했었다. 결혼식을 하고나면, 오드모니얼 씨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주기로. 그 약속을 했을 때, 이안은 정말 많이 기뻐했었다.

“제대로……부를거예요. 연습도 몇 번 했어요. 실수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연습을 해야할 만큼 어려운 일이었나?”

“그, 그야.”

루이스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왠지 간지러운 것 같아서요.”

“잘 되었군. 그대와 나 사이에는 마침 그런 것이 필요하거든.”

그러니 그는 모처럼 입술이 가까워진 간지러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숙여 깊이 입을 맞추었고, 끌어안은 팔에는 힘이 들어갔다.

봄 바람에 나른하게 식었던 몸에서 금방 다시 열기가 감돌았다. 마냥 따듯하지만은 않은, 그런 것이.

더운 호흡만 남기고 떨어진 그의 입술이 새하얀 어깨 위에서 크게 벌어졌다.

살결 위로 날카로운 이가 닿았다. 다른 날이라면 벌써 이를 박아 넣을 듯 깨물고, 살갗을 빨아 들이며 붉은 자리를 만들었을 거다. 그런것을 아주 좋아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욕구를 자제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아마 드레스 때문일까.

루이스가 고른 웨딩드레스는 어깨가 전부 보이는 형태니까.

부드럽게 스친 입술이 움푹파인 등 한가운데에 머물렀다. 고작 닿기만 한 것 뿐인데, 루이스가 움찔 하며 어깨를 떨고 말았다.

그는 아마 웃었을까. 그랬을 거다. 그 곳이 무척 예민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부드러운 젖은 살이 등 위로 뭉그러진다. 간지러운 것이 필요하다고 했던 그의 말이 어쩌면 이런 의미였을지도.

저릿한 감각이 흘러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반쯤 흘러내린 숄을 꾸욱 말아 쥐게 되었다.

“흐으…….”

그의 입술이 조금 더 아래를 향해갔다.

“오드모니얼…….”

루이스가 가까스로 그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도리어 지탱해 주던 팔을 풀어 얇은 숄 안쪽으로 긴 손가락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흣, 제발요.”

간곡한 말이 흐르고 나서야, 그는 겨우 그녀의 등에서 입술을 떼어냈다.

“……제발?”

“아까 했잖아요.”

“그랬지.”

저녁 만찬에서 돌아오자마자 몇 번이나 말이다.

“쉬, 쉬어야 하지 않을까요?”

루이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물론 솔직히 말하면, 그의 몸 상태는 쉬지 않아도 충분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루이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군, 그대에게는 휴식이 필요하지.”

이안은 한숨을 뱉으며 루이스의 어깨 위로 턱을 기대었다. 아주 실망한 목소리였다.

“어차피 결혼식이 끝나면 또…….”

초야잖아요. 라는 말은 부끄러워서 차마 말하지 못했다.

“너무 멀어.”

“겨우 하루에요.”

“겨우 하루라니.”

이안은 매정한 소리를 하는 제 약혼녀가 얄미웠다.

차라리 예쁘지나 말든가.

달빛이 내리는 창가에 얇은 숄만 두르고 서있는 제 약혼녀는 꼭 달의 여신 같아서, 나약한 인간은 그 아름다움을 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여신님께서 무척 피곤하신 모양이니, 그는 가까스로 제 욕망을 억눌렀다.

“겨울에 결혼식을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어.”

“왜요?”

“태양이 빨리 지고, 늦게 떠오르니까.”

그건 초야가 빨리오고 늦게 끝난다는 점에서 좋다는 뜻일까.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이 단순해지신 거예요?”

“인간의 기본 욕구는 본디 단순한 것이야.”

툴툴거리는 대답에 루이스는 하얗게 웃고 말았다.

“어쨌든 기대하고 있으니까.”

“뭐를요?”

물론 그런 건 한두 개가 아니다. 음란하기 짝이 없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것도 있었고.

“그대가.”

그래도 가장 기대하는 것은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결혼 선물이 될 테니.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

루이스가 봄날의 햇살 아래서 그리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그는 스르르 웃게 될 것이 틀림 없다.

“소박하시네요.”

루이스가 몸을 빙글 돌렸다. 둘은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녀의 얼굴에 피곤함이 남아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이안은 괜히 수척해진 뺨을 쓸어 내렸다.

“……내가 그대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면 좋겠는데.”

“괴롭히고 계세요. 훌륭히도요.”

루이스는 발 끝을 들어 장난스레 입을 맞추고 웃었다. 하지만 이안은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난 그냥, 그대를 힘든 자리로……끌고 온 것이 아닌가 싶어서.”

“함께 불행을 감당하기로 했잖아요.”

루이스는 몇 년전에 나누었던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가 그녀의 발을 붙들고 세상에서 가장 멋 없는 청혼을 하던 날에 나누었던 약속 말이다..

“물론 불행하지는 않지만요.”

루이스는 얼른 솔직한 마음을 덧붙였다.

“이렇게 피곤한 얼굴을 하고서?”

“피곤한 게 불행한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오늘부터는 긴 휴가죠. 온 종일 누워서 식물도감을 읽을 거예요.”

맛있는 걸 사방에 쌓아 놓고서 말이다. 분명히 행복할 거다.

“그럼 나는 그 옆에서 잘까, 그대가 무릎을 빌려준다면 말이야.”

“물론 빌려드려야죠.”

“아주 좋은데.”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이리 와. 내 신부님께서 꾸벅꾸벅 졸다가 혼인의 맹세를 잊어버리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으니까. 푹 자야지.”

이안은 루이스의 허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루이스는 다리가 달랑달랑 들린 채로 침대까지 안전하게 운반 되었다.

이불을 턱 끝까지 덮은 루이스는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였다.

“아무리 잠이 와도 혼인의 맹세를 잊을 만큼 암기력이 나쁘지는 않아요. 이래뵈도 아카데미에서는 수석을 놓치지 않은 학생회장님이거든요.”

“그래? 그거 참 우연이네, 나도 수석을 놓치지 않은 학생회장님이었는데.”

이안은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저어, 들어볼래요……?”

“그럴까.”

루이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내일의 풍경을 그렸다.

아마 루이스와 이안은 많은 사람들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일생 중 가장 좋은 옷을 입고서, 서로를 곁에 둔 채.

그리고 축하하는 소리가 신전의 높은 천장을 채웠을 때. 두 사람은 심장을 채운 감정을 소리로 전하게 될 것이다.

“저, 루이스 스위니는.”

“저, 이안 오드모니얼은.”

같은 감정으로, 같은 목소리로, 같은 장소에서.

진실되고 기나긴 고백을 전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영원 아래에 둘 것을.”

서로를 바라보며.

“맹세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