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87화 (87/92)

?87. 오직 루이스 스위니만이

아직 새해가 되지 않은 겨울.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루이스는 온실 앞으로 조르르 달려나갔다.

마차가 멈추었고 문이 열리자, 이안이 파리해진 얼굴로 내렸다.

루이스는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불렀다.

“오드모니얼 씨.”

“…….”

이안은 몹시 기운이 빠진 얼굴로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일 년동안 호칭을 정리해 달라고 했더니, 기껏 돌아온 대답이 바로 저거였다.

“오드모니얼 씨?”

차라리 회장님 쪽이 나은것 같은데. 그랬다가는 평생 회장님이라고 불릴 것 같아서 차마 지적할 수도 없었다.

“그래, 스위니 씨.”

대신 이안도 루이스를 이따금 스위니씨라고 불렀다.

그리 부르는 건 복수를 위해서 시작한 일인데, 루이스는 무어라고 불러도 언제나 똑같이 웃었다. 부르는 말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생각해 봤는데, 그대가 고른 호칭은 조금 비효율적이지 않나 싶어.”

“왜요?”

“너무……길지 않나?”

“전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부르는 사람이 괜찮다니 뭐라고 반박할 수는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드모니얼 씨는 이상했다.

아마 클레어나 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세 시간동안 깔깔거리며 이안을 비웃을 것이 분명했다.

“그보다, 오드모니얼 씨.”

“예, 스위니 씨.”

“마차에서 머리를 쥐어 뜯기라도 했어요?”

루이스는 유난히 엉망이 된 그의 머리카락을 지적했다.

분명히 궁을 나설 때는 시종 할아버지께서 단정하고 예쁘게 해 주셨을텐데.

“조금, 만지작 거린 것 뿐이야.”

사실은 쥐어 뜯은 것이 맞았다. 도무지 긴장 되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그의 대답에 루이스는 발 끝을 들어올려, 그의 머리칼을 살살 정돈해 주었다. 이안은 루이스가 편해지도록 살짝 허리를 굽혔다.

이안은 머리 정돈에 집중하는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루이스가 성장기의 막차에 탑승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건 막차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만나지 못했던 일 년 사이에 루이스는 부쩍 더 어른스러운 테가 났다.

그러니까, 굳이 의식하기는 싫었지만 더 예뻐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음, 됐다.”

작게 속삭인 그녀는 두어 걸음 정도 멀어졌다.

“이제 괜찮아요. 말끔해 보여요.”

“참고로 묻지만, 오늘 스위니 씨의 기분은 어떻지? 그러니까 아버님 스위니 씨 쪽 말이야.”

이안의 입에서 ‘아버님’이라는 말이 나오는 건 역시 어색했다. 루이스는 괜스래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좋지는 않으세요.”

“……역시 그렇겠지.”

오늘 그가 온실에 온 것에는 어떤 목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그를 돌봐주신 스위니 부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더불어서 루이스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말씀드리고자 했다.

쉽게 말하면.

‘루이스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하여튼 좋은 건 전부 다 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다.

수도 제일의 딸 바보, 스위니씨에게 말이다.

‘원예가위를 들고 날 찌르실지도.’

이안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미래를 그렸다.

“하지만 그건 제가 서류를 잘못 분류해서 그런 것 뿐이예요. 아직 일이 익숙치 않아서……. 하지만 아버지는 오드모니얼 씨에게 화풀이를 하실 분이 아니예요.”

아니 그 분이 화가 나신 건, 루이스가 실수한 탓이 아닐 거다.

아마 이안이 인사를 오겠다고 연락을 넣은 이후로 내내 기분이 좋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쩌면 삽질을 시키실지도 모르지.’

삽질은 조금 자신있었기 때문에, 이안은 부디 제게 기다린 미래에 위험한 원예가위가 아니라 안전한 삽질이 있기를 바랐다.

* * *

스위니 씨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역시 이안의 탓이었다.

“잘 못들었습니다?”

마주 앉은 스위니씨는 이안을 향해 위와 같이 말씀하셨다. 몹시 무서운 얼굴로.

“물론 당황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루이스 스위니는 이제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참이고, 여러모로 불안하시겠지만…….”

“불안하게 하실겁니까?”

“물론 불안하게 하지 않습니다!”

“이거 참. 방금 전에 하신 말씀을 5초도 되지 않아 뒤집으시다니.”

스위니씨는 콧방귀를 끼면서 얼굴을 획 돌렸다. 아무래도 단단히 토라진 것이 틀림 없었다.

이안은 차마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어찌 말해도 그는 말 꼬리를 붙잡아서 이안을 괴롭힐 테니까 말이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건……루이스가 아홉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위니 씨가 아무도 묻지않은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여름이였죠. 루이스와 저는 반딧불을 보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늪까지 함께 갔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감격에 젖어 있었는데, 이안은 그가 어떤 점에서 감격하는지 몰라서 곤란했다.

“밤이 되었고, 작은 루이스 스위니는 제 품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머리가 몇 번이나 툭툭 떨어졌죠. 아아, 얼마나 귀여웠는지!”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루이스가 소리 질렀지만, 그의 맹렬한 회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반딧불이 보이기 시작한 곳에서, 저는 몇 번이나 아이의 통통한 뺨을 두드렸습니다.”

“아버지 제발…….”

루이스가 간절히 애원했고, 이안은 그제야 제가 가져야 할 행동 양식을 파악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신명나게 맞장구를 치는 것이다. 귀한 어른께서 소중한 경험을 말씀해 주시는데, 중간에 이야기가 끊기면 안되는 법이다.

“보라색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습니다. 루이스는 똑똑하고 명석하니 금방 반딧불을 찾아 냈죠.”

똑똑하고 명석하지 않아도 어둠속에서 빛나는 반딧불을 찾아내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이안은 똑똑하고 명석하게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역시, 똑똑하고 명석하군요.”

아니, 도리어 찬동하고 나섰다. 루이스는 그냥 양쪽 귀를 막고 싶었다.

“루이스는, 내 귀여운 아이는 그 반짝이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저를 빼꼼히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때, 말하길.”

그리고 스위니 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너무 좋아요, 라고…….”

“아버지, 설마 우세요?”

루이스는 촉촉하게 빛나는 아버지의 눈가를 바라보며 의심스레 물었고, 스위니 씨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결국 자리를 뜨고 말았다.

보다못한 스위니 부인이 빙긋 웃으며 설명을 해 주었다.

“조금 섭섭해 하시는거란다.”

저 모습 어디가 그렇게 보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제가 뒤 따르겠습니다.”

이안은 양해를 구하고 곧바로 스위니 씨를 따랐다.

온실 밖으로 나간 그는 커다란 전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짚은 채였다.

이안이 다가가자, 스위니 씨가 뒤를 돌아보았다. 더 없이 차분한 얼굴로.

“전하.”

그의 시선은 건조했다. 마치 조금 전의 호들갑이 거짓말이었던 것 처럼.

“예.”

“저는 워렌 백작님의 임종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는 이안의 외조부를 언급했다. 경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알고……있습니다.”

그 분은 다시는 아픈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신분이 뒤섞여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혼란을 경계하라고.

“알고 계신데도, 오늘 이 곳으로 걸음 하셨군요.”

“예, 그렇습니다.”

“전하.”

그에게서 짙은 입김이 빠져나왔다. 아마 그의 숨이 그만큼 뜨거웠기 때문이리라.

“말씀하세요.”

“저는 돈에 미친놈입니다.”

“…….”

“잘난 척을 하는 건 아니지만, 재물이라는 괴물을 멋대로 부릴 줄도 압니다.”

“알고……있습니다.”

“황실의 입장에서야 간지러울 정도나, 저는 이 괴물로 몇 가지 잔재주도 보여드릴 수 있을겁니다.”

물론 나라의 생존을 결정할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닐 터다. 그러나 그들을 귀찮게 하고 열받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협박으로 들으셨다면, 아주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전하.”

“자격이 있으십니다.”

“압니다. 제가 아니라면 누가 그럴까요. 전하께서 제 딸을 메마른 땅으로 데려가려 하시는데!”

부릅뜬 눈이 이안을 향했다. 그 안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안에 대한 걱정까지 함께 있었다.

“그리고……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제가, 전하께요.”

“루이스 스위니가 제게 도움이 될 겁니다. 훌륭한 사람이니까요.”

“그건, 너무 당연해서 감흥도 오지 않는 군요.”

“저도 루이스 스위니에게 도움이 될 테고요.”

“모르겠습니다. 부족하군요. 아직 부족합니다.”

스위니 씨는 고개를 저었다. 이안은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제 자식을 메마른 땅에 보낼 수 있는 아비는 없는 법이니.

“그러니 전하, 제게 보여주셔야 겠습니다.”

루이스의 미래가 안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는 확실한 증표 말이다.

* * *

며칠이 지난 후, 수도는 다소 소란스러워 졌다. 제법 흥미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한 탓이다.

이안 오드모니얼에게는 죽은 황비가 정해 둔 약혼녀가 있었고, 그 약혼녀 역시 출신이 불분명한 여자라는 것이다.

물론 귀족에게 ‘출신이 불분명하다.’라는 말은 ‘천하다’라는 의미였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소문은 작은 티파티에서 커다란 연회를 휩쓸기도 했다.

이안과 함께 아카데미를 나온 이들은 ‘출신이 불분명한 여자’라는 말에서 자연스레 루이스 스위니를 떠올렸다.

그들은 루이스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굳이 그녀에 대해 언급하거나, 두둔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루이스에 대한 소문은 주로 좋지 못한 쪽으로 퍼졌다.

아카데미에서 정직하지 못하다는 의혹을 받았었는데도, 최우수 학생이 된 것을 보면 천박한 돈을 쓴 것이 틀림 없다던가.

전하에게 버릇없이 구는 못 배워먹은 여자라든가.

손에 흙이나 묻히고 돌아다니는 야만인과 약혼한 전하가 불쌍하다던가.

물론 그 소문을 접한 루이스가 허리가 아프도록 웃었다는 점에서는 유쾌했지만, 이안으로서는 꽤 열받는 이야기 였다.

발이 달린 소문은 루이스의 이야기를 품고 멀리, 더 멀리 퍼졌다.

그리고 스위니 가문이 이례적으로 신년회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쑥덕공론의 정점을 찍었다.

“어머니.”

궁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루이스는 맞은편에 앉은 스위니 부인을 바라보았다.

“걱정되니?”

부드러운 걱정이 돌아왔고,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었을 뿐이예요.”

스위니 부인은 최근 들어 꽤 깊은 근심에 빠졌다.

“본가의 힘을 빌려오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저는.”

루이스가 말하는 ‘본가’란 스위니 부인이 속해 있었던 남작 가문을 뜻했다.

물론 그 남작 가문도 루이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난리가 났었다.

돈 한푼 주지 않고 내 쫓은 딸이 낳은 아이가 황태자의 약혼녀로 거론된 데다가, 황실에서는 굳이 그것을 부정하지도 않았으니.

루이스의 외조부는 몇 번이나 온실에 편지를 보내고, 심지어는 찾아오기도 했다.

뒤늦게 남작 자리를 어머니께 물려주겠다며, 정식 후계자로 삼겠다는 소리도 했었다.

그는 루이스가 황실과 인연을 맺는데 괜찮은 명예가 있어야 한다고, 걱정하는 척을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이제와 루이스의 할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어진 걸 거다. 손 하나 대지 않고 황실의 외척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스위니 부인은 여전히 제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스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데, 무작정 거절을 할 수는 없었다.

“저는 두 분의 딸이지, 그 분의 손녀는 아니거든요. 물론 정신적인 부분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 루이스는 어머니를 위해 단호하게 결론을 내려 드렸다.

“거절하세요.”

“하지만.”

“거절하세요. 아셨죠?”

스위니 부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실은 신년회에서 외조부께서 제 할아버지 노릇을 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나는 괜찮지만, 네가 걱정이 되어서…….”

“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용인들이 신경써서 말아준 머리가 경쾌하게 흔들렸다.

“이렇게 완벽하게 갖추어 입었잖아요? 도무지 야만인으로 보이지 않아서 모두 실망하겠죠?”

루이스가 제 소문을 이야기 하며 너무나도 씩씩하게 웃기에, 스위니 부부는 무어라 화를 낼 수도 없게 되었다.

* * *

신년회는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 해의 첫 날로 이어지는 긴 연회였다.

이 때에는 수도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기회를 잡은 지방 귀족들도 올라와 황제께 인사를 올릴 수 있었다.

물론 그 많은 인사를 황제가 홀로 받았다가는 과로로 쓰러질 것이니, 그 자리에는 대리인이 있기도 했다.

선황비께서 계실 때도 있었고, 힐라드 공작이 있기도 했다. 올해는 이안도 그 자리를 채울 자격이 되었다.

스위니 가문이 인사를 올릴 때는 황제께서 직접 인사를 받았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꽤 화제가 되었지만, 황실에서 루이스를 어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되지 못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황제는 ‘그 소문’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져, 새로운 해를 맞이 하는 연회가 시작 되었다.

그 순간만큼은 신년하례를 멈추고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렸다.

자연이 만든 거대한 하늘의 시계가 움직여, 마침내 새해가 되는 순간.

사람들은 술잔을 높이 들어올렸고, 음악가들은 연주를 시작했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 선 것은 그 때였다.

제 하나 뿐인 반려를 잃은 후, 그는 단 한 번도 춤을 추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드리워진 슬픔과 분노가 여전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또한, 다시는 어느 누구도 그의 곁에 두지 않으리라는 경고와도 같았다.

그러니 사람들은 목석같은 황제를 일어서게 한 이가 누구인지 몹시 궁금해 했다.

그가 나가아는 길 마다 귀족들은 뒷 걸음을 쳤고, 고개를 조아렸다. 자연스레 만들어진 인간의 길 끝에서 황제는 걸음을 멈추었다.

루이스 스위니의 앞이었다.

“어린 스위니, 오랜만이군요.”

그는 다정한 말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춤을 청하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제게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건조하여 갈라지고, 굳은살이 잔뜩 남은 부지런한 손이다.

아마 매일같이 일을 하시느라, 이 귀한 손을 돌볼새도 없으셨던 거다.

루이스의 아버지도 마침 비슷한 손을 갖고 계셔서, 아버지들의 손이란 대개 이런 다정한 모양새를 하는가 싶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상냥한 제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가능하면 당당하게 행동하고 싶었는데, 어쩔수 없는 놀라움이 표정으로 새어 나오고 말았다.

황제는 루이스를 홀의 가운데, 가장 화려한 곳으로 직접 인도했다.

잠시나마 멈추었던 음악이 다시 흘렀다.

“일단 고맙다고 해야겠습니다.”

루이스가 잔뜩 긴장하여 뻣뻣하게 발 끝을 내 딛는 동안 황제가 다정히 이야기를 걸었다.

“제게……고마운 일이 있으신가요?”

루이스가 묻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미소는 이안이 장난스레 웃을 때와 닮아있었다.

“처음으로 어머니와의 내기에서 이겼습니다.”

“폐하께서 내기를 하셨다고요?!”

그것도 선황비와 말이다.

“덕분에 어린 스위니와 먼저 춤을 추는 것은 나의 특권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황제는 웃었다. 어른들은 항상 제 아이의 미래를 궁금해 했다.

특히 항상 사이좋게 지내는 세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선황비는 ‘오라비 같은 시몬’이 유리하다 했고, 황제는 ‘잘은 모르겠지만, 제 아들은 최고입니다.’라는 이유로 이안이 유리하다 했다.

선택은 루이스 스위니의 몫이었고, 내기에서 이긴 것은 황제였다.

“철 모르는 어른들의 주책입니다. 어찌되었든 세 사람의 우정의 맹세가 굳건하여 기쁩니다.”

“그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어요.”

루이스는 이제야 제가 아는 이야기가 나왔다며 웃었다.

“저희 세 사람은 언제나 굳건하죠.”

“압니다. 우리들의 자랑이기도 하니까요.”

오랫동안 춤을 추지 않았는데도, 황제의 리드는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긴장했던 루이스가 어느새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어쩌면 이안과 비슷하여 더욱 그리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린 스위니.”

“네.”

“사실 내기에 이겨서 고마운 것은 아닙니다.”

황제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을 향했다. 꼭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얼굴로.

“어린 스위니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누구도 저 아이의 곁에 설 수 없었을 겁니다.”

곁에 선다는 것은 단순하게 혼인을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신하가 아닌, 동등한 존재로서 곁에 머무는 것 말이다.

그러니 황제는 오롯한 자리에 선 자야말로 진정한 마음을 찾아 결혼해야 한다고 여겼다.

결혼마저 누군가의 충성이나 이득을 위해 희생하고 나면, 평생 아무도 곁에 둘 수 없을테니.

“제 자식이 그렇게 사는 것을 바라는 부모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이런 위험한 곳에 제 딸을 보내려는 부모도 없는 법입니다.”

“그건…….”

루이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서 증명하려는 겁니다.”

“우리들이요?”

루이스의 물음에 황제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다른 이에게 넘겨 주었다.

빙글 몸을 돌려 바뀐 상대를 확인하니 그 곳에는 선황비께서 서 계셨다.

“저, 전하?”

“붙잡으세요. 빛 아래서 쌓아온 60년의 기술을 보여드릴테니까요.”

선황비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루이스의 두 손을 붙잡아 당겼다.

루이스는 이제야 황제가 이야기 했던 ‘우리’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증명하려는 지도.

황가는 공식적으로 루이스 스위니를 환영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리라. 더불어 그녀를 깊이 존중하고 있다는 것도.

“그 아이는 총명했습니다. 꼭 지금의 당신처럼요.”

그건 이안의 어머니, 이 나라의 하나 뿐인 황비 전하의 이야기 였다.

“그 아이에 대한 소문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은 저 역시 압니다. 그 우수함마저 조롱거리가 되었다죠.”

“……그건.”

“하지만 그 아이는 황가의 일원으로서 자랑스러울 만치 일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군가의 약한 곳을 가장 먼저 공격하기 마련이다.

탄탄한 황가에 있어서 홀로 출신이 다른 황비란 가장 뜯기 좋은 연한 살점이었다.

루이스와 닿은 선황비의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 아마 분노하는 것이리라.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그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비록 지금의 귀족들은 그 아이를 인정하지 않겠지만, 기록은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을……전부 남겨두니까요.”

루이스는 성가실 정도로 이안을 따라다녔던 사관들을 떠올렸다.

“그 아이의 평가는 시간이 흐른 뒤 반드시 복구 될 겁니다. 자랑스러운 아이니까요. 하지만.”

선황비는 다시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그리고 아주 확고한 어조로 단언했다.

“내 아이 가운데 누구 하나도. 만만히 보이도록 두지 않을 겁니다. 실수는 한 번으로도 이미 많습니다.”

“제가……귀족이었다면 좋았을걸요.”

루이스는 문득 그리 중얼거렸다. 그녀의 신분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여러사람에게 신경 쓰게 하는 것이 미안했을 뿐이다.

“그랬어도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좋다는 점은 똑같습니다. 어차피 나는 내 아이들을 위해 수고를 들이는 걸 좋아하니까요.”

수고를 들인다는 말씀에는 언제나 비밀리에 보내주셨던 시몬의 생일케이크가 떠올랐다.

“아! 당근 케이크는 늘 맛있었어요. 몇 년 동안 감쪽같이 속았지만요.”

“앞으로도 몇 번 더 속을겁니다.”

“그건……기대되네요.”

선황비의 속임수는 분명히 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말이다.

“루이스 스위니.”

“예.”

그 즈음에서 선황비의 움직임이 느려졌고, 곧 두 사람은 홀 가운데에 멈춰서게 되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많이 웃고, 먹고, 놀아야 합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말입니다.”

“……전하.”

“물론 일이 많을테니 이제 많이 노는 건 어렵겠군요.”

선황비는 장난스레 웃으시고는 곧 루이스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이제, 아무리 눈치를 발바닥에 붙이고 다니는 이라고 하더라도, 한가지는 확실하게 알겠군요.”

“황가의 어른들께서 절 환영해 주신다는 거요?”

루이스가 얼른 대답했지만, 선황비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가장 많이 닮은 젊은 황태자가.”

선황비는 루이스의 어깨를 빙글 돌려 뒤를 보도록 했다. 멀리 이안이 새파랗게 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선황비께서 루이스에게 키스하는 모습에, 모든 것을 집어 던지고 달려오는 모양이다.

“그대에게 푹 빠져서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말이죠.”

반쯤 웃음이 섞인 말이 끝난 뒤에는 가볍게 루이스의 등을 밀어 주셨다.

“가 보세요.”

루이스는 얼핏 고개만 돌려 선황비를 바라보았다.

“어서 가 보세요. 어디든 그대가 원하는 곳으로요.”

* * *

물론 루이스는 이안과도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동안 이안은 보는 사람이 다 부끄러울 정도로 즐거워 했다.

선황비께서 ‘그대에게 푹 빠져서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진 테라스로 피신 한 후. 이안은 바람 빠진 고무공 처럼 추욱 늘어졌다.

“피곤하세요?”

루이스가 걱정하여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루이스의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황비께서 키스를 남긴 귀여운 이마 말이다.

물론 신년에는 누구나 서로의 축복을 빌어 주면서 이마에 키스를 할 수 있다. 그건 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도 순서가 있듯 축복의 키스에도 순서라는게 있는 법이다.

“오드모니얼 씨.”

루이스는 새해가 되어도 변하지 않은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얼굴에 분노가 가득 찼어요.”

“그야, 할머님께 화가났으니까요. 스위니 씨.”

이안이 루이스의 말투를 따라하며 새침하게 대답했다.

루이스는 선황비께서 어째서 그리 웃으셨는지 이제야 알았다. 이안의 이런 반응이 무척 재미있으셨던 모양이다.

“그대는 내 거야.”

이안은 고집스럽게 선언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 관절과 근육은 물론이고, 넓고 광활한 이마도 나의 것이지.”

“늘 말씀드렸지만, 전 제 거에요.”

“그대가 가진 건 이안 오드모니얼이고.”

굳이 그를 통째로 안겨 선물해 줄 것까지는 없었는데 말이다.

그는 저를 올려다 보는 루이스를 바라보다가 한 숨을 쉬었다.

“또 일 년을 기다려야 하나…….”

“기다리다니, 뭘요?”

“새해에 그대를 가장 먼저 축복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

그는 맨들맨들한 루이스의 이마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다가, 늦게나마 두 번째로 축복의 키스를 남겼다.

따듯한 입술이 가볍게 닿고 떨어지면서 그는 축복을 속삭였다.

“그대와……새해를 맞이하는 건 처음이기도 하고. 모든 처음은 특별하지.”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아직도 오드모니얼 씨와 하지 않은 것이 있다니 놀라워요. 정말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놀란 중에 미안하지만, 그대와 내가 하지 못한 것은 아직 얼마든지 있어.”

“하지 못한 거요?”

루이스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물었고 그는 그냥 웃고 말았다.

“뭔데요?”

“글쎄……뭘까?”

그는 루이스의 턱을 조금 더 들어 올렸고, 자연스레 입술이 얽혀 들었다.

서로가 가진 부드러움을 탐하는 시간은 조금 길어졌다. 이제는 가볍게 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게 되었으니까.

키스는 늘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곤 했다.

상냥한 말을 그리는 입술의 모양은 어떠한지. 호흡을 받아들이는 길은 어떤 온도를 가졌는지. 모든것을 핥고 삼키며 헤아리게 되므로.

그 너머의 열렬한 애정을 깨닫게 되는 순간 부터는 머릿속이 점점 몽롱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루이스는 그에게 완전히 무게를 기댄 채, 한 가지 사실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녀가 읽었던 원작 ‘아카데미의 가짜 연인’은 스텔라가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완결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원작에 속하지 않은 시간이다.

이야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완전히.

물론 원작의 형태는 오래전 부터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이제는 악역이나, 주인공과 같은 말에 구애받지 않게 될 것이다.

루이스는 두 눈을 조금 더 꼬옥 감았다.

이제부터는 그 누구도 정해놓지 않은 새하얀 미래만이 있을 것이다.

오직 루이스 스위니만이 살아갈 수 있는.

* * *

……잠깐.

밝고 희망찬 내일을 꿈꾸는 루이스의 머릿속에 눈치없이 홍보 문구 하나가 떠올랐다.

「마지막, 그 이상의 열망을 담아서 19금 개정판이 발행됩니다!」

그 개정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카데미 졸업 이후를 다룬 내용이 추가 된 증보판으로 ‘남주의 몸이 개연성이다’라는 찬사와 함께 별 다섯개의 행진을 이어갔다.

설마, 루이스도 그 개연성을 확인하게 되는 걸까.

“……왜 그래?”

뭔가 이상을 느꼈는지, 이안이 입술을 떼어내며 물었다. 루이스는 귀 끝까지 빨개져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미쳤지, 루이스 스위니. 무, 무슨 개연성을 어떻게 확인하려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표정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래……? 응?”

그는 양 손으로 루이스의 얼굴을 감싼 채, 부드럽게 달래는 듯 물어왔다. 게다가 몇 번이나 입술 끝을 가볍게 맞춰왔다. 그녀의 기분이 괜찮은지 확인하며.

하지만 그건 역효과였다. 자꾸 이렇게 닿으니까 마음속의 혼란만 더 깊어졌다.

몸이 개연성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도 곤란하고, 가짜면 속상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걱정스레 바라보는 이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루이스는 적당히 거짓을 말하려고 했다.

“그, 그냥 좀…….”

“아아. 사관들이 기록할까봐 걱정하는건가?”

“……네?!”

“하지만 오늘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곤란할거야. 황실에서 그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날이니.”

“하지만 지금을 기록하는 건 좀……!”

“알아. 그들도 테라스의 비밀을 기록할 만큼 짓궂은 사람은 아니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안은 안심하라는 듯 루이스를 꼬옥 안아주었다. 느릿하게 등을 토닥여 주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그의 상냥한 품에 얼굴을 부비며 작게 웃었다.

역시 이렇게 안겨있으면 안심이 된다. 좋아하는 심장 소리를 듣고, 옷 너머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몸…….

몸이 개연성…….

으음. 아무래도 당분간은 조금 더 원작에 얽매여 있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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