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어서 와, 루이스 스위니
‘신문에서 봤어요. 열흘도 넘게 마차를 타셨다죠?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네요. 몸이 아프진 않아요? 클레어도 건강한가요? 있죠, 저는 요즘.’
루이스는 잠시 펜을 멈추었다. 제가 적은 글을 읽으며 펜대를 빙글 돌린 후에는 남은 내용을 적었다.
‘휴이트 교수님이 내 주신 조별과제로 아주 바빠요. 하지만 토론이 필요한 내용이라 재미있기도 해요.’
너무 작위적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문자는 말과 달라서 표정도 억양도 보이지 않으니 이 정도가 딱 좋았다. 조금이라도 지친 기색이 보이면 이안이 걱정할 테니까.
게다가.
‘어차피 보낼 수 있는 편지도 아닌걸.’
루이스는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린 후에, 기껏 완성한 편지를 두 번째 서랍 속에 넣어버렸다.
그녀의 두 번째 서랍에는 이렇게 보내지 못한 편지가 몇 장 더 들어있었다.
이안과 루이스.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편지로 소통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루이스가 이안의 근황을 알기 위해서는 신문을 읽는 수 밖에 없었다.
순방 때문이었다.
순방이란 제국의 지배를 받는 여러 왕국을 하나씩 돌아보는 것으로, 몇 년마다 한 번씩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중요 행사였다.
거의 매일 이동하는 강행군을 펼치는 이안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은, 바람의 꼬리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모처럼 찾아왔던 여름방학에도 만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서로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이런 시기에도 루이스는 편지를 적었다.
늘 적는 것은 아니었다. 이따금 이런 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때만 그렇게 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처음에는 좋은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기분은 아주 좋아졌다. 남몰래 쿡쿡거리며 웃을 만큼.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따금씩 마음에 욕심이 피어 오르기도 했다.
지금 당장 만나고 싶다……. 든가, 하는.
욕심은 루이스의 약한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서 새파란 멍을 만들곤 했다.
평소에는 아프지 않지만, 무심결에 닿으면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아릿했다.
어느새 짙어진 멍 자국을 더듬어 가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루이스는 깜짝 놀라며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흘러 있었다.
“루이스?”
스텔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별과제를 함께 하기 위해 찾아 온 것이다.
루이스가 달려나가 문을 열자,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스텔라가 들고 온 블루베리 빵 덕분이었다.
“간식까지 가져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웃으며 맞이하자, 그녀는 말 없이 들어와 책상 위에 간식 쟁반을 올려놓았다.
스텔라는 잠시동안 루이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어들어, 그 위로 치즈가 들어간 크림을 잔뜩 바르기 시작했다.
“스텔라?”
루이스는 의아해 했지만, 스텔라는 크림을 많이 바르는 것에만 집중했다.
빵과 크림의 비율이 같아졌다. 스텔라는 그 위로 굵은 설탕까지 야무지게 뿌렸다. 이제 완성 되었다.
“아 해봐.”
“네?”
무심결에 대답하자, 루이스의 입안으로 빵과 크림이 밀려 들어왔다.
설탕은 아삭거렸고, 크림은 질척거렸다. 서로 다른 식감은 밀도 높은 빵과 만나, 비로소 하나의 맛이 되었다.
눈이 번뜩 뜨일 만큼 달고, 정신이 돌아올 만큼 고소했다.
“맛있네요.”
루이스는 얼른 차를 준비하여 스텔라의 앞에 놓아 주었다.
“조금 우울했는데. 고마워요, 스텔라.”
“……별거 아니야.”
루이스는 책장에서 과제를 위해 준비해 둔 노트를 찾았다.
흘긋 돌아보니 스텔라도 크림을 듬뿍 얹은 빵을 우물거리고 있었는데, 그녀 역시 뭔가 속상한 일이 있어 보였다.
“도서관에 일이 많은가요?”
“거긴 괜찮아. 몇 명 더 일하는 학생이 생겼거든.”
“음, 그럼 힐 교수님과 무슨 일이 있었어요?”
“콜록!”
스텔라가 홍차를 잘못 삼킨것을 보니, 루이스의 추측이 옳은 모양이다.
물론 지금까지 스텔라는 힐 교수님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 한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혹시 이야기할 기분이 되면, 저는 언제든 괜찮아요. 스텔라.”
친절한 이야기에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스텔라는 여전히 루이스에게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제 고민에 루이스를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여겼다.
하지만 루이스의 고민이라면 들어주고 싶었다. 무엇이든 말이다.
“루이스도.”
“네?”
“내게 이야기해도 괜찮아. 무, 물론, 네가 괜찮다면 말이야.”
루이스는 조금 놀란 얼굴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 두 사람이 꽤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고민을 들어주겠다’는 말은 처음이었으니까.
루이스는 그녀가 먼저 내민 선의를 부끄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모처럼 가져온 과제 노트를 잠시 미뤄 두었다.
“있죠, 스텔라.”
그리고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제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스텔라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대신 계속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이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그대도 남은 1년 동안 믿을만한 인재를 찾아두는 편이 좋아.」
믿을만한 사람이라. 거기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도 포함되는 걸까?
* * *
또 시간이 흘렀다.
마지막 시험을 앞둔 루이스는 극도로 예민해졌다. 지금까지 이루어온 ‘우수 학생’이라는 금자탑이 무너질까 봐 불안했다.
루이스는 새삼스레 이안을 존경하기로 했다. 작년의 그가 어땠는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했다.
그는 학생회장의 일을 완벽히 하는 중에도 수석을 차지했다. 이에 더불어 느긋하게 연애도 하고 가끔은 요리까지 해냈다.
이제야 이안이 아침마다 피곤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매일 이렇게 늦게까지 깨어있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이제 자정이 되었음을 확인한 루이스는 기지개를 켜고, 책을 덮었다.
하늘을 보니 방향을 알려주는 별이 빛을 내리고 있었다.
아마 지금 쯤 이안은 저 빛을 길잡이 삼아서, 이동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바쁜 처지를 불평하지 않고, 즐겁게 농담을 건네면서 말이다.
이안의 왕국 순회는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여 점점 멀어져갔다. 이제 그는 태양이 뜨고 달이 이러지는 시간마저 다른 곳에 도달했을 거다.
거리가 멀어진 만큼 그와 루이스가 공유하는 것은 점점 줄어들었다.
소식을 나누는 일도 없고, 같은 시간 아래 서는 것 마저 불가능했다. 아마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도, 날씨도 다를거다.
‘좀 속상하네.’
루이스는 부스럭거리며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그리움이 과거의 순간을 가져왔다.
「자다가 용맹하게 이불을 걷어차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고.」
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을 들었을 때 한마디 해 줄 것을 그랬다.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는 일은 주의한다고 해서 어떻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무의식의 산물이니까.
‘나중에 만나면 꼭 말해 줘야지.’
루이스는 마음속에 가득한 ‘밀린 이야기’에 새로운 말을 조심스레 쌓아 두었다.
“……나중에 만나면.”
이 말이 굳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오늘 낮에 스텔라가 가져다준 신문 기사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너, 널 괴롭히려고 가져온 건 절대 아니야!’라는 말을 수십 번 반복하면서 그 기사를 건네 주었다.
대체 무슨 기사길래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걸까 했더니, 이안에 대한 것이었다.
순회에서 얻은 외교 효과와 그의 남은 일정을 정리해 둔 것으로, 애초 계획보다 일정이 늘어났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신년제를 앞두고 겨우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길게 늘어나고 말았다고.
이건 루이스가 알고 있던 귀국 시기와는 달랐다. 예전에 이안이 보내준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으니까.
‘꽤 긴 일정이 되겠지만, 그대가 아카데미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에는 함께 있을거야.’
그러니 겨울의 입구에는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훨씬 더 늦어질 모양이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추운 겨울에 먼 거리를 이동할 이안과 클레어 그리고 헤셰가 걱정되었다.
연세가 많으신 시종 할아버지들께는 너무 가혹할 것 같았다. 다들 건강해야 할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루이스는 생각을 멈추고 베개에 머리를 마구 비볐다.
이안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고, 루이스가 하루빨리 그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사사로운 것이다.
……작은 것이다.
‘섭섭해 하면 안 돼.’
루이스는 제 마음을 다잡았다. 무엇보다 이런 데 정신이 팔려서 시험을 망치는 것도 싫었다.
“괜찮아.”
루이스는 다시 소리를 내어 말했다.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서.
“괜찮아.”
방 안에 퍼지는 소리의 울림을 따라서 루이스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 날은 꿈을 꾸었다.
꽤 시끌벅적한 꿈으로 루이스는 아주 많이 웃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사방이 고요한 것이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 * *
졸업식이 가까워도 큰 감흥은 들지 않았다. 루이스는 그 보다도 눈 앞에 닥친 문제에 집중했다.
학생들의 시험 관련 불만 처리, 관리 부인의 식단 감시 그리고 졸업식 준비에 이르기 까지 말이다.
졸업식이 하루가 남은 날에는 루이스의 손에 ‘퇴거 시간표’가 들려 있었다.
언젠가 이안이 ‘내년에는 네가 하게 될 일’이라며 보여주었던 그 서류 말이다.
“그 서류는 무엇인가요?”
올해의 수석 남학생이 루이스에게 차를 건네며 물어왔다.
참 눈치가 좋은 아이다. 마침 따듯한 차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학생회 활동은 그의 언어능력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서,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하게 되었다.
“졸업생들의 기숙사 퇴거 시간이에요.”
“다들 시간이 다르네요?”
그의 질문은 언젠가 그녀가 했던 것과 같았다. 루이스는 그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내일은 각자 원하는 만큼 시간을 들여서 이곳 생활을 마무리 짓게 되니까요.”
“그런데, 그 시간표를 왜 회장님이 관리하시는 거예요?”
“그야, 모든 학생들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역대 학생회장들의 신성한 마지막 업무야.」
“……역대 학생회장들의 신성한 마지막 업무라고 배웠거든요.”
“그럼 회장님은 늦은 시간까지 여기에 계시는 건가요?”
“맞아요.”
“회장님의 가족분들께서는 오래 기다리셔야 겠네요.”
“그래서 졸업식이 끝나면 먼저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렸어요. 이 마지막 업무는 아주 중요하다고 들었거든요.”
“전대 회장님께 말이지요?”
“맞아요. 그리고 저도 가르쳐 드려야 겠네요.”
루이스는 살짝 몸을 돌려 그와 정면으로 마주 앉았다.
“내년에도 이 중요한 일을 잘 부탁드릴게요.”
“설마, 저요?”
그가 몹시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반응마저 작년의 루이스와 비슷했다.
루이스는 아마 이안도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 했다.
“제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아마 그렇게 될거예요.”
“설마요. 저는 아직 말도 익숙하지 않고요.”
“하지만 전통을 제대로 발음하게 되었잖아요?”
“줜통이요?”
“아이참, 전통!”
“……줜통?”
“일부로 이러는거죠! 그렇죠?! 지난 번 발표에서 제대로 발음하는 걸 다 들었다고요.”
“제가 줜통을 제대로 발음 했다고요? 설마요.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연이었을 거예요.”
그가 사르르 웃으며, 루이스의 잔에 차를 조금 더 따라 주었다.
아무래도 잘 할 수 있으면서 괜히 저러는 것 같은데.
“제 어학실력은 아직 한참 멀었어요. 그러니까, 회장님께서 마지막까지 절 도와주셔야 해요.”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루이스는 한숨 섞인 대답과 함께, 그에게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사무장님께 전해주세요.”
그는 루이스가 건넨 붉은색 파일을 소중하게 끌어 안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예, 따르겠습니다. 회장님!”
……대체 저 소리는 언제까지 할 생각인 걸까.
* * *
졸업식에서 루이스는 제 목표를 달성했다.
“축하합니다. 루이스 스위니.”
원했던 대로 최우수 학생이라는 명예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뛰어난 성적보다도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칭찬하고 싶군요.”
으음, 하지만 노력만으로는 이런 명예를 누릴 수 없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하실건가요. 학장님.
그래도 목표한 것을 이루었다는 것은 아주 기뻤다. 루이스는 이걸 위해서 아카데미에 왔던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다른 기쁨도 있었다. 입학식 때의 복수에 성공한 것이다.
학장님의 축사 말이다.
이번에는 딘 크리시스가 활약했다. 그는 남 몰래 학장님의 정장에서 원고를 빼돌리는데 성공했다.
소중히 챙겨온 원고가 사라진 학장님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학생회가 준비해 둔 3분 49초의 축사를 낭독했다.
학장님과 루이스는 때때로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녀에게 최우수 학생의 명예를 내린 것을 몹시 후회하는 얼굴이었다.
아마 축사가 가장 마지막 순서가 아니었다면, 루이스는 제 목표를 이룰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 번 내려진 이 명예가 거두어진 적은 없었으니, 루이스는 안심하고 졸업의 즐거움을 누렸다.
물론 이번에도 그 즐거움은 짧았다.
그녀는 올해도 ‘학생회에서 도움을 드립니다.’라고 적힌 종이 띠를 두르고, 기숙사 앞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게되었다.
“외부인은 기숙사에 들어가시면 안 된다고요! 사용인 분들은 마차로 돌아가세요! 앗! 거기, 거기! 가방을 방치하기 전에는 이름을 표기해 두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루이스는 작년보다 훨씬 나은 대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루이스, 그 동안 너무 재미있었어, 우리 가끔 수도에서도 인사하고 지내면 어떨까?”
작년에는 다가오는 친구들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할수 없었던게 아쉬웠다. 그래서 올해는 따로 준비한 것이 있었다.
“고마워요. 이건 제 명함이에요. 언제든 연락주세요!”
주소와 이름 그리고 고맙다는 말이 적힌 명함이었다.
아마 몇 명 정도는 꽃이 필요하거나, 루이스가 보고 싶을 때 연락을 줄 것이다.
정신없었던 기숙사 퇴거가 마무리 되어갈 때 즈음에는 딘 크리시스도 마차에 올랐다.
“그럼 나중에 보자.”
“네. 그렇게 해요.”
“어.”
루이스는 그의 성의없는 인사가 참 좋았다.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뜻인 것 같아서 말이다.
다른 학생들도 모두 보내고, 마지막으로 사무실에 학생 전원 퇴거를 보고했다.
“일 년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스위니 회장.”
루이스는 확인 사인을 받은 파일을 끌어안고 웃었다.
“회장도 바로 돌아가나요?”
“이것만 학생회실로 가져다 두고 나면요.”
“정말로 마지막 일을 하러 가는군요.”
직원의 말 대로, 이 서류를 자리에 가져다 놓고나면 루이스는 회장의 의무에서 물러나게 된다.
사무실에 인사를 드리고 나와 학생회실로 돌아가는 길에는 저절로 걸음이 느려졌다.
사실 급할 것도 없었다. 루이스의 거주권은 자정까지 보장되어 있으니까.
게다가 하늘에는 예쁜 달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걸음마다 어둠이 번져가고, 노란 빛이 제 형태를 선명하게 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루이스는 어느새 어두워진 복도를 따라서 학생회실 앞에 도착했다.
혹시 누군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문 너머는 조용하기만했다.
하긴 정신없는 졸업식을 겪었으니, 다들 쓰러져서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문고리를 붙잡았다.
문을 밀어열자,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어왔다. 아마 누군가 창문을 열어 놓고 잊은 모양이다.
이 추운 계절에 창문을 열어 놓다니. 아무리 바빴다고 해도 대체 무슨 정신이람.
루이스는 바람의 저항을 느끼며 완전하게 문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 달빛이 내리는 창가에 선 한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루이스는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어서 와, 루이스 스위니.”
이안이었다.
“……아.”
루이스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뭘 그렇게 놀라?”
그가 창틀에 몸을 기대며 웃었고, 루이스는 가까스로 말할 수 있었다.
“잘못……본 줄 알았어요.”
루이스는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대가 나를 잘못 볼리 없지.”
“어, 어떻게 여기 계세요? 출입허가라든가……. 아니, 그 전에 신문에서 봤어요. 신년제에 겨우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멀리 가셔서, 그래서 오늘은 여기에 계실 수가…….”
루이스는 자신이 아주 많이 당황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쓸데없이 말이 늘어지는 것을 보면 분명했다.
그러니 그녀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말 끝을 애매하게 흐렸다.
자연스레 시선도 다른 곳을 향하고 말았다. 차마 바라 볼 수가 없는 이유를 모르겠다.
다시 만나는 순간을 몇 번이나 상상했었는데도.
“신문에서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은 조금 흘러내린 루이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대답했다.
“나는 그대와는 약속했으니.”
그의 손이 턱선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자연스레 고개가 들려 시선이 마주쳤다.
“……으.”
“왜 그래?”
“그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실은 말 뿐이 아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을 늘 쌓아 놓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만나면 분명히 쉴 새 없이 떠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지금은 말이 서로 엉겨붙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저런.”
그가 안타까워하는 소리를 내며, 몇 번 더 뺨을 쓸어 주었다.
“그럼 내가 먼저 이야기 할까. 일단 그대의 졸업을 축하해. 이 날을 기다렸지.”
“……고마워요.”
대답하기 쉬운 말이었기 때문일까. 잔뜩 굳어있던 루이스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최고 우수한 학생이 된 것도 축하해. 물론 그대가 아니라면 누가 될까마는.”
“그것도 고마워요.”
“학생회장의 일도 아주 잘 했다고 들었어. 고생했어.”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중요한 일이지.”
“그건 그래요.”
비로소 루이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바쁜 중에도 늘 편지를 써주어서 고마웠어. 내게는 유일한 낙이었지.”
“바로 답장을 주셔서 저도 재미있었어요. 비록 최근에는…….”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없었지만요. 라는 말은 잔뜩 흐려졌다.
“그래도 그대는 편지를 썼을거야. 그렇지?”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을 어찌 아느냐고 물었다.
“그야, 나도 보내지 않을 편지를 썼거든.”
“그런 일을 하셨어요?!”
“이상한가?”
“조금요.”
이안은 실리주의자에 가깝다. 보내지도 않을 편지로 종이를 낭비하는 것이 신기했다.
“꽤 재미있었어. 긴 일정에 유일한 낙이었지. 아마 그대가…….”
그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루이스는 그가 쌓인 말을 필사적으로 헤집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은 그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리웠던 거겠지.”
그리고 그는 ‘미안’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웠다는 말에 어째서 사과가 달라 붙는 걸까.
“아마 나도 그대처럼 말이 엉겨붙은 모양이야.”
“저보다는 훨씬 나으신것 같은걸요.”
“아냐, ‘아마 그리웠다’는 형편없는 말이 나온 걸 보면.”
루이스는 제 얼굴에 닿은 그의 손이 평소보다 아주 많이 뜨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슷한 긴장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니, 되려 루이스의 마음이 편해졌다.
“혹시 바라신다면.”
루이스는 조심스레 제안했다.
“다시 말씀해 주셔도 괜찮아요. 어느 나라의 어순으로 말씀하셔도 저는 다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이 너그러운 말과 부드러운 미소는 이안이 가장 그리워 한 것이다.
가끔 몸이 무거워 움직여지지 않는 날에는 ‘모든 일정의 끝에는 햇살같은 루이스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지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 그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나아갔다.
사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피로로 몸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도 그런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하게 가까워진 거리에서 루이스가 먼저 그에게 머리를 폭 기대었다.
그리웠던 감각이 심장에 닿자, 그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끌어 안았다.
실감이란 언제나 늦는 법이라더니, 이제야 그가 목표로 둔 사람에게 도달했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깨달음은 곧 감격이 되었다. 그는 제게 닿은 작은 몸을 몇 번이라도 당겨안으며 존재를 확인했다.
혹시 바란다면, 다시 말해도 좋다고 했었던가.
이안은 작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마음에 쌓인 말이 아무리 많고 복잡하더라도, 결국 그가 그녀에게 건네야 하는 말은 오롯이 하나였다.
그 외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고, 사실 필요치도 않았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잔잔하게 빛이 흐르는 금빛 머리카락 사이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