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눈을 치울 때 꽤 고생 좀 하겠는데.”
그는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루이스는 그 모습을, 정확히는 셔츠 너머로 어슴푸레 비치는 살갗을 물끄러미 보았다.
“루이스.”
그가 부르자, 루이스는 깜짝 놀라며 얼른 대답했다.
“네, 네?!”
“나중에 제설 작업에 투입될 수도 있어. 그때는 학생회 창고에 있는 털 장화를 빌려 신고 나오도록 해. 꼴은 우습지만, 아주 따듯하니까.”
“회장님도 그 털 장화를 신으시나요?”
“내가? 그런 걸?”
그는 삐딱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날씨가 추워도 얇은 코트 한 장만 달랑 입고 다니시는 분께서, 털 장화를 신을 리 없었다.
“손은 좀 어때?”
그가 다가와 손에 말아준 수건을 걷어 냈다. 따스했던 수건은 어느새 차게 식었다.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이리 줘봐.”
루이스는 제 옆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다. 아마 꽤 진심일 것이다.
루이스는 이런 사람을 두고, ‘다리를 만지는 건 이상하다.’라든가, ‘셔츠가 젖어서 비친다.’와 같이 삿된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얼른.”
그가 재촉했고, 루이스는 손을 내밀었다.
루이스의 손은 여전히 검붉었다. 간지러움이나 따가움은 처음보다 줄어들었지만 불편한 감각은 여전했다.
“아무래도 내가.”
그가 한숨 섞인 말을 건네며 루이스의 손을 따듯하게 감싸 주었다. 신기한 일이다. 똑같이 놀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다른 걸까 싶을 정도로.
“장난을 걸지 말 것을 그랬어.”
“시몬에게요?”
“그래.”
“그래서 저를 이렇게 도와주시는 거예요? 눈싸움의 발단이 회장님이니까요?”
“그래 그대가 이렇게 된 것이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니, 나 때문이지.”
“가벼운 동상인데요. 뭐.”
“동상이라는 말 앞에 가볍다는 말을 쓰면 안 돼. 정말 무서운 거니까.”
그는 제 손안에 따듯한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그 온기가 자연스레 루이스의 손끝을 간질였다.
“소, 손은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괜찮기는.”
그는 손등이나 손톱을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여전한데.”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진걸요.”
루이스는 슬그머니 제 손을 빼냈다.
“그럼 발은 어때?”
“발도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을 남용하는 건 좋지 않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솔직하게 말해 줘야지.”
“정말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그릇을 치워주었다.
루이스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발을 허공에 들고 있었다.
“회장님, 저쪽에서 수건 좀 가져다주실래요?”
“이미 가져가고 있어.”
그는 바닥에 앉아 루이스의 발에 남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제, 제가 할 수 있어요!”
“알아. 하지만 내가 해 주는 거야. 상태를 봐야 하니까.”
“더럽단 말이에요…….”
“더럽긴.”
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발등을 손끝으로 살살 쓸었다.
“따갑진 않은가?”
“조금 그렇긴 한데. 그보다 창피해요.”
“어렸을 때는 꽤 자주 맨발로 놀았으면서 뭘.”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 발을 만지작거리지 않으셨잖아요.”
“그때는 이렇게 그대의 발이 얼지 않았거든.”
가벼운 말을 주고받은 후에는 루이스도 자연스레 웃게 되었다.
물론 차가운 발끝을 그의 손이 따듯하게 해주고 있다는 점은 부끄러웠지만.
“있죠.”
“음?”
그는 루이스의 발등에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조금 전에 시몬에게 장난을 건 것을 후회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저는 좋았어요.”
루이스는 조금 움직이기 수월해진 손으로 부스럭거리는 이불을 붙잡았다.
“두 분이 정말로 즐거워 보였거든요.”
“나와 시몬은 언제나 즐겁지.”
“알아요. 하지만 오늘은 특히나 그랬어요.”
“시몬 덕분이었어.”
“회장님 덕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다음에는 추운 데서 그러시면 안 돼요.”
“그 점은 나도 반성 중이야.”
“다행이네요.”
루이스는 여전히 제 발을 소중히 모아 쥔 이안을 바라보았다.
괜스레 손을 뻗어보니, 손톱 끝에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카락이 스쳤다.
참 가깝다.
이안과는 늘 가까이 지냈지만, 지금처럼 가까웠던 적은 없었다.
단순히 거리뿐 아니라,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두 사람의 관계가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더 명확한 것으로.
그리고 아마 아카데미라는 환경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
수도에서 이안이 루이스를 찾아오는 일은 간단하고 쉬웠다. 언제든 온실에 오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아주 드물고 어려웠다.
이안의 초대가 있지 않으면 그녀는 감히 그 거대한 궁에 발 한 짝 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는 그저 복도와 계단을 지나는 것만으로 그에게 닿을 수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었다.
별 아래를 나란히 걸을 수도 있었고, 새벽을 함께 헤아릴 수도 있었다.
루이스는 이제야 제가 경험했던 많은 일들이 무척 희소한 것임을 깨달았다.
다시 바깥으로 돌아가면 이런 경험은 좀처럼 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아카데미의 제복을 벗고 나면, 신분이라는 옷을 다시 입어야 할 테니.
루이스는 괜스레 만지작거리던 그의 머리카락에서 천천히 손을 떨어뜨렸다.
“더 만지지 않고?”
농담 같은 말이 들려왔지만,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이 가까움에 중독이 되어버릴까 봐 두렵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으니까.
“전하의 머리카락은 얼지 않았거든요. 아, 아니, 회장님의 머리카락이요.”
저도 모르게 틀린 호칭이 나왔기에, 루이스는 얼굴을 돌리며 얼른 제 말을 정정했다.
“아카데미 안에서 그대가 호칭을 틀리는 건 아주 오랜만인데.”
“그러……게요.”
“처음에는 조금 어려워하더니, 나중에는 자연스레 잘도 부르더군,”
회장님, 회장님! 하면서 말이다.
“루이스 스위니.”
그녀의 시선이 다시 이안에게 돌아왔다.
“내가 졸업하고, 또 그대가 졸업하고 난 뒤에는 말이야.”
이안은 여전히 루이스의 발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듯한 손으로 살살 주무르고 녹여 주면서 말이다.
“나를 어떻게 부를 생각이지?”
“그야…….”
“황태자 전하라는 호칭도 물론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전하가 될 수 없지.”
“회장님이 제게 윗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 되는 것이다. 아마 그도 그것을 바라고 말한 것이리라.
“어렵네요.”
“무엇이?”
“음……. 조금 복잡해요.”
“말 해봐. 그대가 괜찮다면.”
“실은요.”
루이스는 오랜만에 원작을 떠올렸다.
못된 루이스가 ‘이안’이라고 부른 순간. 그는 썩은 가지라도 보는 것 같은 얼굴을 했었다.
원작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에는 왠지 이 장면을 잊지 못해서,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었단 말이야? 그것도 그대에게?”
“정확히는 회장님이 아니에요. 이젠 다른 이야기가 되었으니까요.”
“왠지 그쪽의 나를 때려주고 싶은데…….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내가 회장님 소리를 들은건가.”
“딱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요.”
“또 뭐가 있는데?”
루이스는 조금 머뭇거렸다.
“누가 들을까 봐…….”
“지금은 아무도 안 듣고 있으니까 편하게 말해. 또 뭐가 있는 건데?”
“아뇨. 나중에 제가 황태자 전하를 편하게 부르는 걸 누가 들으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뭐라고 생각하긴. 내가 루이스 스위니에게 단단히 빠졌다고 생각하겠지.”
“보세요! 그렇게 생각하게 되잖아요!”
“사실이잖아?”
“……그!”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지시킬 수 있어서 참 좋은 것 같은데, 문제 있나?”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은 없지만요.”
“그대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
“라센 교수가 그대에게 쓸데없는 교훈을 심어 주었지. 물론 나는 나가는 즉시 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 둘 생각이다만……. 불안함이란 쉽게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지.”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사람이 앞으로 몇 명이나 더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더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잔혹한 방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악의는 두 사람 모두를 향하게 될 것이다.
루이스는 이안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는 물론이고 헤셰까지 힘들어질 테니까.
“그래도 말이야.”
그의 말투에서는 엷은 웃음이 묻어났다. 곤란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중에도 말이다.
“혹여 그 결과로 좋지 못한 일을 생긴다고 하더라도.”
“…….”
“내게 벌어질 수많은 불행 중 가장 행복에 가까운 것일 거야.”
“그래도 불행은…….”
불행일 뿐이잖아요.
“말했잖아, 동화와는 다르다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언제나 함께 오지.”
“회장님께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면 저도 불행해질 거예요. 물론 행복에 가장 가까운 불행이지만요.”
“그건 아주 고마운 말인데.”
“우리, 불행해지는 건가요?”
“좋잖아? 함께 불행을 감당하는 것.”
“하나도 안 좋…….”
“평생.”
줄곧 장난스레 이야기를 건넸으면서, 마지막 한 마디는 아주 진중했다.
평생이라는 말.
그러니까, 계속 이렇게 둘이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을 거다.
그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고, 그는 웃지 않았다.
“그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그대의 영원을 청한다는 뜻이야.”
그는 친절하게도 명확한 설명을 곁들였다. 루이스가 다른 뜻으로 오해할 수 없도록.
“음, 물론”
묘한 정적이 계속되자, 이안은 사르르 웃으며 가벼운 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바로 대답을 들을 생각은 아니었어. 나도 그 정도의 양심은 있는 사람이지.”
“아, 아니.”
“생각해 봐. 시간은 일 년이나 있고, 선택권은 그대에게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요.”
“그럼 뭔데?”
“지금, 그러니까. 제게…….”
루이스는 귀까지 빨갛게 된 얼굴로 가까스로 문장을 완성했다.
“청혼하신 거잖아요.”
“그렇지.”
그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발을 쥐고서요.”
“싫은가?”
“세, 세상에 발을 잡고 청혼하는 남자가 어디에 있어요!”
“최소한 머리는 안 긁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너무 극단적이잖아요. 머리가 아니면 발을 만져야 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대의 발인걸.”
“그건 그렇지만요! 그래도요!”
“괜찮아. 아주 예쁘니까.”
그는 조금 들어 올린 루이스의 발등에 키스했다.
“지, 지금……!”
“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약속했잖아. 매일 다른 곳에 키스하겠다고.”
“그렇다고 발에 키스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생각보다 꽤 많을 거야.”
“흐으…….”
그 사이에 루이스의 발은 조금씩 평소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녹아드는 아픔도 사라졌고, 둔했던 감각도 점점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럼, 이제 좀 치워 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은 잠시 바깥으로 나가서, 물그릇과 수건을 정리하고 금방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뜨거운 머그잔이 들려있었는데 반쯤 녹은 마시멜로가 동실 떠 있는 핫초콜릿이었다.
“이건 관리 부인께서 네게 전해달라고 하신 거.”
그가 잔을 내밀며 그리 말하기에, 루이스는 잠시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손 씻으셨죠?”
“관리 부인의 주방 공국에서는 손을 씻지 않은 자에게 사형을 내리거든.”
그건 아주 다행이다. 루이스는 안심하고 그가 건네는 뜨거운 머그잔을 받았다.
어느새 손도 평소와 같이 돌아와 있었다.
단 냄새를 풍기는 핫초콜릿을 마시자, 몸속이 따끈따끈하고 아주 좋아졌다.
“좋네요…….”
“그렇지? 마시고 나면 씻고, 나와 함께 나가면 돼.”
“이 날씨에 어디에 가시려고요?!”
“관리 부인의 주방 공국에 미리 망명 신청을 해 두었거든.”
그건 미리 사용허가를 받아 두었다는 뜻이었다.
“왜요?”
루이스는 반쯤 녹은 마시멜로 두 개를 동시에 우물거렸다.
“눈이 오니까.”
루이스는 아직도 촘촘하게 내리는 하얀 눈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몇 가지 구애용 레시피를 독학했지. 찐득찐득한 초콜릿 케이크나, 가을의 사과 파이나. 겨울의…….」
「시나몬 롤이요?」
「그래. 찐득찐득하게 녹아내리는 그거. 눈이 오는 날이면, 그대는 꼭 그걸 먹어야 하지.」
하얗게 눈 내리는 날에 먹는 시나몬 롤은 최고다. 물론 거기에 진한 홍차가 더해지면 완벽하게 행복해 질 거다.
“그렇게 해요.”
“좋아. 그럼 한 시간 뒤에 기숙사 1층에서 만나도록 하지.”
“아뇨, 그게 아니라.”
루이스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가까운 스툴에 머그잔을 올려두었다.
“같이 불행을 감당할게요. 평생.”
루이스는 이안이 했던 말을 따라 하고는 괜스레 웃었다.
“대신 겨울에는 시나몬 롤을 만들어 주세요.”
“생일에는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고?”
“가을에는 사과 파이를 만들어 주셔야 하죠.”
“좋아. 그럼 이쪽에서도 조건이 있는데.”
“조건이요?”
“일 년 동안 나에 대한 호칭을 제대로 정리할 것.”
“흐으.”
“머리를 긁으면서 춤을 청해도 지적하지 말 것.”
“또 그러실 생각이세요?”
“내키면. 그대 반응이 재미있었거든.”
“알았어요. 그 정도는 봐 드리죠. 그리고요?”
“남은 아카데미 생활을 멋지게 보낼 것.”
“……그건.”
“알아. 그대가 남은 일 년을 걱정하고 있다는 건.”
루이스가 유난히 가까이 지낸 이들은 모두 아카데미를 떠나게 되니까.
“지금은 없는 새로운 즐거움이 있을 거야.”
“그럴……까요?”
“그래.”
확신이 가득한 대답에 비로소 루이스가 헤실 웃었다.
* * *
한 시간 뒤에 두 사람은 말끔해진 모습으로 기숙사의 현관에서 다시 만났다.
아직 낮인데도 아카데미는 눈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했다. 모두 따듯한 곳에서 느긋한 오후를 보내는 모양이다.
하얀 길을 따라서 걷던 루이스는 이안을 돌아보며 조심스레 제안했다.
“저, 생각해 봤는데요. 조건을 더 추가해도 괜찮아요?”
“내 약혼녀께서 바라신다면, 얼마든지.”
기분이 좋아진 이안이 너그럽게 대답하기에, 루이스는 얼른 제 머플러를 풀어서 내밀었다.
“제발 머플러 정도는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보는 사람이 다 추울 정도예요!”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던 그가 지금은 몹시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건 빼고.”
그는 걸음을 멈추고 루이스에게 다시 머플러를 꼼꼼하게 둘러 주었다.
“어째서요?”
“글쎄.”
아마 그의 미학에 어긋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그를 걱정하면서 발을 동동거리는 루이스가 재미있었다.
“또 추가하고 싶은 건?”
루이스는 제게 다시 돌아온 머플러를 만지작거렸다.
“회장님도 제가 없는 일 년 동안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
“시몬도 멀리 가 버리니까, 분명히 외로워 하실 것 같아서요.”
그야……외롭긴 할 거다.
기쁜 일이 있어도 곧장 달려갈 상대가 한 명도 없다는 건.
우울한 기분이 들어도 머리를 쓰다듬어 줄 친구가 없다는 건.
괜한 마음에 이안은 루이스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를 움켜쥐던 다양한 불안이나 걱정이 사그라지고 만다.
“나도……생각해 봤는데, 내 청혼이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말씀드렸잖아요. 발을 잡고 하면 안 된다고요.”
“아니, 그건 아주 좋았어.”
그는 루이스와 이마를 맞대고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함께 불행을 감당하자는 말.”
“그게 왜요?”
“내게 그대가 있는데 불행하다는 말을 붙이는 건 말도 안 돼.”
“그야, 현실은 동화가 아니니까요.”
물론 그것은 이안이 늘 주장한 바였다.
“하지만, 잘 생긴 황태자가 등장하면, 전부 다 동화라고 해도 괜찮아.”
그는 제 의견을 손바닥 뒤집듯 간단히 바꾸었다.
“그, 그건 좀 무책임하지 않아요?”
“괜찮아. 여기엔 훌륭하고 귀여운 악역도 있으니까. 구색은 갖춘 셈이지.”
“이야기가 또 엉망이잖아요.”
“아무리 엉망이라도 그 장르가 동화라면, 끝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거든,”
“끝이요?”
“유명한 문장이지.”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모든 동화를 맺는 유명한 문장을 떠올렸다. 불행과는 조금도 이웃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포근한 문장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될 거라고요?”
“……그래.”
이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긍정했다. 가까워진 입술이 거의 닿을 듯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그리고 남은 문장은 키스로 전부 녹아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