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하나하나 기억해
라센 교수의 일도 조금씩 정리되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라센 교수의 훌륭한 점 한 가지를 발견했다. 한 번 품은 목적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그분은 ‘루이스 스위니가 수석을 하는 건 여전히 열 받으니까.’라는 이유로 제 청문회를 지겹도록 질질 끌었다.
서류에 정리된 청문회 지연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피부가 당김.’
‘식사하지 못함.’
‘개인적 일정.’
루이스는 제 손에 들린 지난 청문회의 보고 서류를 보면서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하찮은 이유로 청문회가 계속 미뤄지고, 루이스는 오늘이 되어서야 윤리 위원회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첫 시험을 하루 앞둔 오늘이 되어서야 말이다!
첫 시험의 중요성은 수백 번을 넘게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로부터 시작은 모든 것의 절반이라고 할 정도니까.
“루이스 스위니 양.”
위원회장님이 부르시기에 루이스는 얼른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테이블 너머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 세 분이 나란히 앉아 계셨다. 모두 엄격한 눈을 하고서 말이다.
“확인하고 싶은 부분은 48쪽입니다.”
모두 종이를 넘겼고, 루이스도 얼른 그들을 따라 48쪽을 펼쳤다.
“라센 교수는, 힐 교수가 내는 시험에도 깊이 관여해 왔다고 자백했습니다. 사실입니까?”
그야 사실이긴 했다. 루이스가 그의 수업을 듣고 있으니, 어렵게 출제하라고 권했을 정도였으니까.
“표정을 보니 사실인 모양이군요.”
“하지만.”
루이스는 종이를 꾹 쥔 채 고개를 들었다.
“힐 교수님은 평소와 다름없는 시험 문제를 내셨어요. 교수님의 역대 기출문제와 평균점수가 그걸 증명해 줄 거예요.”
모두 공평하게 어려우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은 이것뿐입니다. 돌아가도 좋습니다.”
“벌써요?”
“예. 시험 기간에 처한 학생을 오래 잡아 둘만 한 사안은 없군요.”
그 말씀을 들어보니, 처분이 거의 결정 된 모양이다.
“저어, 힐 교수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위원회장은 곤란한 듯 웃었다.
“이거 아무래도, 아카데미 내에서 웨인 힐 교수의 인기가 어마어마한가 보군요.”
“……예?”
물론 힐 교수님은 인기가 어마어마하게 없는 편이다. 늘 학생회의 도움을 받아서 수업 인원을 겨우 채울 정도로.
“스텔라 라피스 양도 힐 교수를 걱정하는 얼굴로 같은 질문을 했었습니다.”
“스텔라가요?”
“예. 그리고 이안 오드모니얼 군도. 역시 학생들은 젊은 천재 교수의 존재에 열광하는 모양이군요. 그렇죠?”
“아, 그, 그런……경향이 있죠. 후, 훌륭하신 교수님이니까요! 아카데미의 빛이며 미래라고 할 수 있는 분이죠.”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윤리 위원회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사실은 희망 사항에 가까운 말이었다. 아카데미는 그 훌륭하신 교수님을 사랑함이 옳다! 그러니 루이스는 제발 힐 교수님의 처분이 너그럽기를 바랐다.
루이스의 신나는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위원회장은 빙긋 웃었다. 다만, 대답은 엄격했다.
“웨인 힐 교수의 처분은 정해지는 대로 공지할 겁니다. 물론 라센 교수에 대해서도.”
정식 공지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싸늘한 복도로 나오자, 회색 외투를 입은 스텔라가 있었다.
“스텔라?”
“루이스.”
그녀는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잘……했어?”
“네. 별건 없었어요. 스텔라도 여기에 불려오셨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내일이 첫 시험인데, 네가 여기에 불려 왔다고 해서.”
“그래서요?”
“……불공평하잖아.”
중얼거리는 스텔라의 얼굴이 조금 붉었다.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그러니까, 지금.”
루이스는 조심스레 그녀의 마음을 넘겨짚었다.
“제가 여기에 불려온 사이에 스텔라가 열심히 공부하면 불공평한 것 같아서 이 추위 속에 서 있었다고요?”
그녀가 작게 끄덕였다. 루이스의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맙소사 스텔라, 이런 귀여움을 왜 이제야 보여 주는 거예요!
“이런 일로 불공평하다고 하지 않아요!”
“그래도 나는……이렇게 하고 싶었어.”
루이스가 샐쭉 웃으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절 수석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말이죠?”
스텔라는 얼른 루이스와 나란히 걸으며 반박해 왔다.
“무슨 소리야? 내가 수석이 되었을 때, 네가 이 일을 핑계 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지.”
“스텔라야말로, 절 신경 쓰느라 집중하지 못했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누, 누가 널 신경 쓴다는 거야!”
루이스는 몸을 빙글 돌려 웃었다.
“바로 너 말이야. 스텔라 라피스.”
“또 말투가!”
“그야,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종종……이런 말투를 쓰는 거요.”
루이스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스텔라는 종종걸음으로 얼른 따라붙었다.
“안 좋아해!”
“네에. 알았어요.”
“널 안 좋아한다고!”
“알았다고요.”
스텔라는 결국 도서관까지 따라와서 ‘난, 널 안 좋아해!’라고 열렬히 외쳤다.
물론 사서 선생님께서 ‘스텔라 라피스! 도서관에서 루이스 스위니에게 큰 소리로 고백하면 안 됩니다.’라는 주의를 시키셨다.
스텔라가 작은 소리로 ‘난 널 좋아하는 게 아니야…….’라고 중얼거렸지만, 루이스를 제외하고 아무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 * *
다음 날, 루이스는 첫 시험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번 시험에서 그녀는 혼자만의 규칙을 정했는데, 절대로 시험지 이외의 것에 시선을 두지 않는 것이었다.
가령 바닥에 떨어진 물건 같은 것들 말이다. 어떤 사건에도 말려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시험을 끝내고 강의실에서 나오는데, 마침 옆 강의실에서 나오는 시몬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잠시 놀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
서로 다른 시험을 보고도 똑같이 끝내고 나왔다는 사실이 무척 재미있어서 말이다.
루이스는 시몬에게 조르르 달려갔다. 최근 그와는 도서관에서 몇 번 마주치곤 했는데, 그때마다 늘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아서, 혹시 식사도 거르면서 공부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었다.
“제 걱정이 사실이었네요.”
시몬의 얼굴은 예전보다 많이 야위어 있었다.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으신 거죠?”
“도서관에서 자리를 비우면 금방 다른 학생에게 빼앗기니까.”
시몬의 변명은 타당했다. 신성한 도서관의 사용 규칙에 따르면, 자리를 20분 이상 비울 시에는 모든 짐을 들고 가야 했다.
“그래서, 시험은 어땠어요?”
“잘 모르겠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는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주 훌륭하게 치러 낸 것이 틀림없었다.
“내일도 시험이 있나요?”
“두 과목이 있지.”
“또 도서관에 가시겠네요.”
루이스는 잠시 시계를 확인했다. 마침 아슬아슬하게 점심이 가능했다.
“시몬. 바쁘지 않다면 같이 밥 먹을래요?”
“지금? 꽤 뛰어야 할 텐데.”
“달리면 되죠!”
루이스가 가방을 들고 달리기 시작했고, 곧 시몬도 그 뒤를 따랐다.
멀리 식당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관리부인이 ‘점심 마감’ 을 알리는 푯말을 붙이고 있었다.
루이스가 멀리서 제발 마감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물론 너그러운 관리부인은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받아 주었다.
오늘 점심 메뉴는 육즙이 완벽하게 가두어진 촉촉한 고기와 달콤한 저장 채소의 훌륭한 조화로 몹시 호평이었다.
“그래서 고기가 다 떨어졌대요.”
루이스는 고기의 풍미만 남은 브로콜리와 당근 그리고 양파가 담긴 접시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다들 고기를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지.”
시몬은 브로콜리 사이에 끼워져 있던 손톱만 한 고기 조각을 루이스의 접시에 양보해 주었다.
“저는 괜찮아요.”
“괜찮긴. 고기를 좋아하잖아?”
그야 물론 좋아한다. 그리고 그건 시몬도 마찬가지고.
루이스는 작은 고기를 반으로 잘라서 시몬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예로부터 친구끼리는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어 먹는 것이라 했으니까.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관리부인께서는 ‘눈물 나는 장면이구나.’라며 몰래 숨겨 두었던 고기를 구워 주셨다. 참 친절하신 분이다.
두 사람은 방금 구워진 고기와 단맛이 나는 채소를 바닥까지 긁어먹었고, 후식으로 유자 셔벗까지 해치웠다.
기름진 고기 후에 시원하고 상큼한 유자 셔벗을 준비해 두시다니. 관리부인은 천재가 틀림없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는 시험 준비로 인한 피로감까지 모두 지워 주었다.
“시몬, 이제 다시 도서관에 가시나요?”
“그래야지.”
“힘들지는 않으세요?”
“아직은.”
“그, 저기…….”
“음?”
“한 번도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응원……하고 있어요. 진심으로요.”
조심스러운 응원에 시몬은 낮게 웃으며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이스가 그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이따금 도서관에서 루이스와 마주칠 때마다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주었으니까.
아마 이렇게 다가와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조심스러웠기 때문일 거다.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 기울어졌던 것을 신경 써 주느라.
이렇게 은근히 눈치를 보는 것이 참 귀엽다. 멋대로 그를 휘둘러도 탓하지 않을 텐데, 그러는 법도 없고.
“고맙다.”
“시몬이 유학을 가는 건 섭섭해도……. 정말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고작 2년뿐이지만.”
“그 기간 안에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루이스는 그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었고, 그중 어떤 것이 얼마나 커다랗게 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있죠, 시몬. 아젠틴 남부에는 열 명의 사람이 모여야 둘러쌀 수 있다는 커다란 나무가 있대요,”
“정말로?”
“네. 그러니까 꼭 직접 보고 와주세요. 궁금하니까 말이에요. 그리고 우산만큼 커다란 잎도 있대요.”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 구해와야겠는데. 루이스는 거리의 꽃장수에게 우산을 선물하곤 하니까. 새 우산이 필요하겠지.”
“시몬도 참, 다른 나라의 식물을 허락 없이 들고 오면 감옥에 간다고요.”
“음, 나는 면책권이 조금 있어서……. 이렇게 보여도 일단은 황위 계승 서열도 높은 편이고.”
그가 농담처럼 건네는 이야기에 루이스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지금까지 시몬은 제 자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내가 법을 어기면 너희들이 귀찮게 굴 테니까. 간단히 스케치만 해 올까.”
“네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신문에 ‘힐라드 공자, 대형 나뭇잎을 밀반입, ‘우산 대용이다.’망언 논란. 일파만파’라는 기사가 나는 건 보고 싶지 않거든요.”
“멋진 기사인데.”
시몬이 기사 제목을 마음에 들어 해서, 루이스는 조금 불안해졌다.
최근 장난기가 부쩍 많아진 시몬이 정말로 커다란 나뭇잎을 당당하게 들고 귀국하면 어쩌나 싶어서 말이다.
* * *
이안은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공부에 시달리는 중에도 루이스와 약속한 것을 지켜주었다.
그러니까, 키스 말이다.
“오늘도 고생했어.”
함께 공부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면, 그는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언제나 약속된 키스를 했다.
오늘은 왼손 약지였다.
그가 루이스의 손가락마다 키스를 남기는 데는 꼬박 열흘이 걸렸다.
그는 어느 손가락 하나 차별하지 않고 똑같은 애정을 선보였다.
‘매일 다른 곳에 키스한다는 게 손가락……이야기였다니.’
물론 실망을 한 것은 아니다. 절대로!
다만 그의 진지함에 놀랐을 뿐이다.
그는 루이스의 손가락을 입술 끝에 댄 채, 긴 시간 동안 그대로 머물렀다. 꼭 감촉이나 형태를 하나하나 기억해 두려는 것 같은 모습으로.
정중한 키스가 끝나면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사르르 웃곤 했다. 정말로 행복하다는 듯이.
그런 얼굴을 보고 있으면 왠지 창피해서, 루이스는 괜스레 다른 소리를 할 때도 있었다.
“오, 오늘로 손가락은 다 끝났네요.”
“그러네.”
그는 고개를 기울여 손바닥에 간질이듯 키스했다.
“흐으, 이상해요.”
“싫은 느낌으로?”
언뜻 고개를 든 그가 확인하듯 물었고, 루이스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조, 좋은 느낌으로요.”
“옳지.”
그의 입술이 손바닥의 얕은 둔덕을 타고 내려가, 가느다란 손목을 가볍게 압박했다.
뜨거운 호흡이 손목 위를 타고 흐르는 순간, 심장의 흔들림을 따라 여린 손목이 함께 울렸다.
루이스가 깜짝 놀라며 손목을 빼냈고, 다행히 그는 그녀를 쉬이 놓아주었다.
“하, 한 번에 너무 여러 곳에 하면 나중에 곤란하시잖아요.”
“설마.”
절대 곤란할 일이 없다며 웃는 얼굴을 보자 루이스는 조금 불안해졌다.
“혹시.”
그는 손가락 하나하나 키스하며 열흘을 보냈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에는 마침 손가락과 비슷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발에……그것도 발가락에 키스하려 들지는 않겠지. 그건 좀 심했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겁기는.”
루이스는 배시시 웃고는 서둘러 인사하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발이 아닐 것이라는 그녀의 예감은 다행히도 적중해서, 그 날 이후로 이안은 이마나 정수리 혹은 머리카락 양쪽 끝에 입을 맞추었다.
이따금 머리카락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들렸는데, 가끔은 루이스가 알아듣지 못할 말도 섞여 있었다.
다른 나라의 말 같아서, 그게 루이스는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따금 그가 남겼을 말을 홀로 생각해 보곤 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뜨거운 호흡이나 빠른 듯한 심장 소리로 미루어 보면, 뭔가 연인들이 나눌 법한 예쁜 말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괜히 심장이 간지러워졌다.
* * *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은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시험이 전부 끝나고, 오답리포트라는 지옥 레이스가 시작된 것이다.
루이스는 그것에 더해, 학생회로서 졸업식 준비까지 시작했다.
이따금 리포트를 제출하면 받는 젤리를 제외하면, 기쁨도 즐거움도 없는 숨 가쁜 시간이 이어졌다.
그런 와중, 루이스는 처음으로 심장의 돌을 덜어낼 법한 굉장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라센 교수와 힐 교수의 처분이 발표된 것이다.
힐 교수님은 향후 5년간 아카데미에서 수업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아카데미 내부에서 조용히 근신하며 연구를 계속하는 것은 허락되었다.
아카데미로서는 힐 교수의 우수함이나, 연구 성과는 물론이고 이미 그에게 투자된 연구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루이스는 그가 연구자로서 아카데미에 머물게 된 것이 기뻤다.
라센 교수님은 공식적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향후 어떤 경로로든 아카데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교수님은 순순히 그 판결을 받아들이셨다. 처분이 발표되었을 때는 이미 교수실이 텅 비어있었을 정도니까.
아마 지금쯤 루이스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길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 무서운 라센 백작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뜬 루이스는 묘하게 따듯한 기분을 느끼며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했다.
소록소록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온 이후로 만나는 첫 번째 눈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날에 눈이 온다니, 왠지 무엇이든 잘 해결될 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루이스는 서둘러서 일어나, 부지런히 강의동으로 향했다.
하얀 걸음마다 뽀독뽀독 소리가 나는 것이 즐거웠다.
강의동에 들어가니, 루이스보다 먼저 도착한 이안과 시몬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확인했어요?!”
루이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고,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성적은 발표되지도 않았어. 게다가 이왕이면 함께 확인하는 편이 좋잖아?”
“그건 그래요.”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강의동 1층은 제법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험인 만큼 다들 결과가 기대되는 모양이다.
곧 아카데미의 직원들이 커다란 종이를 들고 나왔다.
루이스는 제 양쪽에 선 이안과 시몬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어딘가 긴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시험 결과에 따라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의 관계와 감정을 어떤 식으로 마무리하게 될지 결정되기 때문일 것이다.
‘괜찮을 거예요.’
루이스는 그리 생각했지만, 두 사람에게 그 마음이 전해질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용기를 내어 두 사람의 손을 붙잡았다.
시몬과 이안도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었다. 그건 아마…….
‘그래, 괜찮을 거야.’라는 대답이었을 것이다.